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벽 (赤壁) 대전"은 "관도대전ㆍ이릉대전"과 더불어 "삼국지 3대 전투"로 꼽히며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전투이다. 208.11월, 중국의 삼국 시대, 통일을 목표로 세력을 계속 팽창하던 "조조"에, "손권ㆍ유비"가 연합해 대항하여 "양자강"에서 벌어진 큰 전투이다.
1. 적벽 (赤壁) 대전
• 일 시 : 208.11월 • 장 소 : 장강 적벽 • 결 과 : "손권(주유)ㆍ유비(제갈량)" 연합군의 승리→ "조조"의 남정 저지 • 지 휘 : (조조군) 조조ㆍ서황ㆍ장료ㆍ문빙ㆍ악진ㆍ조인 (손권ㆍ유비 동맹군) 손권ㆍ주유ㆍ정보ㆍ노숙 / 유비ㆍ제갈량ㆍ조운
• 병 력 : (조조군) 약 24~ 25만 (손권ㆍ유비 동맹군) 약 5만 (손권군(3만)ㆍ유비군(2만)) • 병 력 : 기록 없음, 수군은 괴멸적인 타격을 입음
① 주유 (周瑜) : 175~210ㆍ35세ㆍ처 : 소교 (小喬)
동오의 명장. "손책"과는 어릴 때부터 친구였다. "손책"이 "강동"을 통치하게 됐을 때, 군사를 이끌고 귀순했다. "손책"이 "손씨 정권"을 창업하는 것을 도왔고, 깊은 신임을 받았다. "손책"이 죽자, "장소(張昭)"와 함께 "손권"을 보필하였으며, "손권"은 그를 형처럼 대했다. 208년 "조조"가 군사를 거느리고 남하하여 "강동"을 위협하자, 그와 "노숙"은 맞서 싸울 것을 강력히 주장한다. "손권"은 그를 "대도독"으로 삼아 "적벽"에서 "조조군"을 크게 무찌르고 "손씨 정권"을 공고히 한다. 다음 해에는 "조인"을 격파하여 "편장군(偏將軍)"에 임명되고, "남군태수(南郡太守)"를 겸한다. 후에 "촉"을 치려했으나, "파구(巴丘)"에서 병들어 죽는다.
"손권"은 "주유"를 그리워하여, "황제"가 된 뒤에도 "나는 주공근이 아니었으면 황제가 될 수 없었다."고 할 정도였으며, "도량이 넓고, 사람됨이 겸손하다."고 기록했다. 반면 "삼국지연의"에서는 그를 성정이 편협한 사람의 전형(典型)으로 묘사하였는데, 이는 "제갈량"을 돋보이게 하려는 장치였다.
② 소교 (小喬) : "주유"의 처ㆍ"교국로 (喬國老)"의 딸
언니 "대교 (大喬)"와 더불어 천하의 유명한 미인이었으며, 둘을 합하여 "이교(二喬)"라 불렀다.
2. 정사 "삼국지"에서의 "적벽대전" : "정사"에서는 매우 간략하게 적혀있다.
① <삼국지>의 <위서 : 무제기>에서는
"조조"는 "적벽"에 도착해 "유비"와 싸웠지만 형세가 불리했다. 이때 역병이 유행해 관리와 병사가 많이 죽었다. 그래서 "조조"는 군대를 되돌리고, 유비는 형주와 강남의 여러 군을 차지하게 되었다.
② 같은 책의 <선주 (유비)전>에서는
"손권"은 "주유ㆍ정보" 등, 수군 수만을 보내 "선주(유비)"와 힘을 합쳐 "조공"과 적벽에서 싸워 크게 이겨, 그 배를 불태웠다.
③ 같은 책 <제갈량 전>에서는
"손권"은 크게 기뻐하며, 즉시 "주유ㆍ정보ㆍ노숙" 등, 수군 삼만을 보내, "제갈량"을 따라 선주를 뵙고 힘을 합해 "조공(조조)"에 대항하였다. "조공"은 "적벽"에서 패해 군대를 이끌고 업으로 돌아갔다.
