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李承晩ㆍ1875~1965ㆍ90세)"은 "제주 4ㆍ3사건ㆍ여순사건" 진압 과정에서 벌어진 대규모 양민학살ㆍ한국전쟁 중 벌어진 보도연맹 학살사건과 대한민국 국군에 의해 벌어진 "제노사이드 범죄 (Genocideㆍ집단학살)"에 이승만 대통령의 책임이 제기된다.
1. 통치술
① 친일 경찰의 활용
"제주 4ㆍ3사건ㆍ여순사건ㆍ반민특위 습격사건ㆍ장면 부통령 암살 사건" 등의 배후에는 친일 경찰이 있었다고 하는데, "노덕술ㆍ이구범ㆍ최운하" 등은 일제 강점기부터 고문을 잘해서, 출세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반공"을 이용해 국민들에게 공포를 심었다. 당시에는 "친일행위 청산"을 주장하면, "빨갱이"로 몰리기 쉬웠다고 한다. 이승만도 "친일파 청산 주장은 공산당과 연관성이 긴밀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 제노사이드 범죄 (Genocideㆍ집단학살) : "제주 4ㆍ3사건ㆍ여순사건" 진압 과정에서 벌어진 대규모 양민학살ㆍ한국전쟁 중 벌어진 보도연맹 학살사건과 대한민국 국군에 의해 벌어진 제노사이드에 대통령 이승만의 책임이 제기된다.
② 군 견제 정책 (국군 내, 일본군 파벌ㆍ만주군 파벌ㆍ광복군 파벌 간의 헤게모니 쟁탈 갈등)
이승만은 "한국 전쟁" 이후, 급격하게 성장한 "국군 세력"을 경계했다. 군인들의 "쿠데타기도"를 두려워하던 이승만은 "국군 내, 일본군 파벌ㆍ만주군 파벌ㆍ광복군 파벌 간의 헤게모니 쟁탈 갈등"을 알고도 묵인했다.
1954.05월, "정일권 참모총장"이 친밀한 사이인 "공국진"을 "육군 헌병사령관"으로 임명하여, 군내 부패의 척결ㆍ수사기관 사이의 갈등 해결 등을 주요 과제로 지시했다. "공국진"은 이 과제들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직무한계를 자의로 무시하는 "김창룡 특무대장"과 잦은 갈등을 빚게 되었고, "김창룡"은 이 과정에서 "공국진"이 "탄피를 일본에 밀수출하려 하였다"는 혐의를 씌워, 해임을 기도했다.
소위 "경무대 유시"를 근거로 하는 "김창룡"의 공세 앞에 "정일권 참모총장"도 역부족으로 그가 임명한 "공국진 헌병사령관"의 해임을 명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후 "공국진"이 2군 "강문봉 군단장"의 참모장으로 발령되는 것도 "김창룡"의 방해로 무산되었고, 이 과정에서 "김창룡"은 "정일권 참모총장"의 명령을 정면으로 무시하고, "공국진"의 보좌관을 체포ㆍ연행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김창룡의 월권행위"에 분노한 "정일권ㆍ강문봉"은 1955.10월 진해에 머물고 있던 이승만을 직접 찾아가, "김창룡"의 전근 내지는 유학을 건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들의 건의를 수용하지 않음으로써, "김창룡"에 대한 신뢰를 재확인하였다. "김창룡"은 "정일권ㆍ강문봉"의 비리에 대한 집중 수사로 이에 대응하였고, 이는 "정일권ㆍ강문봉의 김창룡 암살음모ㆍ교사"라는 극단적인 대응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주목할 것은 이승만은 "김창룡"에게 "정일권의 비리"를 수사하게 했고, "정일권"에게는 역으로 "김창룡의 비리"를 수사하라는 밀지를 내렸다는 것이다.
③ 정파ㆍ정당 정치에 대한 불신
이승만은 "정당 정치" 자체를 "파벌 싸움"이나 일으키는 갈등의 요인으로 해석하였는데, "정당정치"를 "조선시대 당파 싸움 개념"의 연장선으로 이해하였다. 이승만은 "한민당의 영수가 되어 달라"는 "허정"의 주장에, "나는 일당 일파의 영수가 아니라, 온 국민의 벗이 되고 싶다. 지금 내가 할 일은 민족을 단합시켜 한 뜻을 갖고 일하게 하는 것이오. 지금 내가 한 정당에 소속한다면, 반드시 이루어야 할 전 민족의 단합이라는 더 큰 일을 버리는 것이오."라고 답했다. "허정"은 이러한 생각을 높이 평했다.
반면 "신익희ㆍ윤보선"은 이승만의 "정당정치 혐오"를 두고, 비판을 가하게 된다. 1949.02월, "민주국민당" 창당 사실을 이승만에게 알리기 위해, "신익희ㆍ김성수"는 "경무대"를 방문했다. 그런데 "신익희"는 이승만이 창당에 대한 비판을 늘어놓자, 이를 불쾌히 여긴다. 면담은 오래 걸렸고, 그 날 오후에 나왔다.
나온 후, "김성수"는 차에 오르자마자, 벌레 씹은 우거지상을 하고 말이 없었다. "신익희"는 "정당은 무엇 때문에 조직하는 건데, 이 어른 정당을 조직했다고 인사 온 사람보고, 정권에는 도전하지 말라니, 모든 것을 혼자서 도맡아서 두고두고 하시겠다는 말씀이야. 우리들을 아간지(兒看之), 어린아이 보듯 하시는 말씀이지."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신익희"에 의하면, "김성수" 역시 정당 정치를 비판하는 그의 태도에 불쾌감을 드러냈다 한다.
