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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 (선조ㆍ1542~1607)ㆍ징비록 저자ㆍ이순신 천거

by 당대 제일 2022.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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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 (柳成龍ㆍ1542~1607ㆍ65세)"은 "징비록(懲毖錄)"의 저자이며, "이순신"을 천거(절친인 동네친구)한 인물이다. 죽을 때까지 청렴하고 정직한 삶을 살았던 "청백리"이면서, "조선의 5대 명재상(名宰相)"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1591년 "선조"가 "명장"을 천거하라고 했을 때, 류성룡은 "권율ㆍ이순신ㆍ신충원"등을 천거하여, 뒷날에 나라의 간성이 되게 했는데, 이 중 "이순신"은 "전라도"에, "원균"은 "경상도"에 각각 배치되었다. "이순신"과는 어려서부터 같은 동네에서 함께 자란 절친한 사이로서, 후견인 역할을 하였으며, 이순신의 형 "이요신"과 친구사이기도 하다.

 

1. 류성룡 (柳成龍1542~1607향년 65)

조선 선조 때, 문신(의정부 영의정)"징비록(懲毖錄)"의 저자이순신 천거(절친인 동네친구)청백리(청렴하고 정직)선의 5대 명재상(名宰相)1남인인문학자의학자

출 생 : 경상도 의성군 사촌 (외가, 경북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       사 망 : 경상도 안동부 풍산현 서미동 (여산의 퇴계 묘(退溪 廟)에 같이 모심)        사 인 : 병사

: 서애 (西厓)        부 모 : : 류중영(柳仲郢, 황해도 관찰사), - 안동 김씨(진사 김광수의 딸), 차남

: 본처 : 전주 이씨 (광평대군 5세손 용궁현감 이경(李坰)의 딸) / 후처 : 인동 장씨 (선무랑 장윤업(張潤業)의 딸)        자 녀 : 63: 류위(조졸)류여(장남 승계)류단류진류초류첨3녀        가 족 : : 류운룡(柳雲龍)조부 : 류공작(柳公綽간성군수)

스 승 : 이황        친 구 : 이순신(절친인 동네친구)이요신(이순신의 형)동문수학 :조목(趙穆)김성일        경 력 : 1566(23)- 별시문과 급제

저 서 : 징비록 (懲毖錄임진왜란 때, 겪은 후회와 교훈을 후세에 남긴 것국보 제132)서애집(西厓集)난후잡록(亂後雜錄)진사록(辰巳錄근폭집(芹曝集)

류성룡

"선조실록"에서는 "북인"성향 편찬자의 평으로, "재상"으로서의 그릇이 작고, 붕당에 대한 마음을 떨치지 못해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면 용납하지 않았고, 임금에게 바른 말을 고하지 못하여, 대신다운 풍절이 없었다고 하는 등, 그의 성품에 대한 단점도 기록되어 있다.

"이황"의 문하에서 1590년 통신사로 갔던 "조목(趙穆)김성일"과 동문수학하였으며, "성리학"에 정통하였다"과거"를 통해 관료로 등용되어, "서인"이 아닌 "이산해"와 같은 "동인"으로 활동하였다그러나 "정여립의 난기축옥사"를 계기로 강경파인 "이산해정인홍"등과 결별하고, "남인"을 형성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 "이순신"을 천거하여, "선조"로 하여금 "전라좌수사"로 임명하도록 하였다"이순신"으로 하여금 "임진왜란" 당시 열세였던 조선의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임진왜란" 당시,  "4도 도제찰사ㆍ영의정"으로 국정과 군무를 총괄하고, 인재등용과 여러 개혁정치를 시행하여, 전쟁의 피해를 수습하려 한 까닭에 "재조산하를 이룬 재상"이란 평가를 받았다. "노량해전"과 같은 날에, "정인홍이이첨" 등의 "북인"의 상소로 인해, "영의정"에서 관직삭탈하게 된다"안동"으로 내려가, "선조"의 부름에도 올라가지 않고, "임진왜란" 때 겪은 후회와 교훈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징비록"을 저술하였다.

