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우스 카이사르 (시저ㆍ케사르ㆍBC 100~44ㆍ56세)"는 "아우구스투스 (BC63~ AD14ㆍ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ㆍ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BC27~AD14)"를 양자로 삼는다. BC 44년, 옥타비아누스의 외할머니 "율리아 카이사리스"의 남동생이자 자신의 외종조부 뻘인 "카이사르"가 암살되자, 유언장에 따라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었다.
1. 유언장 작성 : 옥타비아누스 (조카 손자)
BC 45.09월, "카이사르"는 "이탈리아"로 돌아오면서 미리 유언장을 썼는데, 조카 손자(조카의 아들)인 "옥타비아누스"를 이미 자신의 유일한 후계자로 정해두었으며, "카이사르"라는 막대한 권위를 지닌 자신의 이름을 비롯하여, 모든 것을 상속한다고 썼다. "옥타비아누스"는 위대한 "카이사르의 아들"이 되었으며, 그리하여 로마 대중 상당수의 충성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유증"을 통해, 그에게 유산의 2/3을 지급하였다.
하지만, 유서에는 "포로로마노"의 시민들에게 자신의 재산에서 1명당 "300 세르테르티우스"를 지급하라는 내용도 있었기 때문에, 유산의 2/3은 그리 많지 않은 돈이었다. ("300 세스테르티우스"는 매우 큰 액수는 아니었으나, 로마 노동자들의 평균 3달치 급료에 해당하는 돈으로 상당히 좋은 선물이었다)
이어 "데키무스 브루투스ㆍ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유언의 공동 집행자"로 지명했다. "카이사르"는 또 자신이 죽기 전에 "옥타비아누스"가 죽는다면,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알비누스"가 다음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적었다. "카이사르"의 사후 공개된 유언장에서 자신이 제2의 상속자인 것을 알게 된 후 "브루투스"는 얼굴이 흙빛이 되어 침묵에 잠겼다고 한다.
2. 첫 "집정관" 재직ㆍ3두 정치ㆍ내전 (루비콘 강)
① 제1차 삼두정치 (BC 60~53)
• 카이사르 (CaesarㆍBC 100ㆍ장군ㆍ로마 공화정이 제정으로 변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 • 폼페이우스 (PompeiusㆍBC 106ㆍ장군ㆍ카이사르의 사위ㆍ공화정 말, 원로원 파(귀족 파) 지도자ㆍ술라의 부관이자 손녀사위ㆍ카이사르와 패전 후, 이집트에서 사망) • 크라수스 (CrassusㆍBC 115ㆍ군인ㆍ로마 역사상 최대 부호ㆍ파르티아와 전쟁 중, 대패 후 사망)
※ 술라 (SullaㆍFelixㆍBC 138~78)
로마 역사상 최초의 전면적인 내전(BC 88~82)에 승리했으며, 뒤이어 "딕타토르(독재관)"를 지내면서(BC 82~79) 로마 공화정의 마지막 세기에 공화정을 강화하기 위한 헌정 개혁을 실시했다. BC 82년 말, 자신이 행운아라고 믿는 마음에서 "펠릭스"라는 이름을 썼다. BC 94년 프라이토르(법무관)가 되어, 동맹시 전쟁에 참전했으며(BC 90~89), BC 88년 공화정 최고의 직책인 2인 콘술(집정관)의 한 사람이 되었고, 소아시아에서 폰투스 왕 미트라다테스 6세와 벌인 전쟁의 지휘관을 맡았다. 내전 후, "술라"는 "발레리아 법"에 따라 "딕타토르(독재관)"로 임명되었는데, 이 법령은 그에게 정치체제ㆍ입법ㆍ군사ㆍ사법에 관한 전권을 부여했으며, 로마 역사상 최초로 "딕타토르"의 임기에 관해 제한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술라"는 공화정 개혁을 완료하고, 물러났다.
