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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이승만 • 김구 • 박정희 • 정당

박정희 ① 대통령 (5~9대ㆍ1917~1979ㆍ62세)

by 당대 제일 2022. 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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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2군 부사령관(육군 소장)에 재직 중, 청년장교들과 함께 "5ㆍ16군사쿠데타"를 주도했다. 7월 군사정변의 최고 권력기관인 "국가재건최고회의(입법권ㆍ사법권ㆍ행정권을 장악)" 의장에 취임해 2년 7개월간의 군정을 실시했으며, 1962.03월 "윤보선 대통령"의 사임으로 "대통령 권한대행"도 함께 맡았다. 1963.08월 "대장"으로 예편하고, 1963년에 창당된 "민주공화당"에 입당해 총재에 추대되었다. 1963년, "5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래, 9대에 이르기까지 장기 집권했다.

 

1.  박정희 (朴正熙다카키 마사오1917(경북 구미)~ 1979.10.26(서울) 62)

5~ 9대 대통령호 :  중수 (中樹)키 :  165cm빈농의 5 2녀 중 막내ㆍ무교

1961, 2군 부사령관(소장)에 재직 중, 청년장교들과 함께 "516군사정변"을 주도했다. 7월 군사정변의 최고 권력기관으로 입법권ㆍ사법권ㆍ행정권을 장악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취임해 2 7개월간의 군정을 실시했다.

보릿고개를 없앴고, 근대화와 경제성장 달성이란 업적을 남겼지만, "독재자"란 비난도 같이 받았다. 경제발전에 집중했으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유신을 선포했으나, 18년 장기집권 끝에 1979.10.26일 측근이었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에 쓰러졌다. 부인 "육영수 여사" 1974.08.15 "재일동포 문세광"이 쏜 총탄에 맞아 타계했다.

박정희

출 생 : 경북 구미시 상모동  (당시,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

사 망 : 1979.10.26 (62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

매 장 : 국립 서울 현충원 (서울 동작구 사당2)

정 당 : 남조선노동당주공화당

 여 자 (3) : 처 (2)약혼자 (1)

 1  : 김호남 (金好南) : 1920년 생 (3살차)ㆍ결 혼(1936~1950)ㆍ당시 16-19세ㆍ1녀  이혼 후 출가하여, "구니 (법명 : 월상)"가 됨→ 1950년에 육영수와 결혼

 약혼자 : 이현란 (이대1년) : 1924년 생 (7살차)ㆍ동거 (1948~1950)ㆍ당시 24- 31세ㆍ1남 사산  아이가 생후 6개월 만에 사망하고, 1948.10월 "여순ㆍ반란 사건"으로 "박정희"에게 문제가 생기자, 그를 떠나 "요정" 등을 전전하였다.

 2  : 육영수 (陸英修) : 1925년 생 (8살차)ㆍ결혼 (1950~1974)ㆍ당시 25- 33세ㆍ1남 2녀  1974.08.15일, 8ㆍ15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조총련계 "문세광" 쏜 흉탄에 맞아 사망

자 녀 :  5 명 (아들 2ㆍ딸 3 )

 1째 딸 : 박재옥 (朴在玉ㆍ1937~2020ㆍ83세동덕여대 가정학과) : 김호남의 딸ㆍ사위 : 한병기 (1931~2017ㆍ86세ㆍ갑종1기): 육군대위외교관국회의원설악관광케이블카 회장

 1째 아들 : 미상 ( ? ~ ?ㆍ생후 6개월 후 사망) : 이현란의 자

 2째 딸 : 박근혜 (朴槿惠ㆍ1952~ ㆍ서강대 전자공학과) : 18대 대통령 (2013.02~2017.03)

• 3째 딸 : 박근령 (朴槿令ㆍ박근영ㆍ1954~ ㆍ서울대 작곡과) : 전, 육영재단 이사장ㆍ1혼 (1982): 류청 (풍산금속 사장 장남, 6개월후 이혼) 2008년 신동욱과 재혼 (14살 연)사위 : 신동욱(1968~ ㆍ남서울대 광고홍보학과) 공화당 총재

