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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물 • 악녀 (10인) • 부덕 (6인)

한석봉ㆍ한호 (선조ㆍ1543~1605)ㆍ서예가ㆍ김정희와 쌍벽

by 당대 제일 2022.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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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봉ㆍ한호 (韓濩ㆍ1543~1605ㆍ62세)"는 "추사 김정희"와 쌍벽을 이루는 "서예가"로, "해서ㆍ행서ㆍ초서" 등 각 "서체"에 모두 능했다고 한다. "작시(作詩)"에 능한 "차천로"ㆍ"작문"에 능한 "최립"과 함께, "송도3절"로 불린다. "안평대군 (安平大君)ㆍ김구 (金絿)ㆍ양사언 (楊士彦)"과 함께, "조선 4대 서가 (四大書家)"로 꼽힌다 "허균ㆍ허봉 (허균의 형( 홍길동전 저자)ㆍ여류시인 허난설헌 (허초희)의 오빠)"의 친구이다.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으로 불우한 환경을 극복하고, 당대 최고의 "서예가"로 자리매김한 입지전적의 인물이지만, 최고의 "서예가"가 되고 나서의 그의 삶도 그리 행복하지만은 않았던 듯하다.  

 

1. 한호 (韓濩1543~1605향년 62)

조선 문신서예가(김정희와 쌍벽)외교관ㆍ"서예의 명인"이라 불렸으며, 1567(명종22), 25세 때 "진사시(進士試)"에만 합격한 후, "글씨를 잘 쓴다."고 바로 "사자관"으로 특채됐고, 바로 얼마 후 "중앙"으로 올라오라는 명을 받고, "선조"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으며, "선조"는 그가 쓴 글씨를 항상 벽에 걸어두고 감상하였다고 한다조선의 문서와 "나라"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도맡아 썼으며, "중국"에 사절이 갈 때도 "서사관"으로 파견되었다.

출 생 : 경기도 개성부        사 망 : 경기도 개성부        사 인 : 나귀에서 떨어져 "낙상사" (허균이정(화가)과 술자리 이후)          : 석봉(石峯)청사(淸沙)        별 칭 : 서예의 명인        : 강릉 최씨       • 가 족 : 부 : 한언공(韓彦恭ㆍ3세에 사망) / 모 : 홍주 백씨 / 조부 : 한세관(韓世寬ㆍ병조정랑)

친 구 : 허봉허균이정(화가)        경 력 : 1567(24, 명종22)- 과거 급제(진사시 합격 정확한 까닭은 알기 어려우나, 그러나 "대과"에는 급제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는 "진사시"에만 합격하고, "관리생활"을 시작했는데, "명필에 대한 특전"이었다.

한석봉

1567(명종22), 25세 때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그 후 1583(선조16), "와서별제(瓦署別提)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하고, 1592"임진왜란" 때는 "사보""왕의 행재소(行在所)"에 가서, 문서 관계의 일을 맡았으며, "가평군수(加平君守)흡곡현령(谷縣縣令)" 등을 지냈다

그는 뛰어난 "글씨""사자관(寫字官)"에 발탁되어, 오래 근무했다"사자관""승문원(承文院, 40)규장각(奎章閣, 8)"에 소속되어, 말 그대로 글씨를 쓰는 관원이었다당연히 그들은 가장 중요한 문서인 "국왕의 어서(御書)""외교문서의 필사"를 전담했다"사자관(寫字官)"으로서 "국가의 주요 문서외교 문서"를 도맡아 작성하며 지냈는데, 그 동안 사신을 따라, 몇 차례 "명나라"에 다녀왔다사신을 따라, "명나라"에 갈 때마다, "한호"는 연석이 벌어진 자리에서, "특유의 정교한 필법"으로 글씨를 써서, "동방 최고의 명필"로 아낌없는 칭송을 들었으며, "명나라"의 여러 고위 관료들로부터 종종 "왕희지"와 비교하는 평판을 들었다.  "선조""한호"가 쓴 글씨를 항상 궁궐의 벽에 걸어두고 감상하였으며, "임진왜란정유재란" , "조선"도우러 왔던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마귀(麻貴)" 등도 "한호"에게 친필을 부탁하여, 어 가지고 갔다고 전해진다.