"윤보선"은 이승만의 정당정치를 두고, "민주주의 정당 정치를 부인하는 행위"라며, 비판한다. 윤보선은 "그이는 흉중에 무슨 생각을 품었던지, 정당정치의 부당성을 주장해 오다가, 6ㆍ25 사변 후 갑작스레 자유당을 만들어 정당정치를 표방하였다는 것은 우리나라 의회 정치사상 본궤도를 찾은 셈이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2대 대통령 때부터 이승만은 민심이 이반되어, 권위가 날로 퇴색되어가고 있었다. 그러자 이승만은 "국민 대다수를 점유하는 농민ㆍ노동자ㆍ근로 대중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하여, 신당을 조직하겠으며 직선제 개헌을 하겠다."라고 하였다.
이승만이 "자유당"을 창당한 것을 두고도 반응은 엇갈렸다. 나중에 이승만이 친위 정당인 "자유당"을 결성한 것을 두고, "윤보선"은 당연한 정치태도라는 입장을 보인 반면 "신익희"는 국회의원들의 간접선거로 하면 당선이 어려우니까, 재선을 위해 수를 쓴 것으로 해석하였다. "허정"은 귀국 초기 입장처럼 "중립적인 시각을 보이시라"며, 촉구하기까지 했다.
④ 정략가
초기의 이승만이 반드시 파당적으로만 인사를 했던 것은 아니다. "초대 내각"은 각계각층에서 유능한 인재를 간추린 "거국내각" 비슷한 것이었는데, 그 대표적 사례가 "농림장관 조봉암"으로, 즉흥적으로 기용했던 것이 아니다. 그는 1946년 봄, "조봉암"이 "박헌영"과 결별할 때, 쓴 "3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글에 날카로움이 있는 것을 보고 찜해 두었다고 한다. (김석영ㆍ경무대의 비밀ㆍ1960) 달리 생각해보면, 지주가 중심인 "한민당(→민국당)"의 저항을 뚫고 농지개혁을 밀어붙이기 위해서는 과거 "공산주의자"였던 "조봉암" 같은 인물이 필요했던 것이다. "좌파"의 공세도 차단하고, "한민당"의 경제기반도 약화시키며, "농민 지지"도 확보하는 1석3조였다.
그 효과는 "6ㆍ25" 때, 농민들이 "인민군"에 호응하지 않았던 점으로도 입증된다. 더불어, 이승만이 역점을 둔 것은 이후 한국 근대화의 원동력이 될 "교육"이었는데, "의무교육제"를 도입해 교육기반을 확충시킬 "문교장관"에 독일박사 출신의 "안호상(安浩相)"을 기용했다.
1948.08.15일 그는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의 나이 74세 때였다. "늦게 왕을 계승한다."는 그의 이름 "승만(承晩)"처럼 늦게 권좌에 올랐다. 그러나 흔히 알려진 것처럼 "미국"의 덕을 본 것이 아니다.
미국은 장사꾼 논리다. 늘 이긴 자와 손잡는다. 그게 "안전 빵"이기 때문이다. 이승만도 자기 힘으로, "대통령" 자리에 올라갔기에, "미국"이 손을 잡아준 것이다. 그가 대외적으로 역점을 둔 것은 "대한민국의 국제적 승인"이었다. 이를 위해 이승만은 "장면"을 단장으로 하고, "올리버"를 고문으로 하는 강력한 대표단을 UN에 파견해 승인을 받았다. 이 승인을 받아놓았기에, 뒤에 발발하는 "6ㆍ25전쟁" 때 UN군의 신속한 파병이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국제정치의 묘미를 알고 있던 이승만 다운 솜씨였다.
⑤ 만사에 직접 개입ㆍ결재 : 독립운동 할 때의 마인드
"이원순"은 이승만이 "사소한 것까지 관여ㆍ간섭하면서도, 일면 사소한 것은 대강 넘겼다"고 했다. 그는 정사의 세부에까지만 관여하고 있으면서도, 실제로 행정부의 자세한 사무에는 초연하였고, 원칙상 기본적이고, 전체적인 정책에 주의를 집중하도록 하였다.
"신익희" 역시 "이승만이 사소한 것까지 일일이 간섭해야만 직성이 풀린다."고 증언하였다. 이승만이 "독립운동 할 때의 사고방식을 버리지 못했다"는 시각도 있다. "신익희"는 이승만이 "독립운동 할 당시의 주먹구구식 계산으로 정치를 한다."고 했다. "신익희"는 그가 "독립운동 할 당시의 마인드를 버리지 못했다"고 하였다.
1948.07.20일 초대 대통령 선거에 당선되었다.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 직후 처음 방문한 "신익희"는 "우남께서는 을미사변ㆍ을사늑약ㆍ경술합방을 겪으시면서, 국내ㆍ해외에서 영토도, 국민도 없이 유한한 몇몇 독립운동 동지들과 함께 독립운동 하시느라, 어렵고 위험한 형극의 길을 50여 기나긴 성상을 걷다가, 반쪽 일망정 영토ㆍ국민ㆍ주권의 세 요소를 갖춘 완전한 독립국가의 대통령이 되셨으니, 그 감개무량함이 남달리 여타 유별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천만 가지 모두가 정황이 부접하고요, 일일이 미정한 때에 깊은 근심과 짙은 걱정이 전보다 몇 배 더하실 것입니다. 하와이에서, 상해에서, 미 본토에서 독립 운동하시던 그 때와는 판이하게 아주 다릅니다 국무총리 이하 각 부 장관만 학식과 능력, 그리고 덕망 있는 사람으로 골라서 맡기시고, 그 아래는 그 사람들로 하여금 골라서 임용하도록 권리와 책임을 주십시오. 우남께서는 이열 한 부의 장관과 네 처장만 딱 거머쥐셔서 번적 들며 줄줄이 따라 올라오고, 내려 놓으면 모두가 내려앉습니다. 이렇게 하셔야지 만일 그렇지 않고 만기(萬機)를 일일이 친자(親自) 총괄하시려고 하면 어렵습니다. 아무리 기억력 좋고 영리한 사람이라도 사람의 능력은 한계가 있습니다. 더구나 우남께서는 지금 나이가 연만하신 터수에 어려우시니 그렇게 하도록 하십시오."라고 진언하였다.
