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임 (許任ㆍ1570?~ 1647?ㆍ77세?)은 침술의 대가로,어머니의 병을 고쳐준 의원에게 품을 팔며, 눈썰미로 "침구법"을 배웠다. 관노 집안의 아들로, "허준(許浚ㆍ1539~1615ㆍ동의보감 저술"도 "서얼"이긴 하지만, 양반 출신이다. "허준"과 함께 "선조의 주치의"였던 "허임"은 "관노의 아들"로서 의원이 되었는데, 그의 아들은 의원으로 대를 잇지 않았다.
1. 허임 (許任ㆍ1570?~ 1647?ㆍ향년 77세?)
조선 선조ㆍ광해군 때, 의관(醫官)ㆍ침술의 대가ㆍ"치종교수(治腫敎授)"라고도 표기한 것으로 보아, 외과적인 치료도 겸했음을 알 수 있다. 신통한 침술로 이름을 날렸던 허임은 75세 때에 평생 경험을 집대성하여 "침구경험방"이란 책을 냈다. "이경석(내의원 제조)"은 "침구경험방"에 다음과 같이 발문을 썼다. "태의 허임은 평소 신의 기술을 가진 자로 일컬어져 평생 구하고 살린 사람이 손으로 다 헤아릴 수 없다. 그간 죽어가던 사람도 일으키는 효험을 많이 거두어 명성을 일세에 날렸으니, 침가(針家)들이 추대하여 으뜸으로 삼았다."
• 출 생 : 경기도 김포군 양촌면 공암리 능곡동 (서울 강서구 가양동) • 묘 : 하포 광암동 (下浦 廣岩洞ㆍ파주 진동면 민통선 안에 있음) • 부 : 허억봉 (許億鳳ㆍ악공(천민ㆍ"장악원"의 대표적인 연주자)ㆍ양양의 관노 출신)→ 후에 "우의정 부원군"으로 추증 • 모 : 좌의정 김귀영의 사비(私婢) 계집종 박씨 → 후에 "정경부인"으로 봉해짐
• 호 : 구암 (龜巖)
"허준(許浚ㆍ1539~ 1615)"과 함께 "선조의 주치의"였던 "허임"은 "관노의 아들"로서 의원이 되었는데, 그의 아들은 의원으로 대를 잇지 않았다. 그랬기에 그의 집안은 "중인층"으로 정착되지 못했다. 그의 의술은 제자 "최유태(崔有泰)ㆍ오정화(吳鼎和)"의 집안을 통해, 침술을 후대에 전승시켰다. 의원은 전형적인 "중인"의 직업이지만, 모두 "중인"은 아니다.
"중인"이 형성되기 전인 조선 전기에는 선비들이 의원 활동을 했으며, "중인층"이 형성된 조선 중기 이후에도 선비 출신의 의원이 많았다. 이들을 "유의(儒醫)"라고 하였다.
2. 관노의 아들
아버지 "허억봉"은 "강원도 양양"의 관노였는데, 어린 나이에 "장악원 악공"으로 뽑혀 한양에 올라왔다. "악생"은 양민이지만, "악공"은 천민이었다. "장악원 첨정 안상"이 "금합자보(琴合字譜)"를 만들었는데, "허억봉"의 연주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이 악보는 목판본으로 간행된 악보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라, 보물 제283호로 지정되었는데, "안상"은 서문에 이렇게 썼다. "내가 가정 신유년(1561년)에 장악원 첨정이 되었는데, 악공을 시험할 때에 쓰는 악보와 책을 보니 문제가 있었다. 예전의 합자보(合字譜)를 버리고 다만 거문고와 상하 괘(卦)의 차례만 있으며, 손가락을 쓰는 법과 술대를 쓰는 법은 없으니, 거문고를 처음 배우는 자들이 쉽게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악사 홍선종을 시켜 당시의 곡조를 모으고 약간의 악보를 보태어, 합자보를 고치게 하였다. 또 허억봉에게 적보(笛譜)를 만들게 하고, 이무금에게 장구보를 만들게 하여 그 가사와 육보(肉譜)를 함께 기록했다. 홍선종은 기보법(記譜法)에 통달하였고, 허억봉과 이무금은 젓대와 장구로 세상에 이름을 떨친 자들이다."
"허장렬 (허씨 대종회 부회장)"은 "허조(許稠)가 좌의정으로 있던 세종 때까지는 하양 허씨가 떳떳한 양반이었는데, 아들 허후와 손자 허조가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을 반대하다가 죽고 자손들은 관노가 되어 충청북도 괴산군에 배속되었다."고 고증했다. 그래서 "허임"의 선조 묘소가 "괴산"에 있게 된 것이다.