② 갈리아 (프랑스) 정복ㆍ갈리아 전 쟁(Bellum Gallicum)
BC 58~51년(8년 전쟁), "로마 공화정"과 "갈리아 부족" 간의 전쟁이다. "갈리아 전쟁"에 대한 사료는 "갈리아 전쟁기(카이사르의 저작)"에 남아 있다.
③ 내전 : 폼페이우스와의 전쟁ㆍ루비콘 강
BC 50년, "폼페이우스"가 주도하는 "원로원"에서는 "카이사르"에게 전임 "집정관" 임기가 만료되었으므로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로 귀환하도록 명령하였다. 또 "원로원"은 "카이사르"가 2번째로 출마하려는 "집정관" 선거에 부재중, 입후보를 금지하였다. "카이사르"는 "집정관"의 면책권이 없거나, 군사력이 없는 상태로 "로마"에 들어간다면, 기소되고 정계에서 밀려나리라고 생각하였다. BC 49.01.07일, "집정관 가이우스 마르켈루스"는 "원로원 최종권고"를 발동시켰고, 그 전권을 위임받은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를 "불복종ㆍ대역죄" 혐의로 고발하였다. BC 49.01.12일, 카이사르는 단 "1개 군단"만 이끌고, "루비콘 강(이탈리아의 북방 경계선)"을 넘어 내전의 도화선에 불을 당겼다.
BC 48.08.09일, 파르살루스 전투 : 카이사르ㆍ폼페이우스의 최종 결전
"파르살루스 전투"는 카이사르의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로마의 권력다툼"에서 밀려난 "폼페이우스"가 "이집트"로 도망쳐오자, 겁먹은 "이집트"의 어린 왕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포티누스(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내시)"는 "폼페이우스"의 목을 잘라, 선물로 "카이사르"에게 받쳤는데, 그는 "폼페이우스"의 머리를 보고, 울었다고 한다. 이때 "카이사르"는 당시 "알렉산드레이아"에서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클레오파트라 7세(누이ㆍ부인ㆍ공동 국왕)" 사이의 "권력 투쟁"에 개입하게 되었다. (아마 "프톨레마이오스"가 "폼페이우스"를 죽이는 데 관여한 탓에, 그는 "클레오파트라 편"에 선 것 같다.)
BC 47년, "카이사르"는 "나일강 전투"에서 "프톨레마이오스 군"을 무찌르고, "클레오파트라"를 10살이나 어린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결혼시키고,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의 지배자"로 삼았다. BC 47년 초, 몇 달간을 "이집트"에서 지낸 카이사르는 "중동 지역"으로 가서, "젤라 전투"에서 "폰토스 왕 파르나케스 2세"를 절멸시켰는데, 너무나 빨리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과거 "폼페이우스"가 이런 형편없는 적들과 오랫동안 싸워, 거둔 승리를 조롱하였다. 이 승리를 기념하여, 그는 원로원에 보낸 서한에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라고 적었다.
BC 46년, 카이사르는 "탑수스"에서 "메텔루스 스키피오ㆍ소(小)카토"의 군대를 상대하였고, "탑수스 전투"에서 이긴 뒤, "사르디니아ㆍ코르시카"를 시찰하고, 본국으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크게 "개선식"을 치르고, 10년 임기의 "독재관"으로 임명되었고, 2년 동안, 각종 개혁을 실시하였다. BC 44.02.15일, "폼페이우스 회랑"(원로원 회의장)에서 "카이사르"는 암살당했다.
