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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 역사 • 사건 • 인물

삼국지 (三國志) ⑨ 184년, 황건적 (黃巾賊)→ 한나라의 몰락 (220)

by 당대 제일 2022.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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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건적 (黃巾賊ㆍYellow Turbans)"이란,  후한 말기, 호족 지주에 의한 토지겸병의 위기에 끊임없이 직면해 있던 농민이 "황건적 (黃巾賊)"이 되어 일으킨 반란이다.

 

1. 황건적 (黃巾賊ㆍYellow Turbans): 중국의 비밀결사ㆍ태평도(太平道)

 황건의 난 (184~204): "한나라"의 몰락(220)을 재촉했다. 삼국시대() 도화선

 머리에 누런 수건을 쓴 것이 특징이며, "태평도(太平道)"라는 종교를 세워, "후한"을 타도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들의 등장으로 "중국 삼국시대"가 개막되는 도화선이 마련되었다.

 장각 (張角, 천공장군)장보 (張寶, 지공장군)장량 (张梁, 인공장군)ㆍ공도관해당주마원의손중유벽장만성조홍파재하만하의한충황소 :"장각" 184년 병으로 죽었으나, 반란은 그 후 약 20년간 계속해서 각지를 어지럽혔다.

반란 지도자인 "장각(張角)"은 전염병이 번질 때, "도가"의 치료술로 많은 추종자들을 모았다반란자들은 황제를 조종하고 있던 "환관들의 처단"을 요구했다이들은 "5행의 토"를 의미하는 "노란 머릿수건"을 두르고, 자신들이 화에 해당하던 "한조"를 계승하리라고 믿었다. 반란은 동쪽의 성들에서 일어났고,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은 막대한 비용을 들여 대군을 모집했지만, 조정이 부패하여 크게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후한(後漢)" 말기, 외척환관의 전횡으로 인하여 병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늘어가자, "후한 영제" 때에 "장각(張角)"은 동생인 "장보(張寶)장량(張梁)"과 함께, 하북(河北)지역의 "거록(鋸鹿)" 중심으로 사람들을 치료하기 시작했다이후 10여 년 사이에 수십만 명의 신도를 얻어, 일대 교단(敎團)으로 성장했으며, 184"장각"을 필두로 "황건의 난"을 일으켰으나, "장각과 장보, 장량"이 모두 사망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192년 다시 봉기를 일으켰으나, "조조(曹操)"에 의해 진압 당했다비록 "후한(後漢) 타도"에는 실패했지만, "황건적의 등장"으로 인해, "후한" 말기 정부의 실정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었으며, 지방 장관의 권한이 점차 증대되는 계기를 제공해, 결과적으로 "후한"이 멸망하게 된 도화선을 제공하였다.

2. 황건적의 난

후한 말기, 호족 지주에 의한 토지겸병의 위기에 끊임없이 직면해 있던 농민이 황건적(黃巾賊)이 되어 일으킨 반란ㆍ외척이나 환관의 전횡으로 인하여 부패한 정치 밑에서 한층 더 곤궁을 당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는 미신적인 민간신앙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현세구제(現世救濟)의 종교가 유행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추세였다.

• 일 시 : 184년 (194년 재봉기)           • 장 소 : 유주ㆍ청주ㆍ영천ㆍ곡양ㆍ완성           • 결 과 : 황건의 난 진압 그러나 후한의 쇠퇴           • 지 휘 : 하진노식황보숭주준동탁원소조조손견유비 (병력 - 7/ 황건적 36)

황건적

① 장각 (張角, ? ~ 184): 중국 후한 말기의 종교 지도자ㆍ기주 거록군 출신ㆍ"황건의 난"을 일으켰다.

