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안토니우스 (Marcus AntoniusㆍBC 83~30ㆍ53세)"는 "로마 공화정" 시대의 정치가ㆍ군인ㆍ제2차 삼두정치의 1인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 (시저ㆍ케사르ㆍBC 100~44ㆍ56세)"의 충실한 부하로, "카이사르 군대" 지휘관ㆍ행정가였다.
1.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Marcus AntoniusㆍBC 83~30ㆍ향년 53세)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충실한 부하로, "카이사르 군대 지휘관ㆍ행정가"였고, "카이사르"의 사후, "옥타비아누스ㆍ레피두스"와 함께 "제2차 삼두정치"를 하였다. "제2차 삼두정치"는 BC 33년에 깨지고, "안토니우스ㆍ옥타비아누스"는 불화를 일으켜서, 두 진영 사이는 "내전"에 돌입한다. 두 진영이 맞붙은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 군대"에 대패하였고, 이어 "알렉산드리아"에서도 졌다. BC 30년, "안토니우스"는 자살하고, 연인이자, 함께 "옥타비아누스"에 대항한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7세"도 자살했다.
• BC 41~30년까지, 만날 당시, 클레오파트라(28세)ㆍ안토니우스 (42세) • 부부 관계ㆍ클레오파트라와 14살 차 • 아들(2):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ㆍ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푸스 / 딸(1):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
"카이사르"의 사후, "옥타비아누스ㆍ레피두스"와 함께 "제2차 삼두정치"를 하였다. "제2차 삼두정치"는 B.C 33년 깨지고, "안토니우스ㆍ옥타비아누스"는 불화를 일으켜서, 두 진영사이는 내전에 돌입했으며, 두 진영이 맞붙은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의 군대에 대패하였고, 이어서 "알렉산드리아"에서도 졌다. B.C 30년 "안토니우스"는 자살하고, 그의 연인이자 함께 "옥타비아누스"에 대항한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7세"도 자살했다.
① 제1차 삼두정치 (BC 60~53)
• 카이사르 (CaesarㆍBC 100ㆍ장군ㆍ로마 공화정이 제정으로 변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 • 폼페이우스 (PompeiusㆍBC 106ㆍ장군ㆍ카이사르의 사위ㆍ공화정 말, 원로원 파(귀족 파) 지도자ㆍ술라의 부관이자 손녀사위ㆍ카이사르와 패전 후, 이집트에서 사망) • 크라수스 (CrassusㆍBC 115ㆍ군인ㆍ로마 역사상 최대 부호ㆍ파르티아와 전쟁 중, 대패 후 사망)
④ 제2차 삼두정치 (BC 43~30)ㆍ암살 이후ㆍ악티움 해전 (BC 31)
• 옥타비아누스 (OctavianuㆍBC 63ㆍ아우구스투스ㆍ최초 황제ㆍ악티움 (32세)ㆍ카이사르 양자) • 안토니우스 (AntoniusㆍBC 115ㆍ장군ㆍ카이사르 오른팔ㆍ클레오파트라 남편ㆍ자살) • 레피두스 (LepidusㆍBC ? ㆍ장군ㆍ독재관 카이사르의 기병대장 출신ㆍ시칠리아를 얻으려고 옥타비아누스와 대립ㆍ정권을 잃고, 정계 은퇴)
2. 연 표
BC 83 : "로마"에서 출생 → BC 54/50 : "카이사르"의 부하로 "갈리아 원정" 참가 → BC 50 : 호민관 (BC 494 처음 도입ㆍ2~ 10명ㆍ오직 평민 계급에서만 선출ㆍ평민들의 요구를 대변)
BC 47 : 이탈리아에서 혹독한 정치로 정치적으로 소외당함 → BC 44 : 1번째 "집정관" 직 (카이사르와 공동 집정관) → BC 43 : "카이사르"의 사후, "옥타비아누스ㆍ레피두스"와 함께, "제2차 삼두정치" 결성 → BC 42 : "카시우스ㆍ브루투스(공화주의자ㆍ카이사르 암살범)"을 "필리피 전투"에서 섬멸