그러나 끝까지 조용하게 듣고 있던 이승만은 "신익희"의 건의가 끝나자, 벌떡 일어나서 방안을 빙빙 돌면서 손을 입에 갖다 대고는 훅훅 불면서 "안 돼요, 믿을 사람이 누구란 말이오."하고는 국회의장실 한 구석에 앉아 있던 여자 사무원을 가리키며, "저기 앉아 있는 사환들 까지도 내가 일일이 간섭해야 해요. 그래야 모든 일이 제대로 됩니다. 해공은 모르시는 말씀이야."라고 하였다.
"신익희"는 "우남 대통령 저 어른 큰일 났다. 아직도 하와이의 사탕수수 밭에서 노무자로 이민 간 무식한 교포들과 비서 몇 사람 데리고 일하시던 그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시니, 앞으로 정형(情形)은 어려워 질 것 같구나"라고 하였다.
"허정"은 "이승만이 소인배들의 농간 외에도 그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또 하나의 요인이 있었다. 그것은 좋게 말하면, 사명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집념 또는 아집이었다. 우남은 자기 손으로, 그리고 자기만이 한국을 훌륭한 민주국가로 키울 수 있고 분단된 조국을 통일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이것은 스스로 설정한 정치적 목표였고 스스로 내세운 사명이었다. 그는 대통령 직에서 물러나게 될 때까지 이 사명을 수행하는 길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에 대한 국민의 절대적 신뢰를 의심하지 않게 되었을 때, 그는 국민의 이러한 신뢰는 그의 정치적 사명에 대한 국민의 정치적 동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라고 보기도 했다.
만사에 일일이 개입하는 업무 스타일을 그의 최측근 이외의 부하직원들은 피곤하게 여겼고, "이기붕 일파ㆍ자유당"은 소와 말까지 동원해가며, 국민이 재출마를 희망한다(우의마의)며, 그를 속이기도 했다.
2. 논란ㆍ의혹
① "독재자가 아니다"는 견해
권위주의적이고, 독선적이기는 했지만, 독재자는 아니라는 주장이다. 근거로 "4ㆍ19혁명"에 대한 책임을 지고, 스스로 물러났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허정"은 이승만의 성격을 알기에, 그가 독재자가 되려고 마음먹었다면, 얼마나 잔인하고 혹독하게 탄압했을지 모른다고 했다. 허정은 "우남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만일 그가 스스로 독재자의 길을 택했다면 얼마나 철저했을 것인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독재라고 부르는 그의 행동이 얼마나 엉성하고, 어설프고, 불철저했던가. 만일 그가 스스로 독재자가 되려고 결심했다면 그는 이렇게 불철저한 행동을 하지 않았으리라고 믿는다. 독재자는 우남과는 다른 유형임을 이제 국민들은 이해해야 할 것이다. 심신이 쇠약한 노령에 이르러 행정수반으로서의 과오와 실정을 저지른 바 없지 않았지만 그가 평소에 쌓은 공적과 대비하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윤치영"은 이승만이 평소 "부정과 부패를 싫어하고, 자유민주주의적 공명선거를 믿고 있었다."며, 이승만 몰래 자유당 측근들이 부정을 저지른 사실이 사후에 다른 사람에 의해, 보고되자 깜짝 놀라, "그렇다면 학생과 국민이 일어선다는 것은 당연하다"며, 자진해서 하야한 이승만이었다고 주장했다. "진상이 드러나자, 드디어 이승만은 04.27일 행동으로 당신의 뜻을 보여주었다"며, 이승만이 독재자가 아니라고 하였다.
② 측근들의 부패ㆍ오도
측근들이 그의 눈ㆍ귀를 가렸다는 설도 있다. 이승만이 "돈암장ㆍ이화장"에 있을 때부터 비서관이며, 비서실장을 지낸 "윤치영"은 "이기붕"의 수하들이 눈ㆍ귀를 가리고, 이 박사를 속였다고 진술했다. 윤치영은 "가슴 아픈 것은 면종복배판 측근들에 대한 이박사의 심정이었다."는 것이다. 윤치영은 "노쇠한 이승만 대통령의 여생을 점치던 정상배와 협잡꾼들과 같은 기회주의자마저 끼어들어 벌써부터 논공행상에 여념이 없는 작태들을 노정시키고 있었다."고 하면서,
"내무장관 최인규와 자유당 간부들이 부정선거를 획책했다. 선거전이 종반으로 접어들면서 내무장관 최인규가 진두지휘하는 행정부의 부정선거 음모는 자유당 수뇌들과 미리 짜여진 각본에 따라 실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행정관서와 경찰이 청중을 강제 동원하는 전국 유세가 02.27일 대구에 이르러 수성천변에는 역사상 초유의 군중이 자유당 집계로도 30만에 달하였다. 1960.02.28.일, 대구 시내에는 "경북고등학교" 학생들을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장면" 후보의 집회를 방해할 목적으로 등교케 했다. 최인규가 각급 행정관서와 경찰, 그리고 지방선거관리위원회에 내린 비밀지령은 이기붕 후보를 필사적으로 당선시키려고 무리를 담고 있었다. 이러한 부정선거운동의 양상을 보며, 더군다나 장막에 둘러싸여 아무것도 모른 채, 당신의 평소의 소신과 철학대로 민주주의적인 절차가 잘 진행되고 있으려니 하고, 믿고 있을 이승만 박사의 처지가 가엾고 통분할 노릇이었다."고 했다.