"황제(黃帝)ㆍ노자(老子)"의 사상에 심취하여, "도교"의 경전인 "태평청령서(太平淸領書)"등을 공부하고,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스스로 "대현량사(大賢良師)"라 칭하고, 자신의 가르침을" 태평도(太平道)"라 이름 붙였다. 병든 이가 찾아오면, 부적을 태운 물로 치료하고, 잘못을 뉘우치면서 절하도록 했다. 병이 낫는 경우가 생기자, "장각"의 명성이 점점 높아져 장각을 신처럼 여기며 따르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윽고 "장각"의 명성이 중국 북부지역에 널리 퍼지자, 당시의 정치에 실망해 있던 백성들 중에서 태평도에 귀의하는 사람이 많아져 신도 수가 수십만에 달했다. 어떤 이는 가산을 처분하고 "장각"에게 오기도 했으며, 장각에게 병을 치료받으러 오다가 죽는 경우도 있었다. 사태를 심각하게 본 일부 신하들은 "영제(靈帝)"에게 상소를 올렸으나, 이를 대수롭지 않게 본 "영제"는 별다른 손을 쓰지 않았다.

② 황제 헌원씨 (黃帝軒轅氏): "황제"는 중국 문명의 시조ㆍ도교의 시조

중국의 신화에 등장하는 제왕(帝王)으로, "삼황(三皇)"에 이어 중국을 다스린 "오제(五帝)"의 1번째 왕이다. "황제(黃帝)"라는 명칭은 재위 기간 중 "황룡"이 나타나, 토덕(土德)의 상서로운 징조가 있다고 하여 붙여졌다.  사실상 신화로 여겨졌던 "삼황"과 달리 "황제"를 필두로 한 "오제"는 실존한 제왕들로서 추앙되었다.

③ 노자 (춘추시대 초나라의 철학자,  BC 604년(추정)): 도교의 시조ㆍ도가 사상ㆍ노장 사상

사상은 저서 "노자 도덕경" 속에 있는 "무위 자연"이라는 말로 나타낼 수 있다. 사람이 우주의 근본이며, 진리인 도의 길에 도달하려면 자연의 법칙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무위 자연" 사상이다.  즉, 법률ㆍ도덕ㆍ풍속ㆍ문화 등 인위적인 것에 얽매이지 말고 사람의 가장 순수한 양심에 따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지키며 살아갈 때, 비로소 "도"에 이를 수 있다고 하였다.

"도"는 성질이나 모양을 가지지 않으며, 변하거나 없어지지 않으며, 항상 어디에나 있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형태의 우주 만물은 다만 "도"가 밖으로 나타나는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우주 만물의 형태는 그 근본을 따지면, 결국은 "17가지 진리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사상이다.

3. 태평도 (太平道) 창시ㆍ봉기

① 장각의 태평도 (太平道) 창시

"후한 영제" 때, 거록(鋸鹿)의 "장각(張角)"은 스스로 "대현량사(大賢良師)"라 호를 짓고 "황천(黃天)의 신(神)의 사자(使者)"라고 일컬으면서, 병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의 치료하기 시작했다. "장각"은 스스로 "9마디(九節)가 나 있는 지팡이"를 짚고 설교하고 다녔는데, 170년대 초 무렵부터는 제자를 사방에 파견하여 포교(布敎)에 힘썼다. 이 같은 교리는 빈곤 속에서 질병에의 공포와 불안을 품고 있던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아, 10여 년 사이에 화북(華北)의 동반부로부터 "양쯔강(揚子江) 유역"에 걸쳐 수십만 명의 신도를 얻어, 일대 교단(敎團)으로 성장했는데, 이 교단의 이름이 "태평도(太平道)"이다.

"태평도"는 주술(呪術)에 의한 "요병(療病)"을 중심으로 하고, 한대(漢代)에 유행한 "참위설(讖緯說)ㆍ음양오행설" 등과 잡다한 민간 신앙을 가미하고, 다시 "도가(道家)의 설"로 윤색한 것이다. "장각"은 이 신도들을 "36개의 방(方)"으로 조직했는데, 이 조직은 빈민의 반(反)권력적인 성격과 결합하여, 군사적인 조직이 되기도 했다.

