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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건- 상식 • 논쟁 (개화파 • 북학파)

당파 싸움ㆍ붕당 (朋黨)ㆍ계보 (1575년 (선조8))

by 당대 제일 2022. 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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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정당 (政黨)처럼 "정치적인 견해"를 중심으로 구분된 집단이 아니라, "지연, 학연, 이해관계"에 따라 무리가 니뉘고 구성되었으므로, "붕당 (朋黨)"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최초의 "붕당" 대립구도 성립은 1575(선조8), "이황"을 추종하는 무리가 "서인"이 되고, "이이"를 추종하는 무리가 "동인"이 되었다서로 의견대립을 보이고, 이것이 다시 "노론소론" 다시 "남인북인" 등으로 갈라지는데, 이것이 "조선의 당파"의 효시인 것이다.

 

1. 붕당 (朋黨)

사림의 정권 장악→ 붕당의 형성 (뜻이나 이익을 같이하는 사람들끼리 결합체)

"붕당(朋黨)"은 조선 중기 이후, 특정한 지역적학문적정치적 입장을 공유하는 양반들이 모여 구성한 정치 집단이다. "붕당 정치"는 학문적 유대를 바탕으로 형성된, 각 붕당들 사이의 공존을 특징으로 하는 조선의 독특한 정치 운영 형태를 말한다.

붕당1
붕당2

2. 당파 (黨派)의 효시

"이황"을 추종하는 무리가 "서인"이 되고, "이이"를 추종하는 무리가 "동인"이 되었다. 서로 의견대립을 보이고, 이것이 다시 "노론소론" 다시 "남인북인" 등으로 갈라지는데, 이것이 "조선의 당파"의 효시인 것이다.

최초의 "붕당" 대립구도 성립은 1575(선조8), "이조전랑 직 임명" 문제로 인한 갈등으로 "심의겸" 추종하는 기성 사림인 "서인""김효원"을 영수로 하는 신진 사림인 "동인"의 결집에서 비롯되었다"심의겸"이 서울 서쪽에, "김효원"이 동쪽에 살았기에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

"서인동인"의 분당은 "문반 관료"의 인사권을 쥔 "이조전랑 자리"를 둘러싸고 "심충겸(심의겸 동생)김효원"이 서로 다툰 데서 비롯되었다. "이조전랑"56품의 낮은 자리이지만, "삼사(三司)" 하나인 "홍문관(옥당) 출신의 엘리트 관료"가 임명되는 것이 관례로서, "삼사(三司)"의 공론(公論) 수렴하여 대신들을 견제하고, 물러날 때에는 후임자를 스스로 천거할 뿐 아니라, 이 자리를 거치면 "재상"으로 쉽게 오를 수 있는 요직이었다. 따라서 "이조전랑"의 자리를 누가 차지하느냐는 권력 경쟁의 핵심 과제였다"서인동인"의 분당 배경에는, 기성 관료신진 관료의 이해충돌, 학파지연의 차이, 척신정치에 대한 강온의 태도 차이가 밀접히 관련되어 있었다.

"선조"가 즉위하면서 "훈구파"는 자연스럽게 몰락하였고, 그동안 "훈구파"의 탄압을 견디어낸 "림파"가 정치 주도 세력이 되었다"동인(東人)"은 조선 최초의 "붕당"으로 16C 중엽, 사림파 중 신진 세력인 "김효원류성룡이산해" 등이 연합하여 결성하였는데, 주로 영남 "이황조식"의 문하였으며, 이 밖에도 개성의 "서경덕" 문인들도 가담하여, 이들의 연합은 학연의 성격이 짙었다.

"서인(西人)"은 주로 서울 근방에 생활 근거를 둔 고관들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학문적으로는 "이이기대승김인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또한 왕비는 대체로 서울 근방의 고관 집에서 채택되는 것이 관례여서 자연히 "서인" 중에는 척신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서인"은 학문적 구심이 없어 처음에는 큰 세력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동인서인" 사이의 중재역을 자처하던 "이이""서인"에 합류하고, "성혼""서인"에 합류하면서, 두 사람이 "서인의 구심" 이루게 되었다. 이후 "붕당"은 정치적 이념과 학문적 경향에 따라 결집되어, "정파적학파적" 성격을 동시에 가지게 되었다.

"선조" 초에는 "서인동인"의 경쟁 체제가 유지되면서 큰 실정은 없었으나, 1589(선조22) "기축옥사(정여립 모반사건)"를 계기로, "서인""동인"을 배제하고 정권을 잡는데 성공하였다이 사건으로 "동인" 중 일부 급진세력이 관련되어 처벌을 받았기에, "서인"에 대한 동인의 감정을 자극하였고, 2년 뒤인 1591(선조24)"동인""정철"이 세자책봉을 왕에게 건의한 사실을 문제 삼아 "정철" 일파를 내몰았다(건저문제).

당시 "선조""동인"의 편을 들어주어, "동인"은 세력을 회복하게 되고, "정철"의 처벌문제로 인해 "강경파(급진파)""이산해" 중심의 "조식서경덕계인 북인(北人)"과 온건파인 "류성룡" 중심의 "이황계인 남인(南人)"으로 갈라졌다"기축옥사" , 피해를 입은 세력이 "조식서경덕계"였으므로 북인은 서인에 대한 반감이 컸다.

"북인"의 탄압을 받던 "남인서인"이 연합하여 1623"인조반정"을 일으키면서, 이후 "북인"정계에서 숙청되었다. 정권을 잡은 "서인"은 형식적으로 "남인"과 연합 정국을 구성하였으나, "효종" 즉위하면서 "북벌론"을 국시(國是)로 하면서 "성리학의 대의(명분론의리론원칙론)"에 충실한 "서인"의 입지는 더욱 커져 갔다

"숙종"대에 이르러, 상호 비판을 전제로 100년 가까이 공존하던 "서인남인"의 대립은 점점 격화되기 시작하였다. 3차례에 걸친 환국(경신환국기사환국갑술환국)의 와중에 "서인남인"은 서로를 숙청하고, 정치적으로 제거하는데 온 힘을 쏟았다.

"영조"는 즉위 해(1724), 당쟁의 폐단을 지적하고, "탕평책(蕩平策)"을 폈다. "영조""노론 소론" 사이의 화해를 유도하고, 당파를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겠다고 선언해, 격렬한 당쟁은 "영조" 대에 이르러 사라졌다. 또한 주요 인물들을 "외척"으로 만들어 세력의 안정화를 꾀했는데, 이 과정에서 오히려 "탕평책"을 지지하는 "탕평당"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당파를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정조""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하였으나, 능력에 관계없이 양쪽을 고르게 등용한 "영조"와는 달리, "정조"는 자신의 국정운영에 부합하는 세력(남인의 청남계노론의 청명당계 등)을 중용하였다"영조 탕평책"과 대비하여 "정조 탕평책""준론탕평(峻論蕩平, 옳고 그름을 명백히 가리는 탕평책)"이라 불린다. 그러나 "붕당 간의 당쟁"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정조"의 정책에 찬성하는 "시파(時派)"와 반대하는 "벽파(僻派)"로 새로운 당파를 형성하여 당쟁을 계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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