④ <주유전>에서는
"주유ㆍ정보"를 보내 "선주"와 힘을 합쳐, "조공"과 맞서 적벽에서 조우하였다. 그때 "조공"의 군대에는 이미 질병이 퍼져 있어 처음 교전하자, "조공"의 군대가 패퇴하여 강북으로 후퇴하였다.
⑤ <오주전>에서는
"주유ㆍ정보"가 좌ㆍ우독이 되어 각각 1만 명을 거느리고, "유비"와 함께 진격하였는데 "적벽"에서 "조조군"을 만나 그들을 크게 격파했다. 조공이 남은 함선을 불태우고 병사를 이끌고 퇴각했다.
3. 배 경
205년, "조조"는 "원담"을 멸망시키고, 206년 "고간"을 멸망시키고, 207년 "오환ㆍ원상 연합군"을 무찌르고 "원상"을 멸망시킴으로써, "원씨" 일가의 세력권이던 "기주ㆍ청주ㆍ병주ㆍ유주"를 손에 넣고 "오환"의 세력을 크게 약화시켜, "하남ㆍ하북"의 패권을 확립했다.
"승상"에 오른 그는 통일의 의지를 표명했으며, 다음 해 여름 본격적으로 남진을 개시했다. 갓 병사한 "유표"의 뒤를 이어, "형주목"으로 옹립된 "유종"은 "조조"에게 그대로 항복하고, "한수 북부"를 포기한 "유비"는 "강릉"으로 향했으나, 같이 따르던 피난민들의 속도가 느려, "조조군"의 기병에게 "당양"에서 따라잡혀 위기에 빠진 후, 결국 "한진"에서 수로를 따라 하구에 주둔하는 "유기"에게로 피신했다.
여기에 "유기ㆍ손권"은 적대 행위를 중지하고, "손권"은 "주유ㆍ노숙ㆍ정보" 등의 의견을 받아들여 "유비ㆍ유기" 등과 연합해, "조조"에게 맞서기로 결정 내렸다. "손권"의 선친인 "손견"을 죽음으로 몰아간 전력이 있는 "유표"의 가문에 대해, "손권"의 이러한 조치는 엄청나게 파격적이었다.
4. 준 비
"유종"의 항복과 "유비"의 피신 이후, 거의 "형주" 전역을 장악한 "조조"는 "강릉"에 주둔하며, 수군이 채비를 갖추길 기다렸다. "조조"는 이끌고 온 보병을 나누어, 수병으로 재편성하였다. "조조 원정군"의 대다수가 물에서의 싸움에 익숙하지 않았으므로, 항복받은 후 새로 편입한 "형주" 수군과 함께 수전 훈련을 시키는 한편, 적선보다 중량이 큰 함선을 대량으로 건조하도록 하였으며, 배 멀미를 막기 위해 배들을 튼튼한 쇠고리로 종횡으로 연결해 흔들림을 낮추고,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 배에서 배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해서 해결했다. 다만 이 점은 나중에 "화공"을 받았을 때, 선단 전체가 불타버리는 부작용을 낳게 된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더욱이 "조조군"은 익숙하지 못한 여름기후, "강릉"에서 주둔지로 여겨지는 "오림"까지의 늪지대 등으로 인해 "역병"이 도는 등 건강상의 문제가 있었고, 접전한 결과, "손권"의 수군이 강 위에서는 우세하다는 것이 판명되었으므로, 우위를 확보할 때까지는 "장강 북안"에 포진한 채 적극적인 행동으로 나서지 않기로 했다.
"유비"는 "유기"에게 몸을 의탁한 이후, 하구에서 좀 더 하류에 위치한 "번구"에 자리 잡았는데, 전부터 "유기"가 매우 신뢰했으므로 매우 병약한 그에게서 "군무"를 사실상 위임받았다. 이후 "유비군"은 "제갈량"을 "손권"에게 보내 동맹하고, "주유"와 같이 "적벽 대전"에 참가하게 된다.