관노 "허억봉"이 "좌의정 김귀영의 계집종 박씨"가 부부가 된 사연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은데, "허임 기념사업회 손중양 이사"는 이렇게 추측하였다. "허임"이 태어났다고 여겨지는 1570년 직전에 "김귀영"이 "예조판서"가 되었다. "금합자보"를 만드는 과정에서 "장악원"의 대표적인 연주자로 인정받은 "허억봉"은 당연히 "김귀영"의 집에 자주 부름 받았을 것이고, 그러한 과정에서 "계집종 박씨"와 눈이 맞았을 것이다. 아버지가 "관노"인 데다, 어머니도 "여종"이었으니 "허임"은 당연히 "종"이 되었어야 하는데, 그가 "종"이었다는 기록은 없다. 아버지가 "전악"까지 오르면서 제도에 따라 면천되고, "허임"도 "천인"의 신분을 벗어난 것으로 여겨진다.
3. 눈썰미로 "침구법"을 습득
어머니 박씨가 병에 걸렸는데, 집이 가난해 의원을 불러다 치료할 수가 없었다. 당시 서민들은 의원이 진맥해서 처방을 내주어도, 약재가 비싸기 때문에 몇 차례 침만 맞고도 고칠 수 있는 침술을 더 좋아했다. 그런데 그의 집안은 너무 가난해서 침놓는 수고비조차 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침을 놓아준 의원의 집에 가서 잡일을 도와주는 것으로 치료비를 대신했다.
그런 과정에서 허임은 눈썰미로 "침구법"을 배웠다. 신통한 침술로 이름을 날렸던 허임은 75세 때에 평생 경험을 집대성하여 "침구경험방"이란 책을 냈는데, 머리말에서 자기가 침술을 배운 과정을 이렇게 기록했다. "명민하지 못한 내가 어려서 부모의 병 때문에 의원의 집(醫家)에서 일한 적이 있는데, 오랫동안 공들여 어렴풋이나마 의술에 눈을 떴다."
"전의감·혜민서"에서 의학생도로 정식 공부를 하지 못했지만, 그는 20살이 넘자마자 현장에 나가 침술을 베풀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광해군"을 따라, "황해도ㆍ충청도" 등지를 돌아다니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광해군"의 신임을 받기 시작했다. 1595년, "의학교수(종6품)"가 되었으니, 체계적으로 의술을 배우지 않은 그로서는 상당히 빠르게 승진한 것이다.
4. 의원은 크게 약을 쓰는 "약의(藥醫)"와 침을 쓰는 "침의"로 나누어진다.
"약의"는 의과에 합격해야 하지만, "침의"는 민간 출신도 많았다. "약의"를 "침의"보다 높게 여기긴 했지만, 병에 따라 "약의ㆍ침의"의 역할이 달랐으며, 약재가 넉넉지 않은 전쟁 중에는 "침의"가 할 일이 많았다. 허임을 "치종교수(治腫敎授)"라고도 표기한 것으로 보아, 외과적인 치료도 겸했음을 알 수 있다.
"선조"는 임기 말년에 병이 깊어지자, 여러 의원이 자주 입시하여 치료했는데, "선조실록"에는 "허준ㆍ허임"의 이름이 번갈아 나온다. 1604.09.23일, 한밤중에 "편두통"을 일으키자, "선조"가 허준에게 "침을 놓는 것이 어떻겠는가?" 물으니, "침의들은 항상 "반드시 침을 놓아 열기를 해소시켜야 통증이 줄어든다"고 말합니다. 소신은 침놓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만, 그들의 말이 이러하기 때문에 아룁니다. 허임도 평소에 "경맥을 이끌어낸 뒤에 아시혈에 침을 놓을 수 있다"고 했는데, 이 말이 일리가 있습니다."고 했다.
"선조"가 병풍을 치게 하고, "허임"에게 침을 놓게 했다. "허준(50대)"이 "허임(30대)"의 침술을 임금 앞에서 인정했는데, 약으로 며칠 끌다가 침을 맞고 완쾌된 "선조"는 1달 뒤에 "허임"을 6품에서 정3품으로 승진시켰다. "허임"이 현역에서 물러나, "공주"에서 살 때에도 "광해군"은 그를 왕궁으로 불러 침을 맞았으며, 너무 늙어 말을 탈 수 없게 되자, 처방이라도 보내 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허임"은 "선조ㆍ광해군"의 신임을 받아 승진할 때에도 "관노의 아들"이라는 꼬리표를 끝내 떼지는 못했다. 1617년.02.12일 "광해군"이 "허임"을 "영평현령"에서 "양주목사"로 승진시키자 "사헌부"에서는 "허임의 아비는 관노이고, 어미는 사비(私婢)이니, 비천한 자 중에서도 더욱 비천한 자입니다." 하고 출생 신분을 들고 나와 반대하였다. 18~26일까지 계속 반대하자, "광해군"도 결국 지쳐서 03.09일에 "부평부사"로 내보내는 형식으로 타협했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지만, "관노ㆍ여종" 사이에 태어난 "천민"을 "한양" 인근의 "목사(정3품)"로 내보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18C 초, 조선으로 유학을 온 "야마카와(山川淳庵ㆍ오사카 출신 일본 의사)"는 "침구경험방"을 일본에 가지고 가서 1725년 일본에서 간행하였다.