"허정" 역시 이승만이 "소인배들의 농간에 희생되었다"고 하였다. "장면"은 "이승만 측근들이 장기집권을 위해 부정부패를 저질렀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장기집권은 이승만의 뜻이 아니라, 그 부하들의 농간이었다는 것이다. "그 분을 장기집권 시키기 위한 자유당 정권이 저지른 "중석불 사건ㆍ원면 사건ㆍ연계 자금 사건ㆍ산업 금융 채권사건" 등 추잡한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 국민의 불신을 사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이승만은 "인의 장막에 가려져 있음"을 은연중에 인식했다고 한다. "윤치영"에 의하면, 1958년 이승만을 찾아갔을 때, "당신의 불편한 심정을 토로하는 가운데 뭔가를 암시하는 듯 "철창에 갇힌 호랑이"에 비유하며, 혼잣말처럼 독백하시던 일로 미루어 나로서는 여러 가지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며, 이승만이 뒤늦게 "자신이 부하들의 농간에 놀아남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③ "국민회 자금" 유용 의혹
"국민회ㆍ이승만 파(동지회)"가 서로 테러를 가하기도 하고, "국민회 대표회의" 때에는 총격이 가해지는 일도 벌어졌다. 이런 분쟁 속에서 마침내 "국민회 주도권"이 이승만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대한인 국민회" 계열 재미 한국인들은 이승만을 두고, "협잡배"라 매도했고, "돈을 너무 밝혔다"고 비난을 가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에도 이승만과 "국민회"가 "독립자금 문제"로 분란을 겪어, 끊임없이 의혹을 받고 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발족되자, 국내외에 걸쳐 많은 "독립자금"이 들어왔는데, 1919년 미주의 "국민회"에서 임시정부에 송금한 내역을 보면, 공식적으로 36,000 $ 였다고 한다. 다음 해, 이승만도 많은 자금을 가지고 "상하이"로 왔는데, 1920년도에는 미주에서 200만 $을 모금했는데, 이는 오늘날 가치로 보면 2억 $가 된다. 이후 이승만은 "구미위원부"를 발족한 뒤, 미주 동포들이 낸 "독립자금"은 "구미위원부"에서만 사용하고, "임시정부"로 보내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다시 "독립자금" 모금을 두고, 다시 "주도권 분쟁"이 야기되기도 하였다.
"박용만"과의 갈등 중, "하와이 대한인 국민회" 활동에서 자금을 유용했다는 의혹을 끊임없이 받기도 했는데, 이승만은 "하와이"에 온 초기부터, "하와이" 실력자이면서, 군사양성에 열중하는 "박용만"을 맹렬하게 비난했고, "박용만 반대세력"을 규합했다. 이승만은 "대한인 국민회의 운영권" 곧 "회비 관리권"을 움켜쥐려고 온갖 공작을 벌였으나, 쉽게 실현되지 않았다. "박용만"은 다른 농장으로 "군영"을 옮겨가면서, 군사훈련을 거듭했으나, 두 사람의 대립은 그칠 줄 몰랐다.
1910년대 중반 무렵, "일제"는 "밀정"을 통해, "박용만"의 군사훈련 사실을 캐냈다. "주미 일본 대사관"에서는 "미 국무장관"에게 이를 항의했고, "국무장관"은 "하와이 총독"에게 그 실정을 알아보게 했다. 1918년 "박용만"이 "살인 미수 혐의"로 재판을 받자,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증언을 했다. "그는 미국 영토에 조선국민군단을 설립하고, 배일활동을 하면서, 일본 군함 출운호가 호놀룰루에 도착하면 파괴하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 이는 미국과 일본 사이에 중대사건을 일으켜 평화를 방해하려는 짓이다."
"박용만"은 온갖 음모에 시달리면서, 주도권을 잃어갔다. 이승만은 "자금횡령 혐의"로 "대한인 국민회 간부들"을 고소했고, "국민회 간부들"은 법정에서 고통을 받아야 했다. 서로 벌인 소송사건이 10차례나 있었다. 분쟁이 야기되는 동안에도 "독립기부금"은 잘 걷혀, 1915년 1,523 $에서 해마다 늘어나 1918년도에는 3,775 $를 기록했다.
3. 평가ㆍ비판
① 부정적 평가
"해방 정국"에서의 "이승만"이 한국의 분단을 고착화시켰다는 주장과 공산주의에 맞서서, "반공국가"를 건설하였다는 주장이 있다. 1949년, "반민특위 습격사건"에 최종적 결정 승인ㆍ지시를 내린 것으로 알려져있으며, 친일 경찰ㆍ군인ㆍ관료 출신들을 "반공투사"라 칭송하면서 대거 등용했다는 점ㆍ한국전쟁 시, 대통령으로서의 평판을 실추시킨 행동들ㆍ토지 개혁과 귀속재산처리 문제에 소극적인 태도로 나아갔다는 점ㆍ사사오입 개헌ㆍ3ㆍ15 부정선거ㆍ인의 장막에 가려져 있었던 점ㆍ집권 욕, 고집 등에 대한 비판들이 있다.
