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양사/미술사

화가 : 피카소 ① (Pablo Picassoㆍ1881ㆍ입체파)의 여성 편력

by 당대 제일 2024. 4. 7.
반응형

 "피카소 (Pablo Picasso1881~1973ㆍ향년 92세ㆍ출생: 스페인ㆍ사망: 프랑스)"는 20C를 대표하는 "스페인 입체파" 화가입체주의 미술의 거장80여 년을 미술에 바쳐 회화/ 조각/ 소묘/ 도자기/ 시 등의 무수한 작품으로 20C 현대미술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나는 보는 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대로 그린다. 평생동안 나는 사랑만 했다. 사랑 없는 삶은 생각할 수가 없다." 미술품 경매에서 작품이 가장 많이 판매된 "1위 작가", 남긴 유산만 10조원에 달하며, 작품 중 1$(1,350억 원) 이상이 훌쩍 넘는 최고가 작품만 무려 6점에 달한다.

 1. 파블로 피카소 (Pablo Picasso1881~1973ㆍ향년 92세ㆍ스페인ㆍ사망: 프랑스)

스페인에서 태어나 식당 장식을 하는 화가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피카소는 말도 배우기 전부터 그림을 배우게 되는데, 천재적인 소질로 아버지를 항상 놀라게 했다아버지에게 그림을 배우면서 일찍이 뛰어난 소묘 실력을 발휘했고, 이후 마드리드에서 미술을 배우며 염증을 느끼다가, 카페사창가를 배회하고 "프라도 미술관"을 찾아가 그림을 감상했는데, 이 시기가 평생 작품의 원동력이 됐다파리를 여행하며, "색채"에 관해 눈을 떴고, "파리"로의 영구 이주를 결심하며, 급진적인 화풍의 작품이 나오기 시작했으며, 생을 마감할 때까지 끊임없는 새로움을 추구했다.

생전부터 그림이 잘 팔렸던 화가로도 유명한데, 자신의 그림이 얼마에 팔리는지 확인했다고 한다. 자기가 받을 돈의 액수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그린 그림의 가치가 얼마나 되는가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를 쓰는 재능도 상당하여 시집도 냈고, 그동안 쓴 시는 30여 개 정도라고 한다"꼬리 잡힌 욕망"이라는 희곡을 쓰기도 했는데, 저항적인 내용이라 몰래 상연되었다. 여기에 출연한 사람들은 "장폴 사르트르시몬 드 보부아르알베르 카뮈" 등등 당대의 지식인들이었다.  패션 감각도 특이해서 흰 바탕에 파란색 가로줄 무늬가 있는 상의를 즐겨 입었으며, 그의 절친 중 1 바로 "찰리 채플린(1889~197788세ㆍ무성영화 시대 최고의 희극배우ㆍ모던타임스/ 위대한 독재자 )"이었다.

그의 파란만장한 여성편력은 화려한 명성 뒤에 가려진 어두운 그늘로, 미술사를 통틀어 그만큼 수많은 염문을 뿌린 작가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는 새로운 여성과 사랑에 빠질 때마다, 변신을 듭하며 새로운 화풍을 만들어냈고, "카멜 다우드(소설가)"의 표현대로, 그는 "여자를 삼킨 화가"였던 것이다. "마리아 피카소(손녀)"는 회고록에서 "할아버지의 걸작은 가족들의 희생을 필요로 했다."고 했다.

2. 라이벌 관계 : 앙리 마티스 (Henri Matisse1869~195412살 연상ㆍ85세ㆍ프랑스)

라이벌 치고는 서로 간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다. 서로를 고양시키는 라이벌 관계였던 것이다20C 미술사의 새 영역을 개척해 나간 "피카소마티스". 둘은 경쟁 관계이자, 둘도 없는 친구였다. "피카소"는 뜨거운 열정주의자였고, "마티스"는 차가운 이성주의자였다. "피카소""마티스"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자신만의 독보적인 세계관을 공고하게 구축한다12살 더 많은 "마티스""(안정조화를 추구)"에서 벗어났다면, 그는 "형태(형태 위주의 긴장열에 초점)" 해방시키게 된다. 그만큼 서로의 스타일이 극명하게 다르기도 했고, 서로에게서 자신에게 없는 부분을 보고 있었다는 듯하다실제로 그는 "마티스"의 작풍 일부를 차용해서 쓰기도 했는데, 그 때문에 그가 화실에 놀러왔다 가면 마티스는 "저 인간 또 아이디어 훔치러 왔다"면서 투덜거리고는 했다는 일화도 있다.

