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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건- 상식 • 논쟁 (개화파 • 북학파)

선비 ① 훈구파ㆍ사림파ㆍ생육신ㆍ사육신

by 당대 제일 2022. 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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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라는 말은 "용비어천가 (1447, 80)"에 처음 나타나며, 조선 사회에서 "학문을 닦는 사람" 예스럽게 이르는 말로, "어질고 학식과 인품이 있는 사람"을 말한다.

 

1. 유림 (선비 사회

 4파벌 : 훈구파 (勳舊派)사림파 (士林派)청담파 (淸談派)절의파 (節義派)

 훈구파기호파 (畿湖派) : "세조"의 찬역 (簒逆)을 도와, 높은 지위많은 녹전을 차지한 부귀가 겸전한 일파 정인지최항이석정양성지권람신숙주강희맹거정극돈

 사림파영남파 (嶺南) : "김종직 (밀양 출신동방성리학의 정통을 이어받은 대학자)" 중심으로 한 일파 김종직의 제자 : 김굉필정여창조위김일손유호인

 청담파 : "중국의 죽림칠현"을 본떠, 서울 동대문 밖 "죽림"에 모여, "고담준론"으로 세월을 보낸 일파 남효온홍유손

 절의파 : "세조의 찬역" 절대 반대한 "매월당 김시습" "생육신(生六臣)"을 중심으로 한 파

 생육신(生六臣): "세조""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벼슬을 버리고 절개를 지킨 6명의 신하 김시습성담수원호맹전조려남효온

 사육신(死六臣):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6명의 신하 성삼문하위지이개유성원박팽년김문기

2. 훈구파 (勳舊派) : "혁명파 사대부"를 계승, 훈구공신(勳舊功臣)구대신(勳舊大臣)

훈구세력의 집권 시대 : 조선 건국~ 100년 간 / "세조" 이래, "기성 집권 정치세력"을 지칭, "훈구파"라는 명칭은 원래 "훈구공신(勳舊功臣)구대신(勳舊大臣)"등 오랫동안 공로를 많이 세웠다는 의미를 지닌 일반 용어였다 "성종" 후반 이후, 대두된 "신진 정치세력"인 이른바 "사림파(士林派)"와 대비되는 정치세력을 지칭하는 역사적 용어로 쓰였다.

""찬역(簒逆왕위 찬탈)에 협조하여,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귀족적 관료 학자들"로,  조정의 요직에 있어, "세조~성종" 시대의 여러 가지 편찬사업(조정에서 간행하는 서적 편찬)에 큰 공헌을 한 사람들이며, 나라의 문화 발전에 이바지하였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녹전"은 주로 "경기도충청도"에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기호파(畿湖派)"이다.

3. 사림파 (士林派): "온건파 사대부"를 계승

"전원의 산림(山林)"에서 유학을 공부하던 문인자 / 15C 이후, 조선 중기 중앙 정계를 주도한 정치집단

고려 말 유학자 "길재(吉再)"가 은퇴하여, 고향에서 후진 양성에 힘쓴 결과, "영남 일대" 제자가 많이 배출되어, 조선 "유학"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훈구파"에 대립하였다.

"사림""김종직(경상도 밀양 출신)"의 제자로, "세조의 찬역"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점에서는 "절의파"와 일맥상통하지만, 적당한 기회를 얻으면 "조정의 요직"에 들어가 포부를 펴보려는 점에 있어서는 "절의파"와 생각을 달리하였다. 그러므로 "훈구파"에 있어서 적은 "사림파"였다.  "김종직제자들"은 대개 "경상도영남 지방"에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영남파"라 하였다.

4. 훈구파사림파 요약

요약

조의제문(弔義帝文)- 1457(세조3), "김종직""세조"의 왕위찬탈을 풍자하여 지은 글.

"단종"을 죽인 "세조""의제"를 죽인 "항우(서초패왕)"에 비유해, "세조"를 은근히 비난한 내용

"세조의 즉위"를 비판하여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무오사화"를 불러일으켰다. "세조의 찬탈"을 비판하고, 이를 "항우""초 회왕 살해"에 비유한 "조의제문"을 지어 기록에 남겼다"김종직""밀성"에서 "경산"으로 가는 길에 "답계역"에서 자다가, 꿈에 "의제(초나라의 초대황제)" 만났는데, 여기서 깨달은 바가 있어, "조문을 지었다"고 한다1498(연산군4)음력 7, "성종실록"을 편찬(編纂)할 때,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 사관(史官)으로 있던 "김일손(김종직의 제자)""사초(史草)"에 기록한 것을 "연산군유자광"이 문제 삼았다(사초(史草) : 조선 시대, 사관들이 그때그때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여 둔 "사기"의 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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