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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 마키아벨리 ④ 체사레 보르자 (1475?~1507ㆍ32세)

by 당대 제일 2023. 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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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사레 보르자 (Cesare Borgia1475?~150732)"는 "르네상스" 시대, "발렌티노ㆍ로마냐"의 공작이자, "안드리아ㆍ베나프로"의 군주이며, "디오이스"의 백작, "피옴비노ㆍ카메리노ㆍ우르비노"의 지배자, "교회군"의 "총사령관ㆍ장관", "스페인ㆍ이탈리아"의 용병대장이며, 전직 "추기경"이다.

 

1. 체사레 보르자 (Cesare Borgiaㆍ1475?~1507ㆍ향년 32세)

타고난 영웅의 냉혹함을 가진, 전직 "추기경"이며, "발랑티누아 공작"이다. 1498.08.17일, "체사레"는 역사적으로 "추기경 직"을 사임한 1번째 사람이 되었다. 그 대신 그는 "프랑스 루이12세"로부터 "발렌티노 공작"의 작위를 받았고, 이후 그는 "발렌티노(Valentino)"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출 생 : 교황령로마       ㆍ사 망 : 나바라 왕국비아나       매 장 : 비아나산타 마리아 교회       ㆍ재 임 : 1498.08~1507.03       ㆍ배우자 : 샬롯 달베르 (1480~1514나바라 왕의 여동생1499년 결혼)       자 녀 : 발랑티누아 여공 루이즈 보르자 (샬롯 달베르의 딸) 체사레는 적어도 11명의 사생아를 두었는데, 그중에는 이사벨라 콘테사 디 카르피와 결혼한 지롤라모 보르자도 있다.

ㆍ가 문 : 보르자 가문       ㆍ부 친 : 교황 알렉산데르 6(반노차 데이 카타네이(가타네이 백작 부인)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       ㆍ형 제 : 루크레치아 보르자스퀼라체 공작 호프레 보르자간디아 공작 후안 보르자       어머니를 알 수 없는 배다른 형제- 돈 페드로 루이스 데 보르자지롤라모 데 보르자

 평 가

"마키아벨리"는 "피렌체 공화국"의 대사관 겸 비서로서 "체사레"를 만나 협상한 적이 있었는데, 이후로 그는 "체사레"를 크게 존경하게 된다. "마키아벨리"는 1502.10.07~ 1503.01.18일까지 "보르지아"의 저택에서 지냈다. 이 기간에 그는 정기적으로 "급송 공문서"를 "피렌체"에 있는 상관들에게 보냈고, 그 문서들은 대부분 오늘날까지 남아, "마키아벨리"의 작품집으로 출판되고 있다.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저서 "군주론"에서 "체사레"의 공적과 전략을 다수 인용하였고, 그를 본받을 것을 권고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체사레"의 2가지 무용담은 "마키아벨리"에게 매우 큰 인상을 남겼다. 1번째 무용담은 "체사레"가 "로마냐"를 진압한 과정으로, "군주론"의 제17장에 기술하였으며, 2번째 무용담은 1503년 새해의 밤에 "체사레"가 "세니갈리아"에서 자신의 정적들을 암살한 이야기이다.

"체사레"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찬사는 언제나 논쟁의 중심에 있다. 어떤 학자들은 "군주론"이 20세기 범죄의 선구자 노릇을 했다고 주장하며, "맥컬리ㆍ액턴"을 포함한 다른 학자들은 시간에 따른 타락과 일반적인 범죄의 영향과 같은 폭력에 대한 찬사를 설명하기도 한다. "알렉상드르 뒤마"는 자신의 저서 "유명한 범죄"의 1번째 책에서는 "보르자 시대" 당시 "예수 그리스도"를 그린 작품들 가운데, 일부는 "체사레 보르자"를 모델로 삼아 그렸고, 그 시대 이후 만들어진 "예수"의 이미지에 다분히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우르비노 (Urbino)라는 지역

