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헌 (許憲ㆍ1885~1951ㆍ66세)"은 일제강점기 "노동자ㆍ빈민층" 등을 위한 재판에 변호사로 활동한 법조인이다. 일본에 유학하여 "메이지대학(明治大學)법과를 졸업하여,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ㆍ변호사(1호)가 되었다. 귀국 후, 사회운동가로서, 민간 독립운동단체와 연관을 맺었고, 사상적으로 "좌익 경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우파"와 교분이 깊어, "중도좌파"의 성격을 보여주었다.
1. 허헌 (許憲ㆍ1885~1951ㆍ향년 66세)
대표적 항일변호사 (1호 변호사)ㆍ독립운동가ㆍ변호사 출신의 북조선 정치인ㆍ김일성대학 총장ㆍ일제시기, 독립 운동가들을 변호하던 "3대 민족인권 변호사" (이인ㆍ김병로)ㆍ통일운동가ㆍ일제시기, 일본 유학 중 사회주의를 공부하고, 조선에서 "박헌영-주세죽 부부ㆍ조봉암-김조이(고명자와 소련행) 부부"와 함께,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로 활동→ 해방 후, 이북 "소련 군정 지역"에서 활동하였고, "연안파" 간부 활동을 하다가 "김일성 계열"로 넘어가 북한 고위정치인이 되었음.
• 출 생 : 함북 명천군 하우면 하평리 • 사 망 : 북조선 "국장"ㆍ"애국열사릉"에 안장
• 호 : 긍인(兢人) • 사 인 : 익사 (청천강)ㆍ병사 • 학 력 : 메이지 대학교(明治大學) 법학부 법과
• 친 구 : 이동휘(임정 국무총리)ㆍ김성수ㆍ송진우ㆍ이광수ㆍ백남훈(신민당 전당대회 의장)ㆍ이갑(만주밀산무관학교 교장)ㆍ이종호(이용익 손자(보성학교 설립자))
• 처 : 정보영 (정긍자(1884~1932))ㆍ유덕희 • 자 녀 : 4남 3녀(허정숙ㆍ허근욱ㆍ허선욱/허영욱ㆍ허종욱ㆍ허성욱ㆍ허기욱) • 장 녀 : 허정숙(허정자ㆍ1902~1991ㆍ팔로군 육군 대좌ㆍ여성운동가ㆍ투철한 공산주의자ㆍ독립운동가) : "조선공산당" 간부인 "임원근(1혼ㆍ조선일보 기자ㆍ1째 아이)ㆍ송봉우(2혼ㆍ북풍회ㆍ3째 아이)ㆍ최창익(3혼ㆍ조선독립동맹 부주석ㆍ부수상ㆍ연안파)"의 부인이고, "신일룡(2째 아이)"의 연인
< 경 력 >
• 1907 : 일본 변호사 자격 취득 → 1908 : 대한제국 제1회 변호사 시험에 합격(변호사 11호로 등록ㆍ대한제국 최초) → 1919 : 3ㆍ1운동 당시, 47인(민족대표 33인ㆍ관련자 14인)에 대한 변론ㆍ일제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해박한, "법이론 지식"으로 피체된 "3ㆍ1운동"의 지도자들을 변호하여, 일제를 당황하게 만들어 유명해짐.