 

2. 석봉 서체의 특징평가

어려서부터 스스로 "붓글씨"를 익혔으며, 타고난 "천재"에다 피나는 수련을 쌓았으므로, "(楷行眞草)"의 각체가 모두 "묘경"에 이르렀다그는 전설적인 명필 "왕휘지 안진경"의 필체를 익힌 후,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 명필의 글씨를 흉내 내는 것에서, 한 발짝 나아가, 자신의 고유한 필체를 완성했다그는 "왕희지안진경"의 필법을 익혔으며,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계속 뛰어난 명필가들의 필법을 연구하여, "해서행서초서" 등에 모두 뛰어나게 되었다.

"석봉 서체"의 특징은 "조송설(趙松雪)"를 쓰면서도, 자기 독특한" 체풍(體風)"을 세운 데 있다그렇게 그는 그때까지 중국의 서체서풍을 모방하던 풍조를 깨뜨리고, 독창적인 경지를 개척하여 "석봉 류"의 호쾌하고 강건한 서풍을 만들어냈다"글씨"는 현재까지 전해지는 "친필 진본"이 거의 없으나, "석봉 서법석봉 천자문"과 같은 책이 "모간본"으로 전해지고 있어, 그의 흔적들 더듬어 보게 한다그러나 그의 글씨는 "비문"이 많이 남아 있어, "탁본"으로 유행하고 있다.

그가 "명필"로 이름나게 된 중요한 계기는 2가지였다하나는 "대외의 인정"이었고, 다른 하나는 "국내의 성가(聲價, 세상에 드러난 좋은 평판)"였다그러니까 그는 "당시의 전 세계"라고 할 만한 모든 지역에서 "명필"로 평가받은 것이었다.

"명나라" 후반의 저명한 학자인 "왕세정(王世貞)"은 그의 글씨를 "성난 사자가 돌을 헤치는 것 같고, 목마른 천리마가 물로 달려가는 것 같다."고 평가했고, "명나라"의 사신 "주지번(朱之蕃)""왕희지안진경(顔眞卿)과 우열을 다툴 만하다", 격찬했다"임진왜란"에 참전한 "명장 이여송(李如松)마귀(麻貴)등계달(鄧季達)유구(琉球)의 사신 양찬(梁燦)" 등도 그의 글씨를 요청해 받아갈 정도였다.

왕희지 (王羲之, 321~379): "동진"의 서예가로 "서성(書聖)"으로 존경받는다. "초서행서해서"의 실용적 서체를 술적인 경지로 완성시켰으며, 시집 "난정집서"의 서문인 "난정아집시서"가 대표 걸작으로 꼽힌다안진경 (顔眞卿, 709~785): 당나라() 때의 대신명필가)

"선조"도 그의 "대 자(大 字)"를 보고, "()하고, ())하기 한량없는 글씨"라고 감탄하면서 "중사(中使)"를 보내어, 그 집에 연회를 베풀었다"선조"는 한적한 고을인 "가평 군수"에 임명하면서, "필법을 후세에 전하게 하고자 하니, 권태로울 때는 구태여 쓰지 마라. 게을리도 말고, 서둘지도 마라."고 타일렀으며, "선조" 친필로 "醉裡乾坤 筆奪造化(취리건곤 필탈조화)"8자를 써 주었다.

1583(선조1), "선조"는 그에서 "해서 천자문"을 쓰게 했다"한석봉 글씨""조선 글씨체"로 공식인정한 것이다"선조"는 교활하고, 무능한 국왕이었으나, 글씨를 잘 써, "명필" 소리를 듣는 ""이었다"선조""한석봉 글씨체""조선의 글씨체"로 모든 백성들이 익히기를 바랐다"선조" 자신도 "한석봉의 글씨체"를 익히려고 노력했다.

