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필용 사건 (권력 스캔들)"은 1973.04월, "쿠데타 모의 혐의"로, "윤필용(수도경비사령관)"과 장성ㆍ장교 등 13명을 처벌한 사건이다. 당시 "윤필용(수도경비사령관)"이 이후락(중앙정보부장)"에게, "박정희 대통령은 노쇠했으므로, 형님이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는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윤필용과 그를 따르던 군 간부들이 "쿠데타 모의 혐의"로 구속되어 처벌받은 사건이다.
1. 윤필용 사건 (권력 스캔들)
HR의 시련 시작ㆍ하나회(군 내부의 사조직)의 실체 확인 사건
당시 "박정희 정권"에서는 "박종규ㆍ이후락ㆍ윤필용ㆍ강창성"이 서로 권력을 견제하는 양상을 보였는데, "이후락ㆍ윤필용"이 가까워지자, 권력의 균형이 깨질 것을 우려한 "박정희"가 "윤필용"과 그 추종세력을 제거한 사건이라는 해석도 있다.
① 발 단
당시, "윤필용 소장(8기)"와 "이후락 중정부장"의 관계는 최고였음. 1973.04월 : "윤필용 소장(8기)"가 "이후락 중정부장"과 술자리에서, 말해 일어난 사건. "각하가 노쇠하시니 청와대를 물러나도록 하고, 건강이 더 약해지기 전에 후계자를 세워야한다. 각하의 후계자는 형님이십니다. 김춘추도 당나라에 갔다 와서, 왕이 되지 않았습니까?"
② 과 정
"하나회" 멤버의 대다수가 "윤필용"을 따름 → 군내부의 사조직 "하나회" 장교 조사 → 하나회 장교 10명(횡령ㆍ직권 남용ㆍ근무지이탈 죄로 구속) + 장교 31명 (예편) → "하나회"와 절친했던 "이원조(제일은행 상무ㆍ1933~2007)"는 사직 → "윤필용" 제거ㆍ"윤필용"과 가까웠던 한양대 총장(김연준)은 구속 → "대한일보" 폐관
※ 김연준 (金連俊ㆍ1914~2000): 한양대 총장(1959~1973년(15년간))ㆍ작곡가ㆍ언론인ㆍ함북 명천ㆍ연희전문학교 졸업ㆍ동아공과학원(한양대 전신) 설립ㆍ대한일보/기독교신문 창간
③ 결 과
"윤필용 사건"으로 방아쇠가 당겨지면서,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연쇄적으로 일어났고, 그 여파로 "박정희" 주변의 권력구도가 크게 변화했다. "박정희" 죽음을 가져온 구도는 "박정희" 자신만이 전모를 알고 있는 "윤필용 사건"에서부터 짜인 것이다. "김정렴(청와대 비서실장)"을 제외하고는 핵심 측근들 모두가 엄청난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윤필용"은 감옥으로 갔고, "중앙정보부장" 자리에서 물러나 있던 "김형욱"은 "윤필용"이 잡혀가자 바로 명예박사 학위를 받는다는 핑계로 "대만"으로 빠져나갔다가, "미국"으로 망명해 버렸다. "이후락"은 "윤필용 사건"으로 흔들린 입지를 만회하기 위해, "김대중 납치사건(1973.08)"에 적극 나섰다가 교체되었고, "강창성"은 토사구팽 당했다. "김대중 납치사건"은 재일동포 사회에 "반 박정희 정서"가 폭발하도록 하여, 1974.08.15일 "문세광의 박정희 저격미수(육영수 서거) 사건"을 낳고, "경호실장 박종규"는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후임자가 된 것이 "차지철"이고, "중앙정보부장" 자리는 "신직수"를 거쳐, "김재규"에게 돌아갔다.
이때 "윤필용"은 "징역 15년 형"에 벌금ㆍ추징금 약 2,600만 원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으로 "윤필용"과 가까운 장교 30여 명이 군복을 벗었으며, "중앙정보부"에서도 "이후락"과 가까운 "울산사단 30여 명"이 구속되거나, 쫓겨났다. 수사 과정에서 "윤필용"이 후원자 역할을 한 "하나회(전두환ㆍ노태우ㆍ정호용ㆍ김복동 등이 1963년 결성한 군부 내, 대구ㆍ경북 세력의 비밀조직)"의 실체가 밝혀지기도 하였다.
