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익 (李容翊ㆍ1854~1907ㆍ53세)"은 민족의 역량을 배양하고자, 자비로 "보성(普成)소학ㆍ중학ㆍ보성전문학교(1905년, 현, 고려대 전신)"을 설립하여, 장차 국가의 동량이 될 인재를 키워내기에 노력했다. (김성수가 고려대를 설립한 것이 아님) 또한, "인쇄소 보성사(普成社)ㆍ편집소 보성관(普成館)" 등을 설치하여. 민족계몽에 기여햇는데, 1919년 "3ㆍ1운동" 때, "독립선언문"을 인쇄한 것도 이 "보성사"에서였다.
1. 이용익 (李容翊ㆍ1854~1907ㆍ향년 53세)
조선 광산 갑부ㆍ사업가ㆍ대한제국 대표적인 친러파 관료ㆍ외교관ㆍ내장원경ㆍ탁지부장ㆍ중앙은행 총재ㆍ"러ㆍ일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인물ㆍ"함경남도 단천"에서 금광에 투자→ 거부가 됨ㆍ근왕주의 인사ㆍ황실의 금괴 주조사업 주관ㆍ파천황으로 불림ㆍ축지법 사용
• 출 생 : 함북 명천 • 사 망 :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 사 인 : 병사ㆍ암살설 (페테르부르크, 김현토에 의해 암살)
• 호 : 석현 (石峴) • 학 력 : 한학 • 가 족 : 환조의 아들인 완풍대군의 후손ㆍ초병덕(楚秉悳)의 문인
"이재"에 밝은 "이용익"은 주로 외국의 간섭을 많이 받던 "탁지부(재무부)대신", 간섭에서 자유로운 황실의 재정을 맡아 보는 "내장원"의 최고 책임자인 "내장원경"에 있었으며, 무능한 관료들에 의해서 사건이 터질 때마다, "구원투수"로 그 직책을 맡아가면서, 국방에 문제가 생길 때는 "육군참령 육군참장"으로, 재정에 문제가 생길 때는 "탁지부 대신"으로, 다시 "광산" 소출이 적어지면, "광산 책임자겸 내장원경"으로, 외교에 문제가 생기면 "외무 조정"으로 관직을 돌려가며 맡으면서, "고종 황제"의 "오른팔"을 넘어서, "일본 공사"는 그를 "이용익 수상"이라고 불렀고, 백성들은 그를 "부황제"라고 부를 정도가 되었다.
서민의 아들로 태어나, 소년 시절에 서당에서 수학한 뒤, 고향을 떠나 한때, 보부상(褓負商)중에서 물장수으로 자금을 모았고, "함경남도 단천"에 와서, 금광에 투자, 거부가 되었다. 재화를 얻게 되자 큰 뜻을 품고, "한성"에 올라와, "민비(閔妃)"의 친척인 "민영익"의 재물을 바치고, 집에 기거하면서, 금광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 때, "충주"로 피신한 "민비(閔妃)"와 "민영익" 사이를 발 빠르게 오가며 비밀연락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민영익"의 천거로 고종의 신임을 얻어 출세의 길을 잡았다. "민영익"의 천거로 "감역"으로 발탁되어, 당시의 명문세족은 아니었으나, 어렸을 적부터 서당에서 유교 교양을 갖춰 강직한 성품이었고, 청렴하고 이재에 밝은 정치가로 식견이 탁월하여, 고종의 신임을 받았다. 그리하여 "서북철도국 총재ㆍ중앙은행총재" 등을 역임하면서, 근대 개혁에 기여하였다.
