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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이승만 • 김구 • 박정희 • 정당

사건- 1925.03 : 이승만 탄핵 (임정 대통령)

by 당대 제일 2022. 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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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03.18, "이승만 (李承晩ㆍ1875~1965ㆍ90세)"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탄핵 의결"로 대통령 직에서 면직되었다1921, "UN에 위임통치를 청원한 사건"을 계기로, 임정 내 일부 독립 운동가들과 내부 대립갈등하게 되었다.

 

1.  1925.03.18일 : 임시정부 "이승만 대통령" 탄핵 가결

"이승만""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 됐고, 2~ 4기까지 유임했다. 유임하게 된 것은 "자유시 참변" 등으로 인해, "임시정부"내 공산진영이 이탈하면서 "이승만" 이외에는 대통령을 맡을만한 인물이 없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이승만"의 독선적인 정부 운영과 무대책으로 실망한 "임시정부 국무위원의정원 의원들" 지도체제를 "대통령 중심제"에서 "국무위원 중심제(원 내각제)"로 바꾸는 개헌작업을 시도했다.

"이승만"은 이에 반대 입장을 보이면서, "임정" 내부에 분열이 발생했다. 그러자 "이승만"1921.05.29"상하이"를 떠났다. "이승만"1년 반 동안 "임정 활동"을 마쳤지만, "대통령" 직을 사퇴하지는 않았다.

2. 탄핵 배경

"이승만""임정 대통령"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외교력에 "임정이 경악했다"는 점이다.

그는 1919.09.06, "임정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됐으나, "상하이"에 와서 자신의 직책을 직접 수행하지 않고, "미국"에서 독자적인 활동을 이어가서, "임정" 각료들과 갈등을 일으켰다.

특히 1919.03~04, "외교 독립론자들(이승만안창호김규식 등)UN에 위임통치 청원을 했다" 사실이 1921년에 임정 내부에 알려지면서 "무장 독립론자들(박용만신채호이동휘 등)""이승만" 등을 비난했다.

신채호는 "없는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것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보다 더한 역적이다"라고 맹비난했, 이동휘(임시 국무총리)"위임통치 청원을 철회한다는 성명서를 내라"고 건의했지만, "이승만""대통령을 비난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난다"면서, 거절했다.

"조소앙(임시정부 외교부장)""임시의정원의 이승만 대통령 탄핵면직 조치"에 극력 반대 입장을 표명했고, 하와이에 거주했던 "이승만"에게 임정 내부의 사정을 내보(內報)하며 "이승만의 복권"을 시도했었다.

1921.05.29, "상하이"를 떠난 그는 1922.02"호놀룰루"로 귀환했다. 1921.06"이승만""임정 대통령"으로서 걸맞지 않는 행사를 해서 교포 사회에 물의를 일으켰다. 자신이 운영하는 "한인기독학원" 남학생(12)여학생(9)"하와이학생 고국방문단"으로 구성했고, "일본 총영사관"과 교섭해서 학생들이 "일본 여권"을 갖고, 한국을 방문하게 했다.

자금 문제

"임정"은 계속해서 그에게 "상하이"로 돌아오라고 요구했지만, 그는 이를 거부했다이에 "임정 의정원"1922.06.10"이승만 대통령 불신임안"을 제출하고, 1주일 뒤인 06.17일 재적의원 2/3의 찬성으로 "불신임안"을 의결했다.

하지만 "이승만"은 이 역시 불구경하듯 처신했다. 무엇보다 "임정"을 가장 분노하게 했던 것은 "이승만""구미위원부"의 사업을 빙자해, "임정"의 허락도 없이 "독립공채"를 팔아, 자신과 측근들의 "활동비로 충당했다"는 것이다.

"임정의 독립운동 자금"을 이승만이 멋대로 사용한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던 "임정"1925.03.11"임시 대통령 이승만 탄핵안"을 발의했다.

결국 그는 "임정 대통령"으로 취임한지, 6년 만에 "의정원"에서 면직됐다. 헌법 절차에 따른 "탄핵"이었다.

3. 1919년, "임정의 초대 대통령"이 됐지만, 6년 동안 "무책임의 끝"을 보여줬다는 평가다.

"임정"이 노선 및 자금 문제로 분열을 보일 때, 이승만이 리더십을 발휘해서 "임정"을 안정적으로 이끌어 나갔다면, 독립이 좀 더 빨리 다가왔지 않겠냐는 이야기도 있다하지만 다른 일각에서는 "외교"를 앞세운 이승만의 노선과 무장독립투쟁을 앞세운 "임정"의 또 다른 노선이 갈등을 하면서 예고된 참사라는 이야기도 있다.

무엇보다 일제가 국내에서 "임정"으로의 자금 운송을 철저하게 감시하면서, 자금줄이 막힌 상태에서 오로지 가능한 자금줄은 "미국 한인사회"였다그런데 그는 "임정"의 이름으로 "국채"를 발행하고, 그것을 "임정"에 전달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활동 자금으로 사용하면서 "임정"은 자금난에 시달려야 했다. 그것은 1932"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의"에 의해, "중국 장개석 총통""임정"에 파격적인 지원을 할 때까지 자금난에 시달려 살아야 했다.

물론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에도 형편이 크게 나아지지 않았지만, 자금난이 다소 숨통이 틔여지면서 "광복군"까지 조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독립신문

4. 1925.03.18 : 독립신문 호외(號外) 1- "대통령 탄핵안 통과"라는 제목의 호외

홍재하(1898∼1960)ㆍ재불 독립운동가의 유품

독립신문 : 흔히 알려진 "서재필 박사의 독립신"과는 제호만 같을 뿐, 전혀 다른 신문이다 "임시정부""상하이"에서 발행했던 기관지로, 독립 운동가들이 국권을 되찾기 위해 다양한 의견과 주장을 펼치고, 국내외 독립운동 소식을 전하던 창구 역할을 했다.

"독립신문 호외"는 곳곳이 찢어져 있는 등 존상태가 완벽하진 않아도, 글자를 모두 정확히 판독할 수 있는 수준이다. 제작을 맡긴 인쇄소의 당시 활자 사정이 여의치 않은 듯, 한자한글이 혼용된 글자들의 크기가 금씩 다른 것도 특징적이다.

1925.03.25, "임시정부임시의정원(의회)""이승만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에서 탄핵 당했다" 것을 알린 것이다호외에는 대통령 이승만 면직 ()대통령을 선출 ()대통령 박은식 취임식 거행 국무원 동의안 통과의 4개 소제목으로 사실관계가 건조하게 기술됐으며, "318일 임시의정원 회의에 임시대통령 이승만 탄핵안이 통과되다"라고 명확히 적혀 있다.

당시 임시정부 인사들은 "이승만"이 주장한 "국제연맹 위임통치 안"에 반발해, 그가 "상해 임시정부"에서 직접 직책을 수행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함께, "임시의정원" 결의를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행동했다는 이유로, 그에 대한 탄핵안을 통과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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