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준 (1539~ 1615ㆍ향년 76세)"은 명문가 서자 출신(서얼이지만, 양반 출신)ㆍ"내의원"에 봉직하면서 명성을 높였을 뿐 아니라, "동의보감"을 저술하여 의학을 "청나라ㆍ일본"까지 과시한 명의ㆍ"동의보감"이 완성된 5년 뒤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까지 "동의보감"을 곁에 두고 눈을 감았다고 한다.
1. 허준 (許浚ㆍ1539~1615ㆍ향년 76세)
조선 선조ㆍ광해군 때, 의관(醫官)ㆍ한의사(韓醫師)ㆍ동의보감(東醫寶鑑ㆍ국보 제319호) 저자ㆍ"선조ㆍ광해군"의 총애를 받았지만, 평생 고난의 삶을 살아야 했는데, "유가 출신" 벼슬아치들의 편견 때문이었다. "동의보감"이 완성한 뒤에도 끊임없이 새로운 의서를 내기에 여념이 없었는데, "선조"의 명을 받아, "임진왜란" 종결 후, 각종 중국 의서ㆍ기존 의서의 복원ㆍ편찬ㆍ정리에 힘썼다. 특히 "전염병"의 예방ㆍ치료에 관심을 기울여, 이 방면의 저술도 냈다. 언해두창집요(諺解痘瘡集要ㆍ한글로 된 의서)ㆍ언해태산집요(산부인과 관련 의서)ㆍ언해구급방(諺解救急方ㆍ기본 가정의서)" 등도 집필하였다.
• 출 생 : 경기도 김포군 양촌면 공암리 능곡동 (서울 강서구 가양동) • 묘 : 하포 광암동(下浦 廣岩洞ㆍ파주 진동면 민통선 안에 있음) • 호 : 구암 (龜巖)
• 부 모 : 부 : 허논(용천부사)ㆍ모(첩실): 영광 김씨ㆍ조부 : 허곤(許琨ㆍ무관ㆍ경상도우수사) • 자 녀 : 아들 : 파릉군 허겸(巴陵君 許謙) • 가 족 : 이복형 : 허옥(許沃)ㆍ동복동생 : 허징(許徵)ㆍ10촌 : 허균ㆍ허난설헌ㆍ허봉ㆍ허성
2. 유이태 (劉以泰ㆍ劉爾泰): 1652~1715ㆍ63세ㆍ숙종 때 거창 명의
허준 후배ㆍ허준 탄생 113년 뒤 출생한 인물
숙종 때 사대부 가문의 유학자ㆍ의학자ㆍ호 : 신연당(新淵堂)ㆍ원학산인(猿鶴山人)ㆍ인서(麟西)ㆍTV 드라마에서 "허준이 유의태라는 인물로부터 의술을 배웠다"고 알려졌지만, 실존인물 "유이태"를 "유의태"로 각색한 캐릭터일 뿐이다.
"마진편ㆍ인서문견록ㆍ실험단방"등을 저술한 조선후기 의관ㆍ"숙종" 때, "두진(痘疹)ㆍ마진(麻疹)" 등의 질병이 크게 유행하여, 생명을 잃는 자가 많았다. 이에 자극을 받아, 집에 전해 내려오던 "마진경험방(麻疹經驗方)"을 참고로 하여, 1696년(숙종 22) "마진편(麻疹篇) 1책"을 저술하다. 이 책은 "마진"에 대한 전문의서로서 오랫동안 필사본으로 전해져왔으나, 1931년 "경남 진주"에서 "박주헌"에 의하여 출간되었다. 그는 "마진편(麻疹篇)"이외 "인서문견록ㆍ실험단방" 저서 2권, 1940년 초반 화재로 소실된 "침구서ㆍ부인방"이 있다.
3. 선조의 신임
명문 가문의 하나로 꼽힌 "양천 허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직계 조상은 어떤 연유인지 무관벼슬을 해 왔다. 곧 문관보다 한 등급 낮게 보는 무관 양반들이었다. 그는 불행하게도 "서자"로 태어났다. 그가 "서자"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아마 할아버지나 아버지처럼 무관벼슬을 했을 것이다. "서자"의 몸으로 출세할 수 있는 길은 너무나 한정되어 있었다. 다만 나이가 들어, "경상도 산청"에서 의술을 공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할머니 친정이 "진주"였고, "유씨 성"을 가졌다. 신분이 낮은 "그로서는 일찌감치 중인들이 흔히 직업으로 갖는 "서사(書寫ㆍ글씨를 베낌)ㆍ의원ㆍ기술직"을 택해 출세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스승을 찾아 헤맸을 것이다.