"제4공화국(유신체제) 박정희 정권" 내의 권력 향배에 큰 영향을 끼친 사건으로서, "이후락(중앙정보부장)"은 이 사건으로 인해, 권력의 눈 밖에 나게 되었고, 다시 대통령의 신임을 얻기 위하여 "도쿄에서 김대중을 납치"하는 무리수를 둠으로써. 정치적 몰락을 길을 걷게 되었다. "박종규 경호실장"을 통해, "윤필용"의 발언 내용을 전해들은 "박정희"는 "강창성(보안사령관)"에게 철저한 수사를 지시하였고, 결국 "육군본부 보통군법회의"에서 재판이 열렸다.
"쿠데타 모의 혐의"를 입증하지 못하자, "업무상 횡령ㆍ수뢰ㆍ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ㆍ군무이탈" 등 8개의 죄목을 적용, "윤필용"을 비롯하여, "손영길 준장(수도경비사령부 참모장)ㆍ김성배 준장(육군본부 진급 인사실 보좌관)"등 장성 3명과 "신재기 대령(육본 진급 인사실)"등 장교 10명에게 1~15년의 징역형을 선고하였다. 사건 관련자 중, 일부는 재심을 통하여 명예를 회복하였다.
2. 1973년 "윤필용 사건"에서 수사 도중, "하나회"의 실체가 드러났다.
"강창성 보안사령관"이 조사한 "하나회"는 (※ 유사한 "사조직" : 청죽회ㆍ만나회ㆍ알자회ㆍ나눔회)
• 정규 "육사" 출신을 기본, "정원제"로 가입, 10명 내외로, 회원 다수는 "영남 출신"이 점한다 • "비밀 점조직 방식"으로 조직하되, 가입 시 조직에 신명을 바쳐, 충성할 것을 맹세하게 한다 • "고위층"으로 부터 활동비를 지급받거나, "재벌"로부터 자금 징수 • 회원이 누릴 수 있는 혜택 : 진급ㆍ보직 상의 특혜
3. 윤필용 (尹必鏞ㆍ1927~ 2010ㆍ향년 82세ㆍ경북 청도군 출생)
군인 (육군 소장ㆍ수도경비사령부ㆍ월남전 참전)ㆍ국영기업인 (한국도로공사 사장ㆍ한국담배인삼공사 이사장)ㆍ"전두환"과 함께 "하나회"를 이끌었고, 1972년 말, "박정희"의 비서실장 등 15년을 모시고, 육군 방첩부대장(보안사)ㆍ사단장을 거쳐, 수방사령관이 됨.
1950년대 : 5사단 (박정희 소장) 근무 → 61.05.16 : 5ㆍ16 당시, 윤필용은 대령ㆍ박종규(경호실장)는 소령 → 5ㆍ16 이후, "최고회의 박의장 비서실장" 근무 → 전두환ㆍ손영길 대위 → 63년 : 육군 방첩부대장 (정승화 후임) → 68.01.21 : "청와대 습격사건 (김신조 등 북한특공대)"으로 "20사단장"으로 좌천 (후임 김재규 소장) → 68.10.20 : "주월 맹호부대" 사단장으로 파견→ "윤필용" 직계라인 11기와 만남 → 백마사단 29연대장(전두환 대령)ㆍ권익현 중령ㆍ김관중(김우중 형)ㆍ 맹호사단 1연대 3대대장(노태우 중령)→ 박희도 중령
※ 김재규(방첩부대장) : 비서실장인 "황인수(12기) 중령"을 "맹호사단 보안부대장"으로 보냄 → 강경 대립화 → 김재규 비서실장 + 김복동 중령(육사교장ㆍ중장예편) (김복동 : 80년대, "윤필용의 직계11기와 빗나가는 길을 가게 되는 계기)
• 73.03.02 : 박통→ "강창성" 보안사령관(8기)임명→ JPㆍ수도권 부대 체크당부ㆍ윤필용(8기)조사 지시→ 신범식(서울신문사 사장)→ 불경 메모작성→ 박통 보고ㆍ"강창성"이 "전두환 준장"에게 조사 지시→ 윤필용ㆍ이후락 조사
※ "손영길 준장"(윤필용 참모장)과 "이재걸"(감찰실장ㆍHR 오른팔): 울산출신으로 초등학교 이래, 친구 → 밀월은 친위그룹 내무의 질시를 유발 ※ 다른 시각 : "손영길 준장"(윤필용 참모장)과 "전두환 준장" 대립→ "전두환" 무사 (윤필용 소장ㆍ박종규 실장)의 대리전
• 72.10.20 : 박통 "방일계획 취소" 등 일방통보 (박종규 경호실장는 파악하지 못함) → 경호실장 박종규가 HR에게 무시당함 → 겉도는 피스톨로 전락
4. 사건 개요
1973년, 일어난 이른바 "윤필용 사건"은 "박정희 대통령" 측근 실세들 간에 "충성 경쟁과 파워게임"에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수도경비사령관 윤필용 소장(1927~2010ㆍ육사8기)"이 "이후락(1924~2009ㆍ군사영어학교1기) 중앙정보부장"과의 술자리에서 "박 대통령이 노쇠해 가니 형님도 차기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는 말이 "신범식(1923~1992, 고려대) 서울신문 사장"의 귀에 들어간 것이 화근이 됐다.