5. 공주(충남)에 정착
"허임"이 "공주"에 정착함으로써, 후손들은 "한양"의 중인들과 연결되지 못했지만, 그의 침술은 제자들을 통해 대대로 전수되었다. "급유방(及幼方)"이라는 의서에 "숙종" 때 명의 2명을 소개했는데, 이들이 모두 허임의 제자였다. "숙종 대에 "태의 최유태ㆍ별제 오정화"는 모두 허임에게서 침술을 전수받아 당대에 이름났다. 나는 이 두 사람에게서 그 침술의 연원을 전해 들었으므로 자세히 기록하였다.
최유태는 9대 의원으로 이름난 청주 한씨 출신이다. 최귀동부터 계손ㆍ덕은ㆍ준삼ㆍ응원ㆍ유태를 거쳐, 만선ㆍ익진ㆍ택증ㆍ택규에 이르기까지 9대가 모두 의원으로 활동했다. 응원은 내침의(內針醫)인데, 23세 되던 1651년 의과에 합격한 작은 아들 유태는 아버지의 침술을 전수받지 않고, 허임의 침술을 전수받았다. 응원의 맏아들 유후는 1639년 의과에 합격했는데, 그의 후손도 만상·익명·홍훈까지 의원으로 활동했다.
오정화의 집안은 11대 오인수까지 문과 합격자를 낸 양반이었지만, 오구가(13대)·오대종(14대)이 무과에 합격해 무반이 되었으며, 오대종의 1째 아들 오인량(15대)이 역과에 합격하면서 역관 가문이 되었다. 오대종의 2째 아들인 오제량(15대)은 무과에 급제하여 무반의 전통을 이어받았는데, 아들 오정화(16대)는 역관의 딸과 결혼했지만 가업을 잇지 않고, 허임의 침술을 전수받으면서 그의 후손 가운데 한 계파는 역관으로 이어지고, 한 계파는 의원으로 이어졌다. 의과에 합격해 활인서 별제(종6품)까지 오른 오정화(16대)는 침만 잘 놓은 것이 아니라 약까지 처방을 내려 "의약동참의"로 이름을 올렸다.
그의 후손들은 "오지철(17대)ㆍ오덕신(18대)ㆍ오명검(19대)ㆍ오인풍(20대)"까지 여러 대에 걸쳐 모두 침술 의원으로 대를 이었다. 또한 오지항(17대)부터 오경석(24대)까지 8대에 걸쳐 역관을 낸 것으로도 유명하다.
※ 오경석 (吳慶錫ㆍ1831~1879ㆍ향년 48세)
오세창의 아버지ㆍ한국 최초의 개화사상가(북학파)ㆍ조선후기 역관ㆍ외교관ㆍ정치인ㆍ사상가ㆍ작가ㆍ시인ㆍ금석학자ㆍ서예가(특히 전서체를 잘 썼다)ㆍ서화가ㆍ고미술품 감정
"박규수ㆍ유대치ㆍ강위" 등과 더불어 초기 "개화 인사"이자, "북학파"에서 "개화파"로 넘어가는 과도기형 인물로 평가된다. "오경석"이 가지고 온 "신서"는 친구인 "유대치"에게 영향을 끼쳤다. "유대치"는 "오경석"과 동갑으로 "불심"이 깊고, 다방면에 유능한 "한의사"였으며, "유대치"를 따르는 이들로는 "김옥균ㆍ박영효ㆍ서광범" 등이었다. 결국 "오경석"의 영향을 받아, 초기 "개화사상"이 일어난 셈이다. 이런 까닭에 "한국 최초의 개화사상가" 또는 "한국 개화사상의 비조"라는 평가를 받는다.
※ 오세창 (吳世昌ㆍ1864~1953ㆍ향년 89세)
"일제 강점기" 동안, 친일하지 않은 "독립운동"의 원로ㆍ1919년 "3ㆍ1만세운동"에 참여, 당시 "민족 대표 33인"의 한사람ㆍ조선 말기/대한제국의 문신ㆍ최초의 신문 기자ㆍ독립운동가ㆍ계몽 운동가ㆍ언론인ㆍ민주의원ㆍ서화가ㆍ"개화파" 중인 역관 "오경석"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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