"임오군란" 이후, 고종과 왕비 민 씨를 도운 "근왕 개화파"의 지도자로 활동하다가 "친러파"가 되었으며, "북청 부사ㆍ단천 부사"로 재직 시, 수탈행위를 하여, "북청 민란"의 원인을 제공하였다. "대한제국 수립" 이후, 정부의 요직에 있으면서, 황실재정을 확충하고, 독립을 유지하기 위한 외교활동을 벌이는 등 "황실 위주의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1903년, "러시아"가 조선 침략을 목적으로 압록강 어귀에 있는 "용암포의 조차권"을 요구하였을 때, 정부에서 이를 승인하도록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러ㆍ일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 그 후 "친일파" 세력이 강해지면서, 일본을 견제하고자 한 "친러파"인 그의 입지는 좁아졌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어, 국권이 박탈되고, 이른바 보호정치가 시작되자, 육군부장(陸軍副長)이라는 직명으로,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원조를 요청하기 위해, "프랑스"로 향하던 중, 6월에 "중국 산둥성 옌타이항(山東省 煙臺港)"에서 일본 관헌에게 발각되었다. 이 때 "밀령의 책임"을 추궁 받을까 염려한 "조선 정부"에 의해, 일체의 모든 공직에서 파면되었다. 그 뒤 해외를 유랑하면서, 계속 구국운동을 전개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객사하였다. 일설에는 "페테르부르크"에서 "김현토"에 의해 암살당했다고 한다. 그의 부음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면서, 일본의 영향력을 내심 경계하던 "황실"에 의해 "충숙(忠肅)"의 시호가 내려졌다. 사망 시, "고종"에게 "유소(遺疏)"를 남겼는데, 거기에는 "광건학교(廣建學敎)ㆍ인재교육(人材敎育)ㆍ국권회복(國權回復)" 등을 강조하였다
2. 축지법 (縮地法ㆍ땅을 줄이는 법) 사용
"이용익"은 "축지법"을 쓸 수 있다고 주장한 사람들 중, 유일하게 공식적인 기록이 있는 인물이다. 보부상인 이용익"이 출세한 이유가 그의 독특한 기술 때문인데, 거리를 빠르게 이동한다는 "축지법"을 썼다고 한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 반란을 일으킨 군사들이 "궁궐"을 습격 한 후, "민영익"의 집을 습격했는데, "이용익"이 "민영익"을 업고, 담을 타고 도망갔는데, 어찌나 빠르게 이동했는지, "민영익"을 죽이려던 군사들이 놀라서, 그만 멍 때리고 있었다고 한다. 이후 "이용익"의 도움으로 살아난 "민영익"은 그를 "고종"에서 천거했고, 이후 "장호원"에 피신한 "고종"의 정보통 역할을 하면서, 반란군들의 후미를 기습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이때 그의 발은 "말"보다 빨랐다고 한다.
1884년 경, "이용익의 축지법"에 대해서 궁금했던 "고종"이, "내가 전주에 파발을 보낼 일이 있는데, 그대는 전주까지 얼마 만에 갈수 있냐?"고 물었고, "이용익"은 "반나절이면 갈수 있다"고 답했다. 이에 "고종"은 "전주 목사"에게 "이용익"이 친서를 들고 오면, 그 시간을 기록하라는 파발을 보냈고, 4일 뒤, 이용익을 출발시켰다. 그리고 거의 12시간이 안 돼서, "전주 목사"는 "이용익"이 찾아왔다고 하며, 인증까지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도착 했을 때, "이용익"은 옷만 젖고 더러웠을 뿐, 상당히 여유롭게 도착 했다고 한다.현재 서울~ 전주 간 고속도로 거리가 214km이고, 이것을 12시간 안에 주파하려면, 대충 18km/h로 달려야 하는데, 마라톤 선수라면 가능 할 수도 있지만, 마라톤 선수라도 과연 그 속도를 12시간 동안 유지하면서 뛸 수 있을까라는 의문점이 든다.
실제, "이용익의 기록"을 마라톤 기록과 비교해 보면, "이용익"은 마라톤 세계기록의 2배나 되는 속도를 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때가 "조선시대"였으니, 현재처럼 잘 만들어진 고속도로가 있을 리 만무하고, 터널도 없었으니 산 넘고, 물 건너서 가야했으니, 현재의 서울~ 전주 거리보다는 더 멀 수밖에 없다.
실제, "조선시대"에 지방에서 "한양"까지 가려면, 산을 넘는 시간도 있어, 보통 사람들은 1달 이상 걸렸다고 한다. 이후 "고종"이 "축지법"의 비결을 묻자, "이용익"은 "두루마기가 걸리적거리지 않게 잡은 다음, 좀 빠르게 걷기만 하면 됩니다."라고 답했다. "홍종우 (김옥균 암살자)"의 말에 의하면, "이용익은 여유롭게 걷다가 발을 놀려, 순식간에 이동하는데, 그의 발재간이 눈에 안보이고, 팔랑팔랑 나부끼는 두루마기 자락만 보였다"고 한다.