또한, 1958.12월, "차기 대통령선거"에 대비하여 "국가보안법" 등 관계 법령을 개정하고, 경제시책의 빈곤으로 인한 "특정 재벌"에 대한 특혜 등으로 국민의 지탄을 받기도 하였다. 허정은 "다만 처음 환국했을 때처럼, 한 정당의 지도자가 아니라, 국민의 입장에 선 초당적 지도자로서 아직도 미숙한 한국의 정당들을 공평한 입장에서 육성하여, 정권의 평화로운 교체를 위한 기반을 확립하지 못한 점과 정권을 인계함으로써, 훌륭한 민주적 전통을 확립하지 못한 점만은 그의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 위임통치 청원 사건에 대한 비판
1919년,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국제연맹"의 감시 하에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는 청원서를 올리고, 후에 다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신채호ㆍ신성모" 등 "임시정부 무장투쟁파"와 갈등하였고, "박은식 일파"의 공격을 받았다. 결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에 의해, "탄핵"까지 가게 되었다.
이때 "임정"에서 이승만의 편을 들던 인물은 "김구 (내무부총장)ㆍ최창식 (의정원 의장)" 등 소수였다. "신채호"는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아먹었다."고 성토했다. 거기다 "임시정부 대통령" 직을 임하면서도, "임시 정부 청사"가 있는 "상하이"에서는 활동이 거의 없어 1925년에 "탄핵"을 당하게 된다. "조소앙"은 이승만에게 "쿠데타"를 종용하는 편지까지 보내기도 했다. "임시정부"에서 이승만을 "탄핵"하자, 그는 "재미 한인 교포들"에게 "임시정부"로 송금을 중단하게 하였다.
"이승만 반대파"들이 "국민대표자 회의" 소집을 요구하며, "임시정부"를 부정하고, "임정"의 해산ㆍ재창조 등을 주장하는 "창조파ㆍ개조파" 등이 활동하면서, "임시정부" 내에서의 "이승만"의 위치가 자연스럽게 다시 복권될 수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1932.11월, 1933년에 열리는 "스위스 제네바 국제연맹회의의 전권대사"로 파견되었고, 1934년 "국무위원회 회의"에서는 "신익희ㆍ조소앙" 등과 함께, "임시정부 외교위원"의 한 사람으로 신임되었다.
• 자만심이 강하고, 독선적인 인물이었다는 주장
누구든지 그에게 복종하고 그를 따르기만 하면, 그는 그 사람을 동지로 간주하였으며, 그 외의 사람은 모두 그의 적이었다고 평가하였으며, "대단히 성격이 급하고, 남들과 쉽게 싸웠으며, 주요 정치문제에 대하여 대단히 완고했다"고 평하였다.
초기에 그의 신임을 받기도 했던 "장면"에 의하면 "그분의 성격 소치인지 자존심이 너무 지나쳐, "나"이외에는 이 나라를 다스릴 사람이 안중에 보이지 않는 양 정치 면에 나타난 그분의 개성은 독재의 전형적인 감을 주었다. 정적을 용서 않고 때로는 고도의 술책과 잔인성을 주저 않고 드러냈다.
국회에서 통과된 법률도 비위에 안 맞으면 공포 안하기가 일쑤이며, 그의 유시나 담화가 법률 이상의 위력을 휘둘렀다. 구속된 국회의원에 대한 석방 결의도 아랑곳없고, 헌법 기관인 참의원, 헌법 위원회, 탄핵 재판소 등도 필요 없다고 구성해 주지 않았다. 장기 집권을 위하여 때로는 비민주적인 방법의 정치 파동도 일으킨 사실은 우리가 다 잘 알고 있는 바다."라고 비판하였다.
② 토지개혁 : 조봉암 (농림부장관)의 개혁
1950.03월에 개정되어 공포된 "농지개혁 법안"으로 "농지개혁"을 시행했다. 이승만의 승인 하에, "농지개혁"을 주도한 사람은 당시 "농림부 장관 조봉암"이었고, 이승만이 "진보당 사건 조작"으로 사형시킨 사람도 "조봉암"이다. 1948.08월, 이승만은 "조봉암"의 건의ㆍ설득을 받아들여, "농지개혁"을 승인한다.
"농지개혁"으로 "왕조시대" 이후, 대지주에게 집중된 농토를 실제 "농민"에게 나누어주는 것이었다. "농지개혁"으로 인한 효과는 남다른 것이었다. 비록 일부에서는 "실패한 토지개혁"으로 폄하하는 의견도 있으나, 정설로는 "토지개혁을 통해 주인의식이 생긴 농민들이 많아져,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일성ㆍ박헌영 등이 주장하던 100만 봉기설이 무용지물이 됐다"는 것이다.
"이명호(인천 지역유지ㆍ인천시의회 1대 의장)"은 "조봉암의 농지개혁"에 반발하였으면서도, 이승만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참았다고 한다. "이명호"의 5딸 "이양숙"의 증언에 의하면, "이명호"는 "토지개혁"으로 많은 땅을 빼앗겼으면서도 크게 내색하지 않았다고 한다. 워낙 "이승만 대통령"을 존경했는데, 그가 장관으로 임명한 "조봉암"이 나서서 한 일이니, 이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③ 긍정적 평가
"허정"은 "흔히 선생님을 독재자라고도 하지만, 미국에서 수학하신 선생은 독재자는커녕, 분명한 자유민주주의의 신봉자였다. 오히려 우유부단한 면까지 없잖아 있었다."고 했고, 그가 "3ㆍ15부정선거"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점을 두고 "그는 민의를 존중하는 정치인이었다."고 평하였다.
허정은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4ㆍ19의 노도가 장안을 휩쓸었을 때 비로소 민의의 소재를 정확히 파악한 그는 "부정을 보고서 일어서지 않는 백성은 죽은 것"이라며 깨끗이 권부에서 물러났다."며, "젊은 학생들의 애국 기상을 가상히 여기고 국민이 원한다면 사퇴하겠다면서 자진해서 대통령 직을 내던지고 하야함은 이승만이 아니고서는 하지 못할 결단이었다."고 평하였다. 또 "우리는 그의 마지막 모습만을 보고 그의 전부를 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으로 한반도 전체의 적화를 막은 그의 슬기와 용단만으로도 우남은 한국 현대 정치사에 커다란 공적을 남긴 것이다"라고 평가하였다.