• 2째 아들 박지만 (朴志晩ㆍ1958~ ㆍ육사37기) : 육군대위ㆍEG대표이사 회장ㆍ2004년 서향희와 결혼  (16살 연하ㆍ4남)며느리 : 서향희 (1974~  ㆍ고려대 법학대학원) : 법무법인 새빛 대표변호사ㆍ국민대 초빙교수

가 족 : : 박성빈 (朴成彬1871~ 1938) : 백남의 (白南義1872~ 1949) 5남2녀중 막내

1째 형 : 박동희 (朴東熙1895~ 1972)

2째 형 : 박무희 (朴武熙1898~ 1960) "장승원 (장택상 부)" 집안의 "소작농머슴"

3째 형 : 박상희 (朴相熙1906~ 1946) 가장 따랐던 형김종필의 장인 (박영옥의 부)

1째 누나 : 박귀희 (朴貴熙1902~ 1974)

2째 누나 : 박재희 (朴在熙1913~ 1996)

학 력 : 1926( 9)~ 1932(15) : 구미보통학교1932(15)~ 1937(20) : 국립 대구사범학교  1940 (23): 만주국 육군 군관학교 (2기ㆍ신징 군관학교) 입학 → 1942 (25): 신징 군관학교 졸업 (1등/ 240명)ㆍ일본 육군사관학교 (57기) 성적우수자 편입학 → 1944 (27): 일본 육군사관학교 졸업 (3등/300명)  → 1946.09~12 (29) : 조선경비 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전신) 단기과정 2기생  1956(39)~ 1957(40) : 육군대학교

저 서 : 우리민족의 나갈길지도자론국가와 혁명과 나민족의 저력민족중흥의 길

재 산  :  스위스 계좌(?)ㆍ정수장학회영남대학교서울 어린이대공원육영재단 부산일보 (주식 100%)MBC (주식 30%)경향신문 부지 (서울 중구)

경력

경력  : 56789대 대통령  /  육군대장 예편 (병과 : 포병) 

1932 (15): 대구사범학교 입학 1936 (19) : 김호남(3년 연하)와 결혼  1937 (20)~ 1940 (23): 대구사범학교 졸업 (꼴찌)문경 보통학교 교사 (3년) 1940 (23): 만주국 육군 군관학교 (2기ㆍ신징 군관학교) 입학 → 1942 (25): 신징 군관학교 졸업 (1등/ 240명)ㆍ일본 육군사관학교 (57기) 성적우수자 편입학 → 1944 (27): 일본 육군사관학교 (3등/300명) 졸업 → 관동군 견습사관 → 만주국군(일본군) 보병 제8단 (열하성 흥륭현 소재) 소위 임관 1945 (28): 한국 광복군 제3지대 제1대대 제2중대장 (1945.09.21일, 북경에서 활동하던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어, 광복군 장교로 활동하다가, 1946.05.10일, 미 해군 수송선을 타고 부산항을 통해 한반도로 귀국) → 1946.09~12 (29): 조선경비사관학교 ( 2기ㆍ현, 육군 사관학교 전신)ㆍ소위 임관 (1946.10월, 대구폭동 중 3째 형 박상희 사망)→1948 (31) : 육군 소령ㆍ육군본부 작전정보국: 1948.11.11일, "남로당 가입"등 좌익혐의로 "군 수사당국"에 체포, 1심에서 "무기징역", 2심에서 "징역 10년ㆍ징역은 집행정지ㆍ강제 예편" 1949 (32) : 육군 정보국 "문관" 근무 ("정선엽" 장군의 배려)  

1946.10월, 대구10.1 사건 폭동 중, 3째 형 "박상희(독립운동가)"가 일제순사 출신 구미 경찰관들과 대립하다 사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게되고, 사건 직후 형의 친구이자, 사회주의자이던 "이재복"의 권유로, "반 이승만파"이던 "남조선로동당"에 입당하여 활동하다가, "김창룡"이 주도한 숙군에서 "1948.10월 여수ㆍ순천 사건" 연루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정보국"에 "남조선로동당" 조직ㆍ동료들을 밀고한 후, "백선엽(육군본부 정보국장)"의 최종 면담에서 사형을 면하였다.

