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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인물

석호필 (1889) : 제암리학살사건 고발ㆍ스코필드 의사

by 당대 제일 2022.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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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호필 (石虎弼ㆍ프랭크 스코필드ㆍ1889~1970ㆍ81세)"은 1916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로 내한하여, 31운동 때일제의 포악상을 외국에 알렸다1919.04.18일 "수원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교회" 학살사건 (26명 양민 학살) 총살ㆍ방화 현장을 촬영하였다.

 

1. 석호필 (石虎弼프랭크 스코필드Frank W.Schofield1889~197081)

캐나다 의학자 (영국 태생)선교사(기독교)ㆍ"원 화성시 제암리 교회" 학살사건 촬영ㆍ"제암리 학살사건"을 보고, 수원에서 서울로 오는 기차 안에서 "이완용(李完用)"과 조우하였다"이완용""어떻게 하면 기독교 신자가 될 수 있소?"라고 괴로운 심경으로 묻자, "이천만 국민에게 사죄해야 될 수 있소."라고 대답했다1969년 한국에 영주하여, 여생을 마쳤고, 1970년에 외국인 최초로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  출 생 : 영국       •  국 적 : 캐나다      •  묘 소 :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외국인 최초)

•  별 칭 : 한국명- 석호필(石虎弼) 단단하고 무섭고, 남을 돕는다는 자신의 철학

•  학 력 : 토론토 대학 온테리오 수의과     •  수 상 : 1960- 대한민국 문화훈장ㆍ1968- 건국공로훈장

•  경 력 : 1916-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연세대 의과대학) 세균학 교수 1919- 04.18일 수원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교회 학살사건(26명 양민 학살) 총살방화 현장 촬영 1920-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제 출국, 캐나다로 건너가 대학교수 1958- 대한민국 건국 10주년 기념식 초빙, 서울대 의과대학에서 강의 1969- 한국에 영구 정착 1970- 외국인 최초로 국립묘지에 안장

석호필

2. 31운동, 수원 제암리 학살사건 취재

1889년, "영국 럭비(Rugby)시"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녔다1907년 "캐나다"로 이민을 가서, "토론토 대학 온테리오 수의과"를 졸업하였다1916년 당시, "한국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연세대 의과대학 전신) 교장"으로 있던 "에비슨(Avison, O.R.)"초청으로 "세균학 교수"로 한국에 들어왔다.

영어로 강의를 하다가 한국어를 공부하여, 1917년 한국어 시험에 합격하고, 선교사 자격도 받았다한국생활에 충실하기 위해 "성"을 음차하여, "석호필 (石虎弼)"이란 한국어 이름을 가졌다1919년 초, 미국에서 온 "샤록스(Alfred M. Sharrocks)" 란 친구로부터,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 표방할 것이라는 소식에 따라, 미국에서 "이승만ㆍ안창호" 등이 독립운동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이갑성(李甲成)"에게 이 소식을 전하고 한국에서도 모종의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언질을 주어, "31운동"을 지피는데 역할을 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운동 현장을 직접 카메라에 담고, 독립운동의 실상을 체험하여 기록하였다그리고 피해를 당하는 학생들을 영국인이며, 캐나다인 신분을 이용하여 구출하고, 일본 경무국장과의 친분관계를 도용하여 구출하기도 했다.

04.01, 2의 "31운동"이 지방에서 일어났다04.15, 지방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일본군 책임자가 "수원군 향남면(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마을 주민들에게 알릴 사항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여, "제암리 교회"에 모이도록 하였다마을 사람들이 작은 교회에 들어오자, 문을 잠그고 총을 난사하고 불을 질러, 26명의 양민을 학살하였다.

04.18일 이 사건이 알려지자, "스코필드"는 삼엄한 경비를 서는 일본 경찰을 따돌리고, 수원에서 자전거로(코필드는 소아마비 증세로 왼쪽 팔과 오른쪽 다리가 마비되어, 한쪽 다리로 자전거를 탔다) "제암리"까지 잠입하였다거기서 또 일본 경찰을 만났으나, 몰래 제암리의 총살방화 현장을 촬영하는데 성공하였다부근의 "수촌리 (水村里)ㆍ화수리 (花樹里)"의 방화 만행 현장도 둘러보고, 귀경하였다.

3. 31운동시 일본만행 고발

"31운동"을 체험하고, 사진으로 담은 산증인임과 동시에 한국인을 여러모로 보살피고 언론활동으로 일본의 만행을 해외와 국내에 고발하는 활동을 하였다. 다음날(04.19) 다시 내려가, "수촌리"에서 일본 경찰에 구타당하여, 몸을 심하게 상한 사람을 "수원 관비병원"에 입원시키기도 했다.

일본의 "제암리 만행"과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해외에 알리기 위해, "캐나다ㆍ미국"으로 나가는 친구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해외에 보도토록 하였다일본 제국주의의 잔혹상이 폭로되었고, 일본의 언론에서도 "제암리 학살 사건"에 대한 질타의 기사가 나왔다일본인이 한국에서의 일본 선행을 외국인에게 홍보하기 위한 어용 영자신문 "Seoul Press"에 일본의 만행을 비난 고발하는 글을 무기명으로 자주 실었다.

4. 독립운동 수감자 위문강제 추방

일본 "고지마 장군ㆍ사이토 마코토 총독" 등을 만나, 일본의 만행고문 등을 비난하고, 삼갈 것을 요청하였다. 또한 "서대문형무소ㆍ대구형무소" 등을 다니며, "노순경ㆍ유관순ㆍ어윤희" 등 독립운동 수감자들을 찾아다니며 위문하였다그들의 투쟁정신에 감탄하여, 그가 쓰고 모은 독립운동 기록물에 "끌 수 없는 불꽃 (Unquenchable Fire)"이라고 명명하여, 훗날 한국인들이 출간해 주었다.

1920년, 그가 한국인을 돕는 것이 알려지자,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제 출국을 당하게 되었다이때도 "총독"에게 탄원하여, 감옥에 갇혀있던 독립운동가인 "이상재ㆍ이갑성ㆍ오세창" 등을 면회하고 격려하였다. "캐나다"로 건너가 대학교수로 활동하면서, 한국을 수차례 방문하며, 한국을 잊지 못했다그의 "31운동" 역사기록과 사진을 한국에 기증하여, 보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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