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코스트 (Holocaust)"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이 12년 동안(1933~1945) 자행한 "대학살", 주요 대상은 "유대인"이었다. 그리스 어원으로, 나치 독일이 유대인을 대량 학살한 것으로, 전쟁ㆍ화재로 인한 "대 참사ㆍ대 파괴"를 말하기도 한다.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의 전범은 "오토 아돌프 아이히만 중령 (독일 SS중령)"이었다.
1. 홀로코스트 (Holocaust)
• 일 시 : 1933~1945 (12년 동안) "히틀러(1933.01.30일 총리)"가 총리가 된 지 1개월 후에 시작
• 학살수용소 : (대표적)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 (폴란드)→ 약 42,500여 개 시설에 집단 수용ㆍ구금ㆍ독일 전역과 독일 점령지(유럽 전역): 각종 고문ㆍ생체실험ㆍ소각
• 피해자 : 1,294만 명, 주요 대상은 점령 지역의 유대인 (594만 명) 당시 유럽에 거주하던 900만 명의 유태인 중 약 2/3에 해당한다. (유태인 어린이 약 100만 명ㆍ여자 200만 명ㆍ남자 300만 명) 성인 생존자의 평균 체중이 32kg에 불과했다.
• 방 법 : 사회적 권리를 박탈ㆍ재산 몰수ㆍ강제수용소에 몰아넣고, 강제노역에 동원ㆍ가스로 죽였다.
일반적으로, 인간이나 동물을 대량으로 태워 죽이거나, 대학살하는 행위를 총칭하지만, 고유명사로 쓸 때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스 독일"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대학살"을 뜻한다. 1945.01.27일 "폴란드 아우슈비츠"의 "유대인 포로수용소"가 해방될 때까지 600만 명에 이르는 유대인이 "인종 청소"라는 명목 아래, "나치스"에 의해 학살되었는데, 인간의 폭력성ㆍ잔인성ㆍ배타성ㆍ광기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20세기 인류 최대의 치욕적인 사건으로 꼽힌다.
전쟁 후, 많은 유대인들이 미국ㆍ러시아ㆍ중동 등으로 이주했고, 중동에 이스라엘이 건국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럼에도 "보스니아 내전ㆍ르완다의 종족분쟁ㆍ킬링필드로 불리는 캄보디아 내전" 등 세계 곳곳에서 대량 학살이 자행됨으로써, "홀로코스트 문제"는 여전히 국제적인 문제로 남아 있다.
① 국가별 사망자 수 ( 계 : 1,300만 명)
유태인(594만)ㆍ소련군 전쟁포로(200~300만)ㆍ폴란드인(180~200만)ㆍ집시(30~150만)ㆍ장애인(20~25만)ㆍ프리메이슨(80~120만)ㆍ슬로베니아인(2~2.5만)ㆍ동성애자(0.5~1.5만)ㆍ여호와의 증인들(0.25~0.5만)ㆍ스페인 공화주의자(0.7만)
② 거주지별 유태인 사망자 수 (계 : 593만/ 886만 명 (67 %))
폴란드(300.0/ 330.0만 (90%))ㆍ우크라이나 연합(90.0/ 150.0만 (60%))ㆍ헝가리(45.0/ 65.0만 (70%))ㆍ루마니아(30.0/ 60.0만 (50%))ㆍ벨로루시안 연합(24.5/ 37.5만 (65%))ㆍ발트해 국가(22.8/ 25.3만 (90%))ㆍ독일/오스트리아(21.0/ 24.0만 (90%))ㆍ러시아 연방(10.7/ 97.5만 (11%))ㆍ네덜란드(10.5/ 14.0만 (75%))ㆍ기타(38.9만)
③ 비 유태인 피해자 : 슬라브(Slavs) 족 : 동 슬라브 : 러시아ㆍ우크라이나 • 서 슬라브 : 폴란드ㆍ체코ㆍ슬로바키아 • 남 슬라브 : 세르비아ㆍ크로아티아
슬라브(Slavs) 족 : "인도 유럽어"의 한 종류인 "슬라브 어"를 사용하는 민족을 통틀어 일컫는 명칭이다. 6~ 7C 이래, 동유럽의 "발칸 반도"에 퍼져 있으며, 유럽 최대의 민족으로 인종은 백색, 금발이 많다. 언어의 가까움과 지리적 위치에 따라, 크게 "3개 민족 군"으로 분류되며, 이들은 대체로 "비잔틴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④ 부헨발트 (Buchenwald) 수용소 : 독일 중부도시 바이마르에서 10km 떨어진 숲 속
1937~1945년까지 유대인ㆍ정치범ㆍ포로ㆍ집시 등 28만여 명이 "부헨발트"에 수감됐는데, 이 중 56,000여 명이 숨졌다. 굶주림과 강제노역ㆍ고문ㆍ질병 등 사망 원인은 다양했다. 이 때문에 "부헨발트 수용소"는 "시체 공장"으로 불리우기도 했다.
