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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건- 상식 • 논쟁 (개화파 • 북학파)

선비 ③ 사화 (士禍)ㆍ사화 (史禍)

by 당대 제일 2022. 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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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화 (士禍)"는 선비가 화를 입었다는 뜻선비들이 정치적 반대파에게 ""를 입는 일을 말하는 것이고,  "사화 (史禍)"는 "무오사화 (戊午史禍)" 처럼 "사관(史官)"들이 화를 입었다는 말이다.

 

1. 개요

•  사화 (士禍): 선비가 화를 입었다는 뜻ㆍ선비들이 정치적 반대파에게 "화"를 입는 일

•  사화 (史禍): "무오사화"는 "사관(史官)"들이 화를 입었다는 뜻

•  4대 사화 (士禍): "사림"이 화를 당한 1498년(연산군4)~1545년(명종즉위년)까지 발생한 4차례 옥사

•  성종 (1469~1495)→ 연산군 (1494~1506ㆍ폐비윤씨 (1455~1482))→ 중종 (1506~1544)→ 인종 (1544~1545)→ 명종

2. 배경

"성종" 때부터 중앙 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한 "사림 세력""훈구 세력"의 비리를 규탄하면서, 점차 정치적 영향력이 커져가던 ,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훈구 세력"의 불만이 폭발하였고, 양 세력 간의 갈등으로 "사화"가 발생하게 된다.

"사화""사림 세력"의 역사적 성장이라는 추세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이를 통해서 사림들은 많은 피해를 입기는 하였으나, 지방의 "서원""향약"을 기반으로 지지기반을 확산하는 등 성장을 계속하여, "선조" 때에 이르면서, 중앙 정계의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며, 이후 "사림"이 정치를 주도하였다.

"성종" 때에는 "훈구 대신""사림"이 정치적 입장은 달랐어도, 서로간의 직접적인 충돌은 없었다오히려 두 세력은 서로 협력하여, "경국대전"을 비롯하여 "동국통감동국여지승람"등 기념비적인 편찬사업을 마무리하였다여기에는 "훈신" 중에도 "서거정노사신최항양성지" 같은 이들은 원성을 듣던 인물이 아니었고, "양파" 균형과 조화를 추구한 "성종"의 뛰어난 정치적 역량과도 관계가 깊었다.

"세조" , 현직자와 퇴직자에게 아울러 주던 "과전법"을 폐지하고, 현직자에게만 주는 "직전법"으로 개편한 것은 조선시대의 토지제도가 가지는 한계 때문이었다그러나 그것조차 실시할 수 없어서 "직전법"도 폐지되고, 이제는 새로이 관리가 되더라도 국가로부터 아무런 땅도 받을 수가 없게 되었으니. 그들이 가질 수 있는 것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뿐이었다.

"신진관료"는 여기에 불만을 가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불건전한 토지제도를 개혁하자는 주장이 그들 사이에 점차로 일어나게 되었다이 토지 문제를 에워싼 "구의 대립"이 귀족간의 분열과 파쟁을 일으킨 또 하나의 원인이었다토지 문제를 에워싼 "구파"의 대립은 다른 면에서 볼 때에는, "훈구파""사림파"의 대립이었다비록 음성적인 대립이었다고 하더라도 "명군(名君) 성종"이 있는 동안은 그것이 노골화하지는 않았으나, "폭군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드디어 폭발하게 되었다.

3. 4대 사화 (士禍ㆍ史禍)

사화

① 무오사화 (1498 (연산군4)ㆍ戊午史禍ㆍ戊午士禍)→ 폐비 윤씨 사건→ 조의제문(세조의 찬탈 비판ㆍ김종직)

"사초(史草)"때문에 일어났다고 하여, "무오사화(戊午史禍)"라고도 부른다. "연산군(1494~1506)"이 즉위하면서 서로 협력하던 "훈구파ㆍ사림파"의 사정이 달라졌다. 원래 시재(詩才)와 감성이 뛰어난 그의 어머니(폐비 윤씨ㆍ성종의 비)가 신하들의 충돌로 죽게 된 것을 알고, "훈구 대신ㆍ사림"을 모두 누름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다.

