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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이승만 • 김구 • 박정희 • 정당

역대 대통령들의 불운한 말년

by 당대 제일 2022. 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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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들은 대부분 불행한 말년(末年)을 맞았다.  < 사망망명ㆍ수감ㆍ아들 구속 등 >

 

1.  1~  3: 이승만 (재임 1948.08~1960.04 / 1875~196590)

해방 전, 임시정부에서 활동하고,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광복 후 우익 민주진영 지도자로 1948년 초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북한의 공산정권에 맞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호하고, 자본주의 경제 질서의 씨를 뿌린 공을 세웠지만, 1960"419혁명"으로 "독재자"란 비난을 들으며 권좌에서 물러났다. 곧바로 미국 하와이로 망명했으며, 1965.07.19일 서거했고, 유해는 타계 나흘 만인 07. 23일 미국 공군수송기에 실려 귀향했다.

 

2.  4: 윤보선 (재임 1960.08~1962.03 / 1897~199093)

4선 국회의원(3~ 6)서울시장(1948.12~1949.06)상공부장관을 역임했다"419혁명"으로 탄생한 "2공화국"이 내각제였기 때문에, 실권은 "장면 총리"에게 있었고, 명목상 국가원수를 지냈다1961"516쿠데타"로 물러난 뒤, "5대 대선(1963)6대 대선(1967)""박정희 후보"와 잇달아 붙었지만 모두 패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 ()유신 운동과 관련해 3차례에 걸쳐, 사법처리의 대상이 됨으로써, 최초로 "법정에 선 대통령"이란 기록을 남겼다.

 

3.  5~ 9: 박정희 (1963.12~1979.10 / 1917~197962)

보릿고개를 없앴고, 근대화와 경제성장 달성이란 업적을 남겼지만, "독재자"란 비난도 받았다1961, 2군 부사령관(소장)에 재직 중, 청년장교들과 함께 "516군사정변"을 주도했다. 7월 군사정변의 최고 권력기관으로 입법권사법권행정권을 장악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취임해 27개월간의 군정을 실시했으며, 1962.03"윤보선 대통령"의 사임으로 "대통령 권한대행"도 함께 맡았다. 1963.08"대장"으로 예편하고, 1963년에 창당된 "민주공화당"에 입당해 총재에 추대되었다. 1963, "5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래, 9대에 이르기까지 장기 집권했다.

경제발전에 집중했으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유신을 선포했으나, 18년 장기집권 끝에 1979.10.26일 측근이었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에 쓰러졌다. 부인인 "육영수 여사"1974.08.15"재일동포 문세광"이 쏜 총탄에 맞아 타계했다.

 

4.  10: 최규하 (1979.12~1980.08 / 1919~200687)

최초의 국무총리 출신 대통령으로, "국무"리로 재직하다가 "박정희 대통령"의 유고로 인해 대통령 권한대행이 됐고, 12.06"통일주체 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그러나 "신군부 세력""1212사태"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이나, 1980.05월 광주의 비극이 빚어지는 과정에서 통치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다결국 1980.08.16, "신군부"의 압력으로 하야, 역대 "최단기 대통령"이 됐다1989, "국회 광주특위"에서 신군부 등장과 관련한 증언을 거부하다가 "국회 모독죄"기소됐고, 1996, "1212 518사건" 항소심 공판에 강제 구인되기도 했지만, 아무런 증언을 하지 않았다.

 

5.  11~ 12: 전두환 (1980.08~1988.02 / 1931~202190)

"1212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고, "보안사령관중앙정보부"를 거머쥐고 계엄을 확대했다1980, "최규하"가 하야하자, "장충체육관"에서 간접 선거로 단독 출마해 "11대 대통령"에 당선, 취임했다. 취임 이후 개헌을 실시하고, 체육관 선거를 통해, "1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재임 기간 동안, 사회 유화책을 적극적으로 펼치는 한편, 언론통폐합과 삼청교육대 창설, 민주화 운동 탄압을 지속했다. 1987.06월 민주화 항쟁 이후, "629 민주화 선언"을 발표하고 퇴임했다1995, 구속 기소되어 1심에서 "사형", 항소심에서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0억 원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97년 사면복권되었다.