⑤ 인체 해부대
해부실 중앙에는 타일로 만들어진 인체 해부대가 있다. 나치는 이곳에 시신을 올려놓고 각종 장기를 적출하고 생체실험을 자행했다. 해부대는 흘러나온 혈액과 체액이 고이지 않도록 설계됐다. 적출된 장기는 인근 대학의 의대생들을 위한 실습용으로 제공됐다. 나치는 특히 새로운 독극물과 해독제를 만들면 먼저 부헨발트 수용소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거쳤다. 해부와 생체실험이 끝나면 시신들은 바로 옆방인 처리실로 옮겨졌다.

⑥ 시신 처리실 해부대 : 시신 처리실은 다름 아닌 소각장
빵을 굽는 오븐처럼 생긴 대형 소각로 2개에 화로 구멍이 각각 3개씩 있다. 모두 6개의 화로에서 하루 400구의 시신이 잿더미로 변했다. 초기에 바이마르 시내 묘지의 화장시설을 이용했던 나치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시신이 넘쳐나자 기계ㆍ오븐 제조회사에 소각로 설계를 특별 의뢰했다. 2차대전이 끝나갈 무렵엔 처리할 시신은 늘어나는데 석탄이 부족해, 수용소가 해방되기 몇 주 전부터는 시신을 태울 수조차 없었다고 한다.
⑦ 피부로 만든 외설적인 그림
테이블 위엔 사람 피부로 만든 전등 갓ㆍ벗겨낸 피부에 그린 외설적인 그림ㆍ5분의 1 크기로 축소시킨 사람 머리 등이 놓여 있었다. 당시 "일제 코흐(부헨발트 수용소 소장 아내)"를 비롯해 일부 나치 친위대 장교 부인들은 사람 피부로 만든 책 표지 등을 갖고 싶어 하는 "가학적인 취미"가 있었다고 한다.

2.어원과 개념
"홀로코스트(Holocaust)"는 그리스어(holókauston)에서 유래하는데, 이는 고대 그리스에서 신에게 동물을(olos) 태워서(kaustos) 제물로 바치는 것을 의미한다. 196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홀로코스트"는 대량 학살을 지칭하는 데 쓰였지만, 1960년대부터 학자들과 유명작가들에 의해 특별히 "나치의 유태인 학살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쓰이기 시작하였다.
