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05.16일, 북한 당국이 "조만식"을 남쪽에서 활동 중 체포되었던 "김삼룡ㆍ이주하"와 교환할 것을 제의하기도 하였으나, 국내에서 끝까지 일제에 굴하지 않고 지조를 지켜온 몇 안 되는 우파 민족주의자인데다 대중들이 더 선호한다는 사실을 껄그럽게 여긴 "이승만 (李承晩ㆍ1875~1965ㆍ90세)"은 "조만식 (曺晩植ㆍ1883~1950.10.18ㆍ67세)을 38선 이남까지 데리고 내려오라"는 조건을 붙여, 사실상 교환을 거부했다.
1. 조만식 (曺晩植ㆍ1883~1950.10.18ㆍ향년 67세)
독립운동가(조선의 간디)ㆍ이북 최고 지도자ㆍ조선민주당(개신교 정당)총재ㆍ교육자ㆍ종교인ㆍ언론인ㆍ조선일보사 사주 (8대)ㆍ조선일보사 사장ㆍ오산학교 교장ㆍ숭인중학교 교장ㆍ평양 YMCA 청년회 총무(1921): 평안도 대표 민족지도자ㆍ1945.09.08 :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의 내각이 발표 시, 인공 내각의 재정부장으로 선임ㆍ1945.10.07 : 북조선 5도 임시인민위원회(평양) 위원장
• 출 생 : 평남 강서 (江西) • 사 망 : 평양 대동 강변ㆍ 동작동 국립묘지에 유발(사발)이 안장(1991)
• 호 : 고당(古堂) • 별 칭 : 조선의 간디 • 사 인 : 처형 • 종 교 : 개신교(장로교)
• 학 력 : 일본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 → 메이지 대학교(明治大學校) 법학부
• 처 : 박씨 (사별ㆍ1895~1903) → 이의식 (사별ㆍ1903~1935) → 전선애 (1937~1948 월남)
• 자 녀 (5남 2녀) : 장남 조칠숭(박씨 소생ㆍ정신박약아ㆍ요절) / 4남 조연흥 (전선애가 월남시 데려온 아들ㆍ조선일보 전무) • 친 구 : 유학 때 만난, 송진우ㆍ김성수ㆍ안재홍
1897년 15세 때부터는 포목상을 경영하기 시작했다. 포목상을 경영하다가 한정교와 동업으로 지물상을 경영하여 재산을 모으게 되었다. 이 무렵 술 잘 먹고, 돈 잘 쓰는 사업가로 이름을 날렸다.
1905년, "평양 숭실중학"에 입학, 재학 중 그리스도교에 입교하였다. 1907년,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가 "경성부ㆍ평양부"에서 강연, "안창호"의 강연을 찾아다니며 들었다. 1908년, 중학을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에서 3년간 영어를 공부하였는데, 그때 "간디(인도 독립운동가)"의 "무저항주의ㆍ민족주의"에 감명을 받아, 이를 평생의 지표로 삼았다. 22세에 "개신교"에 귀의한 이후, 상업ㆍ종교 활동에 종사하다가, 1919년 "3ㆍ1만세 운동ㆍ중국 망명실패" 등으로 투옥당하기도 하였다. "오산학교"에서 "교사ㆍ교장"으로 교편을 잡기도 했다.
"무저항주의ㆍ민족주의"에 근거하여, 광복을 맞을 때까지 "일제"에 불복종하되, "비폭력ㆍ무저항"을 수단으로 삼는 "민족 자본육성ㆍ민족교육ㆍ민족언론 활동" 등에 몰두했다. "국산 물산장려운동ㆍ일본제품 불매운동ㆍ교육활동ㆍ민립대학 기성회 운동,(국내 민간 자본으로 대학설립 추진 운동)ㆍYMCA 평양지회 설립ㆍ신간회" 등 주도하였다. 당시 개량 한복을 입고, "국산품 애용 운동"을 벌이던 그에게 "조선의 간디"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으로 탄압이 심해지던 일제 강점기 말기까지도 "일제"에 협조하지 않고, 지조를 지켰기에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았다. "조선일보사 사장"이 되어, "주요한(편집국장)ㆍ조병옥(전무 겸 영업국장)"을 임명하고, 민족 언론 창달에 공헌하고 무저항 민족주의 운동을 지도했다. 한편 "이봉창ㆍ윤봉길 사건"으로 "안창호"가 상하이에서 체포ㆍ수감되자, "여운형ㆍ이광수" 등과 함께 매일 "안창호"를 찾아 안부를 물었으며, 옥바라지를 하기도 했다.
