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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사건

사건- 73.08 : 김대중 납치사건 ← 이후락의 충성경쟁 (윤필용 사건)

by 당대 제일 2022.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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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납치사건"은 일본에 망명 중이던 정치인 "김대중(金大中ㆍ1924~2009ㆍ85세)"이 1973.08.08일 오후 1시경 "일본 도쿄도"의 "그랜드 팰리스 호텔"에서 "이후락 (李厚洛ㆍ1924~2009ㆍ85세)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납치되었다가, 5일 만인 08.13일에 "서울 동교동 자택" 근처에서 발견된 사건이다. 이 사건은 "박정희 (5~9대ㆍ1917~1979ㆍ62세)"의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김대중"을 처리하려 했던 사건이다.

 

1. 김대중 납치 사건

"워싱턴"에서 "미주 한민통"을 조직한 "김대중""일본 지부"를 조직하기 위해, "일본"에 입국,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의 "()박정희 집회" 참가를 앞두고, "그랜드팰리스 호텔" 2212호에 투숙하고 있었다 1973.08.08, 같은 호텔에 머물고 있던 "양일동(민주통일당 대표)"의 초청을 받아 가진 회담을 끝내고 나오던 중, 누군가에게 습격을 당했고, 비어 있었던 2210호실에 감금되었다. 김대중은 이 방에서 마취약을 투여 받아,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오사카"로 옮겨져 납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김대중"은 나중에 "배를 탈 때, 다리에 무게 추를 달았다"라고 증언했다 바다에 수장될 위험이 있는 상황에 처해 있을 때, "동해 일본 측 해안"에서 "해상자위대 함정" 추격해 왔고, 사건이 발각될 것을 우려한 요원들은 계획을 변경하여 "김대중""서울" 자택 앞에서 풀어주었다.

김대중 납치 사건

2. 배 경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신민당" 후보로 출마, "민주공화당" 후보였던 "박정희" 현직 대통령에게 "94만 표" 차이로 석패했는데, 이 대선 전후 기간 동안 "김대중"에게는 크고 작은 사고가 잇달아 일어났다.

1971.01: "동교동" 자택 마당에 담배 갑 은박지로 싼 장난감 권총용 화약에 배터리가 연결된 사제 폭발물이 폭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처음엔 "김홍준(김대중 조카당시 15)" 장난으로 한 것으로 자백하면서 해프닝으로 일단락 되는 듯 싶었다. 그러나 "김홍준"이 경찰의 위협과 가혹행위로 인해 허위 자백한 것으로 이내 진술을 번복하자, 경찰 수사는 미궁에 빠졌으며 결국 "김홍준"은 검찰의 구속 소명자료가 불충분하여, 법원으로부터 석방 판결을 받는다.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총선" 유세가 한창이던 그해 5월엔 지원 유세에 나선 "김대중"이 탄 차량과 14톤 대형트럭이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김대중"은 이 사고로 인해 골반 관절 부위에 부상을 당했으며, 서거하기 전까지도 이때의 사고를 "당시 정권의 암살 음모"로 지목했다.

일련의 사건 사고로 인해 신변에 위협을 느낀 "김대중""교통사고 후유증지병" 치료차 "일본" 왕래하기 시작한다1972.10.11, "일본" 정계 순방을 이유로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며칠 뒤인 17"비상계엄령"과 동시에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미국"으로 망명을 택한다"유신" 직후부터 그는 "일본미국"을 오가며, 외신을 통해 "유신 체제"를 비판규탄하였고, 1973.07.06"미국 워싱턴"에서 "한국 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초대의장으로 취임해, 교포 사회를 중심으로 "반정부 투쟁"을 벌이기 시작한다.

한편, "박 정부"1972"10월 유신"을 선포하기 전, 측근인 "이후락(중앙정보부장)""평양"방문하여, "김영주(조직지도부장)"과 회담을 가졌고, "박성철(2부수상)"05.29~ 06.01일까지 "서울"을 답방하여 "이후락 부장"과 회담을 가지게 된다그 결과, 07.04일에 "조국통일 촉진"을 위한 원칙에 대한 합의가 담긴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며 남북간 평화 분위기가 조성되었는데, "10월 유신"이 있기 전에도 정부에서 북한에 먼저 통보를 해주게 된다.