④ 제2차 삼두정치 (BC 43~30)ㆍ암살 이후ㆍ악티움 해전 (BC 31)
• 옥타비아누스 (OctavianuㆍBC 63ㆍ아우구스투스ㆍ최초 황제ㆍ악티움 (32세)ㆍ카이사르 양자) • 안토니우스 (AntoniusㆍBC 115ㆍ장군ㆍ카이사르 오른팔ㆍ클레오파트라 남편ㆍ자살) • 레피두스 (LepidusㆍBC ? ㆍ장군ㆍ독재관 카이사르의 기병대장 출신ㆍ시칠리아를 얻으려고 옥타비아누스와 대립ㆍ정권을 잃고, 정계 은퇴)
카이사르와 떨어져 있었던 "안토니우스"는 로마 민중의 슬픔을 이용하여, 이들의 분노를 "벌족파"들에게 쏟아버리겠다고 위협하였는데, 아마도 "자신이 로마의 지배권을 장악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카이사르가 죽을 당시, 겨우 19세의 나이였던 "옥타비아누스"는 상당한 정치 감각을 입증하였으며, "안토니우스"가 새로운 내전의 첫 단계에서 "브루투스"와 상대하는 동안, "옥타비아누스"는 당초 빈약했던 자신의 입지를 굳혔다. BC 42년, "삼두정치"는 공식적으로 카이사르를 "율리우스 신(Divus Iulius)"으로 신격화하였으며, 그에 따라 "옥타비아누스는 신의 아들(Divi filius)"이 되었다.
이들은 "브루투스ㆍ카시우스"에 대항하여, 2번째 내전에서 45개 군단을 유지할 자금을 확보하기 위하여 수많은 반대자들을 합법적으로 살해하였고, "필리피"에서 "공화정 파"를 격퇴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ㆍ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에 맞서, 3번째 "내전"을 벌인다. 이 마지막 "내전"에서 "악티움 해전"을 기점으로 "옥타비아누스"가 승세를 잡게 되고, 결국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라는 신적인 이름을 달고, "로마 제국"의 첫 황제가 되었다.
3. 업 적
"카이사르의 삶"은 본인이 쓴 "전쟁 기록(갈리아 전기ㆍ내란기)"을 통해 상당 부분 알려져 있다. 정적임과 동시에 오랜 친구였던 "키케로"와의 서신ㆍ연설ㆍ살루스티우스의 기록ㆍ카툴루스의 시 등 당대의 다른 사료도 남아 있다. 또한 여러 "후대 역사가들(플루타르코스ㆍ아피아노스ㆍ수에토니우스ㆍ카시우스 디오ㆍ스트라본)" 등 의 기록도 그의 삶에 대해 더욱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① 달력 개정 : "대신관"으로서 "달력"을 정비하는 일을 했다.
"구 로마력"을 철저히 검사한 그의 업적은 매우 오랜 세월 동안 영향력을 이어갔다. BC 46년, 그는 1년을 365일로 정하고, 4년마다 윤년을 두었다. (율리우스력은 1582년, "교황 그레고리오 13세"가 수정하여, 오늘날의 "그레고리오력"이 되었다) "역법 개정"으로 "로마인"에게 어떤 한 해가(아마 현대 역법으로 BC 46년에 해당할 것이다) 445일로 길어졌다. 7월의 여러 유럽어 명칭 (영어의 "July" 는 그를 기념하여, "율리우스(탄생 월)"에서 기원한 것이다.
② 수도 재개발 : "카이사르의 포룸"을 건설하였다.
"포룸 로마눔"의 내부에는 로마 최초의 "국립도서"관과 "바실리카 율리아"가 지어졌다. 그는 "사이프타 율리아, 마르켈루스 극장"(훗날, 아우구스투스가 일찍 죽은 조카를 기리기 위해 극장의 이름에 조카의 이름을 붙였다)도 건설하려 했다. 도심을 확장하기 위해, "세르비우스 성벽"을 파괴하기도 했다. "카이사르"가 완공하지 못한 건축물은 "옥타비아누스"가 완성했다. "카이사르" 이후, "로마 황제들"은 그를 따라, "포룸"을 건설 및 발전시켰다.
③ 사법 개혁 : "원로원 최종권고"를 폐지하였다.
재판도 받지 않고, 로마시민이 처형당하는 것을 금지한 "셈프로니우스 법"을 부활시켰다. "배심원"의 자격조건을 "40만 세스테르티우스 이상"의 재산을 가진 사람으로 규정하여, "배심원" 구성 비율을 둘러싼 다툼을 종식시켰다. 그는 재판이 나온 뒤의 항소를 "민회"가 아닌 "종신 독재관"인 자신이 제기하도록 바꾸었다. 그리고 "정치범"에 대한 최고형을 "사형"이 아닌 "추방형"으로 규정했다.
