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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이승만 • 김구 • 박정희 • 정당

윤보선 ① 대통령 (4대ㆍ1897~1990ㆍ92세)

by 당대 제일 2022. 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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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보선 (尹潽善ㆍ1897~1990ㆍ향년 92세)"은 제4대 대통령(1960.08~1962.03.23)으로, 1961년, "5ㆍ16 군사정변" 당시, "장면 내각"에 반발하여, "군사정변"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던 점 등으로 외면되거나,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 오다가, 2000년 이후 "박정희 19년"에 맞선 야당 정치 지도자들 중의 한사람이라는 점이 감안되어 재평가를 받기 시작하였다.

 

1.  윤보선 (尹潽善1897~1990향년 92)

4대 대통령(1960.08~1962.03.23)4선 국회의원(3~ 6)서울시장(1948.12~1949.06)상공부장관ㆍ별칭 : 정신적 대통령재야 대통령영국 신사청소시장)ㆍ호 해위 (海葦)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영국으로 유학을 떠날 때 스승 신규식이 지어준 것으로 "바닷가 갈대는 바람에 휘날려도 꺾이지 않는다"는 뜻

•  출생 : 충남 아산군 둔포면 신항리

•  사망 : 서울 종로구 안국동 (충남 아산시 음봉면 동천리 안장)

•  사인 : 병사 (당뇨고혈압폐렴급성 신부전증)

•  학력 : 도쿄 세이소쿠 고등학교영국 에든버러대학교 고고학과 학사    •  종교 : 장로교

•  : 여흥 민씨 (1937년 사별10년간 수절2)공덕귀 (1911~1997권사2)

•  자 녀 : 22

•  가 족 : 조부 : 윤영렬 (1854~1939)ㆍ: 윤치소 (尹致昭1871~1944)ㆍ당숙 : 윤치호 (尹致昊- 좌옹 (佐翁)1864~1945) 친일파

1째 동생 : 윤원선 (1910~1971) / 제수 : 이진완 (1916~1997영선군 이준용의 서녀흥선대원군 증손녀)

2째 사위 : 신준호(? ~ ?)신규식(1879~1922독립운동가)의 장남

3째 매제 : 이재영 (? ~ 2006)이병도 (역사학자) 조카이병묵의 아들

사 돈 : 장인- 민영철 (1864~1912): 첫 부인 여흥 민씨의 아버지민영환의 6촌 동생사촌누나 윤시선(큰아버지 윤치오의 딸)의 시아버지ㆍ신규식 (1879~1922): 독립운동가윤보선의 스승사위 신준호의 부친ㆍ민필호 (1898~1963): 독립운동가사위 신준호의 매부ㆍ신명호김준엽 : 독립운동가사위 신준호의 인척ㆍ남궁억 (1863~1939): 독립운동가6촌 형 윤광선의 장인ㆍ 현진건 (1900~1943): 독립운동가작가8촌 매형 현정건의 동생윤치오 후처의 6촌 동생ㆍ방응모 (1883~1950): 친일파조선일보 사장ㆍ 이병도 (1896~1989): 역사학자매제 이재영의 삼촌ㆍ남궁연 : 음악가 겸 방송인동생 윤완선의 외손자

정 당 : 민주당무소속민정당민중당신민당

저 서 : 구국(救國)의 가시밭길(1967)회고록 : 외로운 선택의 나날들(1990)

윤보선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기여했다는 평가와 "516 군사정변" 협력 논란이 양립하고 있다"516 군사 정변"을 방조했다는 의혹을 받아왔으나, "3공화국4공화국" , "박정희의 라이벌"었으며, "3유신시절" 내내 민권 투쟁에 앞장섰고, 각종 사회사업에도 참여하였다.

"김영삼김대중"이 등장하기 전까지 야당을 이끌었으며, "선명 야당"을 강조하였다조선 선조 때, 문인 "윤두수"의 후손으로, 대한제국의 관료 "윤웅렬"의 종손이며, "윤치호"의 종질이다친일파인 "윤치호윤치왕윤치창"은 당숙이었고, "윤치영"은 숙부였으며, "영선군"의 사위 "윤원선" 동생이었고, "윤일선윤영선" 등은 사촌이었다.