1950 (33) : "한국전쟁"으로 "현역(소령)" 복귀육군 정보국 제1과장 → 1953 (36): 육군 "준장"  → 1955 (38): 육군 5사단장 → 1957 (40): 육군 7사단장 → 1958 (41): 육군 "소장" → 1960 (43): 2군 부사령관 → 1961.05.16 (44):  516군사쿠데타 주도 → 1961 (44)~ 1963 (46): 2대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 → 1962 (45)~ 1963 (46) : 대통령 직무대행 → 1962 (45)~ 1962 (45): 내각 수반 → 1963.08 (46): 육군 대장예편 → 1963 (46)~ 1979 (62): 2대 민주공화당 총재 → 1963.12 (46)~ 1967(50): 5대 대통령 → 1967.07 (50)~ 1971(54): 6대 대통령 → 1971.07 (54)~ 1972(56): 7대 대통령 → 1972.10.17 (56): "유신쿠데타" 자행 → 1972.12.15 (56): "통일주체국민회의" 의장, 대통령 당선 → 1972.12 (56)~ 1978 (61): 8대 대통령 → 1978.12 (61)~ 1979 (62): 9대 대통령 → 1979.10.26 (62) : "김재규(중앙정보부장)에게 피격서거

2.  출생

"박정희 (1917년 생)"의 어머니인 "백남의(白南義ㆍ1872~1949)"는 끼니를 잇기 어려운 가난에 먹을 입이 늘어나는 것도 문제지만, 만산 (당시 45)인데다가, 장녀인 "박귀희 (朴貴熙ㆍ1902~ 1974ㆍ당시 15)" 같은 해에 임신을 하여, 동네사람들 보기가 부끄러워 낙태를 여러 번 시도 했다고 한다당시는 40살만 되면 노인이라고 해서 뒷방신세를 지던 시절이었으니, 충분히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초가집

바로 손위 누나인 차녀 "박재희(朴在熙ㆍ1913~ 1996)"의 증언에 따르면, 뱃속의 아기를 지우려 했던 과정은 이렇다.

"시골사람들이 흔히 쓰는 방식대로 간장을 한 사발이나 마시고 앓아누우시고, 밀기울을 끊여서 마셨다가 까무라치기도 하고, 섬돌에서 뛰어내려 보기도 하고, 장작더미 위에서 곤두박질 쳐보기도 하고,  아무리 해도 안 되니까 수양버들 강아지의 뿌리를 달여 마시고는 정신을 잃어버렸대요. 한 대여섯 날 만에 건강을 되찾았는데, 뱃속의 아기가 놀지 않더랍니다 이제 됐구나 하곤 생각했는데 며칠 지나니까 또 놀더래요 그 뒤 어머니는 일부러 디딜방아의 머리를 배에다 대고 뒤로 자빠져버렸어요 낙태를 시키려고 스스로 방아에 깔려버린 것이지요. 그때 나는 5살이었는데 그 광경을 보고 어머니가 죽는다고 울고불고 했답니다."

이 대목을 가지고 박정희의 전기는 그의 출생이 "매우 극적이면서도 숙명적이라고 할만 했다"는 소감을 피력한다. 그런 상황에서 낙태를 위해 온갖 노력을 했으리라는 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렇지만 미안하게도 이렇게까지 구체적인 노력을 한두 번도 아니고 여러 번을 다양하게 했다는 사실은 쉬 믿기 어렵다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진짜 영웅의 탄생이다저렇게 했는데도 산모가 살아남았고 아이는 태어났으니, 내가 어릴 적 읽은 그의 전기에서 그의 어머니가 간장을 통으로 들이켰다는 내용만큼은 기억이 난다.