④ 원로원 체제 약화 : "원로원"의 권한을 크게 약화시키는 개혁도 진행시켰다.
"갈리아"를 비롯한 "속주"의 유력자들에게 "원로원 의석"을 제공하여, 원로원의 정원을 900명으로 늘였다. 이는 "키케로ㆍ브루투스" 같이 속주민과의 융합을 싫어하는 "보수파"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일관적으로 반대의사를 표명해왔던 "원로원 최종권고"를 완전히 폐지해 버려, "원로원의 강권"을 박탈했다.
⑤ 복지 정책 : 국가에서 "곡물의 일정량"을 의무적으로 매입하도록, "법"으로 규정하였다.
"곡물 수매"에 "국가 보조금"을 대도록 엄하게 제도화하였으며, "곡물 수령자의 수"를 고정하여 줄였는데, 모든 수령자는 "특별 명부"에 기록되었다. BC 47~ 44년까지 그의 전역병 약 15,000명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계획을 세웠다.
⑥ 금융 개혁 : "연리 12% 이하"로 이자율의 제한
이자율의 제한을 "연리 12% 이하"로 정하였고, 물가가 폭등한 "내전" 이전으로 담보물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⑦ 치안 대책 : 기존에는 없었던 "치안대"를 만들어, "치안대책"을 강구했다.
"카이사르" 이전에 "치안대"가 없던 까닭에, "로마"에 정치폭력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카이사르"는 "치안대"를 만들어 이를 방지하였다.
⑧ 교통 규제 : 혼잡한 "로마"의 교통을 규제했다.
낮에 수레가 다닐 수 없게 함으로써, 교통의 혼잡함을 없애려 하였다. 그러나 "수레"가 밤에만 다닐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이 법률로 인해 로마 시민들은 밤에 소음을 들으며, 잠을 자야 했다.
⑨ 카르타고ㆍ코린토스 재건
로마의 도시개발을 꾀하여, "카르타고ㆍ코린토스"를 비롯한 도시들을 재건ㆍ건설하였다. 이후, "제정시대"에 "카르타고"는 크게 발전하여, "아프리카 속주의 주도"가 되었다.
⑩ 교사ㆍ의사에게 "시민권" 지급
로마의 교육ㆍ의료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교사ㆍ의사에게 "시민권"을 제공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⑪ "갈리아 키살피나" 주민에게 시민권 지급
"북이탈리아"의 주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제공했다. 이것은 "갈리아 전쟁" 당시, "카이사르"에게 후방지원을 아끼지 않은 것에 대한 보상이었다. 동시에, "카이사르"가 생각한 본국의 경계는 "북 이탈리아"를 포함한 것임을 보여준다.
⑫ 그 외의 개혁 : 늪지를 개척하는 사업ㆍ오스티아 항만 개조ㆍ해방 노예 등용을 추진했다.
4. 저 서
유명한 작품 가운데는 "마리우스의 아내인 아주머니 율리아의 장례 연설"과, "키케로의 소(小) 카토 회고"에 대응하여, 카토를 비난한 글인 "안티카토네스(反 카토)"가 있다. 생전에 "로마"에서 훌륭한 "웅변가ㆍ산문작가"로 인정받았으며, "키케로"도 "카이사르의 수사ㆍ문체"를 높이 평가하였는데, 그는 "갈리아 전쟁기(카이사르의 대표작)"가 "알몸과 같고 순수하며, 의복과 같은 미사여구를 죄다 벗어 던져버렸을 때, 생겨나는 매력으로 충만해 있다"며, "카이사르는 역사를 쓰려는 자들에게 사료를 제공할 작정으로 썼을지 모르나, 그 은혜를 입는 자들은 군더더기를 덧붙여 화려하게 장식한 역사를 쓰는 바보들뿐이고, 사려 깊고 현명한 이들에게는 역사를 쓸 의욕마저 꺾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고 평가했다.