BC 41 : "클레오파트라"와 만남 → BC 40 : "로마"로 귀환ㆍ"옥타비아(옥타비아누스 누나)"와 결혼ㆍ"옥타비아누스"와 협정 → BC 38 : "타렌툼 협정"으로, "제2차 삼두정치" 기한 연장 → BC 36 : "파르티아"에 패배 → BC 35 : "아르메이나 왕국" 정복 → BC 34 : "알렉산드리아"에서 개선식 거행
BC 33 : "제2차 삼두정치" 종결 → BC 32 : "옥타비아누스"와 비난전ㆍ선전전 → BC 31 : "악티움 해전"에서 패배 → BC 30 : "클레오파트라"가 죽은 것으로 알고, 자살
3. 생 애
BC 83년경, "로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이름은 모두 그와 같은 이름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인데, 할아버지는 당대의 유명한 웅변가로, BC 86년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로마"로 복귀했을 때, 그의 지지자들에 의해 처형당했다. 그의 어머니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먼 친척벌인 "율리아 안토니아"였다. "안토니우스"의 아버지가 죽자, 어린 "안토니우스"와 그의 형제들은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는데 "로마"의 거리를 쏘다니며, 방탕한 시절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
"로마"에서 "안토니우스"는 엄청난 빚을 지고, 도망하듯 "그리스"로 건너가, "수사학"을 공부했다. "아테네"에서 잠시 "철학"을 공부하다가, BC 57년경 "시리아"의 전직 집정관 "아울루스 가비니우스"가 소집한 군대에 들어가, 그의 휘하에서 "유대와 이집트"에서 "기병대 장교"로 복무하였다. "기병대 지휘관"으로서 그는 용맹하고, 대담한 군사적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고, 이 원정길에 "알렉산드리아"에 처음으로 갔다.
① 율리우스 카이사르ㆍ갈리아(프랑스) 원정
BC 54년경, "안토니우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휘하의 "기병대 지휘관"으로서 "갈리아"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탁월한 군사적 재능과 지휘력으로,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의 후반에 큰 도움이 되었으나, 개인적으로 방탕하고, 분방한 성품 때문에, 종종 "카이사르"를 짜증나게 했다. "카이사르"의 호의로 그는 "원로원"에 들어갔으나, 보수적인 "원로원"과 "카이사르"의 사이가 점점 나빠지자, "원로원"에서 추방당해, "카이사르 진영"에 합류하고,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널 때 함께 했으며, 이어 벌어진 "카이사르의 내전"에서, 그는 "카이사르의 오른팔"로 "좌익 기병대"를 지휘하며, "폼페이우스의 군대"에 맞서 싸웠고, 전과를 올렸다.
BC 47년경, "카이사르"가 "독재관"에 취임하고, "아프리카"에서 "폼페이우스"의 잔당을 축출하는 동안 "이탈리아 반도"의 통치를 맡았으나, "키케로"가 지적한 대로 낭비가 너무 심한 행정 때문에, 시민들의 반감을 사고, 결국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다. 이때 "카이사르ㆍ안토니우스"는 2년간 전혀 왕래 없이 지내다가, BC 44년 "카이사르"의 5번째 "집정관" 임기 때, "동료 집정관 직"에 올랐다. 같은 해 03.15일, "카이사르"는 왕위를 노린다는 협의로, "원로원"에서 암살당하고, 그 혼란 중에 "안토니우스"는 노예로 변장하고, "로마"를 탈출하였다. 곧 "로마"로 돌아와, 그는 "카이사르"를 변호하여, 그의 암살의 부당함을 로마 시민에 설득시키고, 여론을 반전시켰다.