 

3. 죽음 "허균이정 (화가)"과 술자리 이후, 나귀에서 떨어져 "낙상사"

"명필 한석봉"의 최후는 황당했다"한석봉"에게 "허봉"이라는 친구가 있었다"허봉""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의 형이고, 조선시대 여류시인인 "허난설헌(허초희)"의 오빠로 명문세족 출신이었다가난했던 그는 "허봉"의 집에 머물던 적이 있었는데, 그 때 "허균"과도 알게 되었다천재소리를 듣던 "허봉"38세 나이에 요절했다.

"허봉"이 죽고 난 후, 그는 "허균"과 친구처럼 지냈다글씨의 천재 "한석봉"이 나이는 26년이나 연상이었지만, 재주 많고 똑똑한 "허균"을 알아보았다. 그들에게 나이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은 한 때 "세자시강원(세자 교육기관)"에서 같이 근무한 적도 있었다"허균""세자"에게 좋은 책을 권해 주고, "한석봉""세자"에게 글씨 연습을 시켰다두 사람은 일이 끝나면, 밤새 술 마시는 일이 많았다

"한석봉""흡곡 현감"에서 파직된 후, "수안군수"로 있던 "허균"에게 편지를 보냈다"지난 번에 서울에서 만났을 때는 아이들 때문에 많이 못 마셨지 강원도 후미진 고을 수령으로 있다가 이번에 파직 되었네 고향(개성)으로 가는 길에 수안에 들려서 가려고 하네. 술 준비 해주게 언젠가 비단 펼쳐놓고, 술에 취해, 먹 잔뜩 갈아놓고, 글씨 쓰며, 껄껄 댄 적이 있었지 그 때처럼 허리띠 풀어놓고, 실컷 마셔 보세. 친구"

"허균""한석봉이 개성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나귀를 보내며, 편지를 동봉했다"수안""개성"은 먼 거리가 아니었다"봄이 지나기 전에 만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꾀꼬리 소리와 개울가 물소리에 술잔 기울이는 흥취가 덜할까 해서입니다 나귀 보내니 타시고 천천히 오십시오. 수수로 빚은 술이 익고 있습니다 안주는 잉어회로 하지요. 죽순 나물과 자라 탕도 준비합니다 너무 먹는 타령만 한다고 뭐라 하지 마십시오 평소에는 이렇게 호사스럽게 먹지 못합니다. 형 오실 때만 그렇게 하려고 준비 했습니다."

3년 전, "평양 기생집"에서 만난 후로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이정(화가)" 까지 낀 술자리는 새벽까지 계속되었다1년간 준비한 술이 바닥나자, 모임은 끝났다만취한 "한석봉""자고 가라""허균"의 청을 물리치고, "개성"으로 간다고 고집을 피웠다"한석봉""나귀"를 타고 가다가, "나귀"가 돌 뿌리에 걸려 비틀거리자, 땅에 떨어져 죽었다"허균""한석봉"의 죽음이 자신의 탓이라 자책하며, 괴로워했다.

화가 이정 (李楨ㆍ1578~ 1607ㆍ향년 29): 허균 등에 의해 당대 최고의 화가로 꼽혔다

"조부 배련(陪連)부친 승효(崇孝)"로 이어지는 "화원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 부모를 여의고, 작은아버지인 "흥효(興孝)" 밑에서 자랐으며, 5세 때 저절로 "그림"을 그릴 줄 알아, "흥효"가 가법을 가르치니, 10세에 이미 대성하여, "산수인물불화"를 모두 잘 그렸다고 한다11세 때, "금강산"에 들어가, "신여상인(信如上人)"을 스승 삼아, "승려"가 되려 했으나, "임진왜란" 발발로 뜻을 이루지 못했고, 1589, "장안사"를 개축 시, 벽에 "산수천왕도" 등을 그렸고, 1599"도솔원 미타전""백의대사도"그렸다가난하여 남에게 기식(寄食)하며 지냈으나, 성격이 고매하고, 의리가 강했으며, 좋은 산수를 보면 집에 돌아가는 것을 잊어버릴 만큼, 낭만적이었으나, ""을 매우 좋아하여 "과음"으로 "평양"에서 단명하였다.