성서 히브리어로 재앙을 뜻하는 "쇼아"(Shoah(שואה),Sho'ah,Shoa라고도 표기됨)는 1940년대부터 유럽과 이스라엘에서 "홀로코스트"를 지칭하는 "히브리어 단어"가 되었다. 많은 유태인들은 "홀로코스트"보다 "쇼아"라는 표현을 더 선호하는데, 이는 종교학적으로 "홀로코스트"가 "그리스 이교도"의 문화에 어원을 두고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나치당"은 "홀로코스트"를 순화하여, "완곡법"을 통해 "유태인 문제의 궁극적 해결(Final Solution to the Jewish Question, 독일어: Endlösung der Judenfrage)이라고 표현하였고, "궁극적 해결(Final Solution)"이라는 표현은 "유태인 학살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널리 쓰였다. 또한 "나치당"은 "살 가치가 없는 생명(lebensunwertes Leben)"이라는 표현으로 유태인 학살을 정당화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박해"와 "학살"은 단계적으로 진행되었다. 먼저, 1935년 제정된 "뉘른베르크 법"을 비롯하여, 유태인을 사회에서 배척하는 각종 법령들이 세계 대전 발발 전에 제정되었다. 또한 집단 수용소를 지은 후 수감자들을 각종 노역에 동원하였고, 이들은 대부분 과로사하거나 병사하였다. 동유럽 점령지의 경우, "특별행동 부대"라는 불법 무장 단체가 100만 명이 넘는 유태인과 정치사범을 총살했다고 알려졌다. 독일군은 유태인과 집시들을 "게토(유대인 거주지역)"에 수용한 후, 화물 열차에 실어서 집단 학살 수용소로 이송했다. 화물 열차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살아남은 이들은 차례대로 가스실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3. 생체 의학 실험
"나치 학살"의 특징적 요소 중 하나는 "인간을 대상으로 의학실험을 자행했다"는 점이다. 미국의 정치학자 라울 힐버그에 따르면, "독일 의사들은 다른 전문직에 비해 대단히 나치화"되었다. 실험은 "아우슈비츠"를 비롯해, 다샤우(Dachau)ㆍ부헨발트(Buchenwald)ㆍ라벤스브뤽(Ravensbrück)ㆍ 작센하우젠(Sachsenhausen)ㆍ나츠바일러(Natzweiler) 등지의 수용소에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생체 실험을 거행한 의사 중 가장 악명 높은 사람은 "아우슈비츠"에서 근무한 "요제프 멩겔레(Josef Mengele)" 박사였다. "멩겔레" 박사는 특히 "집시 아이들"을 대상으로 많은 실험을 하였다.
"멩겔레"박사는 여러 가지 실험을 하였는데, 이 중에는 실험대상자를 고압력 방 안에 집어넣는 실험ㆍ얼음방 안에 집어넣는 실험ㆍ약 임상 실험ㆍ아이들의 눈에 염색약을 주사하여 눈 색깔을 바꾸는 실험 등이 포함되었고, 이외에도 수많은 잔인한 외과실험이 있었다. 실험으로부터 살아남은 자들은 거의 즉시 살해된 뒤, 해부되었다. "멩겔레"박사의 실험기록은 현재 유실되었는데, 이는 그가 기록을 보냈던 "오트마 폰 페르슈어(Otmar von Verschuer)"박사가 기록들을 모두 파괴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아이들에게 사탕과 장난감 등을 주면서 가스실로 데려갔다. 아이들은 그를 "멩겔레 삼촌(Onkel Mengele)"라고 불렀다고 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50쌍의 "집시"쌍둥이를 돌보았던 한 유태인 수감자는, "한 쌍의 쌍둥이가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4살 정도 된 구이도(Guido)와 이나(Ina)이다. 어느 날, 멩겔레는 그들을 데리고 갔고, 그들이 돌아왔을 때는 끔찍한 상태였다. 그들은 샴쌍둥이처럼 등이 꿰매져 있는 상태였다. 상처는 감염되었고 진물이 나왔다. 그들은 하루 종일 비명을 질렀다. 그것을 본 그들의 부모 -엄마 이름이 스텔라였다- 는 어딘가에서 모르핀을 구해왔고, 아이들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주기 위해 아이들을 죽이고 말았다"고 회상했다.
4. 과 정
국가사회주의- 유럽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집단학살하려 했던 나치의 "마지막 해결책"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독일에서 "아돌프 히틀러"의 유대인 박해는 그가 1933.01.30일 총리가 된 지 1개월 만에 시작되었다. "유대인"소유 기업은 배척받아 곧 파산했으며, 유대인은 지방정부ㆍ법원ㆍ대학에서 쫓겨났다. 1933~38년에 이루어진 일련의 "법령ㆍ몰수ㆍ대학살"로 히틀러는 독일 유대인의 정치적ㆍ경제적 기반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 "나치 독트린"에 따르면, 그 가운데는 유대인 혈통을 가진 수천 명의 "독일 그리스도 교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1935년 "뉘른베른크 법"에 따라 유대인은 시민권을 완전히 잃었으며, 다른 독일인과의 결혼도 금지되었다.