"임시의정원"에 일시적으로 참여하였고, "신규식"의 권고로 "영국 유학"을 다녀왔다"미군정기1공화국"의 야당 정치인이었으며, "국회의장 이승만의 비서관서울특별시장상공부 장관대한적십자사 총재" 등을 거쳐, 2공화국에서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1961, "516 군사정변" 이후, "대통령 사퇴" 성명을 발표했다가, "민주당 정권"이 붕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군부에서 "대통령 직"에 있어달라는 요구를 수락사퇴 성명을 번복했다1962.03, "하야" 이후부터는 "반독재 야당 지도자"로 활동하였으며, "박정희""군부내 좌익 프락치"라고 규정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5대 대통령 선거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이후 "한일회담 반대운동민주회복국민선언명동구국선언" 등에 참여하였으며, 군사 정권하에서 여러 번 기소와 재판에 회부되었다"임시의정원의 최연소 의원"이기도 했고, "허정이갑성"과 함께, "31광복절" 기념식 때, 늦게까지 초대된 "독립운동가" 중의 한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전직 대통령"의 자격으로 초대되는 것이었으나, "전직 대통령"이 아니더라도 "독립운동가" 자격으로 초대될 수 있었다.

< 약 력 >

19191922 :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충남 선거구)

1945 : 한국 민주당 창당 발기위원

1946 : 민중일보 사장 (1947, 민중일보사 사장 재선)

1948 : 이승만 국회의장 비서실장

1948.05.10 : 제헌 국회의원 (충남 아산) 4위로 낙선

1948.12 : 서울특별시 시장 (1948.12.15~ 1949.06.05)

1949 : 상공부장관

1950 : 대한적십자사 총재 (12- 피난민구호대책협의회 부회장)

195419581960 : 민의원 (345)

1960 : 민주당 최고위원국회 간접선거로 제4대 대통령 (82.2%1960.08.13~1962.03.23)  구파 지도자 "신익희조병옥"의 사망으로 구파 지도자가 되어, 신파 지도자 "장면"과 대립

1961 : 516 군사 정변 추인

1963 : 5대 대통령 선거 입후보6대 국회의원

1965.02.19 : "장택상"과 함께, 대일 굴욕외교 반대 데모 주관

1966 : 신한당 총재     1967 : 6"신민당" 대통령 후보자 출마

1971 : 신민당 탈당국민당 창당총재(선명야당 기치를 내걸고, "장준하박기출"와 함께)1973 : 유신 정권에 의해 국민당강제 해산 당함

1974 : 비상 보통군사법원 회의에서 "민청학련 사건" 배후 조종 혐의로 제소  (군사재판에서 징역 15년 구형항소 기각징역 3년에 집행 유예 5년 확정)

1977 : 명동사건 상고 기각 원심 확정윤보선 등 고령자는 형 집행 정지

1979 : YMCA 위장 결혼식 사건 연루형 집행 면제, 복권      1981 : 정계 은퇴

 

2. 의혹ㆍ반론 :  5ㆍ16 군사정변 방조ㆍ진압저지ㆍ추인

① 방조 의혹

"윤보선" 측은 "5ㆍ16 군사정변 계획"을 사전에 알고 있었으며, 이를 사실상 승인했다는 의혹을 전면 부인하였으나, "유원식(1914~1987ㆍ군인ㆍ 5ㆍ16 군사정변 주도)"의 주장이 사실인지 여부는 밝혀지지 않았다.

1962.05월, "유원식"은 "윤보선"의 정변 방조 의혹을 제기하였다. 그는 "윤보선이 이전부터 쿠데타가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았고, 이를 방조했다"고 주장하자, 윤보선은 이를 부인하며, "혼란한 장면정부 하에서 무슨 사태가 터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는데, 쿠데타가 일어났다기에 그렇게 말했을 뿐"이라고 반박하였다. 그러나 "윤보선"은 자신의 회고록인 "외로운 선택의 나날들 : 윤보선 회고록"에서 "유원식"과는 만난 적이 없으며, "유원식이 자신을 모함하는 것"이라며, 반박하였다.