2대 국무총리와 4대 부통령을 지낸 "장면"은 "그 분의 애국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고 하였다. "일평생 독립운동에 바친 공적이 이를 말하고도 남는다. 특히 대외적으로 철석같은 반공 태세, 의연한 대일본 태도, 과감한 반공 포로 석방 등은 이승만 박사의 용단이 아니고는 아무도 따를 사람이 없었다. 독립 주권의식의 철저한 시범도 경복할 만큼 위대했다"는 것이다.
1970년대부터, "윤치영" 등에 의해, "이승만 재평가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특히 "윤치영"은 "제1공화국" 기간 중의 부패ㆍ선거 관련 문제는 "이승만과는 무관하다"고 확신했다. "얼마간의 무리도 따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50년대 들어 저질러진 그러한 행태들은 자유당 정권의 부패한 세력들에 의해 주도된 것이다. 가령 이기붕ㆍ박 마리아 같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더욱 유지시키고 심지어는 대권을 생각해서 저지른 짓들입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1970년대부터 "이승만이 독재자"라는 주장은 낭설이며, "우의마의"라는 단어의 어원을 설명, 이승만이 3선으로 퇴진하려 했으나, 이승만을 등에 업고 권력을 행사하려는 "자유당 측근들"의 간계로 관제 "3선 출마" 시위가 있었고, 이승만은 속은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역설했다.
1979년 이후부터는 공공연히 "이승만의 3선 퇴진설ㆍ우의마의"라는 단어의 어원을 역설하며, "학생 운동권"의 이승만 독재자설에 반론을 제기했다. 1991년, 한국논단과의 인터뷰에서 윤치영은 "우리는 거시적인 차원에서 이 박사를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분은 평생을 독립투쟁에 몸 바쳐 온 분이고, 민주주의를 가장 신봉하는 인물이었다."라고 평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후, "이승만 박사"는 "국민 학교 의무교육 실시했다"는 점에 있어서 한국 근ㆍ현대 교육사에 획을 긋는 자취를 남겼다는 주장이 있다.
④ 이승만 우상화 논란
• 1949.03.26 : "중앙청 광장"에 이승만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9시에 기념식이 열렸고, 집집마다 태극기를 걸었다.
• 1954.09.18 : "교통부 광장"에서 "철도창설 55주년 기념ㆍ이승만 대통령 흉상 제막식"이 열렸다.
• 1956.03.31 : "서울 탑골 공원"에 "이승만 동상"이 설치되었다. 이승만의 80회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24m 높이의 동상"이 제작되었다.
• 1956.08.15 : "동상 제막식"에서 이승만에 대한 "만세 삼창"이 이루어지고, 서울 하늘에서는 축하 불꽃놀이가 벌어졌다. 하지만 이 동상은 "4ㆍ19혁명" 이후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철거되었다.
• 1959년 10 : 이승만의 얼굴을 넣은 "100환 동전" 등 이승만을 소재로 한 "화폐 8종"이 발행되었다.
처음 발행된 1953년에는 "한복을 입은 모습"으로 그려졌으나, 1957년에 발행된 새 환화의 "이승만 대통령"의 초상에 있던 "한복"은 "양복"으로 바뀌었다가, 1962년에 들어와서, 화폐에서 "이승만의 초상"은 볼 수 없게 되었다.
서울 뚝섬에 "우남송덕관"ㆍ우민회관ㆍ우남정"등 이승만의 호인 "우남"이 들어가는 건물이 건축되었다. "부산 용두산 공원"은 "우남공원"으로 명칭이 변경되고, "중앙대 도서관"도 "우남 도서관"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승만 하야" 이후, 이러한 기념물, 건물 등은 철거되거나, 명칭이 변경되었다. "4.19혁명" 이후, 대한민국에는 "이승만의 동상"이 없었다.
"서울 종로구 이화동 1번지" 낙산 기슭에 위치한 "이화장(梨花莊)" 대문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초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동상이다. 오른손을 치켜든 동상이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외치는 것만 같다.
5. 반공주의
"반공주의 완결편"은 "일제의 치안유지법"을 거의 그대로 옮긴 "국가보안법" 제정이었다. 이 법에 의해 "반공"은 "대한민국의 국시(國是)"가 되었던 것이다.
"공산주의"와 협력ㆍ타협이 불가능하다는 이승만의 지론은 1921년 "이동휘" 등과 마찰, 1933년 "소련 방문" 때 당한 모욕, 1943년ㆍ1945년 "좌우 연립"을 둘러싼 갈등과 "미 국무부"의 진보적 관리들로부터 받은 수모 등 자신의 개인적 체험에 바탕을 둔 것이기도 했다. 또, 그는 "2차 대전" 후, "연립 정권"을 구성했지만, "좌우 연립"은 명목이었을 뿐, 결국 "공산정권"이 되고 만 "폴란드"의 사례에서 "공산주의와 타협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재확인했다. 이 점은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이라는 그의 라디오 담화문 속에 잘 드러나 있다. (서울신문ㆍ1945.12.21)
① 해방 전, 반공의식
"배재학당"에 다닐 때만 해도, "평민주의자"의 한 사람이었던 이승만은 "공산주의"의 주요 가치가 되는 "평등사상"에 대해, 비교적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1898.11월,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도입하려 했다는 혐의로, "윤치호ㆍ이상재ㆍ남궁억" 등 "독립협회" 간부 17명이 체포되자, 그는 "배재학당 학생ㆍ대중 수천 명"을 이끌고, "경무청ㆍ평리원(고등법원)" 앞에서 철야농성을 벌이다가 잡혔다. 석방을 요구하는 집회가 밤낮으로 계속되자, 아버지가 찾아왔다.