1943년, "지원병 제도"가 실시되자, 협조를 구하러 온 조선군 사령관 "이타가키 세이시로"의 면담 요청을 거절하고, 극렬 반대했다. 1945.08.15일, 민중들의 지지ㆍ호응을 받아, "건국준비위원회 평남지역 위원장"에 참여했고, 11월에는 "조선민주당(한국 최초의 개신교 정당)"을 창당하고, 초대 총재를 지냈다. 일제의 폭압에 맞서 "비폭력 저항운동"을 벌였던 "평화주의자"의 일관된 모습이라는 평가가 있다.
해방 정국에서 "북조선지역"에서 "개신교 민족주의 지도자"였으며, "평안도 개신교도들"을 비롯하여 민중들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확보하기도 했다. "3ㆍ8선 이북지역"에서 정치적으로 몰락하고, 그를 따르던 기독교계 사람들이 월남하여, "북조선 공산주의자들"이 휠씬 수월하게 자신들이 원하는 체제를 "이북지역에 수립할 수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그는 자신을 따르던 이들이 곁에 남아서, 투쟁해 주기를 결코 고집하지 않았다.
2. 당대의 평가
소련 군정문서 : 남조선 정세 보고서 (1946~1947) 1946.03.22일자 내용(러시아연방국방성중앙문서보관소)에서 "사회여론조사부는 각지로 자신의 대표 20명을 파견하여, 실업자ㆍ상인ㆍ소자산가들과 면담을 실시하였다. "이승만ㆍ김구ㆍ김규식ㆍ여운형ㆍ박헌영ㆍ조만식ㆍ김두봉ㆍ김일성 가운데 누가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는 설문조사에서, "대다수는 여운형ㆍ조만식을 지지하였고, 이승만ㆍ김규식을 지지한 사람은 2명이었다"고 적혀있다.
3. 사망
1945.12월,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관하다가, 1946년 "평양 고려호텔"에 감금된 뒤, 한국 전쟁 중 "김일성 측근세력"에 의해 살해되었으며, "고려호텔" 연금기간 동안, 함께 있던 "조연창(2남)ㆍ강의홍(사위)"는 "6ㆍ25한국전쟁" 직전에 투옥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후 행방은 묘연하다.
1950.05.16일, "북조선 당국"이 "조만식"을 남쪽에서 활동 중 체포되었던 "김삼룡ㆍ이주하"와 교환할 것을 제의하기도 하였으나, "이승만"은 좀 더 확실히 하기 위해 "북조선"이 "조만식 선생"을 먼저 보내주길 원했으나, "북조선"은 동시 교환을 주장하여, 결국 결론없이 끝이 났다.
한국 전쟁 이후인 1950.10.15일 "북한 내무성" 안에서 일단의 "내무서원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정황은 비슷하나, 총살 날짜가 10.18일이라는 설도 있다.(박길룡 증언) "박길룡" 등의 증언에 의하면, 1950.10.18일 퇴각 중이던 "북한 지도부"의 결정에 따라, "대동 강변 내무성 정보처"에서 "한규만 소좌" 등에 의해 다른 민간인들과 함께 학살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중공군"과 함께, "북한 당국"이 다시 "평양"에 들어온 이후, 그의 죽음은 "유엔군ㆍ한국군에 의한 학살"이라고 주장된 바 있다. (박길룡 : 소련 출신ㆍ김일성 통역과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을 지내다가, 1959년 소련으로 돌아갔음)
1952.01.23일자, "미국 CIA 보고서"에는 1951.09~ 10월 현재 북한에서 구금 중이거나 추적 중인 도망자 명단에 "조만식"이 나오며, 수년간 구금되었던 그가 도주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고 하였다. 이로 보아 당시 "미국"도 "조만식"의 생사에 대한 확실한 정보가 없었던 것 같다.