"윤보선"은 "내각책임제 하의 정부수반"으로서, 실권을 행사했던 "장면 총리"의 실권을 부러워하여, "5ㆍ16 군사정변"을 방조 내지, 묵인했다는 분석도 있다. 국가원수로, 정치적 라이벌인 "장면의 몰락을 바라며, 제2공화국 붕괴를 방관했다"는 이런 주장은, 야당 지도자인 "윤보선"에게는 도덕적으로 치명적이었다. 또한 05.16일 오전, "청와대"를 방문한 "장도영(육군참모총장)에게 "군사계엄 선포는 반대하지만, 군사혁명을 무산시키는 어떠한 단호한 조치도 반대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도연"으로부터 "폭동발생ㆍ정변 음모" 등의 정보를 입수하고, "김도연"에게서 들은 정보를 "장면 총리"에게 알려, 철저한 대응을 지시하였다는 증언도 있다. 그러나 장면은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에게 알아보니 별일이 아니다. 걱정할 것 없다"고 반응했다고 한다.

② 진압저지 의혹

"국군통수권을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38선 전방부대"를 서울로 보내, "군사정변"을 저지하지 않았고, "박정희의 국군통수권 이양" 요구시, "올 것이 왔다"라는 말과 함께, 순순히 "국군통수권을 이양한 것" 때문에, "군사정변"을 묵인하는 대신, "박정희와 대통령 중심제 개헌을 매개체로 타협을 보려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는 사학자들이 있다. 그것은 "내각 책임제"하에서의 "대통령"은 별 볼 일없는 자리였기에, 이에 분개한 "윤보선이 박정희와 타협하였다"는 것이다.

"5ㆍ16군사정변"이 터지자, "이한림(1군사령관)ㆍ임부택(1군단장)"등에게 비서관들을 보내, "국군끼리 유혈사태가 벌어지면 안 된다"면서, 진압하지 말라고 했다는 의혹도 있다. "장면"은 "윤보선이 이한림에게 비서관들을 보내, 진압을 만류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장면"의 주장은, "국군 통수권을 쥐고 있는 대통령의 태도가 이러한 것을 알고는, 쿠데타가 진압되리라는 희망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후일 "박종률(장면 비서관)"은 "그의 태도가 애매했다"고 봤는데, "윤보선 대통령이 쿠데타를 인정한 것은 사실"이라는 것이다. 당시 "우희창(국방차관)으로부터 들은 말을 인용, "윤보선은 명백하게 쿠데타를 인정하고 진압을 반대했다"고 했고, "우희창" 역시 "매그루더(주한미군 사령관)"에게서 들은 이야기라고 말했다.

③ 추인 의혹

"5ㆍ16 군사정변을 승인할 의도가 없었다."고 주장하였으나, "제2공화국의 국가원수임에도 5ㆍ16 군사정변을 저지하지 않았다"는 비판론이 제기되고 있다. "5ㆍ16 군사정변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는 주장에, "지지하지 않았다"는 반론도 있다.

05.17일 낮11시, "윤보선"은 군사 정변을 진압하러 온 "매그루더(주한미군 사령관)ㆍ마샬 그린(주 한미 대사 대리)"를 만났고, 그들은 "쿠데타에 대한 대통령의 견해"를 듣고자 했다. 그들은 이미 "장면 총리가 영도하는 합법적인 한국 정부를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학생혁명도, 군사혁명도, 똑같은 국민들이 일으킨 똑같은 혁명이다. 당신네 케네디 미국의 대통령이 장면 국무총리와 같은 가톨릭 신자라고 해서 학생혁명은 인정하고, 군사혁명은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냐"고 항의했다고도 한다.

두 사람은 "윤보선"에게 "쿠데타군을 무력으로 진압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윤보선은 "국군끼리 전투를 벌여 서울이 불바다가 되면, 인민군이 기회를 노려 남침한다."며 끝까지 반대했고, "마샬 그린(주 한미 대리 대사)"은 마지막 경고로 "각하의 이번 결정으로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군부통치가 계속될 것이다"고 하였으나, 그의 의지는 변하지 않았다.

"윤보선이 5ㆍ16 군사 정변을 지지한다."고 생각한 "매그루더(주한미군 사령관)"은 "박정희ㆍ장도영ㆍ김종필"등을 진압할 생각을 포기했다. "매그루더 사령관"은 "미 합참의장"에게 비밀문서를 보냈다. 또한, 이 자리에서 "윤보선"에게서 충격적인 말을 들었는데, "윤보선은 나의의 견해가 매그루더 장군과 마샬 그린 대사와는 다르다"고 말했다고 한다. 현 정부에 대한 불만과 환멸은 광범위하게 퍼졌으며, 국민들은 더 이상 "장면 내각"의 약속을 믿지 않는다고 주장했고, 그는 "장면 정권"의 무능력과 부패상 등, 급박한 현안과 직결되지 않은 문제를 거론하면서, "거국내각 구성"을 주장했다.

