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건적 (紅巾賊)ㆍ홍두적 (紅豆賊)"의 난은, "원" 말기((1348~1368경)에, "한산동(韓山童)"을 수장으로 뭉친 "백련교도"가 중심이 되어 봉기한 "한족의 농민 반란군"으로 머리에 붉은 수건을 둘렀기 때문에 "홍건적"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1. 백련교 (白蓮敎)ㆍ의화단의 모태
① "도교ㆍ불교"에서 기원한 중국 민간종교이다.
특히 여성과 가난한 이들에게 크게 유행했는데, 교리는 한 여인이 있어 그녀의 자식을 "천년왕국"이 도래할 때, 하나의 가족으로 모은다는 것"으로 불교의 미륵사상과 민간신앙이 혼합된 사상이다. 보통 당국으로부터 탄압을 받아서 비밀결사 형태로 존재했다.
② 기 원
"남송" 때, "승려 모자원(茅子元)"이 창건한 "정토종"의 일종인 "백련종(白蓮宗)"에서 기원한다. 13C에 이르러, "몽골 정권"이 중국을 지배할 때, 이민족의 지배에 저항하는 사상과 "새로운 구세주가 나타날 것"이라는 "미륵신앙"이 합쳐져 그 세력을 키웠는데, "원나라" 조정은 이들을 탄압하기 시작했으므로, "비밀결사 형태"로 바뀌었다. 이후 "백련교"는 애국심과 종교가 합쳐진 형태의 "비밀결사 조직"으로 발전했다. 교도들은 "불교식"으로 향을 피우고 불공을 드리는 한편, 새로 올 왕국을 대비하며, 무술 수련도 하였다.
③ 교 리
현세의 고난으로부터 구원을 추구하는 일종의 "메시아 사상"으로 볼 수 있다. 창세주인 "무생노모(無生老母)가 미륵을 이 세상으로 보내, 자신의 흩어진 자녀들을 거두어들여 "진공가향(眞空家鄕)"이라는 일종의 천국에 귀의시키고, 평화로운 천년왕국이 인간세계에 실현될 것"이라고 선전했다.
④ 역 사
중국 역사에서 2번의 큰 역할을 하는데, • 14C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세워질 때, 이른바 "홍건적의 난"의 사상적 기원이 되었다. "명"의 태조 "주원장"도 백련교도로 출발하여, 중국을 통일하고 "명"을 세웠다.
• 18C 말, "청"나라에서 일어난 "무장반란"인데, 이때도 이민족인 "만주족"의 지배에 대항하여 "한족"을 중심으로 저항하는 세력으로, "청나라"의 쇠퇴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후에도 "백련교도"는 여러 차례 "청나라"에 반대하는 비밀결사로 조직되었고, 나중에 "의화단의 모태"가 되기도 하였다.
2. 홍건적의 난
1348년, "원나라"에서는 "절강의 방국진"이 해상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차례로 반란이 일어나, 1351년에는 "가노"에 의해, "황하의 개수공사"를 시키던 백련교도인 "홍건당"이 봉기했다. 그때 "한산동"은 "미륵불(彌勒佛)"이라 자칭하며, 민심을 선동하였다. 그 뒤 "한산동"은 관군에게 붙잡혔으나, 그의 부하 "유복통"은 각지를 노략질하였는데, 그 군대는 10만에 달하였다. 그리고 "한림아(한산동의 아들)"을 맞아들여 황제로 삼고, 국호를 "송(宋)"이라 하였다.
1354년, 대규모 토벌군을 이끈 "토구다"가 강대한 군사력을 가지는 것을 두려워한 "토곤 테무르"에게 경질되어 살해당하자, 이것을 "칸"의 권력 회복과 맞바꾸어 군벌에게 의지하던 "원나라"의 군사력을 크게 약화시키게 되었다.
1357년, 홍건적은 "유복통"의 인솔 아래, 3개 군으로 나뉘어, "대북벌"을 개시하여 초반에 큰 승리를 거두기도 했으나, "원나라" 군의 반격과 내부 갈등으로 북벌이 좌절되면서, 홍건적 일부 세력들은 중앙의 통제를 벗어나 독자 행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관선생ㆍ파두반"의 홍건적이 "상도(上都ㆍ원나라 여름 수도)"와 주변 지역을 함락시키기도 했으나, 1359년 주력 부대가 주둔하던 "변량(개봉)"을 다시 "원나라"에 뺐기면서, "요동"으로 이동하게 되고, 급기야 원군(元軍)에게 쫓겨, 고려 영토로 들어오게 되었다.
