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비안 리 (Vivien Leighㆍ1913~1967ㆍ54세ㆍ160cm)"는 영원한 "스칼렛 오하라"ㆍ아카데미 여우주연상(2회) 수상할 만큼, 미모ㆍ연기력을 동시에 소유한 배우였다. 허리 사이즈가 "19inch"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과격하게 코르셋을 조인 상태의 사이즈이고, 실제 허리 사이즈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촬영할 당시, "23inch"였다.
1. 비비안 리 (Vivien Leighㆍ1913~1967ㆍ향년 54세ㆍ160cmㆍ1935~1967 활동)
1939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 역을 매력적으로 소화하며 일약 세계적인 배우가 되었고, 1951년, "말론 브란도"와 함께 출연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명연기를 선보였다. "외모"에만 집착하는 팬ㆍ언론으로 인해, "폐렴ㆍ우울증ㆍ조울증"으로 건강이 좋지 못했고, 불행했다.
• 대표작 :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1939)ㆍ애수 (1940)ㆍ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1951)
• 본 명 : 비비언 메리 하틀리 (Vivian Mary Hartly) • 출 생 : 영국령 인도제국 웨스트벵골 다질링 • 사 망 : 영국 런던 • 자 녀 : 1녀 • 배우자 : 1932~1940 (8년): 허버트 리 홀만 (1900ㆍ13년 연상ㆍ변호사ㆍ박사) / 1940~1960 (20년): 로렌스 올리비에 (1907ㆍ 6년 연상ㆍ영국 최고배우)
부유한 집안에서 외동딸로 자랐고, 덕분에 좋은 교육을 받았다. 어린 시절부터 "바이올린ㆍ피아노ㆍ첼로" 등도 배워서 어느 정도는 다룰 줄 알았으며, "무용"도 어느 정도는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인도"에서 5세때 "영국"으로 귀국했고, 이후 "가톨릭 미션스쿨"을 다니다가 10대 초반부터 18세 때까지 아버지가 유럽 여행을 데리고 다니면서 학교를 몇 번씩 전학을 다녔다고 한다. "영국"으로 돌아온 후, "웨스트엔드"의 연극 공연을 보고 배우가 될 결심을 하게 되고, "런던 왕립 연극학교"에서 본격적으로 연기를 배우기 시작한다.
이즈음 13살 연상의 귀족인 "허버트 리 홀먼"과 1번째 결혼을 하게 되는데, 보수적이었던 남편은 그녀의 배우 활동을 좋아하지 않았고, 때문에 그녀는 다니던 학교도 그만둬야 했다. 20세, 1번째 아이를 출산하고 자신과 맞지 않는 가정주부 생활로 인해, 우울증에 시달리던 그녀는, 친구들의 독려로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하게 되고, 곧 자신의 에이전트를 만나게 된다. 이후 연극 무대에 데뷔한 그녀는 첫 무대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찬사를 받는다.
그러나 이 경험은 그녀에게 좋은 기억이 아니라 나쁜 기억으로도 남게 되는데, 갑작스럽게 너무 큰 찬사를 받아서 연기에 대한 엄청난 부담감을 얻게 된 것이다. 영화배우로서 성공한 이후, 그녀의 "조울증"은 오히려 점점 심해지게 되는데, 1번째로 "스타"가 되기보다는 "배우"로 기억되고 싶었으나, 대중들은 점점 그녀를 스타로만 인식하기 시작했고, 주위 사람들의 외모에 대한 과한 집중까지 겹쳐지면서, 더더욱 자신의 연기에 대한 자신감을 잃게 된다.
전설의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 역으로 유명한데 원래 배우를 다 뽑아놓고 촬영 준비 단계였으나, 유일하게 "스칼렛" 역만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녀를 본 캐스팅 관계자로 인해 막판에 최종 선발되었다고 한다. 사실 이 경우는 정말로 외모가 도와준 상황인데, 원래는 "폴렛 고더드(Paulette Goddardㆍ1910)"가 "스칼렛" 역으로 거의 낙점 상태였으나, "찰리 채플린의 아내"라는 점과 "비비안의 등장"으로 캐스팅이 무산되었다. "폴렛 고더드"는 원래 코메디 연기로 유명했지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연기 변신을 할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스칼렛" 역에서 좌절된 이후, "채플린ㆍ고더드"의 사이는 악화되기 시작했고, 1939년 "위대한 독재자" 촬영시에는 이미 별거 중인 상태였다고 한다. 결국 둘은 1940년 "위대한 독재자" 개봉 직후 이혼했다.