즉, "장각"은 "천공장군(天公將軍)"이라 호를 지어 최고위에 앉고, 2명의 동생 중에서 "장보(張寶)는 지공장군(地公將軍)ㆍ장량(張梁)은 인공장군(人公將軍)"이라 일컬었으며, 1만 명 전후의 신도로 이루어지는 방(方)의 책임자로는 "장각의 제자"가 선출되었는데, 그들은 신도로부터는 "사(師:스승)"라 불림과 동시에 "방"은 그대로 장군이름으로 불렸다.

이러한 "태평도"는 "후한 정부"로서는 커다란 위협이었다. 정부는 탄압책을 강구하여 해산명령을 내렸으나, 이것은 도리어 신도의 단결과 교단의 조직을 강화시키고, 반(反)권력적인 성격을 강화시켜 주는 결과가 되었다.

② 봉기

"장각"은 "한 제국(漢 帝國)의 창천(蒼天) 대신, 황천(黃天)의 세상을 실현해야 한다."고 하면서 민중을 선동하여 봉기를 일으켰다. 당초 반란이 일어난 이유는 고위층의 부패와 민생의 어려움 때문이었으나, "장각"은 얼마 후 스스로 "천공장군"을 자칭하며, "천자"가 될 야심을 품었다. 그리고 백성들을 약탈한 것도 사실이다.

"황건적의 난"은 "후한" 전국 13곳에서 일어나고, 이에 "후한 황제 영제"는 외척이자 대장군 "하진"과 대책을 의논한다. 이리하여 "유비"의 옛 스승이었던 "노식"과 "황보숭ㆍ주준" 등 3명의 장수가 황건적과의 전투 부대로 편성되고, "조조"도 "기도위"에 임명되어, 황건적 토벌에 나선다. 한편 "강동의 손견"도 "하비"에서 부하 "황개ㆍ한당ㆍ정보ㆍ조무"와 함께 1,500명의 군대를 이끌고 토벌에 참여한다. 그리고 "유주의 탁현"에서는 "유비"가 "장비ㆍ관우와" 함께 의형제를 맺고, 수백 명의 장정들을 모집해 모집한 용사 500명을 이끌고 황건적 토벌에 나선다.

 황건적의 재봉기

그러나 황건적이 완전히 소탕되지는 않았고 188년이 되자 황건적과도 관계있는 "백파(白波)의 적(賊)"이 "산시성(山西)"에서 일어나고, "산둥성(山東)" 방면에서는 "칭조우(淸州)ㆍ쉬조우(徐州)"의 황건적이 연달아 맹위를 떨쳐, 전국을 전란과 무질서 상태에 빠뜨렸다. 그 후, 192년 "동탁"이 죽고, "이각ㆍ곽사"가 "서량군"을 무찌른 틈을 타서 "청주"에서 다시 수십만 명에 이르는 황건적이 들고 일어나, "제북상 포신ㆍ연주 자사 유대"까지 전사시키는 등의 위세를 떨쳤다.

이에 "이각"은 "주준"의 추천으로, "종군태수 조조"를 시켜, "청주"의 황건적들을 토벌하고, "제북"까지 공격해 100일 만에 황건적 30만 명을 항복시키고, "청주병"으로 흡수한다. 하지만 그 뒤에도 황건적들의 활동을 계속되어, 194년 황건적 잔당의 "대장 관해"가 군대를 이끌고 "청주의 북해"를 습격하기도 했으나, "북해"의 황건적들은 "유비ㆍ태사자"에 의해 토벌되고, 그 뒤에도 "연주ㆍ서주" 일대에서 계속 약탈을 자행하던 황건적 대장 "하의ㆍ하만ㆍ황소"의 황건적 잔당은 "조조"에 의해 다시 토벌되었다.