3. 생애 (요약)

가난한 농부인 "박성빈(朴成彬)백남의(白南義)" 사이에서 5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1937,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문경소학교"에서 3년간 교직에 몸담았다일본인 "시학관 (侍學官, 장학사)"와 충돌해 스스로 사직했다.

이후 장래를 고민한 끝에 1942년 만주에 있는 "신경군관학교 (新京軍官學校)"에 입학해, 2년 과정을 수석으로 수료한 다음,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 1944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만주군 소위" 임관했다815해방 이전까지 주로 "관동군(關東軍)"에 배속되어, "중위"로 복무했다.

815해방 후 1946년 귀국해 "국군창설"에 참여했고, "조선 경비 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의 전신)" 2기로 졸업하고, "대위"로 임관했다"육군본부 정보국 작전과장"으로 근무하던 중, 1949"여수순천 1019사건"을 계기로 군내 공산주의자와의 관련 혐의를 받고,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그러나 동료장교의 감형운동으로 석방되어, 문관으로 "육군본부 정보국"에 근무하다가, 625전쟁 이후 "소령"으로 복귀,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장"을 지냈다"소령"으로 복귀되는 과정에서, 군고위급 장성 사이에 과거 공산주의자와의 관련 사실을 두고 의견 차이가 있어 복귀에 어려움도 있었다.

1953"준장"으로 진급했으며, 육군포병학교장, 2군단 포병사령관, 57사단장, 1군 사령부참모장, 6관구사령관, 육군군수기지사령관, 1관구사령관,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2군 부사령관 등을 역임했다.

516

1961, "소장(2군 부사령관)" 재직 중, "누란(累卵)의 위기에서 조국을 구하, 도탄에 빠진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겠다."는 등의 혁명공약을 내걸고 청년장교들과 함께 516군사정변을 주도했다같은 해, 7월 군사정변의 최고 권력기관으로 입법권사법권행정권을 장악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취임해 27개월간의 군정을 실시했다.

1962.03"윤보선 대통령"의 사임으로 그때부터 "대통령 권한대행"도 함께 맡았다군정기간 동안, 전면적인 사회개혁의 일환으로 정당사회단체 해체, 용공분자와 깡패 검거 소탕, 댄스홀 및 고급요정 폐쇄, 부정축재처리법을 공포해 72,000만 환에 이르는 부정축재환수 등을 단행했으며, 국민의식개혁을 위해 "재건국민운동본부"를 설치해, 생활간소화가족계획문맹퇴치운동 등을 실시했다.

경제시책으로는 "농어촌 고리채 정리화폐개혁" 등을 단행했으며, 역대정권의 무관심과 무기력 속에 방치된 국토 및 경제개발계획에 착수함으로써, 그가 내세운 조국근대화의 전기를 마련했다당시 이런 개혁정책들은 대다수의 국민들로부터 호응을 얻었다그러나 군정기간 동안, "중앙정보부"에 의해, "4대 의혹사건(증권파동의 부정회전당구 사건워커힐 사건새나라 자동차 사건)"이 발생하였다.

군정실시 2년 후에 민정이양을 하겠다고 공언해 1963 "227선언"으로 원대복귀를 약속했으나 "48 조치"로 군정연장을 발표했다가 국민여론에 밀려 철회하는 등 비난을 받기도 했다군정기간 동안 그의 주장대로 이루지 못한 "516 군사정변"의 이념을 민간인 신분으로 실천하고자 1963.08"대장"으로 예편하고, 1963년에 창당된 "민주공화당"에 입당해 총재에 추대되었다이때부터 그의 본격적인 정치생활이 시작되었다.

