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페르시아"라는 이름은 본래 남부 이란의 한 주(州)인 "파르스(Pars)"에서 유래했다. 그곳에 "아케메네스조"의 수도가 있었다. 그 때문에 고대 그리스 인들은 이 왕조를 그 지역 이름으로 불렀고, 오늘날의 유럽 언어도 그것을 따랐다. 그래서 영어를 비롯한 유럽어에서는 이 나라를 "페르시아"라 통칭했다.
1. 페르시아 제국 (이란 지역ㆍ메디아 왕국ㆍ아케메네스 왕조)
메디아 (B.C 728~ B.C 550) → 아케메네스 왕조 (B.C 550~ B.C 330) →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점령 시대 (B.C 330~ B.C 250) → 파르티아 (B.C 247~ 226) → 사산 왕조 (226~ 651)
"페르시아"는 "이란" 민족이나 이들이 건국한 나라를 가리키는 말이다.
B.C 7C 경, 발달한 철제 무기로 무장한 "아시리아"가 "서아시아 지역(메소포타미아에서 이집트에 이르는 지역)"을 처음으로 통일하였다. 그러나 "아시리아"는 오래가지 않아 멸망하였고, 분열된 서아시아 지역을 다시 통일한 것이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다.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재위 B.C 522~ BC 486)"는 서아시아에서 "이집트ㆍ인더스 강" 유역에 이르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그리스"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기원전 4C 말 "알렉산드로스(알렉산더 대왕)"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였다.
"페르시아 인"은 "메디아 인"과는 인종ㆍ언어적으로 이란인ㆍ이란어계에 속하여 매우 밀접했다.
이 신제국은 토착민이 세운 것이 아니고, 인도ㆍ유럽계의 페르시아 인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이란"의 철기시대는 "이란" 서부지역에서만 나타났으며, 제1기(B.C 약1300~1000)ㆍ제2기(B.C 약 1000~800/ 750)ㆍ제3기(B.C 약 750~550)로 나뉜다.제3기는 "메디아 왕국시대"와 동일한 시기이다. 인도ㆍ유럽 계통의 이란 인들이 "이란 고원"에서 지배 세력이 된 시기는 철기 시대, 즉 B.C 9C 중엽이었다.
대표적인 "이란 족"은 "메디아 인ㆍ페르시아 인"이었다.
그들은 "북부 우르미아 호수" 근처나 "남서부 자그로스 지"역에 정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두 "이란 족"이 동에서 서로 이동했다는 뜻이다. 또, "이란 족"이 최초로 "자그로스 지역"에 정착한 때는 B.C 1300년경인 "제1 철기시대"였다. "제3 철기시대"에는 "자그로스" 전체를 "이란"화시켰고, B.C 7C 말~ 6C 초에 "메디아 왕조"를 탄생시켰다.
2. 메디아 왕국
"헤로도토스 (Herodotosㆍ그리스 역사가)"에 따르면, B.C 8C경 "데이오케스 (DeiocesㆍB.C 728~675)가 "메디아 왕국"을 "엑바타나"에 세웠고, 그 후 아들 "프라오르테스(PhraortesㆍB.C 675~653)"가 왕위를 계승했다. B.C 9C 초, "스키타이 족"이 서부 이란으로 들어와 "아시리아"에 상당한 위협 세력이 되었다.
"메디아 왕국"은 이 종족을 흡수한 다음, B.C 7C 초에 "아시리아"를 침공하였다. B.C 612년경, "바빌론"과 제휴한 "메디아 왕국"은 "아시리아"를 재침공하여, B.C 612년에 멸망시켰다. B.C 585년 이후, "메디아ㆍ리디아ㆍ바빌론" 간의 힘의 균형이 이루어졌으나, "메디아 왕국"은 그 후 "아케메네스 왕조"의 "키루스 2세(Cyrus ⅡㆍB.C 550~530)"에게 멸망당하였다.
3. 주요 황제
① 키루스 2세 (Cyrus ⅡㆍBC 576(590)년경~530년ㆍ73세(59세)ㆍ키루스 대제ㆍThe Great Cyrusㆍ구약성경의 바사 (페르시아) 왕 "고레스")
"아케메네스 왕조"의 시조로 "위대한 샤한샤 (페르시아 제국의 황제 칭호ㆍ"샤(왕) 중의 샤(왕)"ㆍ즉 왕중왕을 뜻함)"으로, 이란인들에게 "건국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다. 성경에는 히브리어 발음에 근접한 "고레스 왕"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페르시아"의 지도자로서, 그가 다스리는 동안 "페르시아"는 "서남아시아ㆍ중앙아시아"의 대부분을 정복하고,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으로 성장하였다. 29년 동안 통치하면서, 당대의 제국들(메디아ㆍ신바빌로니아ㆍ리디아 제국)을 굴복시켰다.
"메데인"들은 "키루스"를 정복자로 생각하지 않았고, 자신들과 같은 혈통의 왕으로 여겼다. 유대인들도 그를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ㆍ하나님의 목자" 등으로 칭송하였다. "알렉산더 대왕"조차도 "키루스 2세"를 위대하게 여겨, 무덤인 "파사르가드 (Pasargad)"만은 파괴하지 않았다.
B.C 559년, "키루스 2세"는 "이란"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려고, 몸소 "메디아 왕국의 아스티아게스(AstyagesㆍB.C 585~550)"의 딸과 결혼했다. 또, "바빌론"과의 외교 관계를 돈독히 했다. B.C 550년, "키루스 2세"는 "메디아 왕국"에 대해 반란을 일으켜 멸망시키고, "페르시아 제국"을 창설하니, 이것이 "아케메네스 (Acheamenes) 왕조 (B.C 569~331)"의 시작이다. "키루스 2세"는 "크레오서스 (Croesus)"의 통치하에 있던 "리디아"를 공격하여 B.C 546년에 멸망시켰다.
