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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보선 ② 516 군사정변 방조 ?ㆍ평가ㆍ사상ㆍ신념

by 당대 제일 2022. 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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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보선 (尹潽善ㆍ1897~1990ㆍ향년 92세)"은 제4대 대통령(1960.08~1962.03.23)으로,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기여했다는 평가와 "5ㆍ16 군사정변" 협력 논란이 양립하고 있다.  "제3공화국ㆍ제4공화국" 중, "박정희의 라이벌"이었으며, "3공ㆍ유신시절" 내내 민권 투쟁에 앞장섰고, "김영삼ㆍ김대중"이 등장하기 전까지 야당을 이끌었으며, "선명 야당"을 강조하였다.

 

1.  윤보선 (尹潽善1897~1990향년 92)

4대 대통령(1960.08~1962.03.23)4선 국회의원(3~ 6)서울시장(1948.12~1949.06)상공부장관ㆍ별칭 : 정신적 대통령재야 대통령영국 신사청소시장)ㆍ호 해위 (海葦)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영국으로 유학을 떠날 때 스승 신규식이 지어준 것으로 "바닷가 갈대는 바람에 휘날려도 꺾이지 않는다"는 뜻

 

2. 의혹ㆍ반론 :  5ㆍ16 군사정변 방조ㆍ진압저지ㆍ추인

① 방조 의혹

"윤보선" 측은 "5ㆍ16 군사정변 계획"을 사전에 알고 있었으며, 이를 사실상 승인했다는 의혹을 전면 부인하였으나, "유원식(1914~1987ㆍ군인ㆍ 5ㆍ16 군사정변 주도)"의 주장이 사실인지 여부는 밝혀지지 않았다.

1962.05월, "유원식"은 "윤보선"의 정변 방조 의혹을 제기하였다. 그는 "윤보선이 이전부터 쿠데타가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았고, 이를 방조했다"고 주장하자, 윤보선은 이를 부인하며, "혼란한 장면정부 하에서 무슨 사태가 터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는데, 쿠데타가 일어났다기에 그렇게 말했을 뿐"이라고 반박하였다. 그러나 "윤보선"은 자신의 회고록인 "외로운 선택의 나날들 : 윤보선 회고록"에서 "유원식"과는 만난 적이 없으며, "유원식이 자신을 모함하는 것"이라며, 반박하였다.

"윤보선"은 "내각책임제 하의 정부수반"으로서, 실권을 행사했던 "장면 총리"의 실권을 부러워하여, "5ㆍ16 군사정변"을 방조 내지, 묵인했다는 분석도 있다. 국가원수로, 정치적 라이벌인 "장면의 몰락을 바라며, 제2공화국 붕괴를 방관했다"는 이런 주장은, 야당 지도자인 "윤보선"에게는 도덕적으로 치명적이었다. 또한 05.16일 오전, "청와대"를 방문한 "장도영(육군참모총장)에게 "군사계엄 선포는 반대하지만, 군사혁명을 무산시키는 어떠한 단호한 조치도 반대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도연"으로부터 "폭동발생ㆍ정변 음모" 등의 정보를 입수하고, "김도연"에게서 들은 정보를 "장면 총리"에게 알려, 철저한 대응을 지시하였다는 증언도 있다. 그러나 장면은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에게 알아보니 별일이 아니다. 걱정할 것 없다"고 반응했다고 한다.

② 진압저지 의혹

"국군통수권을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38선 전방부대"를 서울로 보내, "군사정변"을 저지하지 않았고, "박정희의 국군통수권 이양" 요구시, "올 것이 왔다"라는 말과 함께, 순순히 "국군통수권을 이양한 것" 때문에, "군사정변"을 묵인하는 대신, "박정희와 대통령 중심제 개헌을 매개체로 타협을 보려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는 사학자들이 있다. 그것은 "내각 책임제"하에서의 "대통령"은 별 볼 일없는 자리였기에, 이에 분개한 "윤보선이 박정희와 타협하였다"는 것이다.

