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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1 • 2차 세계 대전 • 독일 • 일본

사건- 1941 : 미국의 개입ㆍ소련 침공 (바르바로사 작전)

by 당대 제일 2022.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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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처칠 수상"의 거듭된 지원요청에 그동안 중립을 고수하던 "미국"이 연합국을 지원하기 시작한다. 그 사이, 서유럽을 장악한 "독일ㆍ소련"의 갈등이 서서히 고조되고, 독일은 마침내, 소련을 침공하는 "바르바로사 작전"을 시작한다.

 

1. 1941.03 : 미국의 개입

1940.06월, 독일이 영국을 침공하기 시작하자, 다급해진 영국 수상 "처칠(1874~1965ㆍ89세ㆍ1940~1945ㆍ1951~1955)"은 미 대통령 "루즈벨트(1882~1945ㆍ63세ㆍ1933~1945)"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영국마저 독일에게 패한다면, 미국은 나치에 통일된 유럽과 맞서 싸워야 할 것무기를 지원해 달라고 호소

그러나 "세계 대공항"을 이겨내기 위해, "고립주의 정책"을 펼치던 미국은 여전히 전쟁에 참전하고 있는 어떠한 국가도 지원하지 않겠다는 입장이었다. 유럽에서 처음 전쟁이 발발했을 때도, 미국 국민들의 반응은 "중립을 유지하자는 것"이었다.  그나마 전쟁국가와의 교역을 금지화 했던 "중립법"이 개정되면서, 영국을 비롯한 연합국에 무기를 수출하며, 수익을 거두고 있었다. 이때는 무기를 구매하기 위해서는 대금을 현금으로 지불해야만 했고, 운송까지 구매자가 직접 책임져야하는 원칙을 내세웠다.

결국 처칠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립주의 정책"을 선언한 루즈벨트는 1940.11월 3번째 대통령 연임에 성공했다. 루즈벨트가 대선 승리를 만끽하고 있는 사이, 영국은 또 다른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독일과의 전쟁으로 피폐해진 영국은 자금난에 직면하게 됐고, 더 이상 미국으로부터 전쟁 물자를 구입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1940.12월, 위기에 봉착한 처칠은 다시 한번 루즈벨트에게 도움을 청하는 장문의 편지를 써서 보냈다.

• 내용 : 놀랍게도 편지 내용은 구걸이 아닌 명령어조가 담겨있었는데, 그 내용은 사실상 전쟁물자 공급은 물론, 운송까지 무상으로 지원해 달라는 것이었다.

"미국과 영국은 민주주의의 현재와 장래를 위해, 함께 싸워왔다.  그런데 지금 그 위기가 오고 있다. 독일의 유럽 외 침략을 막아야만 한다.  독일ㆍ이탈리아ㆍ일본의 위협에 맞서려면, 연합군 측은 군사지원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지금 무기와 탄약을 생산하는데, 모든 재산을 쏟아 붓고 있다.  만일 미국이 지원해 주지 않는다면, 영국은 더욱 잔인한 궁핍함에 시달릴 것이다  그리되면 미국도 영국에 상품을 팔지 못해, 대규모 실업난이 닥칠지 모른다.  이 편지는 단순히 도움을 호소하기 위한 글이 아니다.  우리의 공동목표를 위한 최소한의 행동이자, 성명일 뿐이다."

영국이 지속적으로 지원을 요청해오자, 루즈벨트는 고민하기 시작했고, 결국 영국을 지원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는 조국의 아들들을 절대 외국의 전쟁터에 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해왔기에, 처칠의 기대에 부응하면서 국민들도 수긍할 수 있는 합리적인 이유가 필요했다. 특히 고립정책을 지지하는 공화당이 의회를 점령하고 있는데, 처칠이 보내온 단 한 장의 편지만으로 이들을 설득시킬 수는 없었다. 1940.12.17일 루즈벨트는 "라디오 연설"을 통해, 다음과 같이 연설하며, 의회와 국민들을 설득시켰다.