④ 올 것이 왔구나

이 말을 둘러싼 논쟁은 1980년대까지 계속되었고, "윤보선"이 죽을 때까지 그의 활동과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쟁점이었고,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박정희 일행"을 접견실에서 만난 그는 "올 것이 왔구나"는 말로 입을 열었다. 혼자 하는 말이었지만, 소리가 워낙 커서, 다른 사람들도 그 말을 들었다.

"현석호(국방부 장관)"은 회고록에서, "대통령의 입에서는 듣기에 민망한 혹독한 말들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왔다. 요약을 하면 장면 총리는 진즉에 물러났어야 했으며, 민주당은 무능했다. 윤보선은 이 말에 이어, 나라를 구하는 길은 이 길밖에 없다"면서 "장면 정부"에 비난을 퍼붓고, "박정희"의 거사에 찬사를 보냈다고 했다. "나라를 구하는 길은 이 길밖에 없었습니다. 박 장군은 위대한 일을 했습니다."

군부에 의해, "청와대"로 온 "현석호"는 "윤보선"의 이 발언을 가리켜 "한마디 평생토록 잊지 못할 말을 했다"고 진술했다. "올 것이 왔다"는 발언에 대하여, "유원식"도 같은 진술을 했다. "유원식"이 "5ㆍ16 군사정변" 직전에 "윤보선 대통령"과 만나, 정변 계획에 대한 교감을 나누었으며 정변소식을 들은 "윤보선"은 "올 것이 왔다"는 반응을 보였다는 주장을 내놓아, 논란이 일었다.

"허정"에 의하면, "UN군이 작전권을 장악하고 있는 한국에서 군사혁명이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안도감도 있었으나 군사혁명은 성공해 가고 있었다. 매그루더 UN군 사령관의 원대 복귀 호소도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그 무렵, "매그루더ㆍ마샬 그린"이 "허정"을 찾아왔다고 한다. "허정"에 의하면, "그들의 말로는 군사혁명의 저지를 위해 UN군 병력을 동원할 허가를 받으려고 혁명이 일어난 직후 대통령 윤보선을 찾아갔다고 한다. 그때 장면 총리는 은신 중이어서 윤 대통령을 찾아갔던 것이 다. 그러나 3시간에 걸쳐 병력 동원을 허가해주기를 간청했으나 윤 대통령은 끝내 허락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린 마샬"은 "국헌 준수를 서약하고 대통령에 취임한 만큼, 지금 병력 동원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의무의 포기가 아닌가"하고, 힐난까지도 했다는 것이다.

⑤ 반 론

"김준하(윤보선 비서관)"에 의하면, "그는 5ㆍ16 군사 정변에 협력하지 않았다"고 증언하였다. "곁에서 지켜본 바로는 내통하거나, 묵인한 일은 결코 없다"고 잘라 말했다. "국군통수권이 없었던 윤 대통령은 마셜 그린 주한미대사와 카터 매그루더 유엔군사령관에게 미군을 동원해줄 것을 강력히 요청하는 등, 피를 흘리지 않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애썼다. 정치군인들의 치밀한 사전계획과 장면 정권의 무능과 분열 때문에 쿠데타 세력이 집권에 성공했다. 일부 혁신세력이 주도한 야간 데모 등 사회적 혼란, 물가 폭등과 경제 파탄, 공무원들의 복지부동의 태도 등이 쿠데타의 빌미가 됐다"는 것이다.

또한 그가 "5ㆍ16 군사정변"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거나, 군인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지 않았던 점도 있어 그를 "협력자"라 보기 어렵다는 반론도 있다.

 

3. 성격외모풍모

기본 성격

"풍수설"을 맹신하였고, 1990년 사망했을 때, "국립묘지"에 안장되지 않고, "충남 아산군 음봉면 동천리 선영"에 안장되었는데, 자신이 죽어 묻힐 자리, "신후지지"를 미리 만들어놓고, 즐겨 찾았다. 독서ㆍ정원의 화단 가꾸기를 즐겨하였다.