"5ㆍ16군사정변"이 터지자, "이한림(1군사령관)ㆍ임부택(1군단장)"등에게 비서관들을 보내, "국군끼리 유혈사태가 벌어지면 안 된다"면서, 진압하지 말라고 했다는 의혹도 있다. "장면"은 "윤보선이 이한림에게 비서관들을 보내, 진압을 만류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장면"의 주장은, "국군 통수권을 쥐고 있는 대통령의 태도가 이러한 것을 알고는, 쿠데타가 진압되리라는 희망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후일 "박종률(장면 비서관)"은 "그의 태도가 애매했다"고 봤는데, "윤보선 대통령이 쿠데타를 인정한 것은 사실"이라는 것이다. 당시 "우희창(국방차관)으로부터 들은 말을 인용, "윤보선은 명백하게 쿠데타를 인정하고 진압을 반대했다"고 했고, "우희창" 역시 "매그루더(주한미군 사령관)"에게서 들은 이야기라고 말했다.

③ 추인 의혹

"5ㆍ16 군사정변을 승인할 의도가 없었다."고 주장하였으나, "제2공화국의 국가원수임에도 5ㆍ16 군사정변을 저지하지 않았다"는 비판론이 제기되고 있다. "5ㆍ16 군사정변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는 주장에, "지지하지 않았다"는 반론도 있다.

05.17일 낮11시, "윤보선"은 군사 정변을 진압하러 온 "매그루더(주한미군 사령관)ㆍ마샬 그린(주 한미 대사 대리)"를 만났고, 그들은 "쿠데타에 대한 대통령의 견해"를 듣고자 했다. 그들은 이미 "장면 총리가 영도하는 합법적인 한국 정부를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학생혁명도, 군사혁명도, 똑같은 국민들이 일으킨 똑같은 혁명이다. 당신네 케네디 미국의 대통령이 장면 국무총리와 같은 가톨릭 신자라고 해서 학생혁명은 인정하고, 군사혁명은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냐"고 항의했다고도 한다.

두 사람은 "윤보선"에게 "쿠데타군을 무력으로 진압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윤보선은 "국군끼리 전투를 벌여 서울이 불바다가 되면, 인민군이 기회를 노려 남침한다."며 끝까지 반대했고, "마샬 그린(주 한미 대리 대사)"은 마지막 경고로 "각하의 이번 결정으로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군부통치가 계속될 것이다"고 하였으나, 그의 의지는 변하지 않았다.

"윤보선이 5ㆍ16 군사 정변을 지지한다."고 생각한 "매그루더(주한미군 사령관)"은 "박정희ㆍ장도영ㆍ김종필"등을 진압할 생각을 포기했다. "매그루더 사령관"은 "미 합참의장"에게 비밀문서를 보냈다. 또한, 이 자리에서 "윤보선"에게서 충격적인 말을 들었는데, "윤보선은 나의의 견해가 매그루더 장군과 마샬 그린 대사와는 다르다"고 말했다고 한다. 현 정부에 대한 불만과 환멸은 광범위하게 퍼졌으며, 국민들은 더 이상 "장면 내각"의 약속을 믿지 않는다고 주장했고, 그는 "장면 정권"의 무능력과 부패상 등, 급박한 현안과 직결되지 않은 문제를 거론하면서, "거국내각 구성"을 주장했다.

④ 올 것이 왔구나

이 말을 둘러싼 논쟁은 1980년대까지 계속되었고, "윤보선"이 죽을 때까지 그의 활동과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쟁점이었고,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박정희 일행"을 접견실에서 만난 그는 "올 것이 왔구나"는 말로 입을 열었다. 혼자 하는 말이었지만, 소리가 워낙 커서, 다른 사람들도 그 말을 들었다.

"현석호(국방부 장관)"은 회고록에서, "대통령의 입에서는 듣기에 민망한 혹독한 말들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왔다. 요약을 하면 장면 총리는 진즉에 물러났어야 했으며, 민주당은 무능했다. 윤보선은 이 말에 이어, 나라를 구하는 길은 이 길밖에 없다"면서 "장면 정부"에 비난을 퍼붓고, "박정희"의 거사에 찬사를 보냈다고 했다. "나라를 구하는 길은 이 길밖에 없었습니다. 박 장군은 위대한 일을 했습니다."