"신 사장"은 "박 대통령"과 골프를 하면서, "윤 장군"이 "이 부장"에게 했던 말을 흘렸다. 이를 전해들은 "박 대통령"은 격노했다. "박 대통령"은 곧바로 "강창성 보안사령관(1927~2006ㆍ육사 8기)"에게 철저히 조사하라고 지시했고, "강 사령관"이 "윤필용 장군"은 물론 그의 부하와 군대 내에서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까지 가혹한 조사와 조치가 벌어졌다.
① 사건으로 "윤필용" 뿐만 아니라, "손영길 준장(1932~ ㆍ육사11기"를 포함한 "장성 3명ㆍ장교 10명"에게도 "징역형"이 내려졌고, 이로 인해 그와 가까운 "장교 30여 명"이 군복을 벗었다.
1980년, "전두환 장군"이 정권을 장악한 이후, "강창성 장군"은 모진 곤욕을 치러야 했다. 이 일로 고초를 겪은 "강 장군"은 후에 정계로 들어가, "국회 5공 특위 위원"이 되어, "윤필용ㆍ전두환 장군"을 추궁하는 위치가 됐다. 동기생 "윤필용"과 "강창성 장군"의 악연은 두 사람의 죽음으로 막을 내렸다.
"박정희"는 "5사단장" 시절에 만난 "윤필용"을 총애하여, "7사단장ㆍ1군 참모장ㆍ군수기지 사령관ㆍ1관구 사령관" 등 새로운 보직을 맡을 때, 대부분 "윤필용"을 데리고 갔다.
② "윤필용"은 이른바 "5ㆍ16 반란 혁명주체"가 아니었지만, "박정희"와의 개인적인 인연 덕분에 "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ㆍ비서실장 대리ㆍ육군방첩대장ㆍ수경사령관"으로 20년간 최측근에서 "박정희"를 보좌했다.
"윤필용"은 "육군 방첩대장"으로 있던 1965.05월 "원충연 대령" 등이 주도한 "쿠데타 모의"를 적발하는 공을 세웠다. 1960년대 초반에 발생한 수많은 "반혁명사건"은 사실 모두 조작된 것인데, "원충연" 사건 만큼은 병력 동원이 계획된 실체가 있는 사건이었다. "원충연 대령"은 이 사건으로 1966년 "사형"을 확정 받았다가 이듬해 "무기징역", 1969년 "징역 15년"으로 감형을 받은 뒤, 1981년 "대통령 특사"로 석방됐다. 1984년 "캐나다"로 건너갔다가, "고문 후유증"으로 하반신 마비 등 고통을 겪다가 2004년 83세로 별세했다.
1968년 "1ㆍ21사건" 당시, "윤필용"은 이북에서 침투한 "특수부대원 김신조"를 생포한 당일 "방첩대 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하게 했다. 여기서 "김신조"는 침투 목적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시오"라고 답하여 충격을 주었고, "윤필용"은 며칠간 "김신조"에게 전향교육을 시킨 뒤, 깔끔한 옷을 입혀, 같이 텔레비전에 나와, 그가 얼마만큼 자유대한에 잘 적응하고 있는지를 과시했다.
③ "김형욱(1925~1979ㆍ육사 8기)"의 중앙정보부는 "윤필용"이 전과를 과시하려고, 무장공비를 영웅으로 만들었다고 아우성을 쳤다.