젊은 아내와 어린 아들들 탓에, 그는 자신의 외모에도 각별히 신경 썼다. 깔끔하고, 말쑥한 "신사"였으며, 나이가 들어서도 아랫배가 나오지 않았고, 피부 결이 늘어지지도 않았다눈가 주변에 약간의 주름과 검버섯이 있었던 것을 제외하면, 나이에 비해서 상당히 젊어 보이는 편이었다밥은 꼭 "잡곡밥"으로 식사를 했다고 하는데, "흰 쌀밥"으로만 식사를 할 수 있었음에도 콩보리 조 등 여러 가지 잡곡을 섞어 식사를 한 것이 궁극적으로는 장수의 비결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호흡기 질환이 있던 그는 안과이비인후과를 자주 다녔다.(서울의 정귀섭 안과이비인후과는 윤보선이승만당숙 윤치호의 단골집이었다)

냉정권위적합리적자기중심적인 성격

쉽게 누군가에게 호감을 주는 스타일은 아니었다그러나 한번 자기 사람이 되면 각별하게 챙기고, 그의 가족의 생일기일까지 챙기는 자상함을 보였다1950년대 미국을 방문했을 때, "최기일"을 면담했는데, "최기일"에 의하면 "윤보선의 첫인상은 그다지 좋지 않아서, 나는 그이를 싫어했지만 계속 만나고 이야기하면서, 조금씩 그와 가까워졌다. 내가 미국에 유학을 왔을 때, 그는 미장 그릴에서 점심 대접을 하기도 했다후덕한 사람은 아니지만, 논리적이고 사리가 밝은 사람이었다"는 평을 내렸다.

냉정하고, 합리적이라는 인물평과 자존심을 중히 여기는 "명사형 정치인"이라는 평가도 있다권위주의적이고, 조선시대의 양반적 사고방식을 가졌다는 평도 있다"명문가"라는 자존심과 더불어, 양반의 권위주의적인 사고를 갖고 있어, 대단히 "자기중심적"이었다.  정치관은 "흑백 양자택일"이었기 때문에, 일단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도무지 타협을 모르고 길로만 내달았다. 옳다고 믿는 것은 끝까지 밀어붙이는 성격이었고,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상식적 사고

매사에 "상식"을 강조하였는데, "김준하(윤보선 비서관)"은 이를 그의 "첫 가르침"이라고 회상하였다"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일을 할 때, 잊어서는 안 되는 마음가짐을 꼼꼼히 설명했다. 그때 대통령이 내세운 것은 상식이었다. 민주주의의 종주국인 영국에서는 나라를 다스리는 데 기본이 되는 헌법이 따로 없다. 그들은 "상식"을 헌법으로 대치한다.사고와 행동의 잣대를 상식으로 삼으면 나라의 일이나 개인 생활이나 정상적 궤도를 벗어나지 않는다."

야심가정치적

"서중석"은 그가 "상당히 정치적이었고 야심도 있는 사람이었는데, 그것을 알게 된 것은 대통령이 된 직 내각 책임제하의 수반이었던 장면 국무총리와 싸우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전까지 윤보선은 "영국 에든버러 대학을 나온 신사대부호 명문 집 아들이다" 이렇게만 알려져 있었는데, 아주 잘못 안 것이었다. 윤보선이 1960419혁명이 나기 전까지는 세상에서 잘 몰랐었는데, 대통령이 되었다고 봤다그러나 윤보선처럼 박정희와 정면으로 붙은 사람은 없다. 그것을 보면 사람은 겉보기하고 다르다"고 평가했다.

 

4. 관계일화

① 장면 (총리)ㆍ윤치영 (숙부)와의 관계

1961, 비서관 "김남 (김성수 5)"의 동생 "김상기"의 결혼식이 있었다"김상기""조폐공사" 직원이기도 했는데, "선우종원(조폐공사 사장)"으로부터 결혼식 참석 부탁을 받자 그는 "국무총리(장면) 참석하나요?"라고 되물었다.

"온다"는 답변을 받자, "나는 안 가겠소"라고 서슴없이 대답했다"선우종원""저와 한 직장에 근무하는데다가, 인촌 선생의 아들의 혼사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항의하여 가까스로 달래자, 참석하였다후에 사람들 귀에 들어가면서, 그가 "김남 비서의 결혼식을 기피하더라"는 말이 돌았다.

숙부인 "윤치영" "박정희"를 지지하고, 그의 선거사무장을 지내자, 만남에서 인사조차 나누지 않았다"윤치영"과의 관계는 1980년대 초반이 되어서야 개선되었다.

