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휘 (閔泳徽ㆍ1852~1935ㆍ83세)"는 "명성황후"와 촌수는 상대적으로 먼 편이었지만, "여흥 민씨"의 대표급으로서, 백성들의 원성이 많이 집중되었다. 그는 경제에 밝아, 쉽게 갑부가 되었다. 관직에 있을 때, 수탈한 재물을 잘 불려서, 일제강점기 동안 조선 최고의 갑부 중 한 사람으로 꼽혔다. 귀족 출신으로는 거의 유일하게 "대자본가"로 변신에 성공한 경우로, "권력형 부정축재"로 분류된다.
1. 민영휘 (閔泳徽ㆍ1852~1935ㆍ향년 83세)
조선말 정치인ㆍ고위관료(예조판서ㆍ공조판서ㆍ병조판서ㆍ이조판서)ㆍ천일은행(상업은행 전신) 설립ㆍ일제강점기, 최고 갑부 중 한 사람 (권력형 부정축재자)ㆍ명성황후 친척 조카(척족 세력의 중심인물)ㆍ"청ㆍ일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인물ㆍ광성의숙(1904)/ 휘문의숙(1906) 설립ㆍ첩 : 안유풍(安遺豊) 풍문여고 설립자ㆍ민웅기 (증손자): "남이섬" 소유자ㆍ자작(후임- 민형식)
• 출 생 : 서울 • 사 망 : 서울 • 사 인 : 병사 • 학 력 : 한학 • 종 교 : 유교(성리학)→ 불교
• 호 : 하정(荷汀) • 처 : 본처 : 신씨(申氏)ㆍ첩 : 안유풍 (安遺豊) 풍문여고 설립자
• 자 녀 : 양자 (적자): 민형식 (閔衡植) / 서자 : 민대식 (閔大植ㆍ2남ㆍ안유풍의 자) 동일은행 두취ㆍ민규식 (閔圭植ㆍ4남)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 손자 : 민병도 (閔丙燾ㆍ제일은행ㆍ한국은행 초대총재ㆍ민대식의 아들)→ 남이섬 부지구입(1996)→ 경춘관광개발(주) 설립 법인화 / 증손자 : 민웅기→ "주식회사 남이섬"으로 회사명의 변경 대표이사ㆍ현재 전문경영인이 운영
1877년(고종 14) 정시문과에 급제, "주서ㆍ정언"을 지내고, "민씨 척족세력"을 배경으로 성장했다. 1884년, "갑신정변"을 진압하는 데 앞장섰고, 1886년 "참의내무부사ㆍ도승지", 1887년 "주일변리대신"으로 일본에 파견되었다.
귀국한 뒤, "민씨 척족세력"의 우두머리로, "경리사ㆍ이조판서ㆍ선혜아문당상ㆍ친군경리사" 등을 역임했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청나라"의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도움을 요청해 토벌하려 했다. 이후 "갑오개혁"이 실시되자, "탐관오리"로 논죄되어, "전남 영광 임자도"로 귀양가게 되었으나 탈출해, "벽동의 청군부대"에 은신하고 있다가 중국으로 도망갔다.
1896년, "대사령"으로 귀국한 뒤, "중추원의장ㆍ헌병대사령관" 등을 지냈고, 1910년 "한일합병" 후, "국권피탈"에 앞장선 대가로 병합 직후인 1910.10월 일본 정부에서 "자작 작위"를 받았다. 1911.01월, "은사공사채" 5만원을 받았다. 1911.04월, 사단법인 "조선귀족회" 부회장에 선출되어, 1912.04월까지 재임했다. 1933년 무렵, 30만 원 이상의 재산을 소유한 거부였으며, 1936.01월 유지에 따라 "휘문고등보통학교"에 13만원을 기부했다.
1935.01월, "조선나예방협회(朝鮮癩豫防協會)"에 1만원을 기부했고, 그 대가로 9월 "감수포장(紺綬)"을 받았다. 1935.10월, "조선총독부"에서 "은배(銀杯)"와 시정 25주년 "기념 표창"을 받았다. 사후, "금배(金杯)"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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