3. 평 가
"친일파"와 시종일관 대립한 점 때문에, 일제 강점기 동안 "애국자"로 널리 평가되었다. 사후 그는 일본의 세력이 강대해지면서 "애국자의 전형"으로 추모되었으나, 일각에서는 "친러파"라는 점과 "부패 문제" 등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 그러나 "친일파"와 비슷한 "친러파"로 지목하는 시각과 부패 행위에 대한 의혹도 존재하고 있다.
구한말의 개화파 정치인인 윤치호는 그를 "이지용ㆍ민영철" 등과 함께 "악당"이라고 비판했다. 윤치호는 그를 "친일파"와 같은 인물로 평가했다. 윤치호는 그를 "러ㆍ일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인물의 한사람으로 지목하여 비판하였다. 그는 "금괴 주조사업"에도 참여했었는데, "윤치호"는 그를 부패한 인물로도 지목했다. "고종 황제 개인의 금고를 위해 가난한 백성들의 피와 땀으로 금괴를 주조했던 이용익은 충신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그는 일본인들을 증오했다. 그렇다고 그가 애국자였다고 할 수 있나? 사실인즉 이용익 같은 인간들은 조선인들 입장에서는 일본인들보다도 더 위험한 적이었다."며, 비판을 가했다.
신문 보도에 의하면, "민영휘"가 자신이 설립한 "휘문의숙"에 10만 원 가량을 내놓기로 했다고 한다. 조선일보는 사설을 통해, "민영휘가 도덕ㆍ명성ㆍ재력 면에서 조선 최고"라 평했는데, "민영휘를 두고 도덕적이라 평가하는 것은, 아무리 극악무도한 방식으로 돈을 벌더라도 그 중 일부를 공익사업에 투자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면죄부가 된다는 것으로, 이는 옳지 않다."고 했다.
그 동안 "이용익"은 "일제ㆍ앞잡이들"에 의해, 조선 망국이 내재적인 부패와 타성 때문에 멸망했다는 식의 역사 왜곡을 위해 가장 많이 폄하되고, 축소되어, 잊혀진 인물이 되고 말았다. 그가 출세를 결심하게 된 계기는, "사또의 말잡이"를 하다가, 사소한 일로 크게 곤욕을 치르게 된 뒤 그에 대한 한을 갚기 위해서였다는 풍문이 전하고 있으나, 이 또한 분명한 바가 없다. 그나마 집은 먹고 살 정도 이상으로 풍족했고, 그로 인해 "세종" 이후 금지되었다가, 열강의 이권 침탈로 인해 풀리게 된, "광산 개발"에 참여해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는 천부적으로 "이재(理財)"에 밝았고, 그 돈으로 척족인 "민영익"에게 줄을 대어, 연분을 만든 뒤 "금광"에서 발견한 엄청난 "금괴"를 "고종"에게 바쳐, 처음으로 "고종"과 연분을 틔웠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고종"의 총애를 사기 시작한 것은 "임오군란" 당시, "민영익"의 추천으로 빠른 준족을 이용해서 "고종"과 충주 친가의 "민비" 사이를 반나절 사이에 오고가면서 부터였다고 한다. 당시 "민영익"은 "고종"에게 "이용익은 축지법을 쓸 줄 안다."고 추천했으며, 이에 호기심을 가진 "고종"이 "강원도 관찰사"에게 보내는 서찰을 적어서, 이를 "이용익"에게 "관찰사의 결재문"을 가져오라고 시켰는데, 한나절도 안 되어, "서울과 원주"사이를 왕복했었던 신기를 지녔다고 한다.
"이용익"을 총애한 "고종"은 처음에는 한미한 출신인 그를 파격적으로, "관북지방의 황실 광산" 1개를 운영하는 책임을 맡겼으며, 그가 맡은 "금광"이 내는 이윤이 주변 금광의 2~3배를 넘을 정도가 되자 곧 그 지역 "전체의 금광 책임자"로 그를 임명하게 된다. 지금과 달리, 마땅한 재정 수입원이 존재하지 않았던 최후진국 "조선"에서 "황실"이 운용할 수 있는 최대의 재산이라고 할 수 있는 "광산운영을 이용익에게 맡겼다"는 것은 그의 "이재 능력"이 매우 출중했음을 알 수 있다.