• 1921 : 함흥영생학교 교장ㆍ"이상재"와 민립대학 설립운동ㆍ "차미리사(여성운동가ㆍ독립운동가)"를 도와, "근화학원" 설립ㆍ"동아일보" 창간 시, 8,000여 원의 거금 출자하고, 감사로 근무 → 1923 : "김병로ㆍ이인" 등과 "형사공동연구회(刑事共同硏究會)" 조직(건물- 종로구 인사동) →1924 : 보성전문학교 교장ㆍ조선인 변호사 회장ㆍ동아일보 사장 직무대행(송진우 대행)
• 1926 : 세계일주 여행(6개월 동안, 여행기는 "삼천리 잡지"에 3회에 걸쳐 연재) → 1927 : "신간회(新幹會)"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 "민족단일당(民族單一黨)"결성ㆍ항일투쟁 → 1928 : "조봉암(조선 공산당 창당)ㆍ조동호"를 위해, "서울 경성지법"에서 무료 변론 → 1929 : "광주항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안국동 4거리"에서 "신간회"가 중심이 되어 민중대회를 열기로 계획하였으나, 사전 발각되어, 1932.01월까지 4년간 옥고 → 감옥에 출소하자마자, 일제는 "변호사 자격"을 박탈
• 1930년대 : "교수 월급"으로 생계가 궁핍→ 부동산ㆍ광산업→ 윤치호ㆍ김성수ㆍ송진우 등에게 생계 의존 → 1943 : 단파방송 밀청사건에 연루되어 옥고 (2년 옥고 후, 건강이 악화로 1945.04월 병보석) → 1945 : "여운형ㆍ박헌영" 등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 결성(건준 부위원장) → "조선 인민공화국" 내각에서 "국무총리"로 선출
• 1946 : "민족주의민족전선"의 공동의장 (여운형ㆍ박헌영ㆍ김원봉ㆍ백남운) → "민주주의민족전선" 수석의장으로 선출
• 1946 : "남조선로동당" 결성에 참여, "남로당" 위원장(제2대) → 1947 : "미군정"은 "남로당" 당수 "허헌"에 대한 체포령ㆍ남한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불법선언 → 1948 : "남북협상"차, 북으로 건너간 뒤, 정착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치인) →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ㆍ최고인민회의 의장(의회 의장)ㆍ김일성대학 총장 → 1949 : "조국통일 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의장 → 1951 : 최고인민회의 의장
"한성중학교ㆍ보성전문"을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 "메이지 대학 법과"를 졸업했다. 1907년, "대한제국 제1회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였고, "일본"에서도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그 뒤, 독립 운동가들의 변호ㆍ노동자들의 고용 문제ㆍ임금인상 문제 등을 무료로 변론하였다. 1924년, "보성전문학교" 교장 취임과 "조선인 변호사 회장"을 겸임, "동아일보" 사장 직무대행 등 각종 사회 활동하였다. 1926년, 6개월 동안, "세계일주 여행" 간 것으로 유명하며, 이듬해 1927년에는 "신간회" 단체 주요간부로 활동하였다.
"조선공산당" 창당에 참여하고, "코민테른"의 승인을 얻기 위하여 보내진, "조봉암ㆍ조동호"가 1928.02월 "상하이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자, 이들을 위하여 "서울 경성지법"에서 무료 변론을 해주었다. 이 무렵, 그는 "중도 좌파"로, "사회주의" 성향으로 기울게 된다. "박헌영"을 비롯한 "조선공산당"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동조자적인 변론, "공산주의자들"과의 폭넓은 교우, 그리고 "딸 허정숙ㆍ사위 임원근"이 모두 조선공산당 간부였다는 점이 그를 "사회주의 성향"으로 인도하였다. 1943년, 일제 강점기 말기, "단파방송 밀청사건"에 연루되어, 2년간 옥고를 치루기도 했다.
1945.08월, "여운형ㆍ박헌영" 등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 결성에 참여하였고, "건준 부위원장"을 거쳐, "조선 인민공화국 내각"에서 "국무총리"에 선출되기도 했다. "조선 인민공화국" 해체 후, "남조선"에서 "민주주의민족전선ㆍ남조선로동당" 등에서 활동하다가 탄압을 받자, 1948.04월 "남북 협상" 차, 북으로 건너간 뒤, 정착하였다.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ㆍ최고인민회의 의장(의회 의장)"에 선출되기도 하였고, "김일성대학 총장"이 되었다. "통일운동가"로 활동하다가, 1951.08월 "청천강"에서 익사하였다. 1951.09.07일, "평양 모란봉 지하극장"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장"으로 장례식을 마친 뒤,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었다.
2. 평가와 비판
그의 사상이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대체로 "마르크스주의자ㆍ공산주의자"라기보다, "사회주의"에 공명하는 "진보적 민족주의자"로 평가된다. 그가 "공산주의자"와 비타협적이었던 "신간회"에서 활동과 "김병로ㆍ이인" 등 함께 "독립 운동가들"을 변호한 "3대 민족인권 변호사"로 활동했던 것은, 그의 사상이 양자를 아우를 수 있는 "민족주의"에 기반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정경모(작가)"는 그가 "해방될 때까지 비 전향으로, 일관한 고매한 인격자로 알려졌다."고 평하였다. 그는 "중도좌파 성향"으로, 그의 "통일론"은 "중도적으로 통일을 고수하되, 좌파 주도의 통일론"을 주장했고, 해방 직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통론"을 정면으로 비난했었다. 이 때문에 "한민당ㆍ한독당" 등을 비롯한 "극우 단체"로부터, 격렬한 비난을 받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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