"선친은 내 손을 잡고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승만아, 너는 6대 독자라는 것을 잊지 말라"고 하셨다. 17명은 종내 석방되고 말았는데, 그날 밤 나는 참으로 득의충천 하였었다. 민주주의를 위한 위대한 승리를 이룩하였던 것이다"라고, 이승만은 자서전에 썼다.
또, "황실"이 조종하는 "황국협회"가 "독립협회" 회원들을 습격해, "김덕구(金德九)"라는 사람이 죽었을 때, 수천 명의 민중이 그의 장례식에 참여했는데, 이승만은 바로 이들 "집단의 리더"이기도 했다. 이처럼 당시로서는 진보적이었던 그가 보수적 생각을 갖게 된 것은 "미국"으로 건너간 뒤부터였던 것 같다.
1908년, "전명운ㆍ장인환 의사"가 친일파 미국인 "더햄 스티븐스"를 "샌프란시스코"에서 암살해, "미국 법정"에 서게 되었을 때, 이승만은 자신에게 들어온 "법정 통역"의 요청을 거절하면서, "예수교인으로서, 사람을 죽인 이의 통역을 원치 않는다."고 했는데, 우리는 이 발언을 통해 그가 공산주의를 싫어하게 된 배경이 "공산주의를 사탄시하는 기독교의 영향 때문이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실제로 그가 "공산주의자"와 처음 부딪히게 된 것은 1921년 "상하이 임시정부"에서였다. 당시 "국무총리 이동휘"는 공산주의자였다. 비록 그가 제기한 문제는 "위임 통치국 청원"에 대한 것이었지만, 벌떼처럼 달려드는 "공산주의자"와 동조세력들에게 크게 시달렸다.
"하와이"로 건너간 "이승만"은 "공산주의"에 대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평등주의"는 당(當)하나, 5가지(재산 분배ㆍ자본가 폐지ㆍ지식계급 폐지ㆍ종교단체 혁파ㆍ국가 소멸)는 부당(不當)하다는 글을 발표한 일이 있다. (이승만ㆍ공산당의 당부당(當不當)ㆍ태평양잡지ㆍ1923.03월호) 이는 "공산주의"에 대한 그의 인식을 표현한 글로, 이때만 해도 "공산주의" 자체를 혐오하는 수준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1933년에는 "소련"에 도움을 구하러 간일도 있기 때문이다.
1933.07.20.일, "모스크바 역"에 도착한 이승만은 즉시 추방되는 수모를 당했는데, 이것이 "공산주의"라면 넌더리를 치는 계기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그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소련 비자"를 얻어, 기차를 타고 "소련"으로 갔다. "(만주사변 후) 일본의 영토 확장이 중국과 마찬가지로 소련에도 위협이 되므로 그는 서방에서보다 더 환대를 받지 않을까 희망했다. 그러나, 소련 인들은 소련과 만주지역의 한인들에 아주 적절한 발판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의 말을 가장 듣지 않을 것 같은 이 망명분자를 도와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Richard Allenㆍ1960)
1945.05월, "연합국" 대표들이 "샌프란시스코"에서 "UN 창립총회"를 열었을 때, "미 국무부"는 "중국 외교부장 송자문(宋子文)"을 시켜, 한인 각파 지도자들로 하여금 "한국통일위원회"를 구성하게 하여 "좌우 연립"을 종용했다. 당시 이 복안에 앞장섰던 인물은 대일 첩보로 "미 국무부"의 호감을 사고 있던 "한길수(韓吉洙)"와 중도파의 "김용중(金龍中)" 등이었다.
이승만은 "임정 대통령"을 지낸 자신과 이들을 동격으로 취급하는 "국무부"의 태도에 화가 났다. 게다가 자신의 지지 세력과 상대방이 세 대결에 들어가면, 결코 유리한 상황도 아니었다. 이에, 이승만은 그런 식으로 연립하게 되면, 한국을 "공산주의"에게 내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단호히 거부했다.
그의 참모인 "올리버"가 이승만의 지도력은 이것으로 끝이라고 한, "국무부 관리들"의 말을 전하자 "워싱턴"으로 돌아온 이승만은 그럴지도 모른다면서, "그러나 나 좋자고 한국을 파느니, 나는 차라리 아이오와의 작은 양계장으로 은퇴하겠소."라며, "국무부"가 종용한 연립 안에 강한 거부감을 피력했다. 이처럼 "이승만의 반공투쟁"은 "미국"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② 해방 후, 반공의식
1945.10.16일, 귀국한 이승만은 "남한의 좌우정당ㆍ사회단체 대표들"이 모두 그의 지도를 받기 위해 모여든 것에 크게 고무되었다. "미군정" 또한 그의 지도력을 원했다. 이에 이승만은 10.21일, "공산당에 대한 나의 감상"이라는 방송 연설(매일신보ㆍ1945.10.22)을 통해, "나는 공산당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 주의에 대하여도 찬성하므로 우리나라의 경제대책을 세울 때 공산주의를 채용할 점이 많이 있다."라고 하며, "공산주의를 포용하겠다."고 선언했다.