역사와 문화적 측면에서 보면, "이탈리아"의 3대 도시로 보통 "로마ㆍ피렌체ㆍ베네치아"를 꼽는다. 경제 규모로 따진다면 "밀라노"가 단연 1등 도시이고, 지역의 크기로 보면 "나폴리"도 빼놓을 수 없다. "우르비노 (Urbino)"라는 도시가 있다. "이탈리아 반도"는 한국처럼 동쪽에 높은 산들이 몰려 있는 동고서저(東高西低)의 지형을 이루고 있다. "우르비노"는 동쪽 지방에 있는데, "강원도 원주"쯤 되는 도시로 보면 되는데, 그렇게 큰 도시도 아니고 주요 공항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지리적 접근성이 좋지 않아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도시다. 그래도 "우르비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역사의 주요 인물을 많이 배출한 유서 깊은 문화의 도시다.

회화 분야에서 "다빈치"와 쌍벽을 이뤘던 "라파엘로 (Raffaelloㆍ1483~1520)"와 16세기 초 "이탈리아" 건축가들의 십장(什長) 격이었던 "브라만테 (Bramante1444~1514)"도 이곳에서 태어났다. "이탈리아 용병대장"의 모델이었던 "몬테펠트로 (Montefeltro)가문"과 교황을 3명이나 배출했던 "델레 로베레 (Delle Rovere)가문"도 모두 "우르비노" 출신이다. "우르비노"의 "델레 로베레 가문"이 배출한 "교황 율리우스 2세 (1503~1513년 재위)"는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를 위해 "미켈란젤로"를 고용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자기 고향사람이었던 "라파엘로(회화)"와 "브라만테(건축)"를 총애했지만, "피렌체" 출신인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체사레 보르자의 등장

15C말~16C 초까지 "몬테펠트 가문"이 "우르비노"를 통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군대가 몰려와, 영주 "구이도발도 몬테펠트로(1472~1508)"를 "우르비노"에서 축출시켜 버렸다. "평화의 사도"가 돼야 할 교황의 아들이 전쟁을 일으켰으니, 바로 이 인물이 유명한 "체사레 보르자(Cesare Borgia)"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신(新)군주의 이상적인 모델"로 칭송했던 인물이고, "시오노 나나미"가 "체사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이란 멋진 제목으로 소개했던 바로 그 이탈리아의 영웅이다. "체사레 보르자"가 위대한 군주의 모델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타인의 무력이나 호의에 의지하지 말아야겠다."고 깊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물론 "피렌체"와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프랑스 루이 12세"는 "체사레"의 "피렌체" 공격을 반대했다. "마키아벨리"가 "프랑스"로 출장을 가서, 거둔 외교적 업적이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 

일종의 연합군 관계를 유지해 왔던 "프랑스"가 갑자기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다고 판단한 "체사레"는 이 대목에서 중요한 "권력의 법칙"을 깨닫게 된다.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타인의 무력이나 호의에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프랑스"는 "프랑스"일 뿐이라고 판단한 "체사레"는 새로운 권력의 작전에 돌입한다. "프랑스"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힘과 무력을 구축하는 전략이었다.

"체사레"가 "이탈리아 중부지방(이탈리아 중부지방은 로마냐(Romagna) 지방으로 불린다)"을 차례로 점령해 나가자, "피렌체 정국"에서는 벌집을 쑤셔놓은 것 같은 혼란이 일어났다. "용병부대"를 운영하던 소국의 영주들이 대대로 자치권을 행사하던 지역이었다. 그런데 "보르자" 가문 출신의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이 "로마냐 지역"에 독립적인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야심을 품고, 아들 "체사레"를 출전시킨 것이다. 이제 "로마냐"의 서쪽 지역에 있는 "피렌체"까지 넘보고 있으니, 절체절명의 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프랑스"의 군사적 보호가 마지막 희망이었지만, 예측 불가능한 "체사레"의 성격 때문에 갑작스런 "피렌체 공격"도 배제할 수 없는 형국에 처해 있었다.