"크리스탈나흐트 대학살(1938.11.09~10)" 결과, 독일에 있는 모든 유대교 예배당과 유대인 기관이 사실상 파괴되었다. 그 뒤 수천 명의 유대인이 집단수용소에 감금되었고, 독일 유대인의 재산 대부분은 가혹한 벌금과 기타 강제징수로 몰수되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유대인은 더 이상 시민이 아니었다. 공립학교에 다닐 수 없었으며, 실제로 사업을 하거나 직업을 가질 수도 없었다. 또 토지를 가질 수도 없었고, 유대인이 아닌 사람과는 사귈 수 없었으며, 공원이나 도서관, 박물관에조차 갈 수 없었다. 그들은 "게토"(유대인 거주지역) 안에서만 살라는 명령을 받았다.
1941년, 12세가 넘는 유대인 남자는 군수공장에 징집되었으며, 전화와 모든 공공 수송시설의 사용을 금지 당했다. 또 6세 이상의 모든 유대인은 "다윗의 별"이라 씌어진 노란색 배지를 달아야 했다. 여러 선전활동이 성공을 거두자, 나치는 "반(反)유대주의"가 모든 유럽 국가로 진출할 수 있는 수단으로 유용하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1938.09월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베니토 무솔리니"는 독일의 "반유대주의 종족법"을 본보기로 "반유대법"을 공포했다. 그리고 1938년 오스트리아, 1939년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ㆍ합병해 이들 나라의 유대인을 종속시켰다. "반유대주의"의 역사를 가지고 있던 "헝가리"도 1938년 "히틀러의 법"을 모델로 하여, 처음으로 "반유대주의 법령"을 제정했다. "루마니아"의 "반유대주의"는 1937.12월 "옥타비안 고가"가 총리가 되어, 일련의 "나치 반유대주의 법률"을 지지함으로써 절정에 이르렀다. 그는 곧 "국왕 카롤 2세"에 의해 해임되었지만, 1939.11월 루마니아 유대인의 1/3 이상이 공민권을 박탈당했다. 이 조치로 루마니아 유대인은 외국인으로 취급되어 사회에서 불이익을 받았다. 유대인을 비롯해 유럽의 다른 억압받는 소수민족을 후원해줄 것으로 기대했던 사회ㆍ정치 세력들은 아무 역할도 하지 못했다.
중부 및 동부 유럽 학생들은 오랜 전통에 따라 자유주의자와의 제휴를 거부했다. 자유주의 정당들 자체도 분쇄되거나 억압당했다. 교회의 저항이 있었으나 무력했고, 효과적이지도 못했다. 몇몇 신자와 고위 성직자들은 "반유대주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유대인 스스로 모색한 자구책으로 그들의 입지는 다소 나아졌다. 대다수가 이주를 희망해 1931~41년 미국에 간 사람이 161,262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이주는 상대적으로 적은 수여서, 수백만 명의 유대인이 처한 상황을 개선시켜주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 초, 독일군이 연승을 거두자, 유럽에 거주하는 대다수 유대인은 나치와 그 위성국 치하에 들어갔다. 대서양에서 볼가 강, 노르웨이에서 시칠리아까지 그곳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모든 인간적 권리를 빼앗겼다. 재산은 몰수당했으며, 그들 대부분이 "게토"와 "집단수용소"에 감금되었다. 당시 나치는 이미 "유대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도의 정책을 수립하고 있었다. 프랑스를 함락한 뒤, 1940년에 구상된 "마다가스카르 계획"은 "마다가스카르 섬"을 친위대장 "하인리히 히믈러"의 관할 아래 수백만 명의 유럽거주 유대인들을 재정착시키는 특별구역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영국과의 평화 없이는 결코 실시할 수 없는 것이었고, 독일이 러시아를 침략한 뒤에는 실용성이 없어졌기 때문에 결국 무산되었다. 그 뒤, 악명 높은 "반제 회의"가 열렸다.