 

4. 신필 (神筆)이 되는 과정 : 설화 (2가지

"한석봉"이 수학한 장소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다만 그가 "신희남"에게 글을 배운 서당이 "차곡 들구실"에 있었다는데, "들구실""영암읍 농덕리" 지칭하며,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그가 공부한 서당이 "죽림정사"라고 믿고 있다"죽림정사에서 한석봉을 길러 낸 어머니""한석봉"의 교육을 위해, "영암"에 온 "한석봉의 어머니" 떡을 팔며, 아들을 뒷바라지한 이야기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산이 풍비박산이 된 "한석봉"은 아버지와 친분이 있던 "서경덕(徐敬德)"의 소개로 "영계(瀯溪) 신희남(愼喜男, 영암군 덕진면 영보리 출신)"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12세부터 25세에 "진사시"에 합격할 때까지, "신희남"의 문하에 들어가 필법을 전수받았다고 한다어머니는 "한호"를 유명한 ""로 들여보내 공부를 하게 하였는데, 스승인 승려는 "한호"를 가르치면서 날이 갈수록, 실력이 늘어가는 그의 글 솜씨에 감탄해 마지않았다.

""에 들어가 공부를 한 지 4, 어느 날 그는 어머니가 너무나도 보고 싶어서, 밤에 몰래 ""에서 빠져나와, 집으로 찾아왔다돌아와서는 "이미 공부를 많이 해 더는 배울 것이 없다"고 하자, 어머니는 불을 끈 어두운 방 안으로 들어오게 한 뒤, "자신은 칼로 떡을 썰고, 한호는 글씨를 붓으로 쓰게 하여, 둘의 솜씨를 비교해 보자"고 하였다불을 켜고 보니, 어머니가 썬 떡은 크기나 두께가 모두 똑같아 보기가 좋았는데, "한호"가 쓴 글씨는 서로 크기가 제각각이고, 모양이 비뚤비뚤하여, 보기가 흉했다.

이에 어머니는 "한호"를 크게 꾸짖으며, 자신의 ""처럼, 눈을 감고도 글씨를 고르게 쓸 수 있게 되기 전까지는 집에 올 생각을 하지 말라고 엄명을 하여, "한호"를 다시 돌려보내 공부하게 하였다결국 그는 "10년 동안" 공부를 해서 "조선의 명필"이 되었다이는 어머니의 정성과 냉정한 가르침이 "신필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한호""박연폭포" 아래에서 글씨 공부를 했다10년을 두고 하루도 빠짐없이, "박연폭포"의 바위에 글씨를 썼다마침 "박연폭포 연못"에는 ""이 한 마리 살았는데, "여의주"를 얻어 승천할 즈음이었다그러나 "한호"의 글 쓰는 "먹물" 때문에 승천하지 못하였다""은 할 수 없이, "한호"에게 "하루만 글을 쓰지 말아 달라"고 요청한다그가 거절하자, ""에 조화를 부려, "신필"이 되게 해준 후, 승천하였다하산한 그는 그 ""으로 "신필"이 되었다.

 

5. 생 애

1543, "개성"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한언공"이고, 할아버지는 "병조정랑 한새관"이다그는 돈이 없어, "서당"을 다니기는커녕, "종이"도 살 수가 없었다그래서 "항아리나 돌" 위에 손에 물을 찍어서, "글씨 연습"을 하였으며, 매일같이 꾸준히 연습하자 글씨를 쓰는 솜씨가 차츰 나아지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다

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에게 글을 배웠으나, 15세에 "조부"까지 여의었다이후 집안의 살림이 매우 가난하였으며, 12세에 아버지와 친분이 있던 "서경덕"의 소개로 "영계 신희남" 문하에 들어갔다가난한 가정환경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헌신적인 뒷바라지와 피나는 노력으로 1567(명종22), 25세 때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조선시대 관리의 등용문인 "과거제도"는 까다로웠다"생원과진사과" 초시(, 행정고시 1차 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을 모아, "복시"를 치르는데, "2차 시험"이다"생원과진사과(2차 시험) 합격자""대과"를 치룰 수 있는 자격이 있고,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데, "대과"33명 이하만 뽑았고, "대과"에 합격을 해야 관리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그런데 그는 "진사시"에만 합격하고, "관리생활"을 시작했는데, "명필에 대한 특전"이었다.