한미한 출신인 "이용익"을 중용하자, 이에 시기와 반대를 하는 세력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게 되었다. 이들은 2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우선은 "전제군주정"을 반대하고, "입헌 국가"를 건설하려 했던 "독립협회"를 들 수 있다. "황실 재정"이 튼튼해지고, 이로 인해 "고종의 친정 독제체제"가 구축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들은 "이용익이 이윤을 많이 남기기 위해, 백성들을 쥐어짠다."는 상소를 올렸다.
실제로 "이용익"은 주요 수출품이었던 "홍삼"의 국가 관리를 위해서, "3년 근 이상의 홍삼"은 "국가전매"를 시도했고, 이로 인해 "개성의 인삼 상인들"과 큰 마찰을 빚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수출품인 "홍삼"을 국가가 관리하는 오늘날의 "전매 제도"가 국가의 재정에 큰 보탬이 되었다는 것을 볼 때, "이용익"이 추진한 정책은 그 속도와 강압적인 면에 문제가 있었을지 몰라도 그의 정책이 결국에는 옳은 방향이었고, 탁월한 혜안이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다른 하나의 세력은 주로 "문벌귀족가문 출신의 구신들"이었는데, 이들은 "이용익"의 버릇없는 태도를 주로 문제 삼았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엄비 양귀비 비유 사건"인데, "민비"에 대한 충성을 버릴 줄 몰랐던 "이용익"은 "영 왕"을 세자로 책봉하려 했던 "엄비"와 지속적인 갈등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었고, "엄비"가 "비 책봉"을 받을 때, "엄비는 양귀비 같은 분이시니, 귀비라는 호칭을 쓰시는 게 맞다"고 "이용익"이 발언하자, "엄비"는 이를 못생긴 자신을 양귀비에 비유해서, 자신을 모욕하는 처사라고 생각했고, "엄비"에 연을 댄 대신들의 "탄핵 상소"에 시달리게 되었다.
특히 "이용익"은 한미한 출신으로, 형식보다는 실질을 중시했기 때문에, 당시 "황제" 앞에서는 엎드려서 고해야 했던 관행을 무시하고, 직접 "황제"에게 귓속말을 전할 정도였고, 무례하게도 "전화로 직접 황제와 통화를 주고받았다"고 한다. 비밀스러운 업무가 많았던 "황실 재정"을 운용하고, 후에는 "외교문제"에 깊숙하게 개입하게 된 "이용익"이 비밀 유지를 위해 했던 행동들이, 깨어나지 못했던 구신들에겐 인륜을 깨는 행위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은 길길이 반대를 위해 날뛰었고, "고종"은 이런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흉년에 따른 "안남미 수입"이라는 명분으로, "이용익"을 "여순"으로 출장 보내, 사건이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관직을 복권시켜주는 방식을 여러 번 적용하여, "이용익"을 두둔해주었다.
"이용익" 사후, 그를 반대하던 세력, 미워했던 친일세력, 일제 세력들이 그의 금고ㆍ장부를 모두 압수조사를 했으나, 결국 그가 사적으로 착복했던 것이 아니라, "황실을 위한 충정이었다."는 것을 인정했을 정도이니, 이를 알던 "고종"이 그를 얼마나 신임했기 때문에, 그런 불례를 묵과해주고, 그의 행동을 두둔했는지를 알 수 있다. 나쁘게 말하면, "이용익"은 강대국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했던 "구한말 대신들" 중에서 유일하게 "고종의 개"라고 불릴 수 있을 정도로 "고종의 깊은 심"복이었다.
대신들이 모두 강대국과 연을 대고, 척족ㆍ신하들 사이에서도 서로 파벌을 갈라서 싸움을 하고 있으면서도 "전권 대사"를 임명해도, 그 누구도 명을 받고, 만리타향으로 떠나려고 하지 않던 것이 당시 실정이요, "황실"에서 군대를 모집해도, "용병제"를 하면, 겨우 수천 명도 모을 수가 없는 가난한 국가요, "징병제"를 하게 되면, 수백 군대가 단 수십 명의 외국 군대에 파리 떼 쫓기듯이 쫓겨 다닐 수밖에 없으면서도, 자기들끼리는 "러시아식 군대ㆍ일본식 군대"로 나누어 패싸움을 하였던 어지럽던 정국이었다. 이런 무능한 대신들 속에서 홀로 역할을 맡기면, 전임자의 2~3배를 해내던 인물이 "이용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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