군부에 의해, "청와대"로 온 "현석호"는 "윤보선"의 이 발언을 가리켜 "한마디 평생토록 잊지 못할 말을 했다"고 진술했다. "올 것이 왔다"는 발언에 대하여, "유원식"도 같은 진술을 했다. "유원식"이 "5ㆍ16 군사정변" 직전에 "윤보선 대통령"과 만나, 정변 계획에 대한 교감을 나누었으며 정변소식을 들은 "윤보선"은 "올 것이 왔다"는 반응을 보였다는 주장을 내놓아, 논란이 일었다.

"허정"에 의하면, "UN군이 작전권을 장악하고 있는 한국에서 군사혁명이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안도감도 있었으나 군사혁명은 성공해 가고 있었다. 매그루더 UN군 사령관의 원대 복귀 호소도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그 무렵, "매그루더ㆍ마샬 그린"이 "허정"을 찾아왔다고 한다. "허정"에 의하면, "그들의 말로는 군사혁명의 저지를 위해 UN군 병력을 동원할 허가를 받으려고 혁명이 일어난 직후 대통령 윤보선을 찾아갔다고 한다. 그때 장면 총리는 은신 중이어서 윤 대통령을 찾아갔던 것이 다. 그러나 3시간에 걸쳐 병력 동원을 허가해주기를 간청했으나 윤 대통령은 끝내 허락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린 마샬"은 "국헌 준수를 서약하고 대통령에 취임한 만큼, 지금 병력 동원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의무의 포기가 아닌가"하고, 힐난까지도 했다는 것이다.

⑤ 반 론

"김준하(윤보선 비서관)"에 의하면, "그는 5ㆍ16 군사 정변에 협력하지 않았다"고 증언하였다. "곁에서 지켜본 바로는 내통하거나, 묵인한 일은 결코 없다"고 잘라 말했다. "국군통수권이 없었던 윤 대통령은 마셜 그린 주한미대사와 카터 매그루더 유엔군사령관에게 미군을 동원해줄 것을 강력히 요청하는 등, 피를 흘리지 않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애썼다. 정치군인들의 치밀한 사전계획과 장면 정권의 무능과 분열 때문에 쿠데타 세력이 집권에 성공했다. 일부 혁신세력이 주도한 야간 데모 등 사회적 혼란, 물가 폭등과 경제 파탄, 공무원들의 복지부동의 태도 등이 쿠데타의 빌미가 됐다"는 것이다.

또한 그가 "5ㆍ16 군사정변"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거나, 군인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지 않았던 점도 있어 그를 "협력자"라 보기 어렵다는 반론도 있다.

 

3.  긍정적 평가

① "박정희 집권" 19년간, "비타협적인 자세"를 견지했다.

"3공화국" 당시, "박정희"의 대선 경쟁자이자, "3공화국4공화국" 16년 동안,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을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제5공화국" 이후에는 협력적으로 변하면서, 재야인사 및 신민당계 인사들의 비난을 사기도 했다.

"서중석(대학교수역사학자)"은 그가 "박정희와 정면으로 붙은 것"을 높이 평가한다정통 야당을 고수하며, 독재 정권에 반대하는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던 인사로도 평가된다"인혁당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의 복권 운동을 벌인 점은, 학생 운동가들로부터 높이 평가받는다

"경제정책의 기초를 마련한 것"은 실패하였지만,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그가 추진하려던 "경제개발 계획" 관련하여, "경제정책 프레임은 비록 미완이었지만, 박정희 정권에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꽃을 피워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내는 밑거름이 됐다"는 평가도 있다.

"이승만 정권" 말기의 "자유당의 장기집권"을 비판했고, "박정희3공화국 유신 체제"에 정면 도전하였으며, 1970년대 내내, "인혁당 사건크리스찬 아카데미김상진 할복 사건명동구국민주선언YMCA 위장 결혼식 사건" 등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를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또한 수시로 내사를 당하고, 감시인이 따라붙는 등의 고초를 겪었던 점 등을 높이 평가했다

논리적이고, 사리가 밝은 사람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박정희와의 투쟁"에 있어서, 그의 비타협적인 자세는 원칙을 고수하는 "민주주의자합리주의자"라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으나, 반면에 "융통성이나 타협능력이 부족하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동시에 받고 있다.