또한 미국의 후원가예술 수집가문인인 "거트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1874~194672)"을 사이에 두고 서로 경쟁의식을 불태웠다. 그녀를 놓고 사랑싸움을 한 건 아니고, 그녀가 잘 사는 집 딸이라 잘 보이려 했기 때문이었다. 성을 봐도 알 수 있듯이 부유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난 그녀는 작가시인활동을 했으며, 파리로 유학와 화실을 열고, 파리의 예술가들과 어울렸는데, 돈이 많아 예술가들의 작품을 후하게 사주거나, 가난한 예술가들이 머무를 집도 무척 싸게 빌려줬다이것은 피카소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결과를 낳았는데, 그는 그녀의 집 벽난로 위에 "마티스"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보고, 자존심이 상해, "마티스"의 그림보다 더 멋진 그림을 그려 그녀에게 바쳤다는 일화도 있다.

앙리 마티스 (Henri Matisse1869~~1954ㆍ향년 85세ㆍ프랑스)

주요 작품 : 저녁 식탁열린 창삶의 기쁨  /  프랑스 화가야수파 운동의 지도자20C를 주름잡은 야수파의 창시자19C 후반~20C 초반 활동한 중요 예술가 중 1작품은 색채형태의 조합을 통한 시각적 경험을 제공하며, "포스트 인상주의초현실주의" 운동을 거쳐 "초대 현실주의"를 이끈 핵심 인물 중 1명이다.

중산층 집안 출신으로, 법률 사무소 서기를 지내다가 변호사를 포기하고, 미술 공부를 시작했는데 화가가 되기 위해 "줄리앙 아카데미"에 등록했다. 초기에는 "인상파 풍"의 그림을 그렸고, 이후 "야수파 운동"을 이끌었고 평생동안 "색채의 표현력"을 추구했다. 소재는 주로 실내풍경이나 구상적 형태였으며, 그가 주제를 다루는 방식에는 "지중해" 특유의 활기를 담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공산주의자였으나"스탈린"을 무척이나 혐오했다고 한다. 1944년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했는데, 정치활동이 자신의 예술의 세계관적인 연장선이라고 생각했다. 1937"프란시스코 프랑코 정권"에 반대하는 의미에서 "프랑코의 꿈과 거짓"이라는 산문시와 삽화를 만들기도 했다.

 

3. 복잡한 개인사ㆍ예술적 배경ㆍ정치적 성향

기본적으로 공산주의자였으나"스탈린"을 무척이나 혐오했다고 한다. 1944년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했는데, 정치활동이 자신의 예술의 세계관적인 연장선이라고 생각했다. 1937"프란시스코 프랑코 정권"에 반대하는 의미에서 "프랑코의 꿈과 거짓"이라는 산문시와 삽화를 만들기도 했다.
  • 파블로 피카소는 계속된 불륜, 딸과의 근친 관계,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죽음 등 복잡한 개인사를 가지고 있었다.
  • 부모님과의 관계, 특히 아버지로부터 받은 유흥업소 방문 경험은 피카소의 성적 욕구와 예술적 감수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
  • 초기 작품은 정밀한 묘사가 돋보이며, 이는 아버지에게서 배운 기본기가 반영된 결과이다. 
  • 피카소의 초기 그림들은 우울한 분위기를 담고 있으며, 이는 그의 "청색시대" 라 불리며 현재는 높은 가치로 인정받고 있다.

기본적으로 공산주의자였으나, "스탈린"을 무척이나 혐오했다고 한다. 1944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했는데, 정치활동이 자신의 예술의 세계관적인 연장선이라고 생각했다. 1937, "프란시스코 프랑코 정권"에 반대하는 의미에서 "프랑코의 꿈과 거짓"이라는 산문시와 삽화를 만들기도 했다.