 

6.  13: 노태우 (1988.02~1993.02 / 1932~202189)

1987, 개헌 이후 치러진 첫 "직접선거"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재임기간 북방정책을 펼쳐 중국러시아 등 그동안 외교관계가 없던 공산권 국가들과 수교하는 업적을 남겼다. 육군사관학교 생도 시절 "전두환정호용" 등과 친분을 맺고, "하나회"의 핵심 멤버로 활동했으며, 1979"전두환" 함께 "1212군사반란"을 주도했다. "전두환 정권"에서는 "내무부 장관" 등을 지냈으며, 퇴임 이후 1997"비자금 사건"과 형법상 "내란죄"로 징역 17년과 추징금 2,628억 원을 선고받았다. 1997년 특별 사면되었고, 추징금은 2013년에 완납되었다2003.02,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 "전두환"과 나란히 앉아 행사를 참관했으며, 오랫동안 지병 (소뇌 위축증)으로 투병 생활을 했다.

 

7.  14: 김영삼 (1993.02~1998.02 / 1927~201588)

"장택상(국회부의장국무총리 역임)"의 비서로 일하다가, 1954"3대 국회의원" 선거에 "자유당" 소속으로 출마해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하였다. 국회의원 당선 당시 만 265개월이었다"자유당"에서 정치를 시작했으나, 1954"이승만"의 장기집권을 위한 "사사오입 개헌"이 통과되자 이에 반발하여 "민주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이후 군사정권에 맞선 대표적인 야당 지도자 중 한명으로 같은 당 동지였던 "김대중" 등과 함께 민주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87"629 선언"으로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진 후, 치러진 "13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와 끝내 단일화에 실패하면서 갈라서게 되었다이후 1990"3당 합당"으로 "노태우김종필" 등과 단일화를 하였고, 1992"14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민주당)" 꺾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재임 초기, "하나회 척결금융실명제 실시공직자 재산공개" 등 개혁적 조치를 취해 국민적 인기를 얻었으나, "IMF 외환위기"가 터지며 임기를 마쳤다

2"김현철(1959~ )"1992아버지 "김영삼"의 대통령 당선에 기여하였다. 1996, 실시된 제15 "총선"에서는 여론 조사와 선거 전략을 담당하였다1997, "한보비리 사건"에 연루돼 구속된 데 이어, 2004년에는 "동만(전 한솔 부회장)"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1997.05월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조세포탈 혐의로 구속되었고, 1999.06월 징역 2, 벌금 105천만원, 추징금 52420만원을 선고받았으나, 08.12잔여형기가 면제되어 사면되었다. 2004년 불법정치자금을 수수한 혐의로 긴급 체포되었고, 검찰 수사 도중 자해 소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8.  15: 김대중 (1998.02~2003.02 / 1924~200985)

"인동초(忍冬草)한국의 넬슨 만델라"라는 별명이 있으며, 4차례 도전 끝에 대통령에 당선된 뒤 자신의 지론인 남북화해 정책을 꾸준히 펼쳐 대외적 명성을 높였다. "직선제" 및 민간 정부 출범 이후 최초의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이루었다. 한국과 동아시아의 민주화와 인권, 남북화해 정책의 공로로 "노벨 평화상(2000)"을 수상했다.   제5 "민의원"을 거쳐, 제6ㆍ7ㆍ8ㆍ13ㆍ14대 국회의원(6선 의원)을 지냈으며, 군부 정권의 위협으로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김영삼"과 함께 오랫동안 "민주 진영의 지도자"로 활동하며 군사 정권에 항거하였다. "5ㆍ16군사정변(1961)" 이후 약 30년간 역대 군사정권하에서, "납치ㆍ테러ㆍ사형선고ㆍ투옥(6년)ㆍ망명(10년)ㆍ가택연금" 등의 온갖 고초를 겪었으나, 군사정권에 끝까지 맞서 민주화운동을 강력히 전개함으로써 대중적인 카리스마를 얻었으며, 세계적으로는 한국의 인권투사로 널리 알려졌다. 