4. 이북 최고 지도자인 그가 호텔에 감금된 이유
"현준혁"은 "박헌영 노선"을 따랐지만, "조만식"과도 협조했다. 그래서 "조만식ㆍ공산당"의 창구가 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 "현준혁"이 암살됨으로 인해, "조만식"은 인간적 아픔을 겪는 것과 더불어 "공산당"과의 창구 하나를 잃게 됐다.
※ 현준혁 (玄俊赫ㆍ1906~ 1945.09.03ㆍ향년 38세ㆍ평남 개천ㆍ연희전문학교 문과ㆍ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ㆍ대구사범 교사ㆍ6년간 옥고) : 독립운동가ㆍ사회주의자ㆍ조선공산당 평남지구당위원장(평남 조공ㆍ평남 지역의 대표적 공산주의자)ㆍ건준 평안남도지부(평남 건준ㆍ조만식)과 대립관계ㆍ해방 직후,이북 최초의 정치 테러로 사망. 평남지역 공산주의자로, 건준 평남지부(평남 건준ㆍ조만식)과 대립관계였으며, "김일성"과의 대결 구도를 버텨내지 못한 채 사라졌다고 알려져 있다.
"소작제ㆍ토지개혁 문제"가 "조만식의 리더십"에 끼친 파급력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로 인한 갈등이 1945.10월 "평남인민정치위원회"에서 격화했다. "공산주의 그룹"은 지주가 수확물의 50% 이상을 가져가는 부조리를 근절하고자, "소작인:지주 = 7:3 (73제)ㆍ무상몰수ㆍ무상분배 원칙" 아래, "토지개혁"을 관철하고자 했다. "조만식"과 비슷한 배경에서 성장한 "우파 민족주의 그룹"은 "무상몰수ㆍ무상분배"는 물론이고, "7ㆍ3제"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접근법이 "서울"이 아닌 "평양"에서는 납득될 수 없었다. 조만식은 파국을 막지 않으면 안 됐다. 결국에는 그의 중재로 "7ㆍ3제"만 수용되고, "무상몰수ㆍ무상분배"는 보류됐다. 이 논쟁은 그의 중재력을 부각하기보다는 한계를 극명하게 드러냈다. "공산군대"의 점령하에서 "지주ㆍ자본가"의 이익을 대변해야 하는 그의 입장을 노출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민족주의자들이 "평남인민정치위원회"를 이탈하는 상황으로 이어지고, 이들이 "38선 이남"으로 망명하는 사태로 연결됐다. 그의 전기에는 "이 일이 있은 뒤, 가장 절친한 동지였던 오윤선 장로가 인민정치위원회에서 사실상 사퇴하고 우파 위원들이 하나씩 월남하면서, 고당은 점차 고립무원의 외로운 처지가 되었다"고 말한다.
11.24일, "평남인민정치위원회" 명칭에서 "정치"가 떨어져 나간다. "좌우합작"기구에서 "좌파"기구로 바뀐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조만식"은 정치적 자산들을 대거 상실했다. 그런 상태에서, 1945.12월 말 이후, "신탁통치" 정국을 맞아, 외롭게 "반탁 입장"을 견지함으로써 "치스차코프소련 극동군 제25군 사령관)"가 자신을 연금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했다. 이렇게 허무하게 숙청된 그는 장기간의 "연금"과 함께 잊혀 가는 존재가 됐고, "6ㆍ25한국전쟁" 중인 1950.10월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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