그는 20대 초반부터 "의원"으로 꽤나 알려졌던 모양이다. 24세 때, 유명한 "류희춘(柳希春ㆍ1513~1577ㆍ선조 때 이조참판)" 부부의 병을 돌보기 위해 서울로 올라와서 치료를 잘해 줘, 명망을 얻었다고 한다. 20대 후반에 높은 경쟁률을 뚫고, 과거 잡과에 합격했고, "유희춘"의 추천으로 "내의원(內醫院ㆍ궁중의 의약을 맡아 보던 관아)"에 근무하게 되었다. 비록 문관에게서 푸대접을 받는 의원이었지만 어엿한 직업을 가지고 가정을 꾸리면서 의학 연구에 열중할 수 있는 자리를 얻은 것이다.
그는 과거에 합격한 뒤, 1년 만에 임금이나 왕자의 병을 돌보는 지위인 "내의"에 올랐다. 그의 끊임없는 노력 때문이었다. 그는 선배인 "양예수"와 함께 왕자인 "광해군"의 병을 고친 덕분에 "선조"의 신임을 더욱 깊게 받았다. 그는 이런 결과에 만족하지 않고 중국이나 조선의 의학서적을 읽으며 자기 나름의 의학이론을 세우는데 정신을 쏟았다. 그는 "중국"의 진맥 의학서인 "찬도맥결(纂圖脈訣)"을 알기 쉽게 재편집해 잘못된 숫자를 바로잡았고, 그 밖에 많은 서적을 증보 간행하거나 번역해 사람들이 쉽게 접할 수 있게 했다.
4. 임진왜란 중, 선조의 말벗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그는 "선조"의 "시의(侍醫ㆍ궁중에서 임금의 진료를 맡는 의사)"가 되어 선배 "양예수"와 함께 "몽진(蒙塵ㆍ임금이 난리를 피해 다른 곳으로 옮아감)" 길에 올랐다. 임금의 행차에 백성들은 돌팔매질을 하기도 하고, 땔거리ㆍ밥거리 대기를 거절하기도 했다. 더욱이 많은 벼슬아치들이 도망가는 바람에, 임금 곁에는 몇몇의 신하와 군졸만 있었다. 그는 임금 곁을 끝내 떠나지 않고 건강을 돌보았다.
"선조"는 이런 "허준"을 친구이자, 말벗으로 여겼다. 전쟁은 일단 끝났지만, 기아와 질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갔다. 그는 의원으로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지만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이에 "선조"는 고심 끝에 새로운 의학서적의 편찬을 명하면서, 이런 윤음(임금이 신하나 백성에게 내리는 말)을 내렸다. "궁벽한 마을의 농사꾼들로 하여금 요절하거나 비명으로 죽는 일을 면하게 하기 위해 우리나라에서 나는 많은 약재를 낱낱이 다시 살펴 분류하여 지식이 모자라는 어리석은 백성들도 의술에 대한 지식을 쉽게 얻도록 하라."
선배인 "양예수ㆍ정작" 등과 함께 새로운 의학서적 편찬에 착수했다. 그러나 일이 채 진행되기도 전에 "정유재란(1597년)"이 일어나 의원들이 뿔뿔이 흩어졌고 편찬사업도 중단되었다. 이런 시련을 겪었지만 다음해 전쟁이 끝나자, "선조"는 궁중에 있는 500여 권의 의학서적을 그에게 맡기며 다시 의서편찬의 책임을 지웠다.
이제 그의 큰 뜻이 실현될 첫 단계가 시작된 것이다. 전쟁이 완전히 끝난 뒤인 1604년 나라에서는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공신 칭호를 내렸다. 그는 임금을 호위한 공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에 올라 "양평군(陽平君)"이라는 공신 칭호를 받고, "숭록대부(崇祿大夫)"에 봉해졌다. 어찌 보면 "선조"는 자신을 돌봐 준 벼슬아치를 중심으로 공신을 지정하고 봉호를 주는 편파적 조치를 취한 것이다. 그러자 문관들이 "중인 신분"의 허준에게 "당상관"에 해당하는 작호를 준 것이 부당하다며 심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그에게는 대단히 영광이었지만 썩은 벼슬아치들의 눈에 못마땅한 처사였던 것이다. 그러나 임금은 이를 물리치고 작호를 그대로 내리게 했다.