3. 사건 이후

사건을 조사한 "일본 경찰"은 납치 현장에 "김동운(주일 한국대사관 1등 서기관중앙정보부 요원)" 지문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일본 정부"의 양해 없이 "김대중"을 납치해 강제로 한국으로 압송한 것은 "일본의 주권을 침해한 것"이라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1973.08.23, 열린 "참의원 법무위원회"에서는 한국 정보기관의 관여 혐의주권 침해 여부김대중의 재도일(再渡日)일본의 수사 상황 등을 정부 측에 물었다이에 대해 "다나카 이사지(법무성 장관)""나의 제6감으로 볼 때, 이 나라 비밀경찰의 소행이 림없다"라고 발언했다. 하지만 "오히라 마사요시(외무성 장관)""사건에 대해 단정할 수는 없으며, (한국 정부의)해명 이후 일본의 태도를 결정하겠다."고 답변했다이 사건으로 납치사건에 대해, "동아일보"를 비난한 논조를 올린 "요미우리신문"은 한국 문교부로부터 1973.08.26.일부로 "요미우리신문 서울지국"에 대한 "전면 폐국 명령"을 받았다(사건이 종결된 후, 요미우리신문 서울지국은 1980.01.15일에 다시 개국하게 된다).

이어 한국 정부는 1973.08.25"이상진(한국대사관 정무담당참사관)"을 통해, "일본 국회 등의 논의나 신문의 보도 등에서 한국 정부의 직원이 사건에 개입되어 있는 듯한 내용을 전개하는 것은 유감"이라는 뜻을 전달했다. 그러자 "다나카(법무성 장관)"은 이러한 태도를 가리켜 "매우 괘씸한 변명이다"라고 지적하며, "한국 정부의 그러한 태도는 우리 국회에 대한 중대한 간섭"이라고 비판했다.

"김재권(주일공사)""주일 대사관 1등 서기관" 신분으로 위장하고 있던, "김동운"에게 공작 계획의 수립을 지시했다. "김동운"의 계획안을 접수한 "이철희(차장보)하태준(해외공작국장)""윤진원(해외공작단장)"과 함께 계획을 검토했다.

"김대중""그랜드팔레스 호텔"에서 직접 납치한 사람들은 이미 여러 자료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윤진원(해외공작단장)윤영로(주일대사관 참사관)홍성채(일등서기관)김동운(일등서기관)유영복(이등서기관)유충국(이등서기관)한춘(일등서기관현지정찰임무)를 수행했다이들 "행동대원"은 젊은 말단직원들이 아니었다.

당시 직급으로 "윤영로한춘""이사관2급 갑", "홍성채김동운유영복""부이사관2급 을", "유충국""서기관3급 갑"으로 모두 상당히 고위직에 이른 인물들이었다이들은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 정보요원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어설퍼, 납치 현장에 수많은 유류품과 육안으로 봐도 뚜렷이 보이는 지문을 남겨놓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정보부원들"은 원래 "양일동(민주통일당 대표)" 묵는 2212호의 건너 옆방인 2210호실을 예약했는데, 마침 앞방인 2215호실의 문이 열려 있어, 두 방에 나눠서 요원들이 대기했다그 중 2215호에 우연히 "이북 담배가 있었다"는 것이고, 다량의 유류품을 남기게 된 것은 복도에서 "김대중"을 배웅 나온 "김경인(통일당 의원)"과 마주쳐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2210호실에 있던 납치대원들이 급하게 "김대중"을 끌고 내려가면서, 2215호실에 있던 "감시조"가 뒤처리를 해줄 것이라 생각했는데, "감시조"2210호실 상황을 보지 않고 그냥 빠져나와 버렸다너무나 어설펐지만 어쨌든 납치는 성공했고, "중정부원들"은 일본 경찰의 감시망을 따돌리고 "도쿄"빠져나와 무사히 "공작선 용금호"가 대기 중인 "오사카"에 도착하여 "김대중"을 국내로 실어 보냈다.

"윤진원"은 이 무렵 마음속으로 심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자신의 손으로 처리해야 한다면, "토막살인"을 하기에도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자기 손으로 "김대중을 살해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큰 부담이었다"김대중"이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윤진원도, 이후락도, 박정희도" 모두 자기 손에 피를 묻히기 싫어했기 때문이었다이어 1973.09.05, "경시청""김동운(주일 한국 대사관 일등서기관)"을 용의자로 지목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일본 야당" 측에서는 "한국 정부의 주권 침해에 대해 강력히 대응할 것"을 요청했으나, "일본 정부" 측은 "지금은 진상 규명이 첫째로, 현 단계에서는 주권 침해라고 볼 수 없으며, 지금과 같은 한국과의 관계를 변경할 생각은 없다"라고 답변했다.