6월, 그는 "카이사르 군대"에 힘입어, "카실피나 갈리아 속주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키케로"는 끈질지게 그에 대해 비난했으며, 이에 힘입어 BC 43년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군권을 주고, 그해의 "집정관 2명"과 함께 "안토니우스"를 공격하게 했다. 4월, "안토니우스"는 "포룸 갈로룸ㆍ무티나"에서 패하고, "갈리아 나르보넨시스"로 퇴각했다. 2명의 "집정관"은 죽고, "옥타비아누스"가 혼자 권력을 차지하자, "원로원"은 "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 "집정관 직"을 수여했으나, "옥타비아누스"는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군해, "집정관"에 취임했다. 그동안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파"인 "레피두스"와 합세하여 세력을 불렸다.
② 제2차 삼두정치
"원로원 공화파"인 "브루투스ㆍ카시우스"가 "그리스"에서 "반 카이사르 파"를 규합해, 군대를 조직하자 BC 43.11월초, "옥타비아누스"는 "보노니아"에서 "안토니우스ㆍ레피두스"를 만났으며, 3명은 공식적으로 "5년 기한의 독재통치 협정"을 맺어, "제2차 삼두정치"를 수립했다. 이듬해 10월, "마케도니아"에서 벌어진 2번의 "필리피 전투"에서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파 군대"를 승리로 이끌었고, "브루투스ㆍ카시우스"는 패하여 자살했다.
이로써 "카이사르 파"에 반대하는 "공화파"가 모두 제거되자, "제2차 삼두정치"는 새로운 국면으로 돌입하였고, "옥타비아누스"는 "로마"로 돌아가고, "안토니우스"는 "이집트ㆍ동방의 속주"를, "레피두스"는 "히스파니아ㆍ아프리카 속주"를 각각 맡아, 통치하기로 하였다
BC 41,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통치구역인 "동방 속주(아프리카ㆍ중동)"을 둘러보면서, "이집트 클레오파트라 7세(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여왕)"을 "타르수스(Tarsusㆍ터키의 중남부(소아시아 지방 도시)ㆍ지드누스 강변에 있는 고대 도시ㆍ사도 바울의 고향)"로 불러, 그녀의 "반란혐의(카이사르 피살 반란군을 후원한 혐의)"를 조사하고자 호출하였으나, 한 눈에 반해, 이후 BC 41년~ 40년의 겨울을 "알렉산드리아"에서 함께 지냈다.
한편, "로마"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불만을 품은 "안토니우스"의 3번째 부인 "풀비아"가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안토니우스의 동생)"과 함께, 독자적으로 "옥타비아누스"에 대한 반란을 주동하고, "로마"를 잠시 장악했다가 실패하고, "페르시아"로 퇴각하는 일이 벌어졌고, 그 와중에 "풀비아"가 죽었다. 또한 "안토니우스"가 담당한 "동방 지역"에서는 "로마"의 전통적인 적대국인 "파르티아"가 "로마"의 영토인 "시리아"를 침공하는 일이 벌어졌다.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의 침공에도 불구하고, 먼저 "이탈리아"로 가서, "옥타비아누스"와 화해하고 "옥타비아(옥타비아누스의 여동생)"과 결혼했다. 이후 두 사람은 "동방 정책"에 대해 합의했는데, "헤로데"를 원조하여, "유대"를 다시 찾고, "헤로데"를 "왕"으로 세우기로 하였다. 또한 "시칠리아"를 중심으로, "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해적질을 하던 "섹스투스 폼페이우스(폼페이우스의 아들)"과 잠시나마 휴전을 하였다.
이 휴전을 하면서 두 사람은 다시 사이가 나빠졌다. BC 38년, "타렌툼"에서 "삼두정치를 5년 더 연장하기"로 하고,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의 동방원정에 군대를 보내겠다."고 합의했다.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 문제"에 대한 "옥타비아누스"의 지원을 점점 더 의심하게 되었다. 두 사람 사이는 점점 더 벌어져, "안토니우스"는 임신한 "옥타비아"를 이탈리아로 돌려보내고,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와 손잡았다.