"1남 김홍일(1948~2019703선 국회의원)"1999~2001년까지 "안상태 (나라종금 사장)"으로부터 인사청탁 대가로 15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2006.09월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아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 추징금 15000만 원을 선고받아 의원직을 상실하였다.

"2남 김홍업(1950~ 17대 국회의원)"검찰이 2002, "이용호 게이트" 조사 중, 권력형 이권개입으로 엮었다. 무려 580여명을 소환 조사했음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혐의점을 찾지 못했던 검찰은, "김홍" 가까운 지인 중 개인비리 정황이 포착된 친구 "김성환" 을 회유, 협박하여 거짓 자백을 받아냈다"김홍업"2003.05 대법원에서 각종 이권청탁과 함께 수십억 원대의 금품을 받은 혐의(알선수재) 으로 징역 2년에 벌금 4억 원, 추징금 26천만 원을 선고한 원심이 확정되었다. 재판부는 "김성환" 대해서는 징역 4년에 추징금 206000만 원의 실형을 확정지었다. 훗날 "김성환"은 병환으로 사망 이틀 전, 검찰 진술 내용은 강요에 의한 거짓이었다며, "김홍업"은 억울하게 누명을 쓰게 된 것임을 녹취로 남겨 증언하였다.

"3남 김홍걸(1963~ 21대 국회의원)""김대중"이 현직 대통령으로 재직 중이던 2002.05, "최규선 게이트(불법 뇌물자금수수)"를 수사하던 검찰은 "김홍걸"이 체육사업자 선정 로비 등의 명목으로 36 7천만 원 상당의 금품과 주식을 받은 사실을 밝혀내고, "알선수재"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하였다.  이로써 "김대중 대통령" 재임 시에 아들 3명이 모두 권력형 뇌물 비리로 구속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고, 이를 "3 게이트(뇌물 3형제)"라는 말이 떠돌기도 했다. 현직 대통령 아들 3형제가 모두 비리로 구속되자, "유시민""김대중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하였다.2005.08.15. "노무현 대통령" 의해, "광복절 경축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복권되었다.

 

9.  16: 노무현 (2003.02~2008.02 / 1946~200963)

판사로 재직 후, 부산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1315대 국회의원직을 역임했고, "김대중 정부"에서 "해양수산부 장관"을 역임했다군사독재 정권 치하에서 "인권변호사"로 활약하며, 양심수노동자의 인권옹호와 권익신장을 위해 헌신했으며, 민주주의의 분수령인 "1987.06월 민주화운동"의 주요 지도자로 활약했다. 42세 때 정계에 입문한 뒤, 민주민족세력의 정치적 대변자, 노동자농민도시영세민 등 사회적 약자의 권익옹호자, 군사독재의 유산인 영호남간 지역대립 극복을 위한 동서화합의 전도사를 자임하며 남다른 정치 역정을 걸었다. "풀뿌리 민주주의"의 열렬한 신봉자이자, 한국 사회의 비주류를 대표하는 정치인으로서 200221C 첫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며, 한국 정치사에 큰 획을 그었다. 퇴임 후 정치활동을 접고 고향 "김해의 봉하마을"로 내려가 생활하다가, 재임 중 "친인척 수뢰혐의"로 검찰의 수사를 받던 중 사저 뒷산에서 투신하여 서거하였다.

 

10.  17: 이명박 (2008.02~2013.02 / 1941~ )

"오사카"에서 태어나, "경북 포항"에서 자랐다. 1965"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현대건설" 평사원으로 입사하여 사회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여 12년 만에 "현대건설 대표이사 사장"에 오르면서, "샐러리맨의 신화"로 불렸다이후 정계에 입문, 14~15대 국회의원직32대 서울특별시장직을 역임했다 

1992, "김영삼"에게 발탁되어, "민주자유당"으로 정치에 입문하였다. 2002"서울시장"에 당선되어, "청계천 복원사업대중교통 환승할인제 개편"을 완수하며 호평을 받았다여느 정부 이상 가는 친인척측근비리 문제 등으로 비판받았다2018.03.22, "다스 실소유주 논란국정원 특수활동비 청와대 상납사건" 등으로 논란이 있었고, 결국 영장심사를 거쳐, 헌정 사상 4번째로 구속되었다"뇌물수수배임횡령직권 남용" 등 총 20가지가 넘는 혐의를 받고 구속되었다.