"김준하(비서관)""그분이 1960년 제2공화정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대변인을 맡게 되어 516 사정변을 함께 맞게 되고, 그 이후 반독재 투쟁에도 뒤따르게 됐다. 그분은 영국신사라는 별명에 걸맞게 성격이 온화하고 따뜻하셨다."  "관습법 국가인 영국에서는 상식이 곧 헌법"이라면서 매사를 보고 결정하는 기준으로 상식을 내세웠다. 또 무슨 일이든지 한번 결정하실 때는 오래 심사숙고하신 후에 결정을 내리시고 일단 한번 결정하면 요지부동으로 강직하게 밀고 나가셨다."고 한다.

 

4. 부정적 평가

"민주주의"를 지켜내지 못하고, "군부"에 정권을 넘겨주었던 "나약한 정치인"으로 평가

고집 있는 "자유주의자"라는 시각도 있다"한영우""516 군사정변" 당시, 그의 "묵인적 행동"을 지적, "이 사건(516 군사정변) 중심으로 그를 이해한다면, 그는 한국 민주당에서 민주국민당, 그리고 민주당과 신민당으로 이어지는 한국의 보수 야당에서 구파 계열을 대표하는, 한 파벌의 정치인일 뿐이다."라고 보았다.

"친일파 집안" 덕으로 학창시절과 어렵지 않은 환경에서 수학한 것을 비판하는 시각도 있다.

"친일파"라는 비난도 있으나, 그가 직접적으로 "친일행위"에 가담하지 않았으므로, "친일파"로 보기는 어렵다는 반론이 제기된다 "자유주의자"였지만, 현실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원칙론"만 되풀이했다는 비판도 있다. 자신의 정치적 라이벌인 "박정희"에게 협력했다는 이유로, 숙부 "윤치영"에게 수인사나 목례도 하지 않, 모르는 사람처럼 대한 점도 비판받고 있다.

가계도

내심 "516 쿠데타"를 지지

"516 군사정변"을 방조, 묵인했다는 의혹과 비판은 계속 제기되고 있다"정대철""그가 내심 516쿠데타를 지지했다. 그렇지만 겉으로는 지지성명 요구를 거부하는 등 반대했다는 기록도 남겼다. 노회한 정치인의 처세라 아니할 수 없다"고 평가했다.

"516 군사정변" 일어난 지, 1년이 되는 시점에서 당시의 한 신문은, "쿠데타 주체"의 한 사람이었던 "유원" 말을 인용해, "윤보선"은 이미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에, 군인들과 교감하고 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쿠데타를 승인하는 태도를 보였다"고 폭로했다이러한 폭로는 "올 것이 왔구나"라는 해석을 둘러싼 논쟁을 일으켰다.

"장면 총리"의 갈등

"서중석""민주당 신파의 지도자였던 장면 국무총리가 일을 못하게 된 큰 이유가 윤보선이 딴지를 걸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419혁명"직후, "허정(대통령 권한대행이자내각 수반국무총리)""UN군 측의 저지 노력에도 불구하고 혁명은 성공했고, 장면 내각의 총사퇴와 함께 혁명정부가 정권을 정식으로 인수했다. 나는 윤대통령이 적어도 장면 정부와 운명을 같이할 정도의 양식은 갖고 있으리라고 생각했으나, 그는 그대로 대통령의 자리에 눌러 앉아 있었다."고 비판했다.

성급한 "야당 대열" 참여

"허정"은 그가 "야당 대열에 복귀할 자격이 있느냐"며 수시로 공격했다. "허정"은 자신의 회고록에도"19631월 초 정치정화법이 해제되었다. 그리고 1963.01.02일 김병로, 윤보선 등이 모여 민정당의 발기에 합의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윤보선 씨의 성급한 정치활동 재개는 나로서는 선뜻 납득이 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허정에 의하면 "윤보선은 혁명정권과 한동안 같이 일한 사람인만큼, 혁명 세력과 대결하는 야당 대열에 복귀하기에는 시기상조라는 생각이었다."고 기술하였다.

"5대 대통령 선거" , "매카시즘 공세"를 일으키려다가, 오히려 "역공세 당했다"는 비판

"625한국전쟁" , 이른바 "빨갱이 파문연좌제"로 심한 상처를 안고 있던 사람들 입장에서 윤보선의 "매카시즘 대선 전략"은 과거의 상처만 되살린 꼴이 되어 버렸고, 이들은 도리어 "박정희가 억울하게 빨갱이로 몰린다."는 동정심을 가져, 박정희에 지지표를 쏟았다결국 박정희는 15만표 차로 당선되었는데, 여기에는 윤보선의 "매카시즘 공략"이 커다란 역할을 했다.