"이순신"과는 어려서부터 같은 동네에서 함께 자란 절친한 사이로서, 후견인 역할을 하였으며, 이순신의 형 "이요신"과 친구사이기도 하다. 1591 "선조" "명장"을 천거하라고 했을 때, 류성룡은 "권율ㆍ이순신ㆍ신충원"등을 천거하여, 뒷날에 나라의 간성이 되게 했는데, 이 중 "이순신" "전라도"에, "원균" "경상도"에 각각 배치되었으며, 그 결과 "이순신" "왜(倭)"와 싸웠을 때, 백전백승하며 승리하였다.

2. 징비록 (懲毖錄임진왜란 때, 겪은 후회/교훈을 후세에 남긴 것국보 제132)

선조 때 류성룡이 쓴 "임진왜란" 때인 1592(선조25)~1598(선조31)까지 7년 동안의 일을 수기(手記)한 책ㆍ"임진왜란""원인경과자신의 잘못조정의 실책백성들의 조정에 대한 비판"등을 담고 있다"임진왜란 전란사"로서, 7년에 걸친 "전란의 원인전황"등을 기록한 책으로, 이후, "임진왜란"의 공과를 평가하는데, 사용되었다. "징비록" 연대는 확실하지 않지만, 7년의 전쟁이 끝나고,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 "안동"으로 낙향했던 1598년부터 집필이 시작된 것으로 보이며, 1604년(선조37) 저술을 마쳤다. 

"징비록"에 따르면, 1597 "이순신"이 역모를 당했을 때 "이순신을 천거한 사람이 나이므로, 나와 사이가 좋지 못한 사람들이 몹시 공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류성룡은 "선조"앞에서 직접 "이순신"을 변호하였으나, "선조" 1 "류성룡" "경기지방"에 보내 순찰토록 했다.  류성룡이 1달 뒤에 돌아와 보니, 그 사이에 "이순신"을 죄인으로 만들어 놓았다.  류성룡은 "사직"을 결심하고, 2월 하순부터 4월 초까지 무려 10여 차례나 "사직상소"를 올렸다.  "이원익ㆍ정탁" 두 사람만이 "이순신"을 옹호하여, "이순신"은 간신히 "참수형"을 면하고, "백의종군"을 하게 조치되었고, 이때 살아남은 "이순신"은 복직 후, "정유재란" "명량해전"에서 대활약을 하여 조선을 또다시 구하게 된다.   < 자세한내용은 이 Tistory 내에 있는 "역사서 : 징비록 (懲毖錄ㆍ1604 (선조37))ㆍ 류성룡 (영의정)"을 참조하여 주세요 >

3. 인 물

어렸을 때부터, "신동"으로 평가 받았으며,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다"예악교화(禮樂敎化)치병이재(治兵理財)"에 이르기까지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정계은퇴를 한지 8개월 후인 1599.07월에 "선조", "류성룡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만, 그가 떠나간 후로 국사가 날로 엉성해지고, 더욱 해이되는 것은 무슨 까닭인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전일에 이미 삭직했다고 해서, 어찌 끝내 복관(復官)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심의겸""김효원""이조전랑"천거를 반대하자, 같은 "이황"의 제자였던 그는 "심의겸"을 변호하지 않, "김효원"을 변호하였다.

4. 양명학 비판

"신동"으로 평가 받으며, "이황"의 문하로 들어가 학문을 닦았다17살 때 아버지를 따라, "의주"에 갔다가, "심통원""의주"에 두고 간 "양명집(陽明集)"을 구해 읽었다"양명학"이 처음부터 금기였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스승 "이황""양명학""이단"으로 규정했다

"이황""전습록변(傳習錄辨)"에서 "양명학""사문(斯文주자학)의 화"라고 비판했다"양명학""사문의 화"라고 비판한 다음부터, 금기시되기 시작했다그러나 "이황"의 비판에는 "양명학"의 핵심인 "치양지설(致良知說)"에 관한 내용이 빠져 있으니, "전습록" 전체를 보지 못하고 비판한 셈이 된다스승 "이황""양명학"을 이단으로 규정하자, 그는 "양명학"에 대한 관심을 끊고, "이단"으로 생각하게 되었으나, "양명"의 학설 중 장점은 취하였다.

