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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이승만 • 김구 • 박정희 • 정당

김구 (백범) ④ 임정봉대론ㆍ임정법통론

by 당대 제일 2022. 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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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봉대론(臨政奉戴論)ㆍ임정법통론(臨政法統論)"이라는 것은,  해방 직후, "충칭(중경) 임시정부가 유일한 정권 수임기관이 되어야한다"는 논리로, "한민당계 및 임정계열 인사들"이 추진한 운동이다.

 

1. 임정봉대론 (臨政奉戴論)

해방 직후,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를 제의받자, "송진우""총독부"가 연합군에게 정권을 인도하기를 기다리고, "중경 임시정부"를 정통으로 환영 추대할 것을 주장하였다.

"송진우""38선 이남"에 대한 미군의 진주가 알려진 직후인, 1945.09.01"임시정부 및 연합군 환영 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임정봉대"를 주장하였다.

당시 국내 정치세력은 "인민공화국(좌파)독립촉성중앙협의회(이승만)한민당" 등이 있었으나, "김구 임정세력"은 환국과 함께, "조소앙" 5명으로 "특별정치위원회"를 조직독자적 행보를 보이면서 임정 기구의 확대 보강정당 간 통일을 주장하였다.

1945.12, "여운형인민당"은 인공임정의 해소를 통한 합작과도정권 수립을 주장하였다12.31, "인공"은 인공임정의 동시해체와 통일위원회 결성을 제안했으나, "임정"은 이를 거부하였다.

"임정""모스크바 3상회의"를 계기로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12.28, "국무위원회" 산하에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를 설치하고, 31일 대대적인 "탁치반대국민대회"를 개최하였다이에 1946.01.01, "미군정 하지""김구"를 소환하여, "반탁운동"을 중지하도록 요청하였다.

01.04, "김구""비상정치회의"를 소집하고, 01.20"비상정치회의 준비회"를 조직하였다그리고 이를 "임시의정원"을 계승한 "과도적 최고입법기관"으로 설정하였다01.18, "미군정 하지""임정"의 비상정치회의 소집이나 독자적인 과도정부 수립 시도를 저지하도록 훈령을 내렸다.

"이승만""김구"에게 "비상정치회의"에 대한 "군정"의 적대적 입장을 지적하여, 1946.01.23.일 이"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합하고, 02.0161개 단체를 망라한 "비상국민회의"로 개편하였다여기에는 "조선공산당인민당독립동맹" "좌파 세력"이 배제되어 있었고, 02.13"비상국민회의"에서 과도정권 수립을 위한 28명의 "최고 정무위원"을 선정하였다.

02.14, "미군정"은 이들을 "군정" 자문기관인 "재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在南朝鮮大韓國民代表民主議院)"으로 전환하였다1946"1차 미소공위" 실패 후, "이승만"06.29"민족통일총본부"를 결성하여, "단정 추진좌우합작운동" 저지를 추진하였고, "한민당"이 반대했음에도 "비상국민회의민주의원 연석회의"07.07 18:13으로 합작지지를 결정하였다.

 

2. 임정법통론 (臨政法統論)

"미소공동위원회 제5호 성명"에 합의하고, "미소공위" 재개가 본격화된 1947.01월이었다"2번째 임정봉대론"을 둘러싼 운동은 "이승만 및 한민당이 이에 부정적이었다"는 점에서, 해방 직후와 차이가 있었다.

1947.01.16, "민주의원" 35단체에서 "좌우합작위원회"의 해산을 결의하고, "한독당"도 해산을 요구하고, "입법의원""반탁결의안"을 통과시켰다01.13일부터 "김구""비상국민회의 민주의원" 등 우익단체를 소집하였고, 01.24"3단체(비상국민회의민족통일총본부독촉국민회)"를 통합하여, "반탁독립투쟁위원회"를 조직하였다.

42개 단체가 망라된 "반탁독립투쟁위원회""위원장(김구)부위원장(조소앙김성수)"였다.

1947.02.14.~ 17일까지, "비상국민회의""2차 전국대의원대회"를 열고, 3단체를 통합한 "국민의회(國民議會)"를 조직하기로 결의하였는데, "국민의회""중경임정의 임시의정원"을 계승한 기관으로, "입법의원에 해당하는 입법기관"이라는 천명하였다03.01, "독촉국민회 전국대표자대회""국민의회"의 법통을 승인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봉대" 결의하였다. "전국학련""중경 임정"을 정식 정부로 추대하였고, 03.03"김구""국민의회"를 소집하여, 주석에 "이승만", 자신을 "부주석"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이승만한민당"은 이에 부정적이었고, 1945.12월과 달리 "군정 관리"의 호응도 없었다4월말, "이승만""남조선 보선 실시임정봉대문제 보류"를 천명하였고, 08.20"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08.25"민족대표자대회 제21차 대회"에서 "미군"에 협조하거나, "한인 단독"으로 "총선거 실시"를 추진하였다.

1947.09.17, "미국"이 한국문제를 "UN"에 이관하자, "김구" 측은 기존의 "임정법론에 의한 정부 수립""UN 감시하의 남북총선거" 방안 사이에서 갈등하였다.

11.30, "김구""이승만"과 회담 이후, 12.01일에는 "소련의 방해로 북한에 선거가 실시되지 못해도 그 방해가 제거되는 대로 북한이 참가할 수 있는 것을 조건"으로, 총선거 방식 정부수립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였다. 12.04, 이를 확인하는 담화를 발표하고, "이승만"과 합의를 강조하여, "남한만의 선거를 사실상 지지"하였다.

그러나 12.22"김구"는 다시 "단독정부 반대남북총선거자주 통일정부 수립"을 선언하였고, 1948. 01.26 "미소양군 철퇴한인의 자주적 총선거"를 주장하는 "남북 한인지도자회의 소집" 6개항을 요구하였다02.26, "김구""김규식북한 김일성김두봉"에게, "남북 정치지도자간 정치협상회의"를 제안하는 서신을 보냈다.

이를 계기로 "김구""남한 단독선거 반대남북협상 추진"의 입장에 서게 되었다일제하 26년간, 해방 3년간 추진했던 "임정봉대론임정법통론"을 포기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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