1963.10.15, 5대 대통령선거에서 84.99의 투표율에 4702,642(유효투표의 46.65) , 야당 후보인 "윤보선""15만여 표"의 근소한 차이로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어, 12월 대통령 취임했다이 대통령선거에서 상대후보인 "윤보선"이 자신의 유세내용 가운데, 박정희의 과거 공산주의와의 관사실을 폭로해 선거에서 한때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는 취임사에서 "우리는 우리가 세운 목표를 향해 인내와 자중으로 성실하고 근면하게 살아나가는 근로정신과 소박한 생활인으로 돌아가 항상 성급한 기대의 후면에는 허무와 낙망이 상접(相接)함을 명심하고 착실한 성장을 꾀하는 경제국민이 되어야 하겠다."는 말을 통해 경제성장에 대한 그의 확고하고 단호한 의지를 표명했다.

국민여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경제발전에 필요한 외자확보를 위해 "일 협정"에 정식 조인하고 1965.08.14일 국회의 비준을 거쳐, 12.18일 비준서 교환을 통해 ""간에 국교를 정상화시켰으며, "베트남 전쟁" 파병을 단행했다"한일국교정상화"는 매국이라는 비난을, "베트남 전쟁 파병"은 젊은이들의 피를 팔았다는 비난까지 받았으나, 이를 통해 얻은 경제적 성과는 "보릿고개"라는 고질적 춘궁기로 상징되는 절대빈곤에서 벗어나게 했으며, 이 절대빈곤의 극복은 그의 가장 대표적인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편 대통령 취임 이후 부존자원이 부족한 한국의 상황에서는 수출만이 살 길이라는 기치 하에 출을 독려촉진하기 위해 매월 "수출진흥 확대회의"를 직접 주재해, 수출 목표를 확인하는 한편, 전 세계에 나가 있는 해외공관을 활용해 수출에 주력했다.

3공화국 기간 동안, 수출주도의 고도성장 및 경제개발5개년 계획, 사회간접자본인 산업기지건설 등을 이룩해 경제발전을 위한 기본토대를 구축했다이러한 정책 이행을 통해 국민의 정치적인 지지를 받기도 했던 그는 1967.07"6대 대통령" 선에 이어, 1969.10.17"3선 개헌"을 통한 장기집권을 모색했다.

미국의 주한미군철수론,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의 국론분열(영남호남 간의 지역감정 격화), 북한의 남침위협, 근대화에 따른 갈등과 모순 증폭 등의 국내문제와 미국의 대 아시아 정책의 변화, 오일 쇼크의 엄청난 충격 등 국내외적인 정치적경제적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라는 것이 그 명분이었다.

"3선 개헌"에 의해, 1971.07"7대 대통령"에 당선되자, 마침내 1972년 국회 및 정당해산을 발표하고,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한 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유신헌법"을 제정"8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유신체제).  이로써 이른바 "유신시대"라 불리는 "4공화국"이 시작되었다.

그는 장기집권의 유신시대에 국민의 의식을 한데 모으기 위해 "새마을 운동"이라는 일대 개혁적인 운동을 펼치고자 했다1971년에 제창된 새마을운동은 "조국 근대화"라는 기치 하에 "근면협동"의 정신을 가지고 국민 개개의 생활 향상과 자유로운 성장은 물론 국가의 발전과 중흥을 이룩하려는 사회혁신운동이라고 내세웠다. "새마을 운동""농촌도시학교공장"을 불문하고, 전국적으로 일어났다그러나 이 운동은 민간주도가 아닌 관주도로 진행되는 과정에서 국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보다는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에 의한 강제성을 띠었기 때문에 부작용도 많았다.