스승 "이황"의 학설에 따라, "이기론(理氣論)"을 펼치고, "양명학"을 비판했으며, "이황""이선기후설(理先氣後說)"을 쫒아, "()는 이()가 아니면, ()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여, ""보다 앞서 있는 실체로서의 ""를 규정했다"양명학"의 핵심적 이론인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치양지설(致良知說)""굽은 것을 바로 잡으려다 나치게 곧아진(矯枉而過直) 폐단"에 빠진 것으로 "불교"의 학설과 다름없는 것이라고 단정하고, 하나에 치중됨이 없이 병진해야 한다는 "지행병진설(知行竝進說)"을 주장했다.

5. 일 화

이준경 (李浚慶) 옹호

"명종말기선조초기""이이이준경"이 갈등할 때, 그는 "이준경"을 지지했다. "선조" 즉위 초, 신진사류의 한사람인 "이이"의 거침없는 발언과 비판에 염증을 느낀 사람 중에는 "이준경" 있었다원로대신들 중, "허엽이준경"등은 "이이" "예절근본도 모르는 인간"이라고 분을 터뜨렸다.

"이준경"의 친구 중에는 "백인걸"이 있었다. "이이"의 솔직함과 냉정함에 화가 난 "이준경""백인걸" 찾아가, 항의를 한 일도 있다. 한번은 "이준경""백인걸"을 찾아가, "자네가 추천한 이 아무개라는 인간이 왜 그 모양인가?"하고, 러내놓고 역정을 내기도 했다"이준경"이 죽음에 이르러, 일부 사림을 자처하는 자가 당파를 만들어 조정을 위기로 몰고 갈 것이라는 유언을 남겼다"이이"와 함께, 그는 "이준경"의 상소가 잘못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이이"가 계속 "이준경"을 공격하며, "죽음에 이르러 그 말이 사악하다"고 성토하자, 사림에서 "이준경"의 삭탈관직을 청하는 상소를 계속 올렸다.

이 무렵 그는 "이조정랑"이 되어, "이준경"의 관직을 삭탈함이 옳지 않음을 주장하였으며, "인성(仁聖) 대비" 죽었을 때, "예조"에서 "기년설(朞年說)"을 주장하였으나, 류성룡은 "선조""명종"의 후계자 자격으로 왕위를 이었음을 주장하며, "적손(嫡孫)의 예"를 따라, 3년 설이 타당함을 주장하여 그대로 시행되었다.

이경전 (이산해 아들)의 추천 거부북인의 비난

1589, "영의정 이산해"의 아들 "이경전""이조"에 천거되자, 당시 영남사람 "정경세""전랑"으로 었는데, "이경전"이 추천되는 것을 막고자 이렇게 말했다"이경전은 유생 때부터 남에게 비방을 많이 들었으므로, 이조에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이 말을 듣고 "이산해"와 그를 따르는 자(북인)들이 모두 크게 노했다. 이 발언의 진원지로 "이산해""류성룡"을 의심하였다. 이후 "남인" , "류성룡 계파"에 대한 그의 분노와 불만은 한층 더해갔다.

그때 남인인 "이덕형"이 재상으로 있었는데, 비밀리에 사람을 시켜, "창석 이준"에게 이렇게 청했다"자네가 경암(정경세의 자)에게 말하게. 만약 이경전이 전랑에 천거되는 것을 막으면 반드시 큰 풍파가 일어날 터이니, 이는 조정을 편안하게 하는 도리가 아닐세 이는 내가 사사로이(이덕형의 처남이기도 하다) 하는 말이 아닐세."

"이준""정경세"와 고향이 같고, "이경전""이덕형"의 처남인 까닭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그러나 "정경세"는 듣지 않았고, "이산해"는 그를 의심했고, 그를 탄핵하도록 사주한다얼마 뒤, "대간 남이공""류성룡"을 참혹하게 탄핵했다"이중환"에 의하면, 당시 이 탄핵을 두고 "정경세는 본래 류성룡의 제자였으므로, 이산해는 류성룡이 정경세를 사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했다. 그러므로 남이공을 시켜, 류성룡을 탄핵하도록 한 것이지, 류성룡에게 죄가 있어서가 아니었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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