"67대 대통령 선거" 당시, 야당 분열

"6대 대선", "민중당"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대선 출마를 고집하여, 또다시 "야당의 분열"켰다고 보는 시각이 있으며, "7대 대선"에서도 출마하였으나, 후보 사퇴를 피하려고, "박기출(朴己出1909~1977부산의사정치인)"에게 양보한 점,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권위주의자

"이승만의 권위주의박정희의 권위주의적인 행동"에 대해, "권위주의전체주의"라며 불만을 토로했다그런데 "강준만 교수(전북대 신방학과)"에 의하면, "윤보선도 권위주의적"이라는 것이다"권위주의적인 윤보선과 다툼을 싫어하는 장면의 대조적인 성격"이라고 비평하기도 했다"명문가라는 자존심과 더불어, 양반의 권위주의적인 사고를 갖고 있었으며, 대단히 자기중심적이었다."고 평하였다.

 

5. 사상신념

민주주의 보편 타당론과 상식주의

항상 비서관과 젊은이들에게 "민주주의는 물과 공기와 같은 것으로서, 어느 나라에서든 보편적이고 타당하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따라서 "민족적 민주주의우리식 민주주의한국적 민주주의일민주의" 등을 "거짓 민주주의"로 규정하고, "민주주의의 원칙을 그대로 적용할 것"을 역설했다

다만 무조건 "다수의 의견이 민주주의"라는 주장에는 단호하게 반대했다"소수의 의견"이라고 하더라도 상식적이고 타당하다면, 그것을 따를 수 있는 것이 "민주주의"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국익을 위한 초당적 협력

"국익을 위해서라면, 일단 정당을 초월해서, 협력을 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군사정권" 기간 내내, 그는 "당리당략보다는 국민의 생존권이 우선"이라 판단했다특히 식량이나 약품과 같은 문제에 있어서는 "정치싸움보다는 일단 협력할 것"을 역설했다.

1962, "군사정권" 집권 초, "미국의 잉여 농수산물 무상 지원"을 시도하면서, 야당인사들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자, "김병로" 등은 반대했지만, "윤보선장택상"은 적극 동조하였다오히려 "윤보선""그것은 가인이 잘못 생각한 것"이라며 일침을 놓기도 했다.

"군사정권"에서 도움을 요청한 밀사가 "장택상"을 방문하였다밀사는 "장택상"에게 "정부대표"가 아닌 "개인자격"으로, 비밀리에 "미국"을 설득해서 식량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요청했다. 그 다음날 아침, "장택상""가인 김병로"를 찾아가, 상의하였다"김병로""장택상"과 군사정권 인사 사이에 오고 간 말을 듣고 나더니, 난색을 보였다. 그는 "비록 국민의 식량 문제라고 할지라도 미국 잉여 농산물이 한국에 때맞춰 들어오고 보면, 이 군사정권이 오래 지속될 것이 아닌가"하고 말하면서, "좀 더 생각해 보자"는 것이었다.

"장택상"은 자리에서 나와, 즉시 "안국동 윤보선 댁"을 찾아가, 찾아온 이유를 설명하였다"장택상""김병로가 나의 도미하는 문제에 대하여 난색을 표하더라."고 덧붙였더니, "윤보선"은 대뜸 "그게 무슨 말이냐?"면서, "김병로가 잘못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그것은 가인이 잘못 생각한 것으로 문제가 국민의 식량 문제인 만큼 누구 심부름이든 가릴 것 없이 하루빨리 미국에 가서 힘닿는 대로 해결지어야 한다."고 강경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당시 "주한미국대사""장택상""정부대표 자격이 아니면, 받아줄 수 없다"고 하여, 결국 실패했다. "장택상"이 기자회견까지 마치자, "윤보선"은 직접 환송한다고 자택까지 불러, 저녁 접까지 해 주었다. 그러나 "군사정부"에서는 "장택상"에게 취소됐다고 연락했고, "장택상윤보선" 분개했다.