결국 "유신 시대"를 통해 절대빈곤은 해결되었지만, 날로 심화되어 가는 상대적 빈부의 격차와 장기집권에 따른 정치적 부작용 및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로 국민의 지지가 약화되자, "긴급조치" 발동으로 정권을 유지해갔다그러나 장기집권과 반민주적인 통치를 반대하는 "학생지식인종교인정치인"의 민주화운동과 도성장의 경제적인 분배에서 소외당한 "근로자농민도시빈민의 생존권 요구"를 긴급조치로 억압함으로써 국민의 저항에 부딪쳤다.

"유신 시대" 동안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10%라는 기록적인 기록을 보였으나, 빈부격차는 갈수록 심화되었다이러한 사회적 모순과 갈등 속에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유신시대 초기에는 남북한통일문제를 제기해 "남북 적십자회담남북 조절위원회"를 열기도 했다그는 1972"74남북공동성명", 1973"623선언"이라 불리는 "평화통일외교정책"에 관한 "대통령 특별성명" 등을 발표해 이를 구체화하고자 했으나, 북한 측의 태도변화와 국내사정으로 말미암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유신 시대" 후반기에 접어들어 정권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그 나름의 여러 조치를 내렸으나, 효과는 크지 않았다결국 핵심권력층 구성원들의 상호견제를 통해 충성심을 유도하는 그의 "용병책""유신체제"항거한 1979"부마사태"에 직면해, 오히려 측근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총부리를 겨누게 하는 비극적인 사건을 초래했다.

1979.10.26일 사석에서 "부마사태"의 수습책을 둘러싼 "차지철(대통령 경호실장)김재규(중앙정보부장)" 사이의 언쟁 도중, 그는 "차지철"과 함께 "김재규"에게 권총으로 피격당해 사망했다(1026사태).

4. 일화 : 1963년,  5대 대통령 선거

"516쿠데타"를 성공시킨 박정희는 "군정"을 실시했고, "약속한 기간의 군정을 마치면 정권을 민간에게 이양하고, 군은 본연의 자리인 군으로 돌아간다."고 대국민 약속을 한다그러나 "다시는 나 같은 불행한 군인이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라는 전역사를 하며, 4성 장군으로 군을 전역한 뒤, "혁명정부 의장"에서 민간인 신분으로 1963"5대 대통령 선거"에 나서게 된다"5대 대통령 선거"의 성격은 이념 및 사상전이었다.

박정희 후보가 1963.09.23일 서울 중앙방송을 통해서 발표한 정견발표에서 상대 후보인 "민정당의 윤보선 후보" 및 구정치인들을 "사대주의적 근성을 가진 천박한 자유민주주의자"로 몰아붙임으로서 이념 및 사상전이 시작이 된다. "윤보선 후보"는 박정희 후보의 이 말에 분노하며"적어도 박정희 씨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 천황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했던 사람이 아니었던가. 해방 뒤에는 자의로 공산주의에 투신한 사람이 아닌가. 적반하장도 유분수다고 응수하며,

"박의장의 "국가와 혁명과 나"라는 저서에서 보면, 이집트의 낫세르를 찬양하고, 히틀러도 쓸만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과연 이런 사람이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인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순반란사건의 관련자가 정부 안에 있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박정희)"라고 정면 공격을 한다.

윤보선은 또,  "북한에서 밀파한 황태성 사건의 진상을 밝혀라, 공화당 내에 625 당시 부역자 및 그의 가족이 월북한 자가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는가, 공화당의 중견간부인 김모씨가 625당시 부역을 했다는 사실을 아는가?"란 질문성 선거유세로 했고, 이는 625를 겪은 지 얼마 안 돼는 국민들에게 설득력 있게 먹혀 들어간다.

