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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이승만 • 김구 • 박정희 • 정당

김구 (백범) ⑤ 치하포 살인 사건 (1896.02)

by 당대 제일 2022. 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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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하포 (鵄河浦) 살인 사건"1896.03.09"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의 한 주막에서 조선 청년 "김구"가 일본인 상인 "치다 조스케 (土田譲亮)"를 일방적으로 폭행하고 끝내 살해한 뒤, 재물을 탈취한 사건이다. 사건 직후 "김구"는 피신했지만 6월 말,"해주부"에서 체포, "인천 감리서"에 구속된 상태로 심문을 받다가, 1898년 탈옥 후 재수감, 1899년 석방되었다.

 

1.  치하포 사건수감 생활 (1896.02)

"김구 (金九ㆍ1876~1949.06.26ㆍ향년 72세)"19세였던 1896.02"청나라"로 향했다가, "단발정지령" 시행과 "삼남 의병봉기" 소식을 듣고 1896.03.09일, "평안북도 안주"에서 길을 돌려 고향으로 귀환하던 중, "황해도 치하포"에서 "진남포"가는 배를 타고 가다가, 빙산을 만나면 그는 사람들과 함께 내려 빙산을 의지하여 작은 빙산을 떠미는 방법으로 배를 빼낸 뒤, 우여곡절 끝에 "치하포" 인근 5리 밖의 강어귀에 정박하였다.

치하포구의 한 여관방에 머무르고 있었다여관방에는 한복을 입고, 성이 정씨이고, "장연"에 산다는 사람도 있었다김구는 그 사람이 "진남포"로 간다고 하였으며, "장연 출신"이면서 "경성 말"을 하고, 흰 두루마기 밑에 칼집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인으로 위장한 일본인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굳이 일본인이 조선인으로 위장한 것은 평범한 상인이나 기술자가 아니라, "을미사변"의 공범이라 도피 중이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한국인으로 변복한 것을 수상히 여긴 그는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이거나 그의 일당으로 단정하였다.

치하포

김구는 아침 식사시간에 밥값을 치르던 중, 그를 습격하여 칼을 빼앗아 폭행한 뒤 살해했다그의 이름은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였다김구는 자신의 저서 "백범일지"에서 "쓰치다 조스케"를 일본 군인이라고 기술하였으나, 일본 외무성 자료엔 "쓰치다""대마도 이즈하라" 출신의 상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때 "김완섭"이 김구가 민간인을 살해했다고 주장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으며, 창원대 교수 도진순은 자신이 찾아낸 일본 외무성 자료에 의하면, "쓰치다 조스케""계림장업단" 소속 상인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는 "백범일지" 도진순 주해 1997년판에도 실려 있는 내용이나, 2002년도 판에는 도진순 스스로 이 주장을 철회하여, "계림장업단" 관련 내용을 삭제하였으며, 현재 "쓰치다 조스케"가 상인이었다는 것 외에 "계림장업단" 소속이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더불어 "계림장업단""치하포 사건" 이후인 1896.05월에 조직되어 시기상으로 맞지 않는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그리고 언론인이자 전 국회의원 "손세일"도 자신의 저서 "이승만과 김구" 신판에서 "쓰치다"라는 이름의 그 일본인은 "대마도" 출신의 민간인에 불과했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김구는 현장에서 살인 이유로 국모인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식당 주인이자 동장(洞長)"이화보(李化甫)"를 시켜, 자신의 거처를 적은 "포고문"을 길거리 벽에 붙이고, 집으로 돌아가 체포되기를 기다렸다.

"쓰치다"가 소지하고 있던 엽전 800전 중, 선주들에게 선가를 떼어주고, 나머지는 방장인 "이화보" 시켜 동리 주민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였다석달 후, 자택에서 체포된 김구는 "해주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이감되어 "인천"으로 압송되었다.

"해주 감영"에서 고문당하다가 "인천 감리영"으로 이감, "경무관 김윤정(金潤晶)"은 그에게 일본인 살해여부를 묻고, 이어 재물을 강탈할 목적이냐고 추궁하였다사태가 큰 사안이라 본 "경무관 김윤정""인천부윤 겸 감리사 이재정(李在正)"에게 보고하였고, "이재정"의 추국 때, 군부의 원수를 갚기 전에는 "몽백(상복)"을 입지 않는 것인데, 국모의 원수도 갚지 못하고도 "몽백(상복)"을 입는 것의 염치없음을 질타하였다추국하던 관리들은 부끄러워하여, 이후로 그에게 반말을 하지 않고 공대하였다.

김구는 사형선고를 받고 "인천감옥"에서 사형 집행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고종의 지시로 사형 집행이 중지되었다.  1896"덕수궁"에 자석식 전화기가 설치되었는데, 이 전화는 주요 관아는 물론 인천까지 개통되었다고종은 "인천감옥"에 직접 전화를 걸어, 청년 김구에 대한 사형집행을 중지시켰다이는 전화가 개통된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2. 개화죄수 교육

"김구"는 감옥 속에서 간수가 전해준 "대학세계역사태서신사세계지리"를 읽고, "개화사상학문"에도 눈을 뜨게 되었으며, 감옥안의 재소자들에게 글을 가르쳐, 감옥을 학교로 만들었다.

1897, 강화사람 "김주경(金周卿)"은 그의 딱한 소식을 접하고, 동료 상인객주들과 함께 그의 구명운동을 벌이지만 실패하였는데, 가산을 탕진한 그는 "블라디보스토크" 방면으로 잠복하였다뒤에 김구는 "김주경"의 동생 "김진경"을 찾아, 그의 형 "김주경"의 행방을 수소문하나 만나지 못하였다.

감옥에서 "김구"는 재소자들에게 글을 가르쳤다감옥에서 재소자에게 글을 가르치면서, 감옥이 서당이 되었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일부는 밥을 얻어먹을 목적으로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나, 나중에는 자발적으로 글공부에 참여하였다.

재소자들에게 글을 가르쳐주면서, 재소자들은 물론 억울한 일을 당한 간수들을 위한 "대서(글을 대신 써주는 것)" 해주었고, 또한 동료 재소자들로부터 민담과 노래를 배웠다중국서적을 통해 서양 문물을 접하였으나, 향후에도 "영어"에 관해서는 문맹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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