"손권"은 "주유"를 도독, "정보"를 부도독으로 임명해 군의 지휘를 일임하고, 자신은 "시상"에 주둔했다. "주유"는 함대를 이끌고 하구를 지나, "조조"의 수군을 마주보는 형태로 "장강 남안"에 포진했다. "조조"의 수군은 소극적으로 일관했고, "주유"도 "조조"의 대 함대를 단번에 격파할 만한 기회를 노리고 있어서 당분간 대규모 충돌은 일어나지 않고, 208년은 말에 접어들었다.
5. 전 투
"유비ㆍ손권"은 손을 잡아 전선을 불태웠지만, "조조"는 병 등 여러 까닭 때문에 물러났다. 즉, "조조"는 큰 피해 없이 물러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조조"는 이미 물러날 수 있는 길을 만들고, 이에 "조조"가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었다. "적벽대전"은 "삼국지연의"와 다르게, 스케일이 큰 싸움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황개전>을 보면, "주유를 따라 적벽에서 조공을 막을 때, 화공을 할 꾀를 짰다" 라고만 나온다. 첫 싸움에서 "조조"의 군대는 패하여 "장강 북쪽"에 머물렀다. "주유" 등은 남쪽 강가에 있었다. "주유"의 부장 "황개"가 말했다. "지금 적군은 많고 우리는 적기 때문에 오랜 시간 싸우는 것은 불리합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조조군의 배는 앞뒤가 서로 이어져 있으므로 불을 질러 달아나게 할 수 있습니다."
<주유전>에 나오는 "적벽대전"은, 그래서 "주유"는 배 수십 척을 취해, 풀을 가득 싣고, 그 가운데에 기름을 붓고, 위에 아기를 세웠다. 그리고 먼저 편지를 써서, "조조"에게 항복한다고 알렸다. 날랜 배를 미리 준비하여, 각각 큰 배의 뒤에 매고 순서대로 함께 나아갔다. "황개"는 여러 배를 풀어 동시에 불을 질렀다. 당시 바람이 매우 사나웠으므로, 강가의 진에까지 불길이 번졌다. 조조는 조인 등을 남겨 강릉을 지키도록 하고 자신은 곧장 북쪽으로 달아났다. 자세한 것은 "무제기(조조)전"에서 "조조"의 정예병은 피해를 받지 않고, 피해를 받은 병사들은 "형주(유표)"의 병사들이였다. "조조"는 스스로 자신의 진영에 불을 지르고 물러났다고 나와 있다.
6. 전쟁 이후
"적벽"의 대패로 원정을 계속하는 것이 곤란하게 된 "조조"는 "형주"를 떠나, "조인ㆍ서황"에게 남군을 맡기고 자신은 "허창"으로 귀환하였다. "유비ㆍ주유ㆍ정보 연합군"은 "남군"까지 진격해, "조조군"과 싸웠다. 209년, "조인"이 성을 버리고 달아났으므로, 마침내 "주유"는 "남군"을 손에 넣었으며, "손권"은 "주유"를 "남군태수"로 임명했다. 한편, "유비"는 남쪽으로 진격하여, "4군(무릉ㆍ장사ㆍ계양ㆍ영릉) 태수"의 항복을 받았다. "조조"는 쉽게 항복받은 옛 "유표령 형주"의 남반부를 잃고, "강하군 북부ㆍ양양 이북"만을 유지했다. 나머지 땅은 "손권ㆍ유비"의 손에 넘어갔다.
"손권"은 "주유"에게 "형주" 공격을 맡기고, 자신은 대군으로 "합비"를 공격했다. "조조"는 "장희"에게 기병 1천을 딸려서, "합비"로 보냈는데, "장제"가 4만 대군을 파견했다는 거짓 문서를 만들어서 "합비성"으로 보냈다. 이 소식이 "합비성"과 "손권군" 양측에 모두 전해지자, "손권"은 이를 믿고 진영을 불태우고 달아났으므로, "합비성"은 무사했다.