② 5ㆍ16 군사 쿠데타  당시, "노모 (老母)" 때문에 피신 거부

비서관 "김준하""그가 지극한 효자였다"고 평하였다아침저녁으로 노모에게 꼭 문안을 드리고, 노모의 건강을 체크했다"516 군사정변" 아침, 비서들이 대통령에게 청와대를 피하도록 권유했을 때, 그것을 거부한 이유 중의 하나가 "자기 혼자만 피신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다.

 사쿠라 (유진산 별명)  : 낮에는 야당밤에는 여당 (선명성 의심)

1960년대 중반, "유진산 (柳珍山ㆍ1905~1974ㆍ68세ㆍ 독립운동가ㆍ7선 국회의원)"을 "사쿠라"라고 공격했고, "유진산"의 별명이 되었다. 이후 한국 정계에서 여당과의 타협론을 벌이는 정치인에게는 "사쿠라"라는 별명이 붙여지는 시초가 되기도 했다. (일본에서 불교 전래 전에, "벚꽃"이 핀 봄날에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쿠라"란 축제 의식을 선동하기 위해 박수 꾼ㆍ바람잡이가 군중 속에 몰래 동원되어, "사쿠라"가 "사기꾼ㆍ야바위꾼" 뜻으로 변질되었다는 설이 있다)

 유행어 : 올 것이 왔다정신적 대통령

1961 "516 군사정변" 당시, "올 것이 왔다"라는 말을 하여, 유행시켰다당시 "현석호(국방부 장관)"은 이를 두고, "잊혀지지 않는 말"이라고 했다"민주당 신파" 계열과 일부 재야 운동가들은 이 발언을 문제 삼았다이 발언은 그의 "한민당" 경력과 함께, 일부 재야세력이 그를 미워하는 하나의 이유가 됐다

"대한민국 5대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했으나, 자신을 "정신적 대통령"이라고 주장했다이후 "정신적"이라는 단어가 유행하게 되었다. 선거 결과, 박정희가 4,702,640, 윤보선은 4,546,614표로 15만여 표(1.62%) 차이였다.

5대 대통령 선거당일 저녁, 선거 결과가 중개될 때, 초반전에는 "윤보선" 표가 많이 나왔다10.15일 선거 다음날인 10.16일 새벽 3시경까지만 해도 "윤보선"이 이기고 있었다그런데 마지막에 가서, 아슬아슬하게 "박정희"가 추격해서 이겼다. 이 뒤부터는 박정희가 개표할 때, "박정희" 표가 많이 나올 쪽을 먼저 하고, 야당 표가 많은 데는 나중에 했다는 말도 있다. "경남전남제주도"에서는 "박정희", "충남서울경기도강원도"에서는 "윤보선" 이겨서, "남북선거" 양상을 띠게 되었다 "서중석"은 이를 두고 "경북은 이때만 해도 몰표가 아니어서 박정희가 83만여 표였고, 윤보선 표도 54만 표나 나왔다. 충북도 그렇고, 두 지역은 여당 표가 많이 나오는 곳"이라고 지적했다.

선거가 끝난 직후, "윤보선"은 스스로 "나는 정신적 대통령"이라고 했다사상 논쟁은 얘기할 것이 없었고, "윤보선" 측에서는 막판에 개표 부정이 있지 않았겠느냐고 추측했지만 증거는 없었다"서중석" "그 당시 선거에서 공무원 가족, 경찰관을 포함해 관권에 의해 좌우되는 표를 10~20% 보고 었는데, 그것을 생각하면 윤보선이 정신적 대통령이라고 말한 것도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고 하였다.

윤보선 암살 미수 ?

대선 기간 중, "윤보선"은 암살 위협에 시달리기도 했다1967.05, "김형욱 (중앙정보부장)""방준모 (육군 중령)" 직접 불러 놓고, "이 선거가 아무래도 위험해. 백중지세야. 까닥하다간 지겠어. 박 대통령의 혁명과업 완수와 경제계획을 완수하려면 할 수 없소. 암살할 준비를 하시오"라고, "윤보선 암살"을 명령했다.

표 대결에서 "박정희"가 패배한다면, "윤보선을 총으로 저격한다"는 암살 명령이었다"방준모""김형욱"의 이 지시에 따라, 개표 날 "장총"을 든 저격수와 함께, "윤보선" 집 안방이 내려다보이는 "서울 종로구 덕성여고 2"에서 비밀리에 대기했으나, 실제 개표결과 "박정희"가 승리하는 바람에 그냥 철수하게 되었고, 후일 "방준모"의 이런 폭로는 책으로까지 출판됐지만, 국내 일간지에는 "윤보선에 대한 암살미수" 관련 기사가 1차례도 보도되지 않았다.