"김형욱"은 "중령"으로 "5ㆍ16 군사반란"에 참여하였고, 1963년 "중앙정보부장"이 되었다. 1964년 "인혁당" 사건ㆍ1967년 "동백림" 사건ㆍ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 등 "박정희"가 원하는 악역을 수없이 대신 처리했다. 그러나 1969년 "박정희"는 "김형욱"을 해임하였고, 이에 앙심을 품고 이후 "박정희 정권"의 비리를 폭로하는 저격수가 되었다. 1979.10.07일,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꾐에 빠져, 파리에 갔다가, 이후 행방불명되었다.
④ "육사 8기" 중 처음으로 별을 달고, "소장"으로 진급
"윤필용"은 1970.01월 "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이때 중앙정보부장은 "이후락", 청와대 경호실장은 "박종규"(1930~1985ㆍ육군종합행정학교ㆍ건국대), 보안사령관은 "김재규"(1926~1980ㆍ육사 2기)로 "수도경비사령관 윤필용"까지 4인이 "박정희 체제"를 물리력으로 떠받치고 있었다. "박정희"는 이들 4명의 측근을 적당히 경쟁시키고, 서로 견제하게 하면서, 권력을 관리했다. 육사 기수로는 2기인 "김재규"가 8기인 "윤필용"보다 한참 선배였지만, 나이는 1926년생인 "김재규"가 "윤필용"보다 1살 많았을 뿐이다.
두 사람의 팽팽한 신경전은 "윤필용"의 과감한 공격으로 끝이 났다. "수경사 내의 보안부대"가 자신의 전화를 도청하고 있음을 눈치 챈 "윤필용"은 1971.08월 "헌병대"를 동원하여, "수경사" 영내의 "보안대 사무실"을 폐쇄하고, 도청 테이프를 압수했다. "김재규"는 1달 후, "보안사령관"에서 해임되어, "3군단장"으로 나갔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군부 내에서 "윤필용"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윤필용"이라는 이름은 점차 정치권을 넘어, 대학가에까지 알려졌다. 1971.09.30일, "고려대"에서는 대표적인 부정축재자 3인으로 "이후락ㆍ박종규"와 함께, "윤필용"을 꼽는 대자보가 나붙었다. 며칠 후인 10.05일 새벽, "수도경비사 헌병" 30여명이 "고려대"에 난입하여, 학생 5명을 "수경사"로 연행해가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후 대학가의 규탄 시위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고, "박정희 정권"은 결국 10.15일 "위수령"을 발동하여, 각 대학은 군홧발에 짓밟혔다.
⑤ "유신"을 단행하기 이전에도 "박정희"는 "2인자"를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조금 치고 나간다 싶으면, 다른 측근들의 견제가 집중되었다. "김종필(1926~2018ㆍ육사 8기)" 세력이 칼을 맞았고, "김성곤" 등 "4인 체제(김성곤ㆍ백남억ㆍ길재호ㆍ김진만)"도 몰락했다.
"유신"을 전후한 시기에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의 역할이 증대되었다. 1972.05월, "이후락"이 "평양"에 가서 "김일성"을 만나고 돌아와, "7ㆍ4 남북공동성명"을 이끌어내자 그의 대중적 인기는 크게 치솟았다. 유신의 기획ㆍ실행 과정에서 "이후락"의 역할은 뚜렷했다. 이 사건은 "이후락"의 명성ㆍ권위가 올라가는 계기가 됨과 동시에, "박정희"의 견제ㆍ제거의 대상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⑥ "윤필용"도 처음에는 "이후락"을 견제했으나, "이후락"에 대한 "박정희"의 신임이 두터운 것을 보고 그와 손을 잡았다. "수경사 참모장"이던 "준장 손영길"은 "이후락"의 "울산농고" 후배이기도 했다.
1957년, "박정희"의 전속 부관이 된 이래 "박정희ㆍ육영수" 부부의 총애를 받아온 "손영길"은 "박정희 체제"의 버팀목이어야 할 "중앙정보부장ㆍ수경사령관"이 불편한 사이여서는 안 된다고 보고 둘 사이의 화해를 주선했다.
⑦ "김재규"의 뒤를 이어, "보안사령관"을 맡은 "강창성"은 "이후락ㆍ윤필용"의 구도에 맞서, "박종규"와 손을 잡았다.