학덕 있는 "훈구 대신"들은 대부분 사망하고, "사림 세력"은 더욱 커져서, 그들의 분방한 언론활동은 왕의 노여움을 사는 일이 많았다. 이런 분위기를 이용하여, 평소 "사림"의 공격을 받아 수세에 몰려 있던 "훈구 대신"의 잔류 세력인 "유자광" 등은 1498년(연산군4)음력 7월 "김일손"이 지은 "사초"를 문제 삼아, 왕을 충동하였다.

복수할 기회를 노린 "유자광"은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김일손"이 사초에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실은 사실이 알려지자, 상소를 올려, "세조"가 한 왕위 찬탈(簒奪)을 비유한 문장이라고 보고하여, 수많은 "사림 인사"를 처벌하라고 건의하였다. "김종직"과 관련이 있는 "김일손ㆍ표연말ㆍ정여창ㆍ최부"등 수십 명의 사림을 사형ㆍ유배 혹은 파직케 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김종직" 문인으로 구성된 "영남 사림"이 대부분 몰락하고 말았다.

② 갑자사화 (1504 (연산군10)ㆍ甲子士禍) → 중종반정 (1506ㆍ中宗反正)

"사림"을 정계에서 몰아낸 후, "연산군"은 "훈구 대신"마저 제거하여,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려 했다. 그러던 중, "연산군"을 싸고 도는 척신들이 "연산군"의 생모인 "윤씨의 폐비사사(尹氏 廢妃賜死)"사건에 "윤필상" 등 훈신이 관여했음을 폭로하고, 이 사건에 관련된 "훈구 대신"과 아직 남아 있던 "사림"까지 몰아냈으며, 특히 가족과 제자들도 처벌하였다.

2차례의 "사화"로 쓸 만한 인재들을 처단하고 난 뒤, "연산군"의 음탕과 사치는 심해지고, 관리들에게 "신언패(愼言牌)"라는 패쪽을 차고 다니게 하여, 말조심을 하도록 억눌렀으며, 자신의 행동을 비난하는 글이 "국문으로 쓰였다"하여, 국문학습을 탄압하고, 국문서적을 불사르기도 했다.

1506.09.02일, "연산군"의 학정에 견디다 못한, "박원종ㆍ성희안ㆍ유순정"등 "훈구 대신"들은 군대를 동원해, "연산군"을 추방하고, 그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중종)"을 왕으로 추대했다. 이것이 "중종반정"(中宗反正, 1506)이다.

③ 기묘사화 (1519 (중종14)ㆍ己卯士禍)→ 사림 "조광조" 등용→ "중종"의 싫증 → "조광조 일파" 제거

1519년, "조광조"일파를 견제하기 위해 일어난 "사화"이다. 백성과 "사림"의 여망 속에 왕이 된 "중종"은 "사림"을 다시 등용하고, "도학(道學)"을 숭상하여, 무너진 "유교정치"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특히 1515년(중종10)에 젊고 깨끗한 "조광조(趙光祖)"가 중용되면서, 그를 추종하는 젊고 기개 있는 "사림"이 "현량과(賢良科)"라는 추천제도에 의해서 대거 등용되었다. 이때 등용된 사림은 "기호 출신"이 많아, "기호 사림"으로도 불린다. 이들의 가문은 조선 초기에 큰 벼슬을 지낸 훈신의 후예들이 적지 않았으나, 체질적으로는 전형적인 "성리학자"로 변신해 있었다. 

"조광조"일파는 "삼사(三司)"의 "언관 직"에 포진하여, 자신들의 의견을 "공론(公論)"이라고 표방하면서 급진적 개혁을 요구하고 나섰다. 즉 "연산군"의 학정에 대한 경험에서 무엇보다도 군주의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어, "경연"을 강화하고, 언론활동을 활성화했다.

