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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 서양

고대 문명 (아메리카) ① 마야 문명 (Mayaㆍ치첸이트사) : 황금기 300~900

by 당대 제일 2022.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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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 문명 (Maya)"은  "마야 족(케추아 족북아메리카 인디언의 작은 부족)"이 세운 고대 문명으로, 중앙아메리카의 "멕시코 남부 치아파스"에서 "과테말라유카탄반도의 전역과 온두라스 일부"에 걸쳐 있었고, "과테말라 북부 페텐 지역"을 중심으로 번성했던 고대문명으로, 자연적인 지형에 의해 3개 지역으로 나뉘었는데, 광대한 열대림으로 덮인 "페텐 지구우수마신타 분지의 파시온강 지구유카탄 저지대 지구"이다. 면적은 남한의 3배 정도이다.

 

1.  마야 (Maya)ㆍ아스텍 (Azteca)ㆍ잉카 (Inca) : 1492년, 콜롬버스(이탈리아)의 아메리카 신대륙 발견 

마야 문명 (Maya치첸이트사) : 황금기 300~ 900  멕시코 + 과테말라(서인도제도)1100년경 가뭄으로 소멸 (16C 스페인 진출 시 10%만 존재)

아스텍 문명 (Azteca신 마야문명) : 황금기 1248~ 1521  • 멕시코1520"코르테스 (스페인)" 군대에게 정복

잉카 문명 (Inca페루 마추픽추안데스 산맥지역) : 황금기 1438~ 1533  • 1533"피사로" 군대에게 정복 : 부하(180) + (30) + 조총(1분에 1)  잉카제국 멸망 "리마(페루)" 건설

<  잉카 제국의 멸망원인  >

 - 총과 말의 위력 : 처음 본 말 + 흰 얼굴사람

 - 동맹군의 결성 : 잉카 반군 세력을 규합하여, 스페인 군으로 흡수

 -  바이러스 : 유럽 인이 옮긴 균 (장티푸스콜레라천연두) / 유럽인은 13종 이상의 가축을 길렀으나,                            잉카의 가축은 1(라마) / 가축의 균에 의해, 유럽인은 면역 항체 형성 완료

마야

2. 마야 문명 (Maya): 300~ 900 (황금기)

BC 5000년 전 부터 생겼을 것이라 추측되며, 300~ 900년까지가 문명의 황금기였으나, "고 마야 문명" 10C 멸망하였고, 일부 "유민들""유카탄 반도"로 이동하여, "아즈텍 문명(신 마야문명)"을 세웠다.

천체 관측법역법이 매우 발달했고, 특히 마야 숫자가 매우 유명하다. 숫자 0을 사용했으며, 20진법을 사용했다.

"마야 문명""천문학수학"이 발달해 수준이 높고 찬란한 문명을 일궜으나, 특별한 이유가 밝지지 않은 채 사라졌다. 이에 대해, 학자들은 "전염병외부 침입설주식인 옥수수의 단백질 부족설성행위 부진에 따른 자손번식 실패설화산폭발 원인설" 등 다양한 이론들을 제기한 바 있다.

마야 문명

치첸이트사 (Ruins of Chichén Itzá in Mexico): 마야 문명의 꽃

"마야족""유카탄반도"에 건설한 도시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이 "치첸이트사"이다.

치첸이트사

530~629년, "마야족"은 근거지였던 "중부 멕시코"를 버리고, "유카탄반도"로 이주했다.

이 부족한 "유카탄반도"의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치첸이트사"에는 "세노테(Cenotes자연의 샘)"2군데 있다. 2곳 모두 깊이 40m직경 60m 정도 되는 커다란 샘이다. 두 샘 사이의 거리는 1.6km이다.

하나는 주민들의 식수와 농업용수로 사용했고, 다른 하나는 "황금의 샘"으로 알려진, "차크(Chac비의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신성한 샘이었다. "마야인"들의 신화에 따르면 세계는 신들의 희생으로 탄생했고, 인간은 세계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신들에게 산 제물을 바쳐야했다.

9C "톨텍의 왕 케찰코아틀(Quetzalcoatl)""유카탄"에서 가장 부유한 "치첸이트사"를 정복했다.

"톨텍"은 예술가(혹은 숙련공)를 뜻하는 말로 돌을 다루는 능력이 뛰어났다. 이들 "톨텍인"10~12C"중앙 멕시코" 일대를 장악하며 번영했는데 "치첸이트사""톨텍"의 지배하에 들어가며 그 영향을 많이 받았다.