그 후 동맹 관계에 있던 "바빌론"을 정복하여, 정복자라기보다 "바빌론 문화의 계승자"로서 통치했다. "이집트 정복"은 그의 아들 "캄비세스 2세(Cambyses Ⅱ)"에 의해 시작되었으나, 준비는 "키루스 2세" 때 완료된 것으로 보인다. "이란" 동부지역의 호전적인 부족의 침략에 끊임없이 시달려 온 "키루스 2세"는 중앙아시아의 "아무다르야 (Oxus) 시르다르야(Jaxartes)" 강변 부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② 캄비세스 (CambysesㆍB.C 530~521ㆍ키루스 2세의 아들)
B.C 525년, "이집트 원정"에 착수하여 거의 완료 단계에 들어간 때인 B.C 522년에, 이미 처형된 동생 "바르디야 (Bardiya)"라고 사칭하는 자의 반란이 "이란"에서 일어나자 급거 귀국하여 진압하는 도중에 사망했다.
③ 다리우스 1세 (DariusㆍB.C 521~486ㆍ캄비세스 예하의 장군ㆍ아케메네스 왕가의 왕족)
"다리우스 (Darius)"가 반란군을 진압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B.C 522~521년까지 1년간에 걸친 권력 투쟁을 승리로 이끈 "다리우스"는 "아케메네스 귀족 회의"에서 황제로 추대되었다. "키루스 대왕"의 과단성과 추진력을 닮은 "다리우스 1세"는 "비시툰 산(박트란 동쪽)" 정상에 비석을 세워, 자신의 반란 진압과정을 상세히 새겨 두었다.
"다리우스 1세"의 영역은 "페르시아ㆍ메디아"의 대부분이 포함되었다. B.C 516년경, 그의 영향력은 "북부 인도"에서 "유럽의 다뉴브 강"까지 미쳤다. B.C 507년, "그리스의 이오니아" 사람들은 이란 인의 통치에 반기를 들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B.C 494년, "마르도니우스 (Mardoniusㆍ다리우스의 사위)"는 "이오니아의 특별 판무관"이 되어 그곳 군주를 억압하는 한편, 여러 도시에 그리스의 전통적인 도시 국가의 민주 정부 재건을 지원했다. 같은 해, "마르도니우스"는 "이오니아"의 반란으로 잃었던 "트레이스ㆍ마케도니아"를 회복했다. 그 후, "다리우스"는 유명한 "마라톤 전투(B.C 490.09.12)"에서 "그리스" 도시 연합군에게 패배하여 재침략을 준비하다가, B.C 486년에 사망했으며, 장남 "크세르크세스"가 그를 계승했다.
④ 크세르크세스 1세 (XerxesⅠㆍB.C 486~465)
B.C 485년, "이집트"의 반란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뒤, 그곳의 전통적 행정 체계를 무시하고 "아케메네스 왕조"의 행정 체계를 철저하게 갖추어 나갔다. B.C 480년, "그리스 북부"를 함락하였으나. 8월 "살라미스 해전"에서의 대패와 "플라테아 전투"에서의 패배를 끝으로 오랜 원정에서 돌아와, "수사ㆍ엑바타나ㆍ페르세폴리스" 등에서 안락한 생활 속에 묻혀 있었다.
B.C 477년, "후궁 (harem)"들 간의 음모로 암살당했다. 그 후 후궁의 병폐는 점차 제국의 힘을 소모시켰다. 사후, "아케메네스 조"의 왕위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Artaxerxes ⅠㆍB.C 464~425)ㆍ크세르크세스 2세 (B.C 425~424)ㆍ다리우스 2세 (B.C 423~404)"로 계승되었다.
이들 세 왕의 통치 기간(B.C 464~404)에는 반란과 내분이 끊이지 않았고, "그리스"의 도시 국가인 "스파르타ㆍ아테네" 간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장기간(B.C 460~404) 지속되었다. 이 전쟁에서 "이란인"들은 처음에는 "아테네"와 협력 관계를 유지했으나, 후에는 "스파르타"와 가까워졌다. 결국, B.C 404년, "아케메네스 조"의 지원을 받은 "스파르타"의 막강한 병력은 "아테네"를 몰락시켰다.
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 (Artaxerxes IIㆍ재위 B.C 404~ 359)
재위 기간 동안의 중요 사건은 "스파르타와의 전쟁과 평화 협정(B.C 400~387)ㆍ이집트의 반란(BC 405)과 독립ㆍ동생 키루스의 반란(B.C 401)ㆍ지방 총독(Satrap)의 반란(B.C 373)"등이다. B.C 359년, "후궁(harem)"의 음모와 암살이 이어지는 가운데,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가 즉위했다.
그는 취임 즉시 내분의 원인이 되어 온 많은 인척을 척결했으나, 자신도 "환관 바고아스(Bagoas)"에게 살해되었으며,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종손자이며, 전 지방 총독 "다리우스 3세(BC 336~330)"가 왕위를 계승했다. (B.C 338~336)
B.C 334년 5월, "아케메네스 조"의 마지막 황제 "다리우스 3세"는 "알렉산드로스"의 침입을 받아 "그라니우스 전투"에서 패배하였고, B.C 330년 4월에는 "페르세폴리스"가 "알렉산드로스"의 수중에 떨어졌으며, 같은 해 여름 피란길에서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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