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소앙 (趙素昻ㆍ1887~1958ㆍ71세)"은 1919.02.01일, "대한독립선언서"를 작성하였고, 곧바로 "일본 도쿄"로 건너가 유학생들을 지도하여 "2ㆍ8독립선언"을 작성하도록 지도하였다. 1919년 "3ㆍ1운동" 직후인 04.11일 "중국 상하이"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의하고, "삼균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첫 헌법인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작성했다.
1. 조소앙 (趙素昻ㆍ본명- 조용은(趙鏞殷)ㆍ1887~1958ㆍ향년 71세)
독립운동가ㆍ한국독립당 당수ㆍ국회의원(2대)ㆍ교육자ㆍ"삼균주의" 제창ㆍ1950.09월 납북ㆍ상해 임시정부 초대 외무부장관(외교문서 담당)ㆍ초대 국무원비서장ㆍ대한독립의군부 부주석ㆍ한국독립당의 이론가ㆍ4개 국어 능통(한문ㆍ영어ㆍ중어ㆍ일어)
그의 정치철학인 "삼균주의"는 "한독당과 임시정부"의 정강정책의 골자를 이루고 있었다.그러나 "삼균주의"는 좌·우익 모두의 정치 이념으로는 받아들여지지 못했으며, 다만 "임시정부" 등 우익 중심의 "민족주의 운동세력"에 상당부분 수용되었다. 1940.05월, 한국국민당(김구)ㆍ조선혁명당(지청천)과 함께 3당 통합을 이루어, "한국독립당"을 창당했다. 납북 후, 북한에서도 존경받는 "선생님"으로 불렸지만, 북한 체제에는 협조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 본 명 : 조용은 (趙鏞殷), 필명이던 "소앙"이 후에 "이름"으로 굳어짐 • 출 생 : 경기도 파주군 월롱면
• 사 망 : 평양 → 1970년대 말 평양시 신미리에 있는 애국열사릉으로 이장 (경기도 양주군 남면에 가묘(假墓))
• 호 : 소앙(素昻) • 학 력 : 일본 메이지대학교 법학 학사 (17살, 대한제국 황실의 국비 장학생)
• 종 교 : 삼균주의 사상가ㆍ육성교 창시자 • 처 : 오영선ㆍ최경록 • 자 녀 : 2남 1녀 (조인제ㆍ조시제ㆍ장녀 조계림)
• 저 서 : 동유약초(일본 유학중 출간)ㆍ소앙 문집ㆍ한국문원ㆍ유방집
• 수 상 : 1988-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ㆍ1990-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국통일상
일본 유학 중, "무오독립선언서(1919.02)"의 기초에 참여하였고, 1919년 이후 의정원ㆍ정부에서 활동하였다. 중국에 망명해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독립운동노선이자, 광복 후의 새로운 국가건설 방략을 제시한 "삼균주의"를 정립했다. "김구ㆍ여운형" 등과 "시사책진회"등을 조직하였으며, 임시정부의 외교활동과 이론 수립에 참여하였다. "임정을 중심으로 독립 운동 세력이 통일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1945년 광복 후 귀국, 줄곧 "임시정부 법통성 고수"를 주장하였고, 김구ㆍ이승만 등과 함께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1948.04월에 김구ㆍ김규식 등과 "남북협상"에 참여하였고, "남북협상" 실패 후에는 바로 노선을 바꾸어 "대한민국 단독정부"에 찬성하고 지지하였다. 1950년 제2회 국회의원 선거에 성북구에 출마해서 전국 최다득표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지만, 1950년 6ㆍ25전쟁 당시 북한에 피랍되었다.
2. 사망 관련 의혹 (자살 설ㆍ타살 설ㆍ질병에 의한 돌연사 설 등)
그의 사망은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으며, 목격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1958.09월 북측이 "엄항섭(김구 최측근ㆍ한국독립당 간부)"등을 체포하자, 조작이라며 이에 항의하여 단식투쟁을 벌였다. 단식투쟁 중에 병을 얻어 09.10일 타계했다고 알려져 있다.
일각에서는 투신자살하였다는 설이 있는데, 이는 2002년 조소앙의 비서로 지냈던 김흥곤이 "와전된 얘기"라면서 부인했다. 한편, 남한에 조소앙의 서거 소식이 전해지자, 서울에서 유해 없는 장례식을 치른 뒤, 경기도 양주군 남면에 가묘(假墓)에 안장되었다.