7. 소설 "삼국지연의"에서의 "적벽대전"
"삼국지연의"에서 보면, "형주 자사 유표"의 사후 그의 부하 "채모"가 "유종"을 "유표"의 후계자로 앉힌 후에 "형주" 전 지역을 "조조"에게 주고 항복한다. 그러나 그때쯤 "조조"는 "신야"에 머물고 있는 "유비"를 공격하여, "신야성ㆍ번성ㆍ양양성"을 되찾고 "유비"를 저 멀리 "장판"까지 쫓아낸다. 하지만 "장판 전투"에서 "장비"가 "조조군"을 막고 있을 무렵, "유비"는 백성을 데리고 도망가고 있었는데, "조조"가 물러가자 "제갈량"은 "동오"로 가서 "손권"을 설득시킨다. "손권"이 결심하고, "주유"를 대도독으로 삼고, "정보"를 부도독에 삼고, "노숙"을 군사에 삼고, "조조"와 전쟁을 일으킬 것을 결심한다.
"적벽대전"의 서전에서는 "유비ㆍ손권"의 동맹군의 약 10만 군사와 "조조군"의 100만 대군이 맞붙었는데 물량적으로는 훨씬 "조조군"이 유리했으나, "유비ㆍ손권" 동맹군의 지략으로 "조조군"을 물리쳤다. "조조군"이 군사를 이끌고, "적벽" 반대편에 "대수채"를 세우고 대치한 후, "조조"는 "주유"와 친했던 "장간"을 "오"에 보내서 "주유"를 설득시키려고 하나, "주유"는 그것을 간파하고 일부러 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고, "태사자"에게 전쟁이야기를 꺼내는 자를 죽이라고 명령하자, "장간"은 "항복"이란 말도 못 꺼낸다.
그러나 "장간"은 "주유"가 자고 있을 때, "채모ㆍ장윤"이 "주유"와 내통하고 있는 가짜 편지를 발견 하고 그 편지를 가지고 도망간다. 그걸 본 "조조"가 노하자, "채모ㆍ장윤"을 베고, "우금ㆍ모개"를 새 수군 도독으로 임명한 뒤 "장간"을 다시 보내지만, "주유"는 편지를 가져갔다는 명목으로 산속 처가에 가둔다.
하지만 "장간"은 그곳에서 탈출해 "방통"을 만나는데, 이를 본 "장간"은 "방통"을 데리고 "조조"를 찾아간다. "방통"은 "조조군"들이 배 멀미를 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조조군"의 배를 서로 연결하도록 하고 이에 "서서"가 이를 간파하고, "방통"에게 자신이 살 길을 묻자, "서서"에게 "마초"가 반란을 일으킬 거라는 거짓 명목으로 "허창"으로 돌아가라고 하여, "서서"는 "조조"에게 "장패"와 3000명의 군사를 얻고 목숨을 건졌다.
"조조"는 선상 위에서 문무백관들을 모아 잔치를 벌였으나, 도중 "양주 자사 유복"을 죽여 버리는 실수를 범해, 아들 "유희"를 시켜, 시체를 가져가라고 한 뒤, 장사지내게 한다. 이에 "조조"의 부하 "초촉ㆍ장남ㆍ문빙"이 순시선 50척과 정예군 1250명을 이끌고 "오군"을 습격하지만 "초촉"은 "한당"에게, "장남"은 "주태"에게 죽고 대패한다.
한편 "조조"는 "장간"의 내통 편지가 "주유"의 계략인 걸 알아차리고, "채모"의 동생인 "채중ㆍ채화"를 "주유"에게 잠입시킨다. 하지만 "주유"는 그것을 알아차리고, "황개의 고육계"를 활용해 "황개"를 처벌하였다. 이때 "감녕"도 "황개"가 맞으려고 할 때, 너무 늙었다고 항의하자, "감녕"도 처벌된다. 물론 이런 소동은 "조조"를 속이고자 "황개"와 "주유"가 짜고 벌인 연극이었다.