이런 속에서 그는 잠자고 먹는 일도 잊은 채 새로운 의학 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단순한 의학서적만 모으고 본 것이 아니라, 의학사상의 기초가 되는 "도교ㆍ참선" 등 정신집중의 수양도 거듭 수련했다. 10여 년의 노력 끝에 거의 우리나라 실정에 맞고 민간인들이 쉽게 터득할 수 있는 의학서적이 완성 단계에 접어들었다.
5. 선조의 승하
그런데 1608.02월에 "선조"가 갑자기 기도가 막혀 세상을 뜨고 말았다. 어의인 "허준"이 손쓸 사이도 없었다. 그렇게 "선조"가 죽자, 그 책임이 그에게 씌워졌다. "허준"으로서는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더군다나 일부 벼슬아치들은 그에게 죽음을 내리라고도 했고, 멀리 귀양을 보내라고도 했다. 실제로 임금이 갑자기 죽었을 때, 약을 지어 올렸거나 진맥한 어의를 처벌하는 일은 흔했지만, 이 경우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새 임금인 "광해군"은 그를 감싸고돌면서 파직하는 정도로 그치는 조치를 내렸다. 조정의 신하들이 그에게 죄를 물어야 한다고 요구하자, "광해군"은 가장 가벼운 유배 처분을 내렸다.
그가 유배생활을 할 때에도 일부 벼슬아치들은 여전히 무거운 죄를 주어야 한다며, "위리안치"라도 시켜야 한다고 요구했다.그러나 "광해군"은 이를 듣지 않고, 오히려 그를 유배에서 풀어 주라며 이렇게 말했다. "허준은 호성공신일 뿐만 아니라 나에게 공로가 있는 사람이다. 근래 내가 병이 많지만 내의원에는 노성(老成)한 의원이 적다. 하물며 유배된 지 1년이 되었으니 그 죄를 넉넉히 징계했다고 할 만하다. 이제 풀어 주는 것이 좋겠다." < 광해군 일기 5권ㆍ1년 11월 > 병이 많은 "광해군"으로서는 "허준"의 의술이 절실했겠지만, 그보다 "광해군"은 "허준"의 인술과 열정을 남달리 아꼈던 것이다. 그는 64세의 나이로 유배지에서 풀려났다.
6. 어의 허준ㆍ동의보감 완성 (광해군 시대)
그는 다시 "광해군"의 총애를 받으며, 1년 동안 피나는 노력을 기울여 "동의보감"을 완성했다. 작업을 시작한 지 햇수로 14년 만에 "동의보감(총 25권)"은 완성이 되었다. 내용은 내경편(內景篇ㆍ내과)ㆍ외형편(外形篇ㆍ외과)ㆍ잡병편(雜病篇ㆍ유행병·급성병·부인병·소아병)ㆍ탕액편(湯液篇ㆍ약제·약물)ㆍ침구편(鍼灸篇ㆍ침과 뜸) 등으로 분류되어 있다.
이 책은 "중국"과 우리나라의 의약서를 총망라해서 엮은 것이며, 단순한 치료만이 아닌 병의 근본 원인을 살피고, 정신수양과 섭생(적당한 운동과 음식물로 건강을 유지하도록 꾀함)에도 중점을 두고 처방했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더한다.
특히 당시까지만 해도 우리 민족의 체질이나 풍토에 맞지 않는 이론에, 약재도 우리나라에서 생산되지 않는 중국 중심의 의학이론에서 탈피했다는 점에서 그 창의성이 돋보인다. 또 철저한 임상을 통해 그 치료나 복용의 기준을 세웠다는 점이 드러났다.
이 책을 완성해서 "광해군"에게 바치자, 의학지식이 상당하던 "광해군"도 감탄을 금하지 못하고 곧 출판을 서두르게 되었다. "광해군"은 많은 경비를 마련해 주고 격려했다. 그 결과 1613년(광해군 5) 출판의 결실을 맺어 널리 보급되었고, 한국의학의 신기원을 이룩하게 되었다. "광해군"은 이 책을 완성한 공로를 기려, 빗발치는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임금의 장인에게나 주는 봉호인 "양평부원군"을 내렸다. 문관들이 깔보는 일개 의원을 영의정의 반열에 들게 해서 최고의 영예를 누리게 한 것이다.
이 책은 조선에서 출판된 뒤, "중국ㆍ일본"에서도 출판되어 의원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국내에서는 19C 끝 무렵 "이제마의 사상의학(四象醫學)"이 나오기 전까지 우리 풍토와 체질에 맞는 유일한 처방전으로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했고, 의학공부에 빼놓을 수 없는 교과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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