1951년, 그녀는 당시 할리우드에서 주목받기 시작하던 루키인 "말론 브란도"와 영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출연하면서, 다시 세계를 대표하는 여배우라는 것을 입증했다. 이 영화는 "브로드웨이"에서 극찬을 받은 "테네시 윌리엄스"의 연극이 원작인 영화로서, 그녀를 제외한 모든 배우들이 원작 연극의 출연자들이었다. "브로드웨이 판 블랑쉐 두보아(여주인공)"을 맡았던 여배우가 유명세ㆍ외모가 역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짤리고, "비비안 리"가 캐스팅되자 다른 출연자들과 감독의 반발이 매우 심했으나, 유일하게 "말론 브란도"만 좋아했다고 한다.
이유는 그녀가 섹시해서였다고 한다. 영화 촬영 중 "비비안 리ㆍ말론 브란도"는 절친이 되었다. 처음 촬영할 시기, 캐스팅 문제도 있고, 자신들과 다른 타입의 연기를 하는 "비비안 리"에 대한 다른 배우들의 견제가 심했지만, 점차 그녀의 엄청난 노력으로 그녀를 인정하게 된다. 영화를 보면, 영화에서 메소드 연기를 하지 않고, 전통적인 연극 배우식 연기를 하는 연기자는 그녀 뿐이다. 영화에서의 열연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2번째로 수상하지만, 배역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그녀의 "조울증"이 악화되고 만다. 영화 전의 연극에서도 "블랑쉐 두보아" 역을 맡았는데, 영화 촬영 기간까지 합치면 무려 9개월 간 "정신 이상자" 역을 연기한 것이다. 그녀도 "블랑쉐 두보아" 역할이 자신을 미치게 만들었다고 인정했다.
2. 발 작
한 번 발작을 시작하면,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던지며, 이를 말리는 "올리비에"를 폭행하는 등의 과격한 행동을 하다가, 마지막에는 바닥에 쓰러져 울다 기절했다고 한다. 깨어난 뒤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을 하지 못했다고 하며, 나중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된 후엔 매우 부끄러워 했다고 한다. 이런 증세가 심해지자, 결국 그녀는 연극 투어 대부분에서 중도 하차ㆍ복귀를 반복했다.
"발작"이 가장 심했던 "호주 투어" 6개월 동안 그녀는 "불면증"으로 고생하였고 부부 싸움도 잦았다. 결국, 그녀는 호주 배우와 바람을 피우기까지 한다. 이때 바람피운 상대가 한참 후에 "네트워크"라는 영화로, 사후에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피터 핀치(1916ㆍ3살 연하)"였는데, "피터"는 "올리비에"가 발탁한 인재였다. 둘은 호주를 떠나기 위해 공항까지 왔는데, 비행기가 연착하는 사이, 따라잡은 "올리비에"가 그녀를 설득해서 다시 데려왔다고 한다. 훗날 "올리비에"의 회고에 의하면, "호주에서 비비안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 스캔들이 얼마나 유명해졌는지, 후에 이를 모티브로 한 "엘리자베스 테일러ㆍ리처드 버튼" 주연의 "V.I.P"란 영화가 만들어졌을 정도였다.
3. 사 망
그녀는 평소에 "폐렴 증세"가 있었는데, 끔찍이 사랑했던 "올리비에"와 이혼하고 난 후, "폐렴"에 "우울증"까지 겹쳐서 그녀의 삶은 매우 황폐화되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다시 연극무대에 출연하면서 삶의 보람을 찾을려 했지만, 천성적으로 몸이 매우 허약하여 연극출연으로 인한 지나친 혹사로 그녀의 몸은 더욱 쇠약해져만 갔다.