09.17, "한국 정부""김대중 납치사건 수사자료"를 발표하고, "용금호에 대해 면밀히 조사했으나, 현재까지 김대중 납치 용의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라고 일본 정부에 회답했다이어 09.21일에는 "일본 국회"에서 "내각 불신임안"이 제출되었으나 부결되었다"불신임안"의 제출 이유에는 "김대중 납치 사건" 포함되었다11.01, "한국 정부"는 납치 사건에 대한 "주일 한국대사관" 직원의 관여 혐의를 인정하고, 사의를 표명하려는 의향을 표명했으며, "김동운(일등서기관)"을 면직시켰다(다만 이것은 김동운이 범인이라는 이유는 아니었다). 같은 날 "박 대통령""다나카 가쿠에이 총리"에게 납치 사건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다음날에는 "김종필 국무총리""일본"을 방문해, "다나카 총리"와 회담을 가졌다.

이듬해인 1974.08.06"일본" 수사당국은 수사 보고서를 발표해, "김대중 납치사건"의 범인 중 한 사람으로 "김동운"을 지목했다. 이에 한국 정부는 1974.08.14일 그의 혐의에 대해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고 "일본" 당국에 통보했다다음날,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일본"에서 출생성장한 재일 한국인 "문세광""박 대통령"의 암살을 시도했다. 이로 인해 "영부인 육영수"가 피격되어 사망했으며, "시나 에쓰사부로(자유민주당 부총재)" 09.19"일본 정부" 특사로 저격사건의 진사를 위해 한국을 방문, "박 대통령"과 회담을 가졌다.

1974.10.25, "일본" 당국은 "한국 정부의 수사결과는 납득할 수 없다", 상세한 설명을 요구했다이 요청에 따라 1975.07.22일 수사결과에 대해 다시 회답하면서, 사건 후 "김동운의 직위 해제" 이후 수사를 진행했지만, 바람직한 결과를 얻을 수 없어, 1975.08.14일에 수사를 중단했으며, 이후 비밀리에 수사를 진행했으나, 혐의를 입증할 증거가 없어 "불기소 처분"을 했으며, 이후 "도쿄에서 그의 언동이 품위에 어긋난다고 보여, 공무원의 지위를 박탈했다"는 요지를 통보했다.

1976년 말이나 1977년 초에 "중앙정보부"에서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KT사건 관여인사 일람표"를 보면, "윤진원"에 대해서는 사후관리 방안으로 "복직 또는 취직 알선"이라고 했다반면, "김동운"에 대해서는 본인이 보직 변경을 희망하므로, 상응한 보직을 부여할 것을 건의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김동운" 형식적인 해임 후 바로 복직되었음을 알 수 있다."김동운"은 해직 1년 후, 복직되어 "8국 부단장"에 임명되었으나, 2달 후 "일본"이 이 사실을 알고 항의해 와 "원남동"에 사무실을 얻어 직책도 없이 "부 이사관급" 대우를 받으며, 8년 동안 근무하다가 1982년 말 퇴직했다.

1975.07.23, "미야자와 기이치(외무성 장관)"이 한국을 방문하여, 양국의 정기 회담 개최에 합의하고 다음날 귀국했다. 귀국 즉시 "미야자와" "김대중 납치 사건의 결말이 지어졌다"고 발언했다그러나 "김형욱(전 중앙정보부장)"" 의회"에서 "김대중 납치 사건은 한국 중앙정보부의 범행"이라고 발언하면서 사건이 다시 불거졌다.

이어 1977.07.01, "일본 교토통신"과의 회견에서 증언을 두고, 신빙성이 의심스럽다고 발언한 "후쿠다 다케오(일본 총리)"를 비난하면서, "일 두 정부가 반성하지 않고 계속해서 나의 명예와 신뢰성에 상처를 입혀, 김대중 납치 사건의 진상에 대한 양국 국민의 눈을 가리려 한다면, 더욱 상세한 사실을 밝혀, 양국 정부의 죄상을 고발하겠다."고 밝혔다.

1987, 납치사건을 주도한 "이후락(전 중앙정보부장)"이 사건의 전말에 대해 인터뷰를 한 "신동아 10월호"의 인쇄 작업을 "안기부"가 막는 사건이 발생했다"이후락"의 인터뷰가 "일간 외교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신동아" 기자들은 이에 항의하며, 철야 농성을 벌였고, "동아일보" 측에서 이 사건을 보도하여 유력 외신들에게도 이 사건이 보도되는 등 파문이 확대되었고, 결국 "안기부" 측이 방침을 철회하면서 일단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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