황태성 (북한무역 부상) : "황태성(북한무역 부상)"20$를 가지고 남파됐는데, "김종필" 그를 "조선호텔"모셔다가, 서울에 밀봉교육 장소를 5군데나 만들어 놓고, 공산당 점조직 식으로 비밀리에 공화당을 사전조직 했다는 말이 당시 시중에 떠돌았다 특히, 10.05"서울 남산 유세"에서는 "윤보선"이 약 15만 명의 청중을 모은 데 반하여, 박정희는 4만 명밖에 모으지 못했으며, 이 자리에서 윤보선 후보는 "나는 묻는다. 공산당이 말하는 민족적 주주의와 박정희 씨가 말하는 강력한 민족주의에 바탕한 민주주의와는 무엇이 다른가.공화당의 사전조직을 실제로 한 사람은 누구이며 막대한 검은 자금의 출처는 어디인가"라고 맹공을 퍼붓는다.

TV나 방송이 선거의 수단으로 활성화되지 못했던 그 시절, 여론을 주도하던 신문들은 박정희와 윤보선의 발언들을 가감 없이 그대로 보도했고, 윤보선 후보가 제기한 박정희 후보 및 공화당의 "공성 의혹"은 국민들의 가슴과 뇌리를 자극하여, 선거의 주도권을 윤보선 후보가 잡게 된다.

1963.10.15"대통령 선거" 투표가 시작됐다. 오전에 투표를 마친 "박정희 후보" 부부는 "이후락(최고회의 공보실장)박종규(경호대장)"등을 대동하고, 2대의 승용차 편으로 경주로 향했다(박정희는 "신라 화랑정신"을 숭상했고, 따라서 "경주"를 유별나다 싶을 정도로 사랑했다)

마침내 개표가 시작됐고, 예상외로 윤보선 후보가 앞서 나가기 시작했는데. 윤보선은 서울경기강원충북충남에서 박정희를 크게 앞섰으며, 부산에서는 막상막하의 혼전을 보였다윤보선의 "사상 공세"가 국민들에게 먹혀 든 것이고, 박정희 후보의 사상성을 국민들은 의심한 것인데, 윤보선이 박정희를 "23만 표" 차이로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서울역 앞에 있던 공화당사는 공황상태에 빠져들고 있었고, 상황실에서 전화기 통해서 개표상황을 집계하던 20여 명의 당원들은 윤보선이 본격적으로 앞서나가자 안절부절 못했으며, 이들을 지휘하던 "김용태"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운전기사를 시켜서 권총을 가져오게 했다고 한다(선거에 지면, 쿠테타를 한 반란자들로 몰려 죽을 것이라 자살하려고 한 것이었다)

일부 당원들은 당사의 방에 모여 "이러면 진다, 김형욱 정보부장의 지시다, 개표를 중단시키자, 중앙선관위에 전화를 걸어 개표를 중단시키자"고 합의를 하기에 이르나, "김용태"가 적극 말렸다고 한다그러나 "경상북도전라도제주도"의 투표함이 열리기 시작하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경북"야 박정희 후보의 고향이니 그렇다 하지만, "전라도""제주도"에서 박정희 후보에 대한 몰표가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며, 결과 박정희 후보는 역전을 시켜, 윤보선 후보를 불과 156,026 차이로 눌러, "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서울경기강원충청 지역"에서 크게 패배한 박정희 후보가 고향인 "경상도"는 제외하고, "전라도제주도"에서의 압승으로 이를 만회했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두고, 박정희 정권에서 "중앙정보부장"을 하다, 미국으로 망명한 "김형욱"이 소름끼치는 분석을 했다"박정희의 사상성을 의심하여, "서울경기강원충청 지역" 윤보선에게 투표를 했는데, 625 당시 좌익들의 준동지였던 전라도와(여순반란사건 등) 제주도에서는(제주 43사태 등) 박정희 보 용공성 의심을 보고, 몰표를 몰아주는 무서운 현상이 일어났다"고 한다이후 "김대중" 등장 후, 아무리 고향이라지만 호남이 "김대중"에게 몰표 90% 이상을 주는 것이었다. "박정희ㆍ윤보선"이 심어놓은 "선거판의 사상전"은 남북이 갈라져 있는 한, 어느 선거에서나 여전히 맹위를 떨칠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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