 체사레 보르자의 군사고문 : 레오나르도 다빈치

사실은 또 다른 영웅 1명이 "우르비노"에 있었다. "피렌체" 출신의 예술가이자, 과학자였던 "레오나르도 다빈치"이다. "체사레"의 군사고문으로, "로마냐 지방" 정벌을 위해 지도를 만들고, 새로 건설될 도시와 수로(水路)를 계획했다.

 마키아벨리 : 체사레 보르자와 협상ㆍ평가

"소데리니 주교"와 "마키아벨리"가 "우르비노"에 도착했을 때, 어둠은 이미 도시의 성곽을 집어 삼키고 있었다. 육중한 산 중턱에 우뚝 솟아 있는 "우르비노 성채"는 지금도 중세시대의 무게감이 느껴지는 곳이다. 저녁 늦게 도착한 "피렌체 사절단"에게 "체사레"는 "외교관"의 복장으로 갈아입을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어둠이 깔려 있는 "지하 접견실"로 두 사람은 거의 끌려가다시피 했다.

"체사레"는 어두운 접견실 한쪽 끝에 서있었지만, 그의 주변에는 촛불이 켜 있지 않았다. "소데리니"와 "마키아벨리"만 밝은 곳에 서있고, 교황의 아들은 어둠 속에서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마키아벨리"는 숨을 죽이며, "체사레"와의 대화를 이어갔다. 회담이 계속되는 동안, 어둠 속에 서있던 "체사레"는 끝까지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마키아벨리"는 이 인물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곧 알아차렸다. 그리고 세월이 지난 다음에야, "체사레"가 당시 "매독"에 걸려, 생긴 얼굴의 반점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어둠 속에 서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체사레"는 프랑스의 비호를 받으면서, 자신을 견제하고 있는 "피렌체 공화국"에 대해 과격한 단어를 사용하면서 비난을 퍼부었다. 약 1년 전에 "피렌체"의 성벽 입구까지 진격해, "피렌체" 점령을 눈앞에 두고 있던 때를 상기시키며, 만약 "프랑스"의 개입이 없었다면, 당신들은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고 거친 협박을 이어갔다. "체사레"는 "피렌체 행정부"의 정통성이 없다면서, "메디치 가문"의 복권을 요구했다. 이것은 "피렌체 외교대사"에게 충격을 주는 발언이었다. 1494년에 "피렌체"에서 축출됐던 "메디치 가문"이 "체사레"의 배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체사레"의 협박은 계속됐다. "만약 메디치 가문을 복권시키지 않으면, 내가 가만있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곧 알게 될 것이고, 누구든지 나의 친구가 아니면, 곧 그 사람은 나의 적이란 사실 또한 알게 될 것이요!"

"마키아벨리"는 "체사레"와의 첫 만남 이후, 찬사라고 불러도 좋을 내용의 보고서를 "피렌체"로 보냈다. 적장이었던 "체사레"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평가는 이렇게 이어진다. "이 영주는 정말 실력이 뛰어나며, 멋진 인물입니다.  전쟁에 임할 때, 더욱 그 진가가 드러납니다.  승리의 영광을 차지하고,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결코 쉬는 법이 없습니다.  위험도 불사하고, 피곤함도 개의치 않습니다.  그는 장소를 신속히 이동하는데, 아무도 그의 이동을 눈치 채지 못합니다.  그는 부하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고, 그 부하들은 이탈리아에서 제일가는 전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모든 조건 때문에 그는 항상 승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무서운 존재가 돼버렸습니다.  행운의 여신이 보내는 빛이 항상 그의 앞길을 비추고 있습니다."