불행히도 그의 글과 연설문 상당수는 유실되었다. 가장 큰 원인은 그의 사후에 그가 "신격화 됨"에 따라,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갈리아 전기ㆍ내란기" 등 몇몇 문서들을 제외한 그와 관련된 글과 연설문들의 전량 회수ㆍ폐기를 명령했기 때문이다. 그가 쓴 회고록으로는 "갈리아 전기ㆍ내란기"가 있는데, 전자는 "갈리아 전쟁" 당시 "갈리아와 브리타니아"에서 벌인 군사 작전을 기록하였으며, 후자는 "이집트"에서 "폼페이우스"가 죽은 직후에 일어난 내전을 다루었다. 또 각각 "알렉산드레이아ㆍ북아프리카ㆍ이베리아 반도"에서 수행한 전투에 대해 쓴 "알렉산드리아 전기(De Bello Alexandrino)ㆍ아프리카 전기(De Bello Africo)ㆍ히스파니아 전기(De Bello Hispaniensi)" 등 이 세 저작도 역사적으로 "카이사르"의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제 저자 여부는 불투명하다.
"문체 면"에서 분명하게 단순하고 직설적이나, 사실은 대단히 복잡하고, 그의 정치적 주장을 선전하는 방향으로 미묘하게 편향되어 있고, 특히 "로마ㆍ이탈리아ㆍ속주"의 평범한 "소 귀족독자"를 대상으로 삼고 있다.
5. 연 표
BC 100 : "수부라 지구(로마의 서민지역)"에서 탄생 → BC 84 : "코르넬리아(집정관 킨나의 딸)"과 결혼ㆍ아버지 사망ㆍ16세에 "유피테르"의 고위 사제인 "플라멘 디알리스(Flamen Dialis)"로 지명되어, 사제직에 오르기 위해서는 귀족과 결혼한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에, "코수티아(기사출신 가문의 평민)"와 어릴 때 맺은 약혼을 파기하고, "코르넬리아(당시 "민중파"의 영수였던 "킨나"의 딸)"와 결혼
BC 82 : "술라"의 이혼 명령을 거부하고, "소아시아"로 도피ㆍ"미누키우스 총독"의 군대에 지원ㆍ참모가 됨(~81) (술라(SullaㆍBC 138~78ㆍ정치가, 장군ㆍ뛰어난 술수와 군사적 재능으로 군대를 이끌고 로마에 2번이나 진격하였고, 독재관이 되어, 반대파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으로 공포정치를 실시)
BC 80 : "미누키우스 총독"의 "레스보스 섬 공략전"에 참가 → BC 78 : "술라(숙부인 "마리우스"의 부하)" 사망 → "로마"로 귀국 → BC 77 : "변호사" 개업하고, 당시 권력자들을 고소하지만 실패 → BC 76 : "고소 실패"로 "로도스 섬"으로 도피 유학을 가던 중, 해적 습격으로 포로가 돼, 몸값 주고 석방 → BC 73 : "로마"로 귀국→ 제사장ㆍ대대장이 됨.
BC 70 : "회계감사관"에 취임(~69)ㆍ"에스파냐"에 부임→ 귀국 후, "원로원 의원"이 됨 → BC 68 : "고모 장례식"에서 대담한 "추도 연설"을 행함ㆍ아내 "코르넬리아(집정관 킨나의 딸)" 사망
BC 65 : "안찰관"에 취임ㆍ자비로 "아피아 가도"를 보수하고, 화려한 "검투시합" 개최 → BC 63 : "최고 제사장"에 취임ㆍ"카틸리나 역모사건"에 대해, "키케로ㆍ소(小)카토"와 논전 → BC 62 : "법무관"에 취임ㆍ후처 "폼페이아"에 얽힌 "귀족 클라우디우스"의 스캔들 때문에, 아내와 이혼 → BC 61 : 먼 "히스파니아 총독"으로 부임→ 현지인인 "발부스" 등용ㆍ대서양 연안 평정 → BC 60 : 귀국→ 이듬해 "집정관"에 출마→ "폼페이우스ㆍ크라수스"와 손잡고, "삼두정치" 결성.
