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는 1145년경에 "김부식" 등이 "고려 인종"의 명을 받아 편찬한 "기전체"의 삼국시대 역사서로서, 총 50권으로 "본기 28권, 연표 3권, 지 9권, 열전 10권"으로 되어 있다.
1. 개 요 (50권 9책)
현존하는 대부분의 "삼국사기 (三國史記)" 표지에는 약칭으로, "삼국사"라고 적혀 있다. "삼국사기"는 "고려 인종"의 명을 받아, "김부식"이 1145년(인종23)에 완성한 "삼국시대사"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로서, "삼국(신라ㆍ고구려ㆍ백제)"의 정치적 흥망 변천을 주로 기술한 "정사체(正史體)의 역사서"로서, 1174년에 "송나라"에 진상되기도 했다. 1970년, "옥산서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판본이 "보물 525호"로 지정되었다. 1981년, "조병순"이 소장한 "영본(零本ㆍ보물 722호)"과 "경주부간본(慶州府刊本ㆍ보물 723호)"이 지정되었으며, "옥산서원ㆍ경주부간본"이 유일한 완본으로 현전하며,"영본(零本)"은 1책 44~50권이 전해진다.
• 옥산서원 (보물 제525호) : 수량 : 50권 9책 (조선시대) • 소유 : 옥산서원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7)
• 영본(零本ㆍ권44∼50ㆍ보물 제722호) : 수량 : 7권 1책 (조선시대) • 소유 : 조동기ㆍ조성은ㆍ조영기ㆍ조왕기 (서울 중구)
• 경주부 간본(慶州府刊本ㆍ보물 제723호) : 수량 : 50권 9책 (조선시대) • 소유 : 조동기ㆍ조성은ㆍ조영기ㆍ조왕기 (서울 중구)
2. 편찬 과정ㆍ시기 (1142?~ 1145)
"삼국사기"를 편찬하기 시작한 정확한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완성은 1145년(인종23년)이다. "고려 왕조"가 "이자겸의 난ㆍ묘청의 난" 등 귀족 사회의 동요를 수습하고 난 뒤, 앞 시대의 역사를 공식으로 정리한 정사(正史)로서, "기전체"로 편찬했다. "고기(古記)ㆍ유적(遺蹟)ㆍ중국의 여러 사서"에서 뽑아서, 편찬ㆍ간행하였다.
"김부식"이 "묘청의 난"을 진압하고 난 후에 임명된 벼슬에 "감수국사(監脩國史)"가 있어, 이 무렵부터 편찬되기 시작했다고 보는 설도 있고, "김부식"이 정계에서 은퇴한 1142년에 시작했다고 보는 설도 있다.
• 김부식 (金富軾ㆍ1075~ 1151ㆍ76세ㆍ호- 뇌천 (雷川))
"삼국사기"를 쓴 고려 시대 학자ㆍ문신ㆍ역사가ㆍ"묘청의 난" 진압ㆍ"인종"의 명을 받들어, "정습명(鄭襲明)ㆍ김효충(金孝忠)" 등 10인과 함께 삼국사기를 편찬
3. 편찬에 참여한 편수관
"삼국사기" 편찬에 참여한 편수관(編修官)은 총 11명으로 "감수국사 김부식"을 필두로 참고(參考) 8명(최산보ㆍ이온문ㆍ허홍재ㆍ서안정ㆍ박동계ㆍ이황중ㆍ최우보ㆍ김영온)과 관구(管句) 2명(김충효ㆍ정습명)이다.
"김부식"이 "편찬의 주역"으로 "머리말ㆍ논찬ㆍ사료의 선택ㆍ인물의 평가" 등을 직접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 외의 실질적인 편찬 작업은 10명의 "편수관"이 수행했다. 10명의 "편수관"들 가운데, 상당수는 "대간(臺諫) 출신"들이 많고," 김부식"도 "대간 계통"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이는 "삼국사기"가 비판적 성격을 가질 수 있었던 토대로 여겨진다.