이들 4인 이외에 "박정희"의 측근 한 사람이 등장한다. "청와대 대변인ㆍ문공부 장관"을 지낸 뒤, "서울신문사 사장"으로 있던 "박정희"의 골프 파트너 "신범식"이다. "신범식"은 "윤필용이 이후락에게 박정희 다음을 준비해야 한다."는 불경스런 이야기를 했다는 것을 "박정희"에게 고해바친다. "신범식"도 자신이 "윤필용 사건"에 어느 정도 관여된 부분은 인정하지만, 다만 그는 골프장에서 "박정희"에게 "윤필용 이야기"를 한 것은 "유신" 직후인 1972.10월 말이고, 사건이 터져 "윤필용"이 잡혀간 것은 이듬해 3월로 상당한 시간 차이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박정희"로부터, "윤필용"을 조사하고, 필요하면 "이후락"도 잡아들이라는 특명을 받은 "보안사령관 강창성"은 뒤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은 동기생인 "윤필용"을 구제하고 사건이 "이후락"으로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고 변명하지만, 실제 일이 진행된 것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윤필용 장군" 전속부관이었던 "예비역 소령 정봉화(육사18기)"씨가 쓴 자서전 "신작로에 남겨진 발자국"에 따르면, "강창성"은 겉으로는 "윤필용"을 돕는 척하면서, 도청 장치를 한 음식점으로 "윤필용"을 불러내 유도심문을 하고, 그 내용을 "보안사"에서 적절하게 가공해, "박정희"에게 보고했다.
⑧ "윤필용"은 크게 보면, "쿠데타 음모", 작게 보면 "불경죄"로 잡혀갔지만, "박정희ㆍ강창성"은 그를 파렴치한 "부정축재자"로 처벌했다.
"박정희"의 여색을 거론한 "괘씸죄" 때문인지, 사건의 판결문이나 배경에 대한 해설은 이들이 "탕녀나 유녀들과 어울려 방탕생활을 일삼았고, 치부와 엽색행각을 했다"며, "1951년도 민족의 이름으로 단죄된 국민방위군사건 피고인들이 무색할 인면수심의 향락을 만끽했다"고 비난했다.
그는 2년간 옥고를 치른 뒤, 1975년 석방되었고, 1980년 "하나회"가 주축이 된 "신군부"가 집권하자 "전두환"의 도움으로 "한국도로공사 사장ㆍ한국담배인삼공사 사장" 등을 지냈다. 그리고 죽은 직후에 아들인 "윤해관(미주제강 회장)"이 재심 청구를 하여, "보안사의 고문으로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취지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⑨ "강창성"은 "윤필용" 등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육사11기 이하"의 장교들로 "윤필용"이 후견인 역할을 하는 "하나회"라는 비밀 사조직이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강창성"은 사건을 확대하여, "하나회"도 본격적으로 수사했다. "하나회"는 "육사11기" 중 "영남 출신 생도(전두환ㆍ노태우ㆍ김복동ㆍ최성택, 박병하 등)" 5명이 "5성회"를 조직한 것이 시초이다. "전두환" 주도로 육군사관학도들은 "5ㆍ16 군사정변" 지지 시위를 벌였고, 이는 "박정희 소장"의 관심을 끌었다. 이후 "5성회"는 회원을 지속적으로 받아들여, 확대 개편 과정을 여러 번 거쳤다. "손영길"은 "박정희"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 "전속부관"으로 2년 반 동안 모신 바 있으며, 이 때문에 "박대통령"이 많이 총애하던 인물이다. "전두환"은 처음에 "하나회"를 만들 때, "박정희"와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그를 영입했다.
"수경사 참모장"으로, "육사11기"의 선두주자였던 "손영길"은 "하나회" 관련 인물임과 동시에, "이후락"의 고교 후배로 "이후락ㆍ윤필용"을 연결시켜준 대가(?)로 이 사건과 깊게 관련되었다. "손영길"은 "전두환ㆍ노태우"가 위관장교 시절, "반혁명사건"에 연루되어 위험한 지경에 빠졌을 때 적극적으로 그들을 구명해준 적이 있다. 그래서 그는 "전두환ㆍ노태우"에게 밖에서 구명운동에 힘써 줄 것을 부탁했다.그러나 "손영길"이 곤경에 처했을 때, "전두환"은 그 자신이 존망의 위기에 처해 있다고 보고 "손영길"의 구명운동에 나서지 않았다. 결국 그는 징역 3년을 선고 받고, 강제 예편 당했다. 1976년 만기 출감했고, 사건이 있은 후, 38년이 지난 2011.01.20일, 재심을 통해 무죄 판결을 받고 명예를 되찾았다.