"옆집에 불이 났는데, 그 불을 끄지 않으면, 우리 집으로 불이 옮겨 붙을 수 있습니다.  그때 옆집 사람들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방호스를 빌려달라고 하면, 여러분은 빌려주지 않겠습니까?  옆집 사람들의 불을 끄는 것은 우리 집을 구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어려움에 처한 그들에게 소방호스 비용을 지불하라고 요구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불을 끄고난 후에 다시 소방호스를 돌려줄 것입니다."

이러한 연설을 통해 루즈벨트는 국민들의 호응을 이끌어냈고, 곧 영국을 지원할 수 있는 법안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유럽에서의 전쟁은 불필요하며, 고립주의를 견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대여론도 만만치 않았다.

1941.02월, 처칠은 "라디오 연설"을 통해, 다시 한번 미국 국민들에게 지원을 호소했다. "영국은 굴복하지 않을 것이며, 포기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장비를 주면, 우리가 끝장내겠습니다. (Give us the tools, and we will finish the job)" 수많은 명언을 탄생시켰던 이날 처칠의 연설은 불안에 떨던 영국인들에게 힘을 불어넣었고, 미국인들을 고무시켰다. 

그리고 1달 뒤, 루즈벨트는 우여곡절 끝에 의회를 설득시키는데 성공했고, 마침내 연합군을 지원하는 "무기대여법"이 제정되었다. "무기대여법"이 발효됨으로써, 미국의 방위에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나라에는 군수물자와 장비를 공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루즈벨트는 즉시 영국을 지원할 것을 결정했고, 미국의 전쟁물자들이 대서양을 건너, 영국으로 쇄도하기 시작했다. 이는 미국이 "세계 2차 대전"에 참전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연합국에 제공된 첫 무상지원이었다. 이후 전시 생산체재로 돌입한 미국은 유례없는 생산 능력을 과시하며, 각종 무기를 생산해 냈고, "연합국의 병기고"로 변해갔다.

2. 1941.06~12 : 바르바로사 작전ㆍ독소전쟁 시작 (← 독ㆍ소갈등)

"프랑스의 항복"으로 독일이 서유럽을 지배하자, 소련의 스탈린은 독일의 소련 침공을 대비하기 시작했다. 물론 여전히 양국간 "불가침 조약"이 유효했기 때문에, 겉으로는 아무런 갈등도 없는 듯 보였지만, 스탈린은 주변국을 병합해, 독일군이 모스크바에 이르는 거리를 연장시키기로 결심한다. 소련의 방위선을 전진시키기 위한 1번째 조치는 과거 "상호 원조조약"을 맺었던 "발트3국(에스토니아ㆍ라트비아ㆍ리투아니아)"의 병합이었다. 1940.08.01일, 소련은 "발트3국"을 차례로 위협해 1주일 만에 자국영토로 편입시켰다.

그리고 독일의 침공위협을 받고 있던 "유고슬라비아"와의 관계를 개선했고, 독일에 석유를 공급하던 "루마니아"를 압박해, 자신들의 세력권으로 끌어들이려는 시도를 보였다. 소련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자, 독일은 8월말 "루마니아의 보호국"을 자처하며, 군사적 점령을 해버린다. 게다가 9월에는 "핀란드 정부"로부터 "통과권"을 얻어내, 더 이상 소련이 핀란드에 압박을 가하지 못하도록 견제했다.

이처럼 소련ㆍ독일의 갈등이 서서히 수면으로 드러나는 상황 속에서, "군국주의"를 내세우는 "3개국(독일ㆍ이탈리아ㆍ일본)"이 "삼국동맹"을 체결했다. 이들은 각자의 지배권을 인정하면서, 제3국으로부터 공격을 받았을 때, 적극적으로 원조할 것을 약속했다. 소련과의 전쟁을 생각하고 있던 히틀러는 내심, 일본이 소련의 뒤를 쳐주기를 바랐던 것이었다. 독일은 연합국에 무기를 판매해, 수익을 거두고 있는 "미국을 견제하기 위한 조치"라고 해명했지만, 소련은 자신들을 겨냥한 동맹임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사실 히틀러는 동맹을 체결하기 2달 전부터, 이미 소련침공을 준비할 것을 독일 군부에게 명령한 상태였다. 이러한 속셈을 가진 채, 소련ㆍ독일은 "베를린"에서 "외무장관 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하였다. 각자의 세력권을 다시 설정해, 새로운 질서를 세우자는 취지였다. 이 자리에서 소련은 "핀란드의 병합ㆍ루마니아에서의 독일군 철수ㆍ불가리아와 터키해협에서 소련의 이익을 보호해 달라"고 요구했다. 자신들의 세력권 밖에 있는 "핀란드ㆍ루마니아ㆍ불가리아"까지 쟁취하려는 속셈이었다.