 

11. 18: 박근혜 (2013.02~2017.03 / 1952~ )

"박정희 대통령"의 딸이자, 한국의 첫 "여성대통령"이며, 최초의 "부녀 대통령"이었으며, 1987년 헌법 개정 이후, 최초 과반득표 대통령최초 이공계 출신 대통령최초 독신 대통령으로 기록되었다.  대구에서 "박정희(육군 정보 학교장)육영수" 사이에서 장녀로 태어났다. 9살이 되던 해, "박정희 소장""516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으면서, 청와대에 들어갔다. 1974, "서강대 전자공학 전공" 졸업한 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으나 6개월 만에 "육영수""광복절 경축식장"에서 총에 맞아 갑작스럽게 서거하면서 귀국했다. 당시 22살이던 그녀는 이때부터 "퍼스트레이디 직무대행"을 하면서 외국사절 영접소외계층 봉사활동 등 대외 업무를 수행했다5년 뒤인 1979"1026 사태""박정희""김재규"가 쏜 총에 맞아 서거하는 비극을 겪게 된다.

이후 1982, "육영재단 이사장"을 맡았고, 1988"박정희육영수 기념사업회"1989"근화봉사단"을 발족시키고, "조국의 등불"이라는 영화도 만드는 등 아버지의 명예회복에 몰두했다1995년부터는 "정수장학회 이사장직"도 맡았다. 그러나 "육영재단" 운영권을 둘러싸고, 동생들과 다툼이 시작되어 1990.11"박근령"에게 육영재단 이사장직을 넘겼고, 다시 "육영재단"은 소송 끝에 2008년부터는 "박지만"에게 넘어갔다.

1997년 대선 당시, "이회창(신한국당 후보)"를 지원하면서, 정치에 뛰어들었다. 1998"대구 달성 재보궐 선거"에서 출마해 당선됐고, 이곳에서 내리 5선을 했다. 정계입문 이후, 단숨에 "초선 부총재"뛰어오른 그녀는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이회창 총재"를 비판하면서, "총재직 폐지당권-대권 분리국민참여경선" 등을 요구했다2004~2006년까지 "한나라당 대표 최고위원"을 역임하였으며, 2007년 한나라당 "17대 대선후보 경선" 출마하였지만 "이명박"에게 석패하였고, 이후 "이명박 정부" 기간 동안, 비 주류계 "친박연대"를 이끌었다.

2012"19대 총선"을 승리로 이끌었고, 이후 "새누리당 대통령선거 후보"로 선출되어 2012.12"18대 대선"에서 당선취임하였다"대통령 선거" 당시부터 제기된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으로 취임 직후부터 위기를 맞으며, 국정을 수행했으며, 임기 중 "세월호 참사메르스 사태" 등 국가적 재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국민의 불안감을 증폭시켰고, "창조경제"를 위시한 추진한 정책 다수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미숙한 국정운영불통 논란 등으로 숱한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60대 이상의 압도적 지지로 정권의 기반을 유지하다가, 2016년 말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민간인의 국정개입 사실"이 낱낱이 폭로되면서, 2016.12월 국회에서 "대통령(박근혜) 탄핵소추안" 발의되었고, 12.09일 헌정사상 2번째로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어 대통령 직무가 정지되었다.  2017.03.10,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탄핵 소추심판을 거쳐, "헌법재판소""대통령(박근혜) 탄핵심판 청구"에 관해, "재판관 8인 전원일치"로 인용결정을 내리면서, 헌정사상 최초로 "대통령 직"에서 파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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