다분히 "공산당"을 의식한 일종의 제스처였을 것이다. "좌파"는 환호했다. 아직 수락하지는 않았지만, 이승만은 이 시점에서 그들이 세운 "인민공화국의 주석"이기도 했다. 연설 직후인 10.23일, 각 정당ㆍ단체대표 200여 명이 모여, 이승만을 정점으로 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구성하기로 했는데, 여기에는 "조선공산당" 등 좌파 단체들도 모두 포함돼 있었다. 10.31일, 이승만은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헌영"을 "돈암장"에 불러들였고, 두 사람의 이날 회담은 원만하게 타결된 듯 보였다. (매일신보ㆍ1945.11.02). 그러나 회담에서 논의된 "친일파 배제문제"가 공전하자, "박헌영"이 반기를 들었다.
이에, 이승만은 11.21일 "공산당에 대한 나의 관념"이라는 방송 연설을 통해, "악독한 왜적의 압박 하에서 지하공작으로 절(折)불굴하고, 배일 항전하던 공산당원들을 나는 공산당원으로 보지 않고, 애국자로 인정한다."면서, 자신은 근로대중에게 복리를 주는 경제정책을 펴자는 "공산주의자"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찬성하지만, 경제정책은 어찌 되든지 "공산 정부"만 세우자고 선동하는 "공산주의자"에 대해서는 "나랏일에 손해를 끼치는 이들이니 이 분자가 참으로 염려된다."고 말했다.(서울신문ㆍ1945.11.23) "좌익"을 둘로 나누어, 한쪽은 인정하지만, 다른 한쪽은 인정할 수 없다는 연설이었다.
그러나 "좌파"의 정당ㆍ단체들은 그 최고사령탑인 "박헌영"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12.17일, 어느 정도 유연성을 이던 기타 "좌익 단체들"이 "독립촉성중앙협의회"로부터 모두 탈퇴하자, 이승만은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이라는 방송 연설을 통해, "공산분자들이 러시아를 저희 조국이라 부른다니 과연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요구하는 바는 이 사람들이 한국에서 떠나, 저희 조국에 들어가 저희 나라를 충성스럽게 섬기라고 하고 싶다."며, "공산당"과 완전 결별을 선언한다.(서울신문ㆍ1945.12.21)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승만은 "무기 휴회된 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라고 저 유명한 "남선단정" 발언을 감행하게 된다. (서울신문ㆍ1946.06.04)
비난 여론이 들끓었다. 그러나 그의 발언은 단순히 정권욕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이대로 두면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되니 남한만이라도 건져야 하지 않느냐는 절박한 심정에서 나온 것이었다는 해석이 점차 유력해지고 있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것이, 당시 이승만이 사용한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라는 용어다. 여기서, "위원회"는 다분히, 그 해 2월 성립된 "북한의 임시인민위원회"를 의식한 단어로, "소련이 사실은 단독정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냐?"고 이승만은 의심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의혹은 1993년 공개된 "소련문서"에 의해 사실로 입증되었다. 즉, "스탈린"은 이미 1945.09.20일 극"동군 총사령관ㆍ제25군"에게 "북조선에 반일적 민주주의 정당ㆍ단체들의 광범위한 동맹에 기초하여, 부르주아 민주정권을 수립하는 데, 협조하라"는 지령을 보냈고, 이에 따라 "소련"은 "북조선 5도행정위원회→ 북조선 5도행정국→ 임시인민위원회"를 통해, 이미 "북한의 단독정권"을 구축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6. 외교 관계
① 미 국
"미국"을 불신하면서도, 강력한 "동맹 상대"로 "미국"을 지목하였다. 대한제국 시절, 밀사로 파견되었을 때, "미국"이 "일본"과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체결한, 1905년부터 이승만은 "미국의 대 한국정책"에 대한 강력한 불신을 품어왔다.
"미국"은 비밀리에 "대통령 루스벨트"가 파견한 "윌리엄 태프트 국무장관"과 "일본 총리 가쓰라"가 비밀 회담으로, "일본"이 한국 점령을 용인하는 대신, "미국"은 "필리핀"을 점령하는 것을 "일본"이 침해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1940년대에도 "임시 정부" 승인을 미루거나, 회피하는 "미국"에 대한 이승만의 불신은 계속되었고, "한국 전쟁"의 원인도 1949년, "주한 미군"이 철수한 것이 원인을 제공한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② 일 본
"일본"에 대한 외교정책은 시종일관 "반일노선ㆍ경계"를 지향하였다. "일본인"을 만났다는 이유로 "국무총리 장택상"을 해임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에 대표부를 파견하여 연락을 유지하였고, 이는 이승만 퇴진 후 "주일한국대사관"으로 승격되었다.
"6ㆍ25전쟁" 당시 "미국"에서 "일본"의 개입을 천명하자, 이승만은 "주한미국 대사"에게 "일본군"이 개입하면, "일본군"부터 먼저 축출할 것이라고 하여, "일본군 참전"을 취소시켰다. 한편 서울이 점령당했을 무렵, 이승만은 "일본"에 "임시 망명정부"를 수립할 계획도 고려하고 있었다. 1954.03.27일, 국내에 유통 중인 "일제 상품 몰수"를 지시했고, 1955.06.20.일에는 "일본 제품 특혜 수입 금지령"을 내렸다.
'한국 (근 • 현대사) > 이승만 • 김구 • 박정희 • 정당'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승만 ⑤ 정읍 (井邑) 발언ㆍ정치성향 (0) | 2022.09.22 |
---|---|
이승만 ④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누가 처음 한 말? (0) | 2022.09.22 |
이승만 ② 가족ㆍ여자 (본부인)ㆍ친아들ㆍ성격 (7전8기) (0) | 2022.09.22 |
이승만 ① 초대 대통령 (1875~1965ㆍ 89세) (2) | 2022.09.22 |
김구 (백범) ⑤ 치하포 살인 사건 (1896.02) (2) | 2022.09.2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