유명한 "쿠쿨칸의 피라미드 엘 카스티요(El Castillo성채)"는 평원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 피라미드는 "마야족"의 뛰어난 수학적 재능을 보여준다9층으로 된 피라미드의 사면에는 각각 91개의 가파른 계단이 있고, 정상의 제단까지 합하면, 1년의 날 수와 같은 365개가 된다게다가 사면에서 52개의 판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것은 1년의 주일 수를 상징한다. 신기한 것은 중앙 계단 앞에 서서 손뼉을 치면 정상 부분에서 째지는 듯한 소리가 메아리친다는 사실이다.

지금도 이곳에서는 "깃털 달린 뱀"을 기리는 의식이 1년에 두 번씩 치러지는데, 춘분추분 오후 3~5시까지 중앙테라스의 그림자가 서서히 몸을 꼬며 아래로 내려오는 뱀의 모습처럼 보인다이 그림자는 계단 발치에 있는 돌로 된 두 마리의 거대한 뱀의 머릿속으로 사라진다마야인들은 이 그림자를 보면서 "쿠쿨칸"에 대한 숭배심을 키웠을 것이다.

"쿠쿨칸"의 피라미드 정상에 있는 신전에는 돌로 만든 "차크 몰 신상재규어 형상의 비취 옥좌"가 있다. "치첸이트사"의 상징이자, "톨텍" 전사의 상징인 재규어 형상은 재규어신전과 전사의 신전에서도 볼 수 있다.

"엘 카라콜 (El Caracol)"이란 천문대는 마야족의 높은 천문학 수준을 보여준다.

둥근 탑 내부에 나선형 계단이 있는 "엘 카라콜"을 에스파냐인들은 "달팽이"라 불렀다사제들은 천문대를 통해 정확한 시간을 측정했다. 치밀하게 계산해 만든 창문을 통해 햇빛이 정확하게 1년에 2번씩 천문대의 중앙까지 들어왔기 때문에 사제들은 이것으로 날짜와 시간을 알 수 있었다.

"엘 카라콜"은 서기 1000"금성"이 뜨고 질 때, 수평선과 만나는 점들 중 양극단에 있는 점에 방향이 맞추어져 있으며, "태양의 분점하지점월몰점정남향과 정서향"을 정확히 바라볼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금성"은 마야에서 특별한 숭배의 대상이었다. 마야 천문학자들은 금성 달력을 따로 만들었는데 481년 동안 2시간 이내의 오차가 생길 정도로 정확했다.

"카툰"이란 단위로 시간을 측정했던 그들은 3C부터 이미 020진법을 사용했을 만큼 과학 수준이 높았다. "20진법"은 손가락과 발가락을 전부 합치면 20개인 것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들은 분수를 알지 못했지만, "바빌로니아인"처럼 계산을 돕는 곱셈표를 만들었다0의 사용은 인도보다는 300, 아라비아 상인들보다는 700년 정도가 앞서는 것이다그들은 이 숫자 체계를 이용해 하늘의 운행, 시간의 경과를 계산했고 태양력을 만들었다하지만 동시에 마야인들은 운반용 수레나 철제도구를 사용하지 못할 정도로 기술적으로 낙후한 면도 있었다.

"엘 카스티요"의 동쪽에는 1000개의 기둥으로 둘러싸인 "전사의 신전"이 있다. 전사의 신전은 높이 30M, 기대 면적 60M2의 피라미드형이며 급경사 계단을 올라가면 제단 위의 "차크 몰(Chac-Mool)" 신상이 보인다. 앉아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누워 있는 모습도 아닌 이 신상은 상체를 45도 각도로 들고 있고 발목을 엉덩이에 붙인 채 두 무릎을 바로 세우고 있다.

얼굴은 왼쪽으로 향한 채 끝이 안 보이는 어딘가를 응시하면서 두 손은 가지런히 모아 배 위의 접시를 받치고 있다. 이 접시 위에 사람의 심장을 바쳤다고 한다이 신전에서 "비의 신"이 살고 있는 성스러운 샘까지는 너비 4M, 길이 400M, 돌이 깔린 도로로 어져 있으며 도로 양편에는 날개 달린 뱀의 신 쿠쿨칸의 조상 수백 개가 난간처럼 줄지어 서 있다.