 

4. 어린시절 : 아버지에게 배운 "매춘"

아버지 덕분에 어릴 때부터 미술 교육을 제대로 받았다.  아버지 "호세" 는 화가이자, 예술대학 교수였는데, 피카소에게 묘사와 모방을 강조하며, 기본기를 탄탄하게 다지도록 가르쳤다.  피카소의 초기 작품들을 보면, 추상화가 아닌 정밀한 묘사가 돋보이는 이유가 바로 아버지의 영향 때문이라고 한다..

아버지는 피카소에게 그림뿐만 아니라, 묘한 것도 가르쳐줬다고 하는데,  피카소는 아버지로부터 "메춘"을 배웠고, 이후 복잡한 여성 관계를 맺게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교육 방식이 피카소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상상해보면, 씁쓸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피카소는 엄마 뱃속에서부터 남달랐는데, 엄마 "마리아" 는 피카소가 태어나 처음으로 내뱉은 말이 엄마, 아빠도 아닌 "연필이었다"고 회상했다..

피카소는 학교 수업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혼자 그림만 그리는 아이였다.  9살 때는 비둘이에 꽂혀 학교에 비둘기를 잡아와서 하루 종일 비둘기 그림만 그렸다고 한다. 결국 피카소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지만,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5. 피카소의 말년, 그리고 남겨진 이야기

피카소의 삶은 화려했지만, 그 뒤에는 가족들의 희생과 아픔이 숨겨져 있었다. 그의 천재성은 인정받지만, 그의 어두운 면 또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인 것 같다. 피카소는 71세에 27살의 "자클린 로케" 를 만나 결혼했고, 그녀는 피카소가 죽을 때까지 헌신적으로 그를 보살폈다. 피카소의 마지막 아내 "자클린 로케" 는 평범한 소시민이었지만, 피카소에게 헌신적이었다고 한다.

피카소는 92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피카소의 장례식에서 가족 간의 갈등이 폭발했다. 피카소의 장손은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그로인해 아들 "파울로" 도 알코올 중독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6. 주요 작품

주요 작품 : 게르니카 (349×775cmㆍ1937년 작ㆍ스페인 내전의 참상을 현실적으로 그림)아비뇽의 처녀들(창가의 여성들을 그림ㆍ여1명의 얼굴은 처음으로 사랑에 빠진 여성인 페르낭드 올리비에의 모습)        나치의 "파리" 점령 직후, 한 게슈타포 장교가 "게르니카"보고, 그에게 "당신 작품인가?"라고 묻자, 그는 "아니, 당신들"이라며 촌철살인 답변을 날렸다고 한다.

작품 가격은 역대 최고의 가격을 자랑한다. (1932년에 그린 작품이 명작으로, 당시 피카소(51)마리 (22) 때)

(The Dream1932$ 15000): 안락의자에 앉아 고개를 옆으로 떨군 채 깊은 잠에 빠진 관능적인 모습의 "마리"가 담겨 있고, "마리"의 얼굴에는 "피카소"의 발기된 남근을 추상적으로 묘사한 형태를 발견할 수 있다.

시계를 찬 여인 (Femme a la Montre1932$ 13930): 여인은 시계를 찬 "마리"이고, 특별했던 건, 그가 이 그림을 통해 자신의 불륜 사실을 세상에 공개했기 때문이다.

누드, 녹색 잎과 상반신 (Nude, Green Leaves and Bust1932$ 1650): "마리"가 옷을 벗은 채 누워 있는 모습으로, 그가 단 하루 만에 그린 그림이다.

창가에 앉아있는 여인 (Woman Sitting Near a Window1932$ 1340): 한 손을 어깨에 올리고, 다른 한 손을 무릎에 살포시 얹은 채 창밖을 바라보는 "마리"에게서 청순함이 느껴지는데,다른 작품과 달리 성적인 감각을 자극하는 연인이 아닌 순수한 이미지의 "마리"가 그려졌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