"올리비에"와 이혼 후, "스트레스성 정신착란"을 자주 일으켰으며, 외로움을 잊기 위해 지나친 음주ㆍ과도한 흡연으로 그녀의 몸은 더욱 피폐해져만 갔다. 결국 그녀는 1967년 자신의 아파트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는데, 사인은 "폐결핵"이었으며, 그녀의 입에는 피를 머금고 있었고, 숨진 그녀의 손에는 "로렌스 올리비에"의 사진이 들려져 있었다고 한다. "비비안 리"가 가장 사랑했던 남자는 바로 "로렌스 올리비에"였다는 것이 손에 쥔 사진에서 증명되었다.
"폐결핵"에 걸리게 된 사유는 흡연으로, 하루에 담배를 3갑 이상을 피울 정도로 지독한 골초였다고 한다. "세기적인 미인"으로 만인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그녀는 죽을 때, 아무도 지켜봐 주는 이 없이 고독하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폐결핵"이라는 병에 걸려 병석에 누웠던 그녀는 죽기 전, 지인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로렌스 올리비에 없이 장수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로렌스 올리비에와 함께 짧게 살다가 죽는 편이 났다"
사망 당시, "존 멜리발"이라는 배우와 동거 중이었는데, 그는 "비비안 리"의 죽음을 확인 후, 곧바로 "올리비에"에게 연락했고, 집에 도착한 "올리비에"는 한동안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한다. "올리비에"는 그녀의 장례식을 실질적으로 준비했고, 그녀의 장례식에는 생전의 배우자 3명(허버트 리 홀만 박사ㆍ로렌스 올리비에 경ㆍ존 멜리발"이 함께 했다. "올리비에"의 후처 "조앤 플로라이트(코메디 전문 연기자ㆍ1929ㆍ22살 연하)"의 인터뷰에 의하면, 그녀가 죽은 뒤 "올리비에"는 한밤중에 그녀의 영화를 돌려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고 한다.
말년에 그녀가 영화 출연을 하지 못하고, 잊혀져 간 것을 슬퍼했다는 설이 널리 알려져 있는데,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비비안 리"는 스타가 되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배우로서만 인정받기를 원했다. 본인도 연극배우로서 성공하는 것을 더욱 큰 업적으로 생각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대스타가 된 후, 25년의 세월 동안 찍은 영화는 불과 8편 뿐이다. 영화ㆍ연극 중 어느 걸 더 중시했는지에 대한 방증이다. 말년에 "우울증"이 심해진 것도 "건강 악화"로 인해, 연극에 자주 설 수 없어서이다.
4. 만남ㆍ결혼 : 1940~1960 (20년): 로렌스 올리비에 (1907ㆍ6년 연상ㆍ영국 배우)
"비비안 리"는 평생을 "우울증ㆍ조울증ㆍ폐병" 등의 여러가지 질병에 엄청나게 시달렸고, 그로 인한 그녀의 과도한 히스테리ㆍ발작 등으로 인해서 "로렌스 올리비에"로부터 버림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 그녀가 평생을 사랑했던 남편 "로렌스 올리비에"와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었지만, 남편 "로렌스 올리비에"에게 필요 이상으로 집착하고 질투하는 바람에, 남편과의 관계에서도 금이 가고, 금슬이 깨지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겉으로 보여지는 예쁘고 고운 이미지와는 달리, 상당히 아집이 세며, 야심이 강한 성격이었으며, 자신이 맘먹은 것은 반드시 이뤄내야 직성이 풀리는 강한 "아집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그녀의 성격은 "올리비에"에 대한 지나친 집착으로 이어졌으며, 한때 끈끈한 애정을 나누었던 남편 "올리비에"와의 사랑 전선에 마찰과 갈등을 몰고 오게 된 것이다. "올리비에"는 그녀의 지나친 집착ㆍ아집에 점점 지쳐갔고, 그녀가 움켜잡고 있던 올가미에서 벗어나길 원했으며, 이것이 "올리비에"의 외도로 이어졌으며, 결국 그녀에게 이혼을 요구하게 되었다.