 출 생

"체사레 보르자"의 삶의 모든 부분이 거의 그렇듯, 그의 출생날짜 역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추기경 로드리고 보르자(훗날의 교황 알렉산데르 6세)"와 그의 애인 "반노차 카타네이" 사이에서 1474년과 1476년 중에 "로마"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보르자 가문"은 원래 "스페인 계열"이었지만, "체사레"의 종조부이면서 "발렌시아 교구장"인 "알폰소 보르자(1378~1458)"가 1455년에 "교황 갈리스토 3세"로 선출되면서, 15세기 중반에 지위가 크게 상승했다. 

"체사레"의 아버지인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그의 애인인 "반노차"와 관계하여, 낳은 아이들을 공공연히 자신의 친자식으로 인정한 1번째 "교황"이었다. 이후 "교황 식스토 4세"는 "체사레"에게 수여한 "로마 교황의 교서에"서 그의 탄생을 증명해야 할 필요가 없다고 알렸다. 어린 시절의 "체사레"는 갈색 눈ㆍ검은 머리의 어여쁜 아이로 알려졌으며, 커가면서 차츰 아버지를 닮아 훤칠한 외모ㆍ빠른 걸음ㆍ큰 키ㆍ끝없는 야심을 가진 남자로 성장하였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후안"을 군인으로, "체사레"를 종교인으로 키울 생각으로 그를 처음에 교회에서 수행토록 하였는데, 겨우 15살의 나이에 "팜플로나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암살ㆍ교회군 총사령관으로 임명

"체사레"가 "피사ㆍ페루자"에서 학교에 다니며 법학을 공부할 즈음, 아버지가 "콘클라베"에서 새 교황으로 선출되자, 불과 18살의 젊은 나이에 "추기경"으로 서품을 받았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자기 가문의 영달을 위해, 아들들에게 희망을 걸어, "체사레"의 형제인 "후안"을 "교회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교황청"의 군대를 이끌도록 하였다. 그러나 1497년에 "후안"이 암살당하면서, 그의 빈자리를 "체사레"가 차지하게 되었다. "후안"의 암살의 배후에 "체사레"가 관여하고 있다는 소문이 당시에 파다했다고 한다. 1498.08.17일, "체사레"는 역사적으로 "추기경 직"을 사임한 1번째 사람이 되었다. 그 대신 그는 "프랑스 루이12세"로부터 "발렌티노 공작"의 작위를 받았고, 이후 그는 "발렌티노(Valentino)"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군사적 업적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체사레"를 후원해줄 힘이 있었고, 그러한 아버지의 지원을 바탕으로 "체사레"는 기초부터 시작하여, 차근차근 자신의 업적을 쌓아갔다. 아버지에 의해, "교황군의 총지휘관"으로 지명 받은 "체사레"는 "교황청"의 권위 회복과 교황청에 굴복하지 않는 "이탈리아"의 군소 도시들을 정복하는 임무를 띠고 파병되었다. "이탈리아"의 소참주들은 교황으로부터 "교황 대리"라는 관명을 하사받아, 각자 자신이 부여받은 지방을 다스리는 것이었지만, 세월이 흘러 교회의 권위가 실추하면서, 차츰 저마다 하나의 독립국으로서의 체제를 확립하여, 사실상 "교황령"으로부터 독립했거나, 다른 강대국에 의존하는 상황이었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소원대로 "체사레"가 "프랑스"의 원조를 받아, "이탈리아 중부(로마냐)지방"에 자신의 나라(로마냐 공국)를 세움에 따라, "나폴리 왕국ㆍ피렌체 공화국ㆍ밀라노 공국ㆍ베네치아 공화국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다. 또한, 이 당시 "체사레"는 한때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자신의 "군 건축가ㆍ기술자"로 고용하기도 하였다.