당시 "전두환ㆍ노태우"도 위기에 빠졌지만, "박종규ㆍ서종철(1924~2010ㆍ육사1기ㆍ당시 국방부 장관)ㆍ진종채(박정희의 대구사범 후배로, 전두환의 전임 보안사령관)" 등 영남 출신 장성들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였다. 그들은 "박정희"에게 "강창성"을 "보안사령관"에 그대로 두면, "경상도 장교의 씨가 마르겠다"며, "박정희" 자신이 군대 내의 친위대로 육성한 "하나회가 초토화되는 것"을 막아줄 것을 요청했다. "윤필용"을 잡은 "강창성"은 "영남 군벌"의 반격으로, 1973.08월 "보안사령관"에서 밀려나, "3관구 사령관"으로 좌천되었다가, 1976년 예편되었다.
⑩ 아무리 피의자라지만, 일국의 장성을 잡아다 모진 고문을 가한 "강창성"은 "전두환" 등 "신군부"가 집권한 뒤, "전두환"은 1980년 여름, "강창성"을 "국군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로 연행하여, 고문을 하고 나서, "삼청교육대"에 보내 버렸다.
무려 2년 동안 4번에 걸쳐, "삼청교육대"에서 혹독한 수난과 함께, 2년 6개월간 감옥살이까지 해야 했다. 이후 "국회의원"으로 화려하게 복귀하여, "5공 특위"에 관여하게 되었다.
⑪ "윤필용 사건"과 관련해 고초를 겪은 민간인으로는 당시 "제일은행 후암동 지점 차장"이었던 "이원조"와 "한양대학교" 총장인 "김연준"이 있었다.
"이원조"는 "노태우"와 고교 동창이며, "전두환"과도 이전부터 잘 알고 지냈고, 이를 계기로 "육사 11기" 출신 장교들과 자주 어울린 것이 화근이 되었고, "김연준"은 "윤필용"과 친하게 지낸 것이 화근이 되었다. "전두환(제1공수여단장)"은 "이원조가 잡혀갔다"는 이야기에 당황하며, 한동안 부대 바깥에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전두환"은 부대 내에 칩거하면서, "박종규"와 연락했고, "박종규"를 만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집에 들어갔다고 한다.
⑫ "이원조"는 "전두환의 신군부"가 집권하자, 1980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자문위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해 9월 "전두환"이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하자, "대통령비서실 소속 경제비서관"이 되었다. 1986년, 은행권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은행감독원장"에 취임했으며, 1988~1993년까지 "노태우ㆍ김영삼" 대통령 시절, 2차례에 걸쳐 "민정당ㆍ민자당 전국구 국회의원"을 지냈다. 당시 막강한 정치자금 동원력을 과시하면서, "금융계의 황제"로 불렸다. 1995년, "노태우 대통령"의 수천 억대 "비자금 조성 사건"에 연루된 그는 뇌물을 모아 전달한 혐의가 인정돼 대법원에서 징역 2년6개월의 확정 판결을 받고 옥살이를 했다가, 2000년 "8ㆍ15특사"로 사면 받았다.
⑬ 사실 "윤필용 사건"으로 가장 큰 혜택을 본 사람은 "박종규"였다.
1973년, "박종규"는 권력다툼을 하던 "윤필용(수도경비사령관)ㆍ이후락(중앙정보부장)" 등이 "윤필용 사건ㆍ김대중 납치사건"으로 실각하자, "2인자 노릇"을 하였다. 이 때, "윤필용ㆍ이후락"을 몰아내고, 자신이 "중앙정보부장"이 되기 위해 "윤필용 사건"을 크게 키웠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1974.08.15일,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으로 인하여, "경호실장"에서 물러났다. 1978.12월,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1980.05월, "신군부"에 의해,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지목되어, 조사를 받고 재산을 헌납해야 했다. 이후 죽기 전까지 "IOC 위원"으로 지내다가, 1985년 별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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