"치첸이트사"에는 중앙아메리카에서 가장 크고 정교한 구기장이 있다길이는 91M 정도이며, 벽면에는 마야 예술의 진수를 보여주는 그림들이 양각으로 꾸며져 있다구기장에서 마야인들은 7명씩 2팀으로 나뉘어 "팔꿈치무릎허벅지"만 사용해서 고무공을 8M 높이의 돌고리에 집어넣는 경기를 했는데, 뱀 형상의 돌고리는 아직도 남아 있다.

이 경기는 특정 사람만 참가할 수 있는 신성한 행위였다패자는 목이 베어져 제단에 장식됐는데, 승자 역시 희생 제물로 바쳐지곤 했다구기장의 "두개골의 벽"에는 이런 풍속이 조각되어 있다. 마야의 창세 신화인 "포풀 부(Popul Vuh)"에도 영웅들이 주민들의 목숨을 담보로 구기장에서 악마에게 도전한다는 대목이 나온다.

구기장 벽면 하단에 새겨진 부조로 경기의 내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선수들 중 1명이 종교적 희생양으로 참수를 당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마야문명"은 최전성기를 누릴 때 갑자기 사라졌다. 문명의 후계자도 전설도 하나 남기지 않았다.

"마야"에서는 그런 전쟁이 일어난 흔적도, 다른 지역으로 이동한 흔적도 없다수많은 마야인들은 그들의 찬란한 밀림 문명과 함께 그야말로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내부 요인으로는 소수 지배계급의 독선적인 욕망을 더 이상 충족시킬 수가 없었기 때문에 마야문명이 소멸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지배계급은 웅장한 신전이나 기념비를 계속해서 세우려 했다.

그러나 동물의 힘을 빌리거나 설비를 갖추지 않고 인간의 힘으로만 이런 건축물을 건설하려면 엄청난 희생이 따르게 마련이다. 결국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로 기아와 강제노동을 견디다 못한 대중이 지배계급에 반란을 일으켰을 것이다. 그래서 지배 계급을 상징하는 석비나 석조물을 전혀 세우지 않았고 세우더라도 연호를 새기지 않았던 것이다제로 지배자의 상을 파괴했다는 사실이 고고학 조사에 의해 확인되었다.

외부 요인으로 제일 먼저 거론되는 것은 중세 유럽을 휩쓸었던 "흑사병"과 같은 대규모 질병이다.

학자들은 1482"황열병"이 신대륙의 주민들에게 치명상을 입혔다고 추정했지만, 마야인들의 유골에서 "황열병"의 흔적이나 전염병으로 인한 대규모 시체 매장지 등 직접적인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다. 한편 고원지대에서 세력을 펼치고 있던 유목민족의 공격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이 공격을 피해 마야인들은 450년부터 밀림으로 도피하기 시작했다침략의 충격파가 커짐에 따라 세련된 마야인들은 생활의 리듬을 잃고 말았다신관이 권위를 잃고 성스러운 건물들이 황폐해졌고 지배 귀족 엘리트들 역시 몰락하게 된 것이다더구나 13~16C까지 벌어진 내란은 3000년 이상 계속된 찬란한 문명의 죽음을 재촉했다.

그러므로 16C , "유카탄반도"에 상륙한 에스파냐인들이 만난 마야인들은 원시 상태로 돌아간 빛을 잃은 민족에 지나지 않았다최근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연구팀""지독한 가뭄"이 마야 문명 멸망의 원인"이라는 연구결과를 유명 학술지 "사이언스" 최신호에 발표했다.

3. 신 마야 문명 (마야 - 톨테카)

10C 말경, "마야 족"의 후손들이 다시 "유카탄 반도"로 진출하여, "톨테카 족"과 합세하여, 소위 "마야- 테카""신 마야제국"을 건설하였다.

"신 마야문명"은 규모수준면에서 "고대 마야문명"보다 후진적인 측면을 보였으나, "마야판(Mayapán)코판(Copán)욱스말(Uxmal)"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번영하였다그러나 이들은 12C에 들어, "치첸이트사마야판" 간의 전쟁 이후, 계속된 도시 상호간의 "내전"으로 15C 중엽~ 16C 초 사이에 걸쳐, 여러 곳으로 흩어졌다결국, "신 마야제국""스페인 정복자"들이 도착하기 이전에, 이미 종말을 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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