사회주의공산주의에 대한 불신

"사회주의자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반감불신이 대단하였다. "강원룡"에 의하면"윤보선 씨는 박정희 반대운동을 벌였지만, 사상적으로는 대단히 뿌리 깊은 반공입니다 박정희가 무너질 때까지 재야인사들의 민주화운동을 지지하며 힘을 합했지만, 내심 이 사람들의 행태를 보면 도저히 안심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소위 운동권이 성공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고 이것이 전두환 정권을 멀리 하지 않은 이유 가운데 하나예요."라고 지적했다.

"강원용"은 오히려 "박정희"가 좌익이며, 위험인물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강원용"에 의하면, 그는 한때 "이범석"과 가깝게 지냈던 "김정례"와도 가까이 지냈다고 하였다"윤보선 씨와 가까웠던 김정례 씨도 그랬어요. 김정례 씨는 박정희 치하에서 맹렬하게 싸운 사람 아닙니까. 김정례 씨는 재야 운동권 인사들과 함께 싸우고, 그들이 김정례씨 집에 피신해 있기도 했는데, 과정에서 김정례 씨는 그들을 사상적으로 의심하게 된 겁니다 그들이 박정희에 반대하는 것은 틀림없지만, 이거 가지고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사상적인 불안감을 가졌던 거죠. 윤보선 씨는 그처럼 위험한 세력에게 (정권이) 넘어갈 바에는 박정희처럼 장기 집권만 안 한다면, 당분간 군인들에게 가는 것도 크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 듯해요."

정신혁명론

한국 사회가 진정한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려면, "정신적인 혁명부터 이룩해야 한다"고 보았다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부 도덕성비 정직성"으로 들었다"조국의 근대화"가 아니라, "조국의 민주화""정신적 근대화" 역시 병행되거나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대의의 원칙에 기반한 의회주의, 보통선거, 정당간의 공정한 경쟁을 통한 정부 구성을 이행할 것을 여러 번 촉구했으나 거절당했다.

"박정희그의 유신""반민족반민주반민생빈민권" 세력으로 규정하였다원칙을 강조하되, 그 원칙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상식을 제시했다"윤보선""박정희 정권"의 경제 개발의 후유증이 한국 사회의 비윤리적이고, 그릇된 사고의식타성풍조를 심었다고 진단했고, 국민들 스스로 씻어내고 정신혁명을 이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박정희 정권"의 정책이 부패퇴폐의식을 조장했고, 결과만을 중시하는 풍조를 남기는 등 한 사회에 악영향을 끼쳤다고 봤다.

서구 사회에 대한 충격

"영국유럽 생활" , "영수증을 잘 주고받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라워하였다한국인들은 영수증을 받지 않으면, 바가지를 씌운다는 점과 적당히 바가지를 씌우는 상술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바뀌었다"중국으로부터 들은 말이 있어 내 딴에는 중요한 물건과 현금을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되어, 가방에 넣어 수하물로 부쳤는데, 내 수하물을 취급하는 사람이 어찌된 일인지 화물표(수증)를 발급하지 않는다그래서 나는 짐표를 요구했더니, 화물 취급하는 사람이 도리어 이상한 눈으로 나를 보며, "당신 짐은 글래스고에 가서 찾으면 되지 않소? 표는 무슨 표요?"하고 주지 않았다."

그는 잔뜩 의심하고, 경계하였다"글래스고 시"에 도착해서는 마중 나와 있던 "윤치왕"에게 이를 걱정해서 말했더니, "윤치왕"은 그를 이끌고, 따라오라며, "화물차"가 있는 방향으로 갔다"윤치왕"은 그에게 짐을 가지고 가자고 하였다.

"영국인들"은 각자 자기 짐만 집어가지고 가는 것이었다"남의 짐"도 좋은 것이 있다 싶으면, 가져가는 "조선인들"의 습성만을 봐온 그는 이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나는 이 허술한 사실에 어안이 벙벙하였다."고 한다"그때 영국은 이만큼 탄탄한 사회구조에 이미 서 있었으니, 10전 어치 물건을 사고도 반드시 영수증을 주고받아야만 하는 사회에서 온, 이 동양인에게 그 사회가 어떻게 보였을까."하며, 이를 오래도록 부끄럽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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