③ 클레오파트라와 만남ㆍ죽음
현실적으로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옛 영토를 되찾기 위해, "안토니우스의 군대"가 필요했고,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입지 강화ㆍ"파르티아 원정"에 필요한 자금ㆍ보급품의 지원에 "이집트"가 필요했다. BC 37년,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의 지원으로 "예루살렘ㆍ유대"를 회복하고, "헤로데"를 "왕"으로 세우고, 이어 다음해 "시리아ㆍ파르티아"로 진군해 들어갔으나, 대패하고 물러났다. 이 무렵, "로마"에서는 "레피두스"는 실패한 정치로 실각하고, "옥타비아누스"는 과거 "공화파 귀족"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권력을 강화하고, "안토니우스"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는데, 정숙한 로마인 부인을 버리고, "난잡한 이집트의 여왕"과 놀아나, "로마의 명예를 실추시켰다"고 비난했다. "안토니우스"는 기소되어 몇 차례 "로마"로 소환 당했으나, "알렉산드리아"에 머물면서, 응하지 않았다.
BC 35년, "안토니우스"는 다시 한번 "이집트 지원"으로 "아르메니아 공략"에 성공했다. 원정에서 돌아와, "안토니우스"는 BC 34년 "알렉산드리아"에서 성대한 개선식을 거행했는데, 이것은 "전통적인 로마 개선식"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여져, "로마인"의 반감을 샀다. "개선식 직후" 그는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의 "왕 중의 여왕"으로, "카이사리온"을 이집트의 "왕 중 왕"으로 선포하고, 그와 "클레오파트라" 사이에서 태어난 2명의 아들과 1명의 딸에게도 "아르메니아와 파르티아"(파르티아는 단 1번도 로마에 정복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의 왕ㆍ시리아와 리비아의 왕"등 거창한 제왕의 칭호를 붙였다.
특히 "카이사르ㆍ클레오파트라의 아들"이라고 여겨지던 "카이사리온(프톨레마이오스 15세 카이사르)"은 "카이사르의 적법한 후계자"로 공표되었다. 이러한 "안토니우스"의 발표는 "옥타비아누스"는 물론 "로마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후 2년간 "안토니우스ㆍ옥타비아누스"는 서로에 대한 엄청난 비난과 선전전을 벌였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의 양자임"을 위조하고, 적법한 후계자가 아님에도 "권력을 찬탈한 자"라고 주장했고,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불법으로 속주를 차지하고, "원로원"을 무시하고, 외국과의 전쟁에 들어갔으며, 영토를 "이집트"의 자기 자식들에게 팔아넘겼다고 주장했다. 이제 두 진영사이의 "내전"은 피할 수 없었다. BC 32년, "원로원"은 "안토니우스"를 해임하고, "클레오파트라"에게 선전포고를 했고, "안토니우스"편인 그해의 "집정관 2명"과 "원로원 의원"의 1/3이 "그리스"에 있는 "안토니우스 진영"으로 넘어갔다.
BC 31년 드디어 "내전"이 시작되었다. "안토니우스"는 "에페수스ㆍ아테네ㆍ파트라스"에 잇달아 전선을 구축하고, "암브라키아 만"에서 주력함대를 지휘했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ㆍ장군 아그리파"는 "이탈리아"에서 "이오니아 해"를 건너는 상륙작전에 성공했고, "안토니우스"의 주요 방어지점을 차례로 점령했다. "안토니우스" 진영은 점차 분열되었고, 드디어 09.02일 벌어진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ㆍ클레오파트라"의 해군은 괴멸당하고, 두 사람은 남은 배를 끌고, "이집트"로 도망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유일한 권력에 한걸음 더 다가가게 되었고, BC 30.08.01일 "아그리파의 부대"가 "이집트"에 상륙했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죽었다"고 믿고, 패배의 절망 속에서 자살했다. 며칠 후, "클레오파트라"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카이사리온"은 살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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