"채중ㆍ채화"는 이것들을 낱낱이 "조조"에게 보고하고, "황개ㆍ감택ㆍ감녕"이 청룡기를 달고 군량을 실은 배를 타고 항복한다고 하였다. "채중ㆍ채화"로부터 "황개ㆍ감녕"의 처벌 소식을 들은 "조조"는 둘의 투항을 기정사실화하지만, "제갈량"이 동남풍을 불게 한다. 그리고 "주유"는 "감녕"을 제1대로 임명해, "채중"과 함께 항복한 군사들을 데리고 "오림"을 탈취하라고 했다.
"태사자"는 제2대로 임명해 군사 3000명을 주어, "황주" 경계에 가, "합비"에서 오는 "조조"의 지원군을 막게 했으며, "여몽"은 제3대로 봉해 군사 3000명을 주어 "오림"에서 "감녕"을 돕고, "능통"은 제4대로 임명해, 역시 3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이릉" 경계로 가, "감녕ㆍ여몽"을 지원하게 했다. 그리고 "동습"을 제5대로 임명해, 군사 3000명을 주어, "한양"을 취하고, "한천"을 따라 "조조군"의 "영채"를 치도록 했다. 또한 각 부대를 지휘하는 장수도 임명해, 제1대는 "한당", 제2대는 "주태", 제3대는 "장흠", 제4대는 "진무"였고, 모든 부대에 각각 전선 300척을 주어 모두 1200척의 전선이 있었고, 대 앞에 20척의 화선이 앞장섰다.
"제갈량" 역시 "조운"에게 군마 3000명을 주어, "오림"에 매복하게 하고, "장비"에게도 3000명을 주어 "이릉"으로 가는 길을 끊고, "호로곡" 어귀에 매복하게 했으며, "유기"에게는 "무창"에 매복하게 했으며, 마지막으로 "관우"는 "화용도"에 매복하게 했다. 먼저 "주유"는 항복하는 척, "오"에 잠복한 "채화"를 처형하고, "황개"가 항복하는 척 접근해서 군량을 실은 배에 불을 붙이고 진군한다. 이를 본 "조조"의 부하 "문빙"이 막으려 하지만, 활을 맞고 물에 빠지고, "황개"의 전선들은 "조조군" 수채에 불이 붙자, "연환계"에 의해 배가 다 타 버리고, "조조군"은 몰살당하고 만다. 이에 "장료"가 군사 10명을 이끌고, "조조"를 구출하고 도중에 "황개"를 활로 쏘아 맞힌다.
그러나 "황개"는 원래 수전에 적합한 만큼, 엄동설한에도 목숨을 부지했으며, 조금 뒤 "한당"에게 구출되고, 왼쪽에서는 "한당ㆍ장흠"이 오른쪽에서는 "주태ㆍ진무"가 "조조"를 공격했고, 한복판에서는 "주유ㆍ정보ㆍ서성ㆍ정봉"이 대선단을 이끌고, 군사들을 도왔다.
"감녕"은 "채중"을 앞세워, "오림"으로 쳐들어간 다음, "채중"을 죽이고 군량에 불을 붙였으며, 곧바로 "여몽"이 달려와 "감녕"을 도왔다. "조조"는 "장료"와 함께 군사 100기만 거느리고, 탈출해 "문빙"을 구출한 "모개"와 10기의 군사와도 합류해 "오림"으로 후퇴한다. 그러나 "오림"에서는 "여몽"이 기습해오고, 이에 "장료"가 맞서지만, 산골짜기에서 "능통"이 기습해온다. 그러자 "서황ㆍ마연ㆍ장의"가 군사 3000명을 거느리고 달려와 막긴 하지만, 10리(4km)도 못 가서 "감녕"이 달려와, "마연ㆍ장의"를 죽여 버린다.