"내수사 장리"의 폐지ㆍ"소격서(昭格署)"의 폐지ㆍ"향촌"사회에서 "향약(鄕約)"의 실시와 "삼강행실ㆍ이륜행실(二倫行實)ㆍ주자가례ㆍ소학"의 보급, "균전제" 실시를 통한 토지집중의 완화, "방납 폐단"의 시정 등을 주요정책으로 내세웠다. "사림"의 정책들은 "지방 중소지주층"의 이익을 크게 반영하고, 농민의 부담을 완화시켜 줄 수 있는 것이었으나, "중종반정"에 공을 세운 공신들에게는 불리한 것이었다. 

특히 "조광조"일파는 공신에 책봉된 100명 가운데 3/4는 부당하게 "공신"이 되었으므로, 그들의 "공신 칭호"와 "토지ㆍ노비"를 몰수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공신"들의 원한을 샀다. 또 "공신"들은 "의정부"와 "6조"의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삼사(三司)"에 포진한 "사림"의 견제가 "공신"들에게는 불만의 원인이 되었다. 그들은 "언관(言官)"의 권한이 너무 큰 것은 나라를 어지럽게 할 뿐 아니라, "경국대전"의 권력체제를 무너뜨리는 위험한 행동으로 비판하였다.

"중종"은 처음에 "사림"을 신임했으나, 나중에는 지나치게 "군주"를 압박하는 데, 싫증을 느꼈다. 이런 분위기를 이용하여, 1519년(중종14) "남곤ㆍ심정"등 "훈구 대신"들은 "조광조 일파"에게 "반역죄"의 누명을 씌워 무참하게 죽이거나, 유배 보냈는데, 이것이 "기묘사화(己卯士禍)"이다. 이 사건으로 "사림"의 개혁정치는 4년 만에 끝나고, 그들이 추진했던 정책도 대부분 폐지되었다. 그러나 이때 "화"를 입은 "조광조ㆍ김정ㆍ김식ㆍ김구ㆍ기준" 등은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높은 추앙을 받아, 16C 후반에 "사림 시대"를 여는 정신적 바탕이 되었다.

④ 을사사화 (1545년 (명종 즉위년)ㆍ乙巳士禍)→ 외척간의 권력싸움 : "소윤(명종)"이 "대윤(인종)" 제거

"기묘사화" 이후, 10년 뒤에 "중종"은 "훈구 대신"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다시 "사림"을 등용했으나, 1545년에 "명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사화(士禍)"가 발생한다. 이 사건은 "외척간의 권력싸움"에서 빚어진 것이 다른 "사화"와 다르다.

즉 "중종"이 돌아가자, "제1계비 장경왕후"의 소생인 "인종(仁宗)"이 즉위하고, 왕비의 동생인 "윤임(尹任, 대윤(大尹))"이 세력을 떨쳤다. (중종→ 인종→ 명종)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타계하자, "제2계비 문정왕후"의 소생인 "명종"이 왕위에 올랐다. 

"명종" 역시 어린 관계로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고, "소윤(小尹) 일파"가 실권을 장악했는데, 집권하자마자, "인종"의 외척인 "윤임(尹任ㆍ대윤ㆍ중종 비인 장경왕후의 오빠)"일파를 몰아낸 것이다. (소윤(小尹): 파평 윤씨ㆍ"문정왕후" 동생인 "윤원로ㆍ윤원형(애첩- 정난정)"일파 / 대윤(大尹): 파평 윤씨ㆍ"윤임(중종 비인 장경왕후의 오빠)"일파

"명종" 때에는 "문정왕후"가 "불교"를 숭신하여, "보우(普雨)"를 "봉은사(奉恩寺)주지"로 삼고, "선교 양종"을 다시 부활시켜 오랜만에 불교가 중흥하였으나, "사림"의 비난을 샀다. 또 북방이 어수선하고, "임꺽정"일당이 "경기도ㆍ황해도"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 김종직 (金宗直ㆍ호- 점필재(佔畢齋)ㆍ1431~1492ㆍ61세) : 문신ㆍ시인ㆍ사상가ㆍ교육자ㆍ성리학자

"세조" 때, 동료들과 함께 관직에 진출하여, "세조~성종" 연간에 동료, 후배 "사림파"들을 적극 발탁하여 "사림파"의 정계 진출 기반을 다져놓았다.  자신을 전별(餞別)하는 문인들을 "우리당(吾黨)"이라고 불렀는데, "김종직"을 종주로 삼았던 정치세력이 "사림(士林)"이다. 이를 통상 "붕당 정치의 시원"으로 간주한다.