 말 년

"체사레"는 군인은 물론 정치가로서도 매우 유능한 인재였지만, "교황"의 후원 없이는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에,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선종은 곧 "체사레"의 몰락을 뜻하였다. 1503년,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말라리아"로 인한 고열ㆍ구토로 쓰러져 선종하면서, "체사레"의 화려한 경력에도 종지부를 찍을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는 "교황ㆍ체사레"를 함께 독살한 후, 재산을 차지하려 했던 "아드리아노 다 코르네토 추기경"이 둘을 초대하여 천천히 효과가 발휘되는 독이 든 음식을 먹게 하여 암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1503.06월, "체사레 보르자"는 새로운 군사 원정을 앞두고, 부친 "교황 알렉산데르 6세"와 "아드리아노 다 코르네토 추기경"과 함께 만찬을 가졌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후, 세 사람은 "열병"으로 몸져누웠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당시 의사들이 "체사레"를 살리기 위해서, 피부를 다 벗겨내는 모험을 감행한 결과, 마침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회복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고령이었던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살아남을 가망성이 희박했다. 공식적으로, "알렉산데르 6세"의 사인은 당시 "로마"에 널리 유행하였던 "말라리아"나 그와 비슷한 병에 감염되어, 선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몇몇 기록에서는 그의 아들 "체사레"가 "아드리아노 추기경"을 제거하기 위해, "칸타렐라"라는 이름의 독약을 준비했으나, 뜻하지 않게 "알렉산데르 6세"와 "체사레"도 "칸타렐라"가 든 음식을 먹고 쓰러졌다는 것이다.

이 설을 지지하는 이들은 "교황"의 시신이 매우 빠른 속도로 부패한 것을 근거로 내세웠다. 하지만, 당시 "로마"주재 "페라라 대사"가 "에르콜레 공작"에게 보낸 서신을 보면, 당시 "로마"에 거주하는 거의 모든 시민이 "나쁜 공기(per la mala condictione de aere)"로 병들어 있었기 때문에, "교황"과 그의 아들이 병상에 누운 것도 무리는 아니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체사레"에게 동정적이었던 새 교황 "비오 3세"가 얼마 못 가 선종한 후, 과거 아버지의 정적이었던 "교황 율리오 2세"가 등극하게 된 것이다. "율리오 2세" 휘하의 사람들은 "체사레"를 모함하였고, 결국 "체사레"는 "산탄젤로 성"의 지하교도소에 투옥되었다. 1504년, "스페인"으로 추방당한 "체사레"는 그곳에서 포로로 전락하였다. "메디나 델 캄포"의 "모타 성"에 갇혀 지낸 지, 2년 만에 탈출에 성공한 그는 "처남(나바라의 후안 3세)"이 왕인 "나바라 왕국"으로 도주하였다. 1507년, "체사레"는 "비아나" 포위공격 때, 수많은 자상을 입고 사망하였다. 숨진 후, "스페인 북부 비아나 지역"의 "산타 마리아 성당"에 묻혔지만, 죄인을 묻을 수 없다는 교회의 반발로 무덤을 파헤쳐지고, 유해를 길가에 묻었다. 그러나 2007년, "스페인"의 한 대주교가 시청에 있는 그의 무덤을 교회로 이장하도록 허락했다고 한다.

2. 교황 알렉산데르 6세 (Alexander PP.VIㆍ1431~1503ㆍ향년 72세)

제214대 교황"체사레 보르자(Cesare Borgia)"의 아버지"르네상스" 시대, 교황들 가운데 가장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교황 가운데 한 사람전통적으로 "호색족벌주의탐욕"등의 문제로 역사상 최악의 교황으로 손꼽히고 있지만, 이러한 세간의 악평은 대부분 생전에 그의 정적들이었던 "이탈리아"의 고위 "성직자들과 영주들"한테서 유래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포르투갈 주앙 4세"의 "왕비 루이자 데 구스만"의 조상으로서, 사실상 남서부 지역에 있는 유럽 왕실들의 선조에 해당한다. "부패하고 세속적이며 야심에 가득 찼던 교황"으로, 교회의 영적인 유산을 소홀히 함으로써,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발전하는 데 이바지했다(르네상스). 세간의 악평과는 반대로, "알렉산데르 6세"의 후임자들인 "교황 식스토 5세ㆍ교황 우르바노 8세"는 그를 "성 베드로" 이래 뛰어난 지력을 갖춘 교황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하였다. 그는 여타 다른 많은 "르네상스" 시대 교황들 못지않게, 영적 지도자보다는 "외교관ㆍ정치가ㆍ행정관"으로서 탁월한 능력을 갖춘 것으로 전해진다.