4. 구 성 : "기전체"로 작성되었으며, "본기(本紀ㆍ28권)ㆍ연표(年表ㆍ3권)ㆍ지(志ㆍ9권)ㆍ열전(列傳ㆍ1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① 본기 : 신라ㆍ고구려ㆍ백제, 세 나라의 역사를 각각의 본기로 나누어, "편년체"로 서술
신라본기 12권(1~12권)ㆍ고구려본기 10권(13~22권)ㆍ백제본기 6권(23~28권)으로 구성
② 연표 : 중국 역대 왕조의 연호를 기준으로, "삼국의 왕계"를 표로 작성ㆍ총 3권(29~31권)
③ 지(志): "잡지"로서 삼국의 제도ㆍ문화ㆍ지리 등을 분야별로 서술한 것ㆍ총 9권(32~40권)
대부분 "신라"를 중심으로, "통일기"의 상태에 관해서 서술, 1권은 제사(祭祀)ㆍ악(樂), 2권은 색복(色服)ㆍ거기(車騎)ㆍ기용(器用)ㆍ옥사(屋舍),3~6권은 지리(地理), 7~9권은 직관(職官)으로 구성
④ 열전 : 인물의 전기로, 총 69명이 수록
"김유신 열전(1~3권)" 분량이 가장 많으며, 나머지 7권에는 "삼국의 충효ㆍ화랑ㆍ문인(文人)ㆍ반역인(叛逆人)과 관련 인물" 등의 전기를 수록
5. 내 용
"삼국의 역사"를 모두 "본기"로 구성하였다. "기전체"에서 "본기"는 정통성을 가진 국가의 역사를 기록하는 부분이며, 이와 상반되는 부분으로 "세가(世家)ㆍ열전"이 있다.
"세가"는 "제후국의 역사"를 다루는 부분으로, 중국에 대해 "제후국"으로 자처했던 "조선" 때, 편찬된 "고려사"는 각 왕대의 역사를 "세가"로 구성하였던 것과 비교된다. 이는 "삼국사기"가 "사대주의적인 역사서"로 비판받는 것과 매우 다른 모습이다.
"삼국"은 모두 대등하게 다루어졌는데, "삼국" 모두 각각의 "본기"로 구성되어 있고, 각국의 "본기"에서는 해당 국가를 "我(우리)"라고 칭하며, 나머지 2개 나라와 기타 나라는 타국으로 다루었다. 삼국을 제외한 "부여ㆍ가야ㆍ발해"등의 역사는 직접 다루고 있지 않다. 이는 "삼국사기"가 "정사(正史)"를 표방하고 있으며, "단대사(單代史)" 임을 명백하게 밝힌 점으로 볼 때,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잡지"는 "삼국의 제도ㆍ문화" 등을 체계적으로 전하는 유일한 기록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내용이 "신라"의 기록이며, "고구려ㆍ백제"의 기록은 매우 소략하다.
"지리지ㆍ직관지"가 가장 분량이 많다. 특히 "지리지"는 총 4권으로, 앞의 3권은 "신라의 지리"로서, "통일신라"의 9주를 다루고 있다. 각권마다 3개 주씩, 총 9주의 연혁을 다루고 있는데, 1권은 신라, 2권은 고구려, 3권은 백제의 영역에 해당하는 주로 구성하였다. 4권은 "고구려ㆍ백제"의 지리를 기록하였는데, 앞의 3권의 연혁에 등장하지 않았거나 위치를 알지 못하는 지명도 다루고 있다.
"열전"에는 "김유신"을 비롯한 69명의 전기를 실었다. 특정한 편명으로 구분하지는 않았으나, 각 권별로 일정한 기준에 의해 구성된 것을 알 수 있다. 1~3권(김유신 열전)ㆍ4~5권(무장 및 명신들의 열전)ㆍ6권(학자 열전)ㆍ7권(순국열사 열전)ㆍ8권(효자 및 열녀 등 일반인 열전)ㆍ9권(반신(叛臣)열전)ㆍ10권(역신(逆臣)열전)으로 볼 수 있다. 단, 중국의 정사에서 흔히 보이는 왕실 종친이나 후비 등의 열전은 수록되지 않았다.
"삼국사기"에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기사들과 별도로, 총 31편의 사론(史論), 일부 항목의 서문(序文), 기타 주석이 실려 있다. 특히 "사론"은 "김부식"이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평가를 내린 것으로써, 이를 통해 "김부식의 역사인식"을 살펴볼 수 있다.
"본기"에 23편, "열전"에 8편의 사론이 실려 있으며, 이 사론은 성격에 따라 포폄적(褒貶的)사론과 역사학적 사론으로 나눌 수 있다. "포폄적 사론"은 역사적 사실의 잘잘못을 비판한 것으로, 전체 분량의 2/3 가량을 차지한다. "포폄적 사론"을 통해서 역사를 비판적 안목으로 바라보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역사학적 사론"은 사실의 규명이나 출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삼국사기"를 저술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원칙ㆍ서술한 이유ㆍ역사적 사건의 원인 및 결과ㆍ사료의 부족ㆍ역사의 해석 등에 대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6. 특징
"삼국사기"는 "고기ㆍ해동고기ㆍ삼한고기ㆍ본국고기ㆍ신라고기" 등의 이름으로 한국의 고유 기록을 제1차 사료로 삼았으며, "중국ㆍ한국"의 사료가 충돌하는 경우는 "한국 사료"를 우선적으로 사용했다.