3. 삼균주의(三均主義) 사상 : 정치ㆍ경제ㆍ교육의 균등화→ "균권ㆍ균산ㆍ균학"
중국에 망명해,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독립운동노선이자, 광복 후의 새로운 국가건설 방략을 제시한 "삼균주의(三均主義)"를 정립하여, 1930년대 초에 "삼균주의"를 제창하였다. "삼균주의"는 "정치의 균등화ㆍ경제의 균등화ㆍ교육의 균등화"를 말하는데, "보통선거제"로 정권을 가지런하게, "국유제"로 경제를 가지런하게, "국비 의무교육"으로 교육을 가지런하게 하자는 것이다.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 간에도 균등한 생활을 이루자는 것이었다.
상해 임시정부의 외무 부장이자, 한국독립당의 이론가였던 그는 한국 민족해방운동 내부의 좌ㆍ우익사상을 지양ㆍ종합하여, 독립운동의 기본 방략 및 미래 조국 건설의 지침으로 삼기 위하여, "균권ㆍ균산ㆍ균학"으로 표현되는 "정치ㆍ경제ㆍ교육"의 균등을 기반으로 하여, 개인 간에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민족 및 국가 간의 균등을 주장한 이론을 주창했다.
1920년대 말에 기본구상이 세워지고, 1931년 임시정부의 "대외선언"에서 체계가 정립되었다. 조소앙은 좌우익의 극심한 대립상황을 겪으면서, "삼민주의(쑨원)ㆍ대동사상(캉유웨이)ㆍ무정부주의ㆍ사회주의" 등 여러 사상들을 참고하여, "좌우 절충적 정치사상"을 제시함으로써, 그 대립을 타개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삼균주의"는 좌·우익 모두의 정치 이념으로는 받아들여지지 못했으며, 다만 임시정부 등 우익 중심의 민족주의 운동세력에 상당 부분 수용되었다.
4. 종교 : 육성교 창시
유교 학맥으로는 할아버지 "조성룡"으로부터 한학(漢學)을 수학하였으며, 종교 사상적 활동으로는 "삼균주의" 사상가이자, 후에 "육성교"를 창시하였다. "단군의 독립사상, 석가의 자비제중(慈悲濟衆), 공자의 충서일관(忠恕一貫), 소크라테스의 지덕합치(知德合致), 예수 그리스도의 애인여기(愛人如己), 무함마드의 신행필용(信行必勇)을 두루 본받자는 것으로 제종교의 사상의 융화, 융합을 추진하였다.
5. 가족사ㆍ월북자라는 이유로 차별
그의 가족과 친지들은 "월북자의 가족ㆍ측근"이라는 이유로 주변의 차별과 냉대를 받아야 했다. 조소앙 집안은 전 가족이 일제에 대항하여, 독립운동을 한 집안으로 알려져 있다.
형은 "조용하"이고, 동생은 "조용주ㆍ조용한ㆍ조시원ㆍ조용진"이다. 독립운동가 "오광선(吳光鮮)"은 "오영선(처)"의 사촌이었다. "조인제(1남)"은 1940년 광복군에 입대, "광복군 총사령부 참령"을 지내는 등 항일 유격전을 펼쳤다. 그러나 "조인제(1남)"는 월북인사의 아들이란 낙인 때문에 번번이 취직에 실패하였다.
그래서 "안종덕 (조인제의 처)"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조소앙의 주변에 공산당의 프락치들이 기생한 것 역시 그를 "공산당"으로 몰고 가는 원인이 됐다. "조시제(2남)"는 임시정부의 특명으로 만주로 파견되어 임무를 수행하던 중, 1947년 "김창만(연안파 독립 동맹계)"에게 "안동"에서 암살당하였다.
이후 1970년대부터 복권 여론이 나오기 시작, 그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는 점과 한국 전쟁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간 것이 자발적 월북이 아니라는 점이 지적되면서 복권 시도가 추진되었다. 후에 복권되었으며, 독립기념관 건립 후, 독립기념관 경내에 "삼균주의 어록비"가 세워졌다.
1990년대에 와서, 조소앙의 주변에 있었던 "박갑동" 등의 증언에 의해, 공산당이 그의 주변에 첩자를 심어두고 정보를 빼내고, 그를 기만했음이 알려지면서 누명을 완전히 벗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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