소련이 터무니없는 요구를 해오자, 독일은 더 이상 양국관계가 진전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1940.12.05일, 히틀러는 "소련 침공계획"인 "바르바로사 작전"을 승인하게 되고, 이듬해 1941.05.15일 까지 모든 준비를 갖추라고 지시한다.  한편 소련은 독일과의 전쟁에 앞서, 동부지역의 일본 국경을 안정시켜야만 했다. 당시 중국 만주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일본은 이후 "동남아시아 지역"을 식민지로 삼으려는 야욕을 품고 있었다. 즉, 소련과 일본은 서로의 중립이 썩 나쁘지 않은 장사였던 셈이었다.

그리하여 1941.04.13일, 체결된 소련과 일본의 "중립조약"은 서로의 영토를 보전하고, 양국간 "상호불가침"을 약속했다. 이로써 소련은 "만주국ㆍ중국 북부지역" 등을 일본의 세력권임을 인정하는 대신, 독일과의 전쟁에 전력을 다할 수 있게 된다. 그 사이 독일은 "발칸지역"을 침공해, 자신의 세력권으로 편입시킴으로써 소련을 압박할 계획이었다. 소련에 비해, 상대적으로 국토가 작은 독일이 다양한 "진격로"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히틀러는 "발칸반도" 국가들에게 "강온양면책"을 구사했고, "헝가리ㆍ루마니아ㆍ불가리아"는 자발적이거나, 반 강제적으로 "추축국의 일원"으로 합류했다. 이때 합류한 "헝가리ㆍ루마니아"는 "자국군"을 동원해, 훗날 "소련 침공전"을 주도적으로 앞장서게 된다. 그런데 "유고슬라비아ㆍ그리스"가 반기를 들고 나서자, 히틀러는 망설임 없이 무력을 동원했다. 

1941.04.06일, 독일군의 침공을 받은 "유고슬라비아"는 34만 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개전 10여일 만에 항복을 선언했다.  "유고슬라비아"의 항복을 받아낸 독일군은 곧장 "그리스"로 넘어가, 1주일 만에 "그리스 본토"를 점령해 버린다. 이로써 "발칸반도"를 완전히 장악해버린 독일은 마침내, 소련을 침공하는 "바르바로사 작전"을 눈앞에 두게 된다.

3. 바르바로사 작전 (Operation Barbarossaㆍ붉은 수염 작전)

"제2차 세계대전" 동부 전선에서 "나치 독일"이 "소비에트 연방"을 침공한 작전 명칭이다. 작전명은 "신성 로마제국 프리드리히 1세"의 별명이었던 "바르바로사(붉은 수염)"에서 유래했다. "프리드리히 1세"는 명군으로 불린 전설적 인물로, 동방에 관심을 기울였기에, "대 소련전"에 걸맞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일설에는 "붉은 수염"은 "스탈린"을 암시하기도 한다고 한다.

또한 "독일육군"은 공격 작전명에 색깔이름을 붙이는 전통이 있어, 이것의 발전형이라고도 생각된다. 원래 목표는 "소비에트 연방의 유럽 부분"의 정복이었으나, 실패했다. 이 실패는 "히틀러"의 전체 전쟁작전에 차질이 생기게 했고, 결국은 "나치 독일"의 패배의 원인이 되었다.

• 일 시 : 1941.06.22~1941.12.          장 소 : 벨라루스우크라이나리투아니아라트비아에스토니아러시아의 유럽 부분           결 과 : 전략적으로 "추축군"의 작전 목표 달성 실패           작전명 : 바르바로사(붉은 수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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