 안국동 사저 :  안동궁 (安東宮) ?

"서울 종로구 안국동"에 있는 "윤보선의 자택"은 대지 1,400평에 99칸의 거대한 한옥으로, 후에 100칸을 넘었다그의 "안국동 사저""한민당" 때부터, 정계 거물들이 출입하던 곳으로, 1948.09"윤보선"스로 자신의 "안국동 사저 별채""한국 민주당의 회합장소"로 제공한 이래, 계속 "한민당국당민주당"의 주요 회합 장소로 활용되었다. 그의 사저를 "이승만의 이화장김구의 경교장김규식의 삼청장박헌영의 혜화장" 비교하여, "안동궁(安東宮)"이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했다.

영국 에든버러 대학시절,  "고고학"을 택한 이유

"고고학"을 선택한 배경에 대해 그는 "인간으로서 내용을 충실히 하고, 인간의 도리를 깨우쳐주는 학문" "순수과학"을 할 생각이었으며, 그 가운데 "고고학"을 택했다고 한다"양반가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을 가졌던 "윤보선장택상""박정희"가 자신의 가계와 가난한 가정환경에 대한 열등감을 가진 것을 간파하고, 이를 경멸하였다.

 청와대 (靑瓦臺) 명칭 변경

1960.12.30, 대통령 재직 중, "경무대 (景武臺)""청와대 (靑瓦臺)"로 직접 이름을 개칭하기도 하였다.

 국립묘지 안장 거부

생전에 "국립묘지 안장 의견"에 대해, "독재자와 함께 누울 수 없다"고 반대했다고 한다1990.07.18, "서울 종로구 안국동 자택"에서 사망하였고, "가족장(家族葬)"으로 장례가 진행되었다"충남 아산시 음봉면 동천리 산 34-2"에 위치한 "가족묘" 5대조부모 묘 근처에 안장되었다.

 기념우표주화 거부각하 존칭 자제요청

역대 대통령 중, "취임기념 우표기념주화"가 없는 유일한 대통령이다대통령 취임 후, 각료에게 "각하"라는 명칭은 자제할 것을 부탁하기도 했다1960.08, 대통령 취임 후, "취임기념 우표발행" 건의가 들어왔으나, 살아있는 인물을 도안할 필요가 있느냐며 거절하였고, 자신의 얼굴이 도안된 기념주화 발행에 대한 건, 역시 거절하였다.

우표화폐에는 나라에서 기념할만한 인물을 넣는 것이 상식이라며, 반대의 이유를 밝혔다다만 1960.08.27, 1961.08.27일의 청와대에서의 "대통령 탄신일 기념행사(의전 행사)"는 수용하였다.

 우표 도안에 항의

1961.01.01일 신정 때, "선우종원(한국조폐공사 사장)"의 세배 방문을 받았다그러나 세배를 받은 후, "윤보선"은 우표 2장을 가져와서, 도안을 문제 삼았다"()"가 도안된 우표는 1961년은 "신축년"으로 "소의 해"였고, 색실로 꽃버선이 도안된 우표를 들고 와서, "()"을 내세워 ""씨인 자신을 모독하고, 버선을 인쇄해 "보선"이라는 이름을 놀리는 저의가 어디 있느냐며 항의하였다"선우종원"은 우표샘플을 올리는 방법절차과정을 상세히 설명해야 했다.

 형사들의 감시

"31구국선언민주화 운동단체 가입크리스찬 아카데미민주화이후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이 날조한 법살인으로 확인된 인혁당 사건YMCA 위장 결혼 사건" 등 민주화 운동에 참여지원하거나, 민주화운동 탄압에 연루되어 때문에, 그가 출석하던 "안동교회""중앙정보부"와 형사들의 감시사찰대상이 되었다.

"안동교회""윤치소(윤보선 부친)"이 설립하여, 헌당에 참여한 "예장통합 측 장로교회"이다. 자택"안동장" 앞에도 "중앙정보부"3층 높이의 초소를 세워두고, 집 출입자들을 감시하였다고 한다그는 이를 대단히 불쾌히 여기면서도, "박정희"가 죽고 난 뒤에도, 이를 철거하지 않고 그대로 보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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