"고조선ㆍ가야ㆍ동예ㆍ옥저ㆍ삼한ㆍ발해" 등의 역사는 빠져 있는데, 이것은 "삼국사기"가 먼저 출간된 "구 삼국사"를 보다 간결하게 다듬은 형태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구 삼국사ㆍ삼국사기"의 관계는 "구당서ㆍ신당서"와 유사한 것으로 보이나, "구 삼국사"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7. 보존 및 번역
"고려시대"의 "간행본"은 없어지고, "조선시대"에 와서, 1393~1394년(태조2~3) 사이에 "진의귀ㆍ김거두"가 고쳐 펴냈고, 1512년(중종7)에 "이계복"이 다시 고쳤다. 이후 목판 또는 활자로 수차례 간행되었다.
8. 평가ㆍ비판
"삼국사기"는 한국 고대사 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자료이며, 이후 "고려사ㆍ조선왕조실록 편찬" 등에 영향을 주었으나, "신라 위주로 서술되었다는 점ㆍ백제의 기록이 부족하다는 점ㆍ고조선을 비롯한 가야/동예/옥저/삼한/발해 등의 역사가 빠져 있다는 점ㆍ사대주의적이라는 점ㆍ농민 및 피지배층에 대한 서술이 없다는 점ㆍ불교 및 전통사상을 기술하지 않았다는 점" 등의 비판이 있다.
① 신라 위주의 서술
• "신라"에 편중된 내용, "고구려ㆍ백제"의 기록 부족 등을 근거로 비판한다.
"후삼국시대"를 삼국의 재건이 아닌 "신라에 대한 반란"으로 기록하였다. "김부식"이 "묘청의 난"을 진압한 사실과 관련지어, "삼국사기"가 신라 계 문벌귀족의 "신라계승의식 표출"이라고 보기도 한다.
• 반 론 : 당시 사료의 한계 상,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 본다.
"고구려ㆍ백제"는 멸망한 지, 수백 년이 흐르는 동안 사료가 망실되었으나, "신라"는 "고려"에 평화적으로 정권을 인계하였기 때문에, 사료가 풍부하게 남아 있었을 것이다. "통일신라"를 제외하면, 오히려 "고구려" 본기가 "신라" 본기보다 분량이 더 많고, "신라" 계승 의식보다는 삼국 모두를 계승했다는 "삼한일통 의식"이 더 잘 나타나 있다.
② 사대주의적 사서
• "신채호"의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 사건- 묘청의 난"에서 시작된 비판이다.
"신채호"는 "서경파(평양)ㆍ개경파(개성)"의 대립을 "자주ㆍ사대"의 대립으로 보아, "개경파(개성)의 김부식"이 승리함으로써 "사대주의"가 시작되었다고 보았고, 이에 따라 "삼국사기"에 대해서도 "사대주의적인 역사서"라고 혹평하였다.
• 반 론 : 내용적인 측면에서의 "사대"가 현실적인 수준이다.
③ 불교 및 전통사상의 삭제
• "삼국유사ㆍ동명왕 편"등과 비교를 통해 볼 때, 삭제되거나 고쳐진 부분이 많다.
• 반 론 : 김부식은 "술이부작(述而不作)ㆍ이실직서(以實直書)"의 원칙에 따라 삭제하지 않았을 것이다.
"삼국사기"는 초기 기록의 신뢰 여부 때문에, 학자 사이에서 논란이 많다.
초기 기록을 신뢰하는 학자는 "서강대"를 중심으로 "이종욱"이 대표적이며, "풍납토성"의 탄소동위원소 연대측정 결과가 "삼국사기"와 일치한다는 점과, 초기 기록을 거부하는 것은 "식민사학에서 유래되었다"는 점을 들어 비판한다.
반대로, 신뢰하지 않는 학자는 "서울대"를 중심으로 "삼국지의 위서 동이전"을 신뢰한다. 이는 "무덤의 형태가 일치한다는 점ㆍ삼국사기의 기록보다 훨씬 후에야 중앙집권화의 흔적이 보이는 유물이 보인다는 점ㆍ심지어 한반도 남부에 나타났던 편두 문화까지 상세히 기록된 점"을 들어,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신뢰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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