"주원장"이 "절강"의 "심만삼"의 재력에 도움을 받아, "서수휘ㆍ진우량ㆍ장사성" 등의 세력을 격파했다고 한다. "주원장"은 "남경"을 근거지로 하여, 기타 반란자들을 차례로 쓰러뜨리고 "장강" 유역의 "화남"을 통일하는 데 성공하여, 1368년 "난징"에서 황제로 즉위하여 "명나라"를 건국하고 연호를 "홍무"라 정하니, "홍무제"이다.
"홍무제"는 건국하자마자 북벌을 개시하여, "원 순제(토곤 티무르)"는 "대도(북경)"를 버리고 북쪽으로 도망쳐 "만리장성" 이남의 중국은 "명나라"로 통일되었다. 결국 중원을 점령하고 있던 "원"을 북쪽으로 몰아내고 "명(明)"을 건국하여, "한족(漢族)왕조"를 복원시켰다.
3. 홍건적의 고려 침공
홍건적들은 2차례에 걸쳐, "고려"까지 침범하였다. 1359년(공민왕8) 음력 12월, "모거경(毛居敬)"이 이끄는 4만여 명의 홍건적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의(義)ㆍ정(靜)ㆍ인(麟)ㆍ철(鐵)"의 4주(州)를 함락시키고, 이어 "서경"을 점령하였다.
1360년 음력 1월 하순, 고려군은 2만 명의 병력으로 "서경 탈환"을 시도했다. 비록 고려군 사상자가 1천여 명에 달했지만, 홍건적은 수천 명이 전사하면서 "서경"을 버리고, 북쪽의 "용강ㆍ함종" 방면으로 퇴각했다. 그 뒤 다시 추격을 당하여, "압록강"을 건너 도망한 적은 30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한다. 그 뒤에는 수군으로써, "황해ㆍ평안도"의 해안지대를 산발적으로 노략질하였다. 1361년(공민왕10) 음력 10월, "원나라"의 대대적인 공세에 밀린 홍건적은 "하북 지방"으로 퇴로가 차단되자 다시 "고려"를 침공했다.
2차 침공의 주역은 "반성(潘誠)ㆍ사류(沙劉)ㆍ관선생(關先生)ㆍ주원수(朱元帥) 파두반(破頭潘)" 등이며, 병력은 20만 명이었다. 이때 "홍건당"에서 "주원장"이 두각을 나타냈다. 음력 11.11일, 홍건적은 "절령(岊嶺 : 자비령)"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 성공하고, 수도 "개경(開京)"에 육박하여 왔다. 이에 "공민왕ㆍ왕실ㆍ정신(廷臣)"은 남쪽인 "복주(현, 경북 안동)"로 파천하게 된다. 왕가(王駕)가 "이천"에 도착하던 날, 홍건당은 "개경"을 함락하고 온갖 만행을 다하였다. 그러나 "홍건당"은 "개경" 입성 후 2달간 주둔하면서, 더 이상 남진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홍건적이 "개경"에서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중에 "고려"는 전국적으로 20여만의 병력을 모병했다.
그해 음력 12월경, "복주"에 있던 "공민왕"은 "정세운"을 "총병관(총사령관)"으로 삼았고, "정세운"은 1362년 음력 1월, "동교 천수사(경기 파주 장단면 소재)"에서 "안우ㆍ이방실ㆍ이여경ㆍ최영ㆍ이성계ㆍ김득배" 등에게 20만의 병력으로 "개경"을 포위하도록 했다. 전의가 꺾인 홍건적은 이 2갈래 길로 "개경"에서 도망쳐 그대로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후퇴했다.
"고려군"은 그들의 퇴로를 열어준 채, 계속 추격하여 "홍건적"을 끊임없이 괴롭혔으며, 여름에 수장인 "파두반"을 사로잡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공민왕"과 고려 조정이 "개경"을 떠난 이후, 음력 11.24일에 개경에 입성했다. "이성계"는 휘하의 "고려인ㆍ여진족"으로 구성된 친병 조직 2,000명을 거느리고 "수도 탈환 작전"에 참가하였다. 그는 선봉에서 적장들에게 직접 공격을 가하여, 마침내 홍건적의 괴수 "사유(沙劉)ㆍ관선생(關先生)"을 죽이고, "수도"에 제일 먼저 탈환해 입성하는 큰 전공을 세워, 두각을 나타냈다.
이로써 2차에 걸친 "홍건적의 난"은 끝나게 되었는데, 앞서 "중국의 북서"에서 "만주" 방면으로 진출한 홍건적의 무리들은 "고려"에서 전멸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난은 "고려"에도 막대한 타격을 주어, 국운을 쇠퇴케 하여, "고려 왕조의 멸망"을 재촉하는 원인의 하나가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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