BC 59 : "집정관"에 취임→ 농지법ㆍ공직자에 대한 "율리우스 법" 가결 → BC 58 :(갈리아 전쟁 1년차) "갈리아 총독" 부임→ "헬베티 족ㆍ아리오비스투스" 격파 → BC 57 :(2년차) "갈리아 북동부 경계선"에 진출→ "벨가이 반란군" 격파ㆍ각 지방 평정 → BC 56 :(3년차) "카이사르ㆍ크라수스ㆍ폼페이우스"의 루카 회담ㆍ갈리아 각 지방 평정 → BC 55 :(4년차) "게르만족"을 공격하여 대승ㆍ브리타니아 원정(제1차)ㆍ어머니 "아우렐리아" 사망 → BC 54 :(5년차) 브리타니아 원정(제2차)ㆍ암비오릭스의 반란→ 반란군 격파ㆍ딸 "율리아" 사망 → BC 53 :(6년차) "갈리아 북동부"의 모든 부족 평정
BC 52 :(7년차) "갈리아 대반란"이 발생→ "게르고비아"를 공격하러 가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철수 → "알레시아 공방전"에서 "베르킨게토릭스" 격파ㆍ"갈리아 전쟁기(전7권)" 간행 → BC 51 : "알레시아 공방전" 전후 처리로, 모든 부족을 복종시키고 평정→ "갈리아의 로마화"에 착수 → BC 50 : "북이탈리아 속주"로 귀환
BC 49 : 원로원- 카이사르에게 "원로원 최종 권고"를 결의→ 01.12일 "라벤나"를 떠나, 1개 군단을 이끌고 "루비콘 강" 도하(주사위는 던져졌다!)→ 내전 시작→ "일레르다" 전투 승리 → 이듬해인 BC 48년도 "집정관"에 선출 → BC 48 : "그리스" 상륙→ "파르살루스" 전투→ "폼페이우스"를 상대로 완벽한 승리→ "알렉산드리아" 상륙→ "알렉산드리아 전쟁"에서 승리(이집트인들과 벌인 전쟁)→ "클레오파트라"와 만남
BC 47 : "내전기(전3권)" 완성ㆍ"소아시아" 상륙ㆍ"카파도키아 지방의 젤라"에서 "파르나케스"를 격파 → 승리 기념하여, "원로원에 보낸 서한"에, "왔노라ㆍ보았노라ㆍ이겼노라(veni vidi vici)"라 적었다. → BC 46 : "탑수스 전투"에서 "스키피오 군" 대파→ 로마로 귀환→ 개선식(4차례) 거행→ 내전이 사실상 종결→ 각종 개혁 실시→ 율리우스력(태양력) 채택ㆍ국립 조폐소를 설립
BC 45 : "히스파니아 속주"에서 "반 카이사르 파" 봉기→ "히스파니아"로 떠나, "문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 격파 → BC 44 : 2월 "원로원ㆍ민회"→ "카이사르"를 "종신독재관"에 임명→ 03.15일 "원로원" 회의장인 "폼페이우스 회랑"에서 "공화주의자들(브루투스ㆍ카시우스 등)" 일당에게 암살
'서양사 > 고대 • 불가사의 (7대) • 로마 • 신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토니우스 (AntoniusㆍBC 83~30)ㆍ2차 삼두정치 1인 (0) | 2023.01.13 |
---|---|
시저 (Caesar) ③ 달력 : 그레고리력 (1582~)ㆍ율리우스력 (BC 46~) (2) | 2023.01.13 |
시저 (Caesar) ① 카이사르 (BC 100~44)ㆍ케사르ㆍ카이저ㆍ차르 (2) | 2023.01.13 |
클레오파트라 ② 연인 : 시저 (카이사르)ㆍ안토니우스ㆍ옥타비아누스 (0) | 2023.01.12 |
클레오파트라 ① BC 69~30ㆍ39세 (Cleopatra VII) (2) | 2023.01.1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