1942.01.20일, "베를린" 교외의 "그로센반제"에서 "아돌프 아이히만"을 비롯한 15명의 나치 주요 관료가 모여 "나치 친위대(SS)" 분대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주재로 "유대인 문제의 마지막 해결책"을 논의했다. 이 회의에서 취해진 결정은 모든 유대인을 체계적으로 "동부"에 있는 수용소로 이주시켜 그들을 "적절하게 처리한다."는 것이었다.
유대인 일부는 철저하게 학살될 것이며,(그러나 학살이나 처형이라는 말은 공식적으로 사용되지 않았음) 그 밖의 유대인은 거대한 노동부대로 편성될 것이지만, 소모적인 노동과 빈약한 식사로 그들은 결국 죽음을 맞이하거나 집단학살수용소로 들어가는 길을 선택하게 될 것이라는 계획이었다(강제수용소).
가장 효과적인 대량학살 방법은 특별히 만든 "가스실"에서 가스를 마시게 하는 것이었다. 가스실에서 나온 시체는 인근 화장터로 옮겨졌다. 이런 여러 가지 방법으로 400여 만 명의 유대인이 "아우슈비츠ㆍ마이다네크ㆍ트레블링카ㆍ헤움노ㆍ소비보르ㆍ벨제크" 등의 "집단학살수용소"에서 죽었다. "대량학살 계획"은 효율적으로 실행되었기 때문에, 만성적인 기아와 질병으로 기력을 잃어가던 희생자들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들이 가스실로 들어간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유대인들은 소극적ㆍ적극적으로 저항했다.
덴마크ㆍ프랑스ㆍ이탈리아ㆍ불가리아 등 유대인에게 우호적이었던 나라에서는 유대인을 숨겨주고, 위조서류를 만들어주기도 하며, 중립국으로 도망갈 수 있게 해줌으로써 상당수의 유대인을 구했음이 밝혀졌다. 즉 "덴마크 유대인"의 대다수는 비밀리에 "스웨덴"으로 집단이주했으며, 일부 프랑스 유대인은 스페인ㆍ포르투갈ㆍ스위스로 피신했다. 그러나 동부 유럽에서는 독일인이 "농민의 반유대주의 전통"을 이용했기 때문에 유대인은 일반대중의 도움을 거의 받을 수 없었다. 한편 적지 않은 수의 비독일인이 학살운동을 실행하는데 가장 야만적인 앞잡이로 활약하기도 했다. 이처럼 불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수천 명의 젊은 유대인은 폴란드ㆍ소련ㆍ리투아니아ㆍ프랑스ㆍ이탈리아 등지에서 다양한 "지하 레지스탕스 운동"과 "게릴라 활동"을 벌였다.
"유대인 게릴라"들은 종종 그들 자신의 부대를 편성했다. 프랑스에서도 "마키"라는 "특수 유대인 부대"가 활약을 보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주목할 만 한 점은 "바르샤바ㆍ비아우이스토크ㆍ빌뉴스" 등 폴란드의 주요 "게토"에서 엄청난 열세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봉기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바르샤바"에서는 한때 거의 40만 명까지 수용했던 "게토"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6만 명이 독일의 퇴거 명령에 불응하고 봉기를 일으켰다. (바르샤바 게토 봉기) 1943.04~05월, 이들은 거의 무장도 안 된 상태에서, 화염방사기ㆍ장갑차ㆍ탱크로 무장한 독일 정규군에 대항해 거의 1개월 동안 저항을 계속했다. 불행하게도 연합국 정부들은 그들 자신의 문제에 몰두함으로써, 유대인을 구하는 데 있어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했다. 전쟁의 전 기간을 통해 대부분 국가의 문은 소수의 피난민을 제외한 모든 유대인에게 닫혀 있었다. 유럽에서 전쟁은 1945.05.08일에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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