"정여창ㆍ최부ㆍ김굉필ㆍ이목ㆍ권경유ㆍ김안국ㆍ김정국ㆍ김일손" 등이 모두 그의 제자였고, "조광조"는 "김굉필"의 제자로서 그의 손제자였으며, "남효온ㆍ남곤ㆍ송석충ㆍ김전ㆍ이심원" 역시 그의 문하생이었다.

"재지사림(在地士林)"의 주도로 "성리학적 정치질서"를 확립하려 했던 "사림파의 사조(師祖)"의 한사람이자, 중시조격이다. "성리학"을 전승한 것은 "길재ㆍ권우"였고, "사림파" 출신으로 처음 조선정계에 진출한 이는 "권근"이었으나, "세조" 이후 조선 조정에 본격적으로 출사한 것이 "김종직ㆍ그의 동료ㆍ 제자들"이었으므로, "김종직"을 "사림파의 실질적인 중시조"로 간주한다.

※ 조광조 (趙光祖ㆍ1482~1520ㆍ38세) : 문신ㆍ사상가ㆍ교육자ㆍ성리학자ㆍ정치가

개혁 정책을 펼치다가 희생된 "개혁가"라는 시각과 급진적이고 극단적이라는 평가가 양립하고 있다. 한때 가까웠으나, 뒤에 정적이 된 "남곤"과, 정적인 "김전" 역시 "김종직 학파" 사람이었다.  그의 사상은 문하생 "백인걸"을 통해 "율곡 이이"에게 전해 졌다.  "김종직"의 학통을 이어받은 "김굉필"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유숭조"의 문하에서도 수학했다.

"사림파"의 정계 진출을 확립하였다. "중종"의 "훈구파 견제 정책"에 의해 후원을 받아, 홍문관ㆍ사간원에서 언관 활동을 하였고, 성리학 이론서 보급과 소격서 철폐 등을 단행하였다.  (소격서(昭格署): 도교의 영향을 받아 하늘과 별에 제사를 지내던 조선의 관청)  "성리학적 도학 정치" 이념을 구현하려 했으나, "훈구 세력"의 반발로 실패한다.

조광조는 "중종"의 신뢰를 바탕으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반정공신(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을 왕으로 만든 반정 주체 세력, 그 공로를 인정받은 신하들)"의 막강한 힘에 억눌려 있던 "중종"에겐 "조광조"가 쏟아내는 개혁들로 "반정공신"들을 제압하기에 이르렀다.  개혁과 관련하여 대표적인 예가 "위훈삭제 사건"이 인데, "중종반정" 과정에서 반정공신으로 인용된 관리 중, 실제로 아무런 공로도 없이, 공신세력의 인척으로 공신이 된 사람이 많은 이들을 제외시켰다.

1519년, 반정공신들의 사주를 받은 궁인들에 의해, 나뭇잎에 "주초위왕(走肖爲王): 조씨가 왕이 된다."란 글자가 나타나게 함으로써 역모로 몰려, "전남 화순"으로 유배되었다가 사사된다.  "중종"에게 한 궁녀가 나뭇잎 하나를 가져다 드렸고, "반정"으로 등극한 "중종"은 "조광조"를 의심했지만, 사실상 나뭇잎의 글씨는 궁녀가 과일즙을 발라 벌레들이 파먹게 함으로써, 엄청난 음모의 불씨가 된 셈이었다.