한때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금슬이 좋았던 두 사람은 1960년에 이혼하고 만다. 그녀의 연극 첫 데뷔 무대를 본 "올리비에"가 "비비안"에게 다가가고, 둘은 곧 불륜 상대가 된다. "올리비에"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유부녀인 상태였고, "올리비에"도 처자식이 있는 유부남이었는데, 원래는 둘 모두 배우자와 이혼하려 했지만, 양쪽의 상대들이 모두 이혼에 반대하는 바람에 불륜이 되고 만 것이다. 1940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개봉 후, 드디어 "비비안 리ㆍ로렌스 올리비에"는 각각의 파트너와 이혼하고 결혼한다. 결혼 후 부터는 영화보다는 "올리비에"가 연출하거나 출연하는 연극에 함께 출연하게 되는데, 대다수가 그런 건 아니었지만 그녀가 스타가 된 후, 평론가들이 그녀가 유명해지기 전부터 찬사를 받던 배우인 "올리비에"를 칭송하면서 "비비안은 영화 배우이지, 연극 배우가 아니다ㆍ올리비에가 잘 연출해놓은 걸 그녀가 망쳤다ㆍ비비안이 옥의 티였다"라는 식의 인신공격성 혹평을 계속해서 내놓는다.
완벽주의자였던 그녀는 소수의 평에도 심한 상처를 입었고, 아무리 좋은 연극평이 나와도 나쁜 평에만 집착하는 습관을 가지게 된다. 이후 "올리비에"와 함께 영화에 출연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지만, 한쪽이 캐스팅되면 한쪽은 실패하는 식으로 계속해서 결렬된다. 설상가상으로 평소 그녀의 건강 상태가 안 좋았던 탓에 부부의 2세를 계속 유산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그녀의 "조울증"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어, 결국 "발작 증세"까지 일으키게 된다. 특히, 영화 "시저와 클레오파트라" 촬영 중, 아이를 유산했을 때 크게 낙심했다고 한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출연한 시절까지도 함께 연극 활동을 하던 "비비안 리ㆍ로렌스 올리비에"는 결국 1958년에 별거에 들어가고, 1960년에 이혼했다. 이혼 후에도 서로를 그리워했지만, 이미 다른 사람과 사는 관계로 더 이상의 관계로는 이어지지 못했다. 이후 "올리비에"가 재혼한 상대는 미인이라고 할 수 없는 "조앤 플로라이트(코메디 전문 연기자ㆍ1929ㆍ22살 연하)"였다.
5. 섹시 심볼인 "마릴린 먼로(1926년 생ㆍ13살 연하)"와 한때 연적관계
"비비안 리"는 과거에 갖고 있던 "불륜의 핸디캡(유부남을 유혹해서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었던 부도덕한 과거)"로 인해서 똑같은 일이 "마릴린 먼로"에게서 되풀이 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이러한 간섭은 "남편 로렌스 올리비에"에 대한 "비비안 리"의 지나친 집착 때문이었다. 1957년, "비비안 리ㆍ로렌스 올리비에"는 "왕자와 무희"라는 연극에 함께 출연해서 인기를 끌었었는데 이 연극이 흥행성이 좋다고 판단되어, "왕자와 무희"를 영화로 제작하기로 하였는데, 연극에서 함께 출연한 경력이 있었던 그녀는 영화에 함께 출연하기로 내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실제 영화 촬영이 시작되자, "남편 로렌스 올리비에"의 상대역이 그녀에서 "마릴린 먼로"로 바뀌게 된 것이다. 자신이 남편과 함께 출연하기로 믿고 있었던 "비비안 리"가 주연 자리를 "마릴린 먼로"에게 빼앗기자 "질투심"이 아니라, "의부증"을 갖고 있었다. 당시, "비비안 리"는 "로렌스 올리비에"가 촬영하는 날에는 항상 촬영장에 따라왔다고 하는데, "마릴린 먼로"와의 애정씬을 연기할 때면, "비비안 리"가 연기에 끼어들어 화를 내면서, 두 사람의 관계를 의심하면서 영화촬영을 수시로 방해했다고 한다.
당시 "비비안 리"는 단순히 남편의 영화 촬영을 구경하러 온 것이 아니라, 당시 뭇남성들에게 섹시한 매력으로 인기를 끌던 "마릴린 먼로"가 혹시 "남편 올리비에"를 유혹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와 의심 때문에 촬영장에 자주 나왔다고 한다. 이러한 "비비안 리"의 지나친 간섭ㆍ집착 때문에, "영화 왕자와 무희"는 촬영에 많은 방해를 받았으며, 촬영장에 찾아온 "비비안 리"는 "마릴린 먼로"로부터 "당신은 연기자로서, 프로의식이 전혀 없다"는 매우 모욕적인 말을 듣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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