최근에 "알렉산데르 6세"의 사생활을 좋은 방향으로 포장하려는 시도들이 있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의 "종교 신념"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지만, 그가 전 생애에 걸쳐 벌인 활동에는 추문이 끊이지 않았다. "르네상스 시대"의 관점으로 보더라도, 그가 정치 목표들을 집요하게 추구하고, 끊임없이 가문의 세력을 확대하려고 한 것은 지나친 일이었다. "마키아벨리"와 여론이 평가한 것만큼, 부패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고, 변호자들이 평가한 것만큼 "교세 확장"에 이바지하지도 못했던 "알렉산데르 6세"는 이른바 "악한 교황"들의 목록에서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출 생 : 아라곤 연합왕국 발렌시아 하티바 (스페인)       ㆍ사 망 : 교황령 로마       본 명 : 로드리고 란조르 보르자 이 보르자       임 기 : 214대 교황1492.08~1503.08 (전임 : 인노첸시오 8후임 : 비오 3)

정부 (반노차 데이 카타네이 (카타네이 백작 부인) 줄리아 파르네세)

그는 4명의 자녀 외에도, 알려지지 않은 많은 자녀를 두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처럼 단정치 못한 품행 문제 때문에 그는 "교황 비오 2세"에게 크게 질책을 받기도 하였다. 1469년, 그는 "비토리아"라는 여인과의 사이에서 "베르나르도"라는 아들을 두었다. "베르나르도"는 그의 다른 자녀들과는 달리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당시 "추기경"이었던 "로드리고 보르자"는 "교황"이 되기를 열망했었기 때문에, 자신의 부정적인 면을 최대한 감추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베르나르도"는 다른 형제ㆍ자매보다 아버지의 관심을 가장 적게 받았다. 결국 나이를 먹으면서, 아버지에게 서운한 감정이 커져가던 그는 자신의 어머니와 함께, "로드리고 보르자"의 곁을 떠나버렸다.

"반노차 데이 카타네이(1442~ ?)"는 정부 가운데 가장 관계가 오래 지속된 여인으로, 그녀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를 만나기 전에, 이미 3번 혼인한 유부녀였다. 두 사람은 1470년에 처음으로 만나 애정 어린 관계가 되었으며, 슬하에 "후안 보르자 (1474)ㆍ체사레 보르자 (1476), 루크레치아 보르자 (1480), 호프레 보르자 (1481,1482)" 등 총 4명의 자녀를 두었다.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이들은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자녀로 공공연하게 인정받았다. "교황"에 선출되기 전에 "반노차"에 대한 그의 열정은 다소 식었으며, 그의 랑은 "줄리아 파르네세"가 대신 차지하게 되었다. 이후 "반노차"는 은퇴 생활을 하였다. 하지만 이후로도 그는 "반노차"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에 대한 사랑을 여전히 간직하였는데, 이는 향후 그의 인생 진로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교황"으로 선출된 후에 그는 자신의 자녀들에게 아낌없이 후원함으로써 온갖 특혜와 영예를 안겨주었으며, 그의 자녀들 모두 지상 최고의 권력을 가진 아버지의 후원 덕분에 높은 직책에 앉거나, 유력 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줄리아 파르네세"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정부가 된 후부터, "루크레치아 보르자"와 같이 생활하였으며, 1492년에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와의 사이에서 딸 "라우라"를 낳았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또 다른 자녀로 알려진 "지롤라마ㆍ이사벨라ㆍ페드로 루이스 데 보르자"의 경우에는 어머니가 누구인지 알려져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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