※ "김종직(사림파)"와 "유자광"의 갈등 : 무오사화 ( 1498 (연산군4))의 시작

"성종"이 특별히 배려하여, "사림파"가 정계에 등용되었는데, 이 때 유자광은 "사림파" 인사들과 충돌한다. 이후 유자광은 "언문(諺文)"을 장려ㆍ보급하자고 건의하였다가 "사림파"에게 비판받았으며, "경남 함양군"으로 놀러 갔다가, 시를 지어 "현판"하게 하였는데, 나중에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부임하여, 유자광이 쓴 현판을 저주하며 떼어버리자, 분통해 하며, 원한을 품었다.

김종직은 "남이"의 "역모(남이의 옥사)"의 배후를 "유자광"으로 보고, 혐오하고 경멸(輕蔑)하였다.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유자광이 "대관림"을 돌아보고, "소고대"의 절경을 바라보면서 내려와, "학사루"를 보고 절경에 감탄하여, "아전"에게 "필묵"을 시켜,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렸다. 그 "시"를 "현판"으로 만들어, "학사루"에 걸어놓았다.

"함양 군수"로 있던 김종직은 유자광이 지은 시가 "학사루 현판"으로 걸린 것을 보고, 떼도록 지시한다. 김종직은 대노하여, "아전"에게 호통을 치고, 그 현판을 철거하여 아궁이에 태워 버렸으나, 이 일은 소문으로 전달되었고, 관찰사 유자광이 이를 듣고 불쾌하게 여겼으며, "천첩 출신 서자"로 출신 성분에 열등감이 있던 유자광은 이 일로 "김종직"을 증오한다.

김종직이 관직을 그만두고 "밀양"으로 낙향할 때, 문하생들이 서울에서 정자에 술상을 차려놓고, 송별하는 "시회(詩會)"를 열었다. 이때 초청하지도 않은 유자광이 이곳에 들러 인사하면서, 김종직에게 술잔을 권하여, 마지못해 잔을 받자 김종직의 제일 나이 어린 제자 "홍유손"이 "무령군 대감! 송별시 한 수(首) 지어 보시오! 후세 사람들 중 누가 또 대감의 시를 현판해서 걸지 모르지 않습니까?"라며 조롱하였다.

"함양 학사루 사건"을 빗대서 한 조롱으로, 무안당한 유자광은 이후, "김종직"과 그 문하생에게 원한을 품는다. 당시에 "세도"도 막강하였고, 벼슬도 높았던 유자광은 선비들에게서 이렇게 모욕당하자, "이극돈ㆍ임사홍"등과 손잡고 "사림파" 선비들을 몰살시켰다.

복수할 기회를 노리던 유자광은 1498년(연산군4) 음력7월 "성종실록"을 편찬(編纂)할 때, "김일손"이 "사초"에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실은 사실이 알려지자, 상소를 올려 "세조"가 한 "왕위 찬탈(簒奪)"을 비유한 문장이라고 보고하여, "무오사화"를 일으켜, 수많은 "사림파" 인사를 처벌하라고 건의하였다.

김종직의 문하생들이 끌려와, "의금부ㆍ형조"에서 고문당할 때, 유자광은 "김종직의 문집"을 입수하여 사본을 내놓으면서, 이 중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찾아내, 여러 "추관(推官)"에게 보여주었다. "이것은 세조를 가리켜 지은 문장인데, 김일손(金馹孫)의 악한 것은 모두 김종직이 가르쳐서 만든 것이다."라며, 원본은 "연산군"에게 바쳤다.

"연산군"에게 바치는 "김종직의 문집"에서 유자광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스스로 주석(註釋)해, 문구마다 해석하여 "연산군"으로 하여금 알기 쉽게 하였고 이어, "김종직이 세조에게 부름 받았는데도 감히 은혜를 저버리고, 우리 세조를 비방(誹謗)하고 헐뜯었으니 이는 마땅히 대역부도(大逆不道)로서 논죄하고, 그 남자가 지은 글은 후세에 전파(傳播)되어서는 아니 되니 아울러 모두 불살라 없애야 될 것입니다."라며, "김종직"의 저서와 작품의 압수와 관련자 처벌을 건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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