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李承晩ㆍ1875~1965ㆍ90세)"의 정치성향을 여실히 드러내었던 발언으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인 1946.06.03일에 "전북 정읍"에서 "남측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할 것"을 강조하는 내용의 발언을 했다. "이승만"은 "남한만이라도 임시정부를 조직해, 38선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에 호소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던 선언이다.
1. 정읍 발언 (井邑發言)
미군정기, "이승만"이 각지를 순회하는 도중, 1946.06.03일에 "전북 정읍"에서 "남측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할 것"을 강조하는 내용의 발언을 한 것을 말한다. 이는 향후 "이승만의 정치성향"을 여실히 드러내었던 발언이었다. (전문 참조)
"이제 우리는 무기 휴회된 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다. 여러분도 결심하여야 될 것이다. 그리고 민족 통일기관 설치에 대하여 지금까지 노력하여 왔으나, 이번에는 우리 민족의 대표적 통일기관을 귀경한 후, 즉시 설치하게 되었으니, 각 지방에서도 중앙의 지시에 순응하여 조직적으로 활동하여 주기 바란다."
2. 개 요
1945.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의 신탁통치 안"에 "찬탁ㆍ반탁"을 놓고 좌ㆍ우 세력이 크게 대립하였다. 이듬해,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으나, "소련" 측의 주장은 "모스크바 3상회의 협정 지지세력 만, 통일 임시정부에 참여할 자격을 주자"는 주장이었고, "미국" 측은 "모든 정치세력을 통일 임시정부에 참여할 자격을 주자"고 주장하여, 서로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결렬되어, 무기한 휴회되었다.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이후, "이승만"은 남한 각지를 순회하는 도중, "전북 정읍"에서 연설을 하게 되는데, 이는 이승만의 정치성향을 드러내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3. 단정 수립의 경과
당시 "김구"는 탈장증으로 "용산 성모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상공회의소 강익하(김구 제자)"가 찾아와, "김구"에게 300만 원의 수표를 정치자금으로 건넸으나 그는 "국사에 쓰일 돈이라면, 이승만에게 쓰게 하라"며, "돈이 필요하면 이승만에게 얻어 쓸 것"이라며, 사양하였다.
1946.06.11일, "독립촉성중앙회 국민회"가 "정동교회"에서 개최될 때, 참석하여 "이승만"의 연설에 대하여 답사를 발표하였다. 1946.06.29일, "민족통일총본부"가 설치되자, 부총재에 선출됐다.
1947.11월, "김구"는 "이승만의 노선"에 협조하는 대신, "김구의 국민의회" 중심으로 우익이 단결하는데 "이승만"의 동의를 얻어내었다. 1947.11.24일, "김구"는 "남측만의 단독선거는 국토 양분의 비극을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1947.11.30일, "김구"는 "이승만의 이화장"을 방문하여 1시간을 회동, 자신과 이승만의 근본의사의 차이를 보지 못하였다고 성명을 번복하여, 발표하였다. 성명서 발표 후, "이승만"과 함께 "서북청년회 창립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훈화를 하였다.
1947.12.01일, "김구"는 "소련의 방해가 제거되기까지,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의석을 남겨놓고, 선거를 하는 조건이라면, 이승만 박사의 단독 정부론과 내 의견은 같은 것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장덕수 암살사건(1947.12.02.)" 당시, "이승만"이 "김구"를 도와주기를 거절하면서, "김구"는 "단정수립에 대한 찬성"을 취소하게 된다. "김구"는 자신이 법정에 서지 않게 해달라고, "이승만"의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승만"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이승만"은 응답을 회피했고, "이승만"이 "장덕수 암살사건"으로 위기에 처한 "국민회의"를 방관하면서 따로 "한민당"과 연대하며, 독자적으로 "한국민족대표단"을 구성하자, "김구"는 크게 분노하였다. "장덕수"가 암살되었을 때, "이승만"은 "김구"를 배후로 지목했고, 그 후 "김구"는 검찰에 연행되어 수모를 당한 후, "이승만"과의 결별을 결심했다.
1947.12.22일, "김구"는 "단독정부 절대반대"와 "한국민족대표단"의 해산을 주장하였다. "이승만ㆍ김구"의 연대에 비판적이던 "한민당"은 이 사건을 정치적인 호재로 이용하고자 하였다. "김구"의 항의로 "한국민족대표자회"와의 합동작업이 재개되었지만, "한민당"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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