그리고 "육손ㆍ태사자"가 합세해, "조조"를 공격하자, "조조"는 "이릉"으로 후퇴해 "장합"과 합류하지만, "조운"이 기습해오자 "서황ㆍ장합"을 보내 맞서 겨우 탈출해, "이전ㆍ허저ㆍ모사"들과도 합류한다. "조조"는 "이릉"으로 가던 중, "호로곡"에서 잠시 머무르지만, 그곳에 매복하던 "장비"가 기습하고 이에 "허저"가 맞섰으나, "조조군"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있었고, 100만에 달하던 대군도 "화용도"인근에서는 단지 100명만 남아 "조조"를 따르고 있었다.
하지만 "화용도"에서는 그곳에 매복해 있던 "관우"가 나타나고, 이에 "조조"는 "관우"에게 목숨을 구걸하고 겨우 남은 군사 27명을 이끌고, "남군" 근처에서 "조인"과 합류해, "남군성"으로 간 뒤, "번성"으로 도망간다. 이튿날 "조조"는 남은 군사들을 수습해, 근거지 "허창"으로 돌아가고, "조인"에게 "남군성"을, "하후돈"에게 "양양"을, "장료ㆍ악진ㆍ이전"에게 "합비"를 맡긴다. "오"에서는 여세를 몰아 "형주"를 탈환하기로 결정하고, "주유"는 모두 군대를 동원해 "형주"의 "조조군"을 공격하고, 1년 간의 "조조 - 손권"과의 "남군 전투ㆍ합비 전투"가 벌어진다.
8. 실제와 허구 논란
"김운회 교수"가 저서 "삼국지 바로 읽기"에서, "적벽대전의 허구설"을 주장한 바가 있다. 그는 책에서 "적벽대전ㆍ관도전투"를 비교하면서, "위서"엔 기록이 3줄에 불과하고, "촉서ㆍ오서"를 합해도 70자에 불과하기 때문에, "정사에 남겨진 양이 매우 짧다는 것"을 근거로 "적벽대전"의 허구성을 주장했다. 하지만 "오나라쪽 정사"를 보면, 전쟁에 대한 기록이 풍부하게 남아 있으므로, 허구 논란은 근거가 빈약하다.
다만 일부 장수의 경우는 "적벽대전"에서 사망하거나 참전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연의"의 영향으로 참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경우가 있다. "태사자"가 그 대표적인 예로, "태사자가 적벽대전에 참전했다"는 것은 완전히 허구이며, "태사자"는 206년 "풍토병"으로 병사했다. 그러나 "삼국지연의"에서는 이미 사망한 "태사자"를 "적벽대전"에 참가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정사 "오서 태사자전"을 보면, "태사자"의 최후를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 있으므로, "태사자"의 "적벽대전 참전"은 완전한 허구이다. : "태사자"는 신장이 7척 7촌(177.1cm)이며, 수염이 아름다웠고, 팔은 원숭이처럼 길며, 활을 잘 쏘아 백발백중이었다. 일찍이 "손책"을 따라, "마보(麻保)의 적"을 토벌하러 갔었는데, 그 중 어떤 적이 군영 안의 망루 위에서 욕을 했다. 그 도적은 손으로 누각의 기둥을 잡고 있었는데, "태사자가" 활을 끌고 그를 향해 활을 쏘았다.
화살은 손을 관통하여 기둥에 박히자, 밖에서 포위하고 있던 모든 사람들은 그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묘기(훌륭한 활솜씨)는 이와 같았다. "조공(조조)"은 "태사자"의 명성을 듣고 편지를 써서, 상자 속에 편지를 봉했는데, "태사자"가 열어보니 말하는 바가 없고, 단지 "당귀(當歸)"가 쌓여있을 뿐이었다. "손권"이 정사를 통솔한 후, "태사자"에게 "유반"을 제압할 힘이 있었으므로, 남방의 일을 맡겼다. "태사자"는 41세, 206년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태사향"은 관직이 "월기교위"까지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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