 

6. "글씨"를 잘 써, "사자관"으로 특채주변 관료들의 시샘

"진사시(進士試)"에 겨우 합격하여, "사자관(글씨를 깨끗이 정서하는 관리)"에서 "중앙 행정직" 올라간 "한호"를 두고, 많이 입방아를 찍었다"글씨를 잘 쓴다."는 이유만으로 바로 "사자관"으로 특채됐고, 바로 얼마 후 "중앙"으로 올라오라는 명을 받은 것이었다. 이는 그의 묘갈(죽은 사람의 행적을 새겨 넣은 비석)에도 잘 나와 있는데,

"송도에서 났으며, ()보는 사람이 말하기를 "옥토끼가 동쪽에 났으니, 낙양의 종이 값이 높아지리라. 이 아이는 반드시 글씨를 잘 써서, 이름이 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자라면서 글씨 쓰기에 힘썼고, 꿈에 왕희지에게서 글씨를 받아, 이로부터 마음속으로 자부하고(하략)"  "글씨" 잘 써서, 관직에 오른 것까지는 좋았으나, "사자관(당시는 기술직)""일반 관직"은 달랐다"명종" 때까지만 해도 그의 글씨는 빛을 발했으나, "선조"가 등극하면서, 살짝 꼬이게 된다문서를 읽던 "선조"는 너무나 화려한 글씨체의 주인공이 누군지를 신하에게 물었다신하는 문서 작성자가 "한호"라고 이야기를 하자, "선조"는 그를 "중앙 부처"로 발령하게 된다"선조"의 파격적인 인사에 관리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1583(선조1), "선조"는 그에서 "해서 천자문"을 쓰게 했다"한석봉 글씨""조선 글씨체"로 공식인정한 것이다"선조"는 교활하고, 무능한 국왕이었으나, 글씨를 잘 써, "명필" 소리를 듣는 ""이었다"선조""한석봉 글씨체""조선의 글씨체"로 모든 백성들이 익히기를 바랐다"선조" 자신도 "한석봉의 글씨체"를 익히려고 노력했다.

1583(선조1), "선조"의 명으로 "해서천자문"을 쓰던 해, 40세의 나이로 "와서별제"에 임명되었다. "와서별제""공조"소속으로 국가에 필요한 "기와"를 굽는 곳의 "6"으로, 실무자 중에서는 위직이었는데, "대과"를 거치지 않고 겨우 "진사과"에 급제하고, 관리생활을 시작한 그를 관료조직이 그냥 놔 둘 리가 없었다"비천한 출신""글씨나 잘 쓴다."고 국왕의 눈에 들어, "6품 관리"가 되었으니, 곱게 보일리가 없었다"사헌부"에서 상소가 올라왔다.  "와서별제(瓦署別提) 한호는 용심(용심)이 거칠고 비루한 데다, 몸가짐이나 일 처리하는 것이 이서(이방)과 같아, 의관(의관)을 갖춘 사람들이 그와 동렬(同列)이 되기를 부끄러워 하니, 체직시키소서!< 선조 16년 윤 02.01일의 기록 중 >

관리들을 감찰하는 "사헌부"에서, "선조"에게 올린 상소의 내용이다구체적인 비위사실이나, 결함을 가지고, 체직을 시키자는 것이 아니라, 그냥 마음에 들지 않으니 내쫓자는 것인데, , 성격이 더럽고, 옷 입는 것이 남루하기 때문이라는 것으로, 그는 한마디로 "왕따"를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가난하지만, 소탈하게 사는 그를 털어 먼지가 안 나자, "성격옷차림"을 문제 삼아, "인신공격성" 소를 한 것이었다가난한 살림에 "단벌 신사"로 살아가는 그는 갈아입을 "관복"도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한호"의 재주를 아끼던 "선조""사헌부" 상소를 묵살했다.  "가난해서 남루한 옷차림으로 다니는 것도 죄가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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