4. 전 투

 184년 : 유주성 전투 (후한 유주)

결 과 : 유언유비(장비관우)의 첫 승리     /     병 력 : 유비(500) - 황건적 정원지(50,000)

의병을 일으킨 "유비""유주성"으로 가, "유주 태수 유언"을 만난다 얼마 뒤, 황건적 대장 "정원지"5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유비"는 의병 500명을 이끌고 "유주"의 관군 대장 "추정"과 함께, "유주성 앞 대흥산"에서 대치한다 "정원지"는 부장 "등무"를 내보내 맞서게 했으나, "유비"의 의형제 "장비"에 의해 베어진다 이에 "정원지"는 직접 나서지만, 오히려 "유비"의 의형제 "관우"에 의해 목이 베인다 대장 "정원지"가 쓰러지자, 황건적들은 우왕좌왕하고, "유비 삼형제"는 황건적들을 무찌른다.

 184년 : 청주성 전투 (후한 청주유주)

결 과 : 황건군의 패배 / 유언유비(장비관우)의 승리     /     병 력 : 유비(500) - 황건적(5,000)

"유주성 전투" , 다음 날 황건적에게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한 "청주 태수 공경"의 편지가 도착하고, "유주 태수 유언""교위 추정"을 시켜 군사 5,000명을 보내, "유비"와 함께 "청주"황건적을 무찌르게 한다. "청주성"에 도착한 "유비"는 황건적들을 끌어들여 계곡으로 유인한 뒤 무찌른다 "공경"도 군사를 내어, 황건적을 앞뒤로 포위해 무찌르고, "유비군"은 큰 승리를 거둔다 "유비""광종"으로 "노식 장군"을 도우러 가지만, "노식"의 의견으로 1,000명의 병사들을 내주어 한나라 관군 대장 "황보숭주준"을 도와주려, "영천"으로 향한다.

184년 : 영천 전투 (후한 예주 영천 장사현)

결 과 : 황보숭주준조조의 승리     /     병 력 : 조조(불명) - 황건적 장량장보(10,000)

"예주 영천"의 산골 "장사현"에서는 한나라 관군 대장 "황보숭주준"이 황건적을 토벌하고 있었다 "주준"은 첫 전투에서 황건적의 대군을 이끌고 있는 "파재"와 싸우지만 패배하고, "주준""장사"에서 농성으로 들어가자, "파재"는 이를 포위한다. 그러자 "주준""황보숭"과 함께 "장각"의 동생 "장량장보"와 합류한 "파재"를 화공으로 공격해 무찌른다 "장량장보"는 형 "장각"이 있는 "광종"으로 도주하였으나, 도중에 "조조"를 만나 1만 명의 전사자를 내고, 6월에는 "팽탈"의 황건군은 다시 격파했고, 남은 황건적들은 "예주 자사 왕윤"이 이끄는 별동대와 관군의 협공으로 격파당하면서, "예주"의 황건적은 모두 평정한다 "유비"는 뒤늦게 전투 후에 도착해, "황보숭주준"의 명으로 다시 "노식"이 있는 "광종"으로 돌아간다.

 184년 : 광종 전투 (후한 형주 광종)

결 과 : 유비(장비관우)동탁의 승리     /     병 력 : 유비(500) - 황건적 장각(150,000)

그러나 "유비""광종"으로 가던 도중, "노식"이 뇌물을 거절해 모함을 받아 "중랑장" 자리를 앗기고 끌려간다는 소식을 듣는다. 결국 "유비""탁군"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노식"에게서 받은 1,000명의 군사를 돌려보내고, "탁군"으로 향한다 그러다가 "탁군"으로 가던 도중, 황건적의 우두머리 "장각"에게 쫓기던 "노식"에게서 "중랑장" 자리를 빼앗은 중랑장이자, 서량 "자사 동탁"을 도와준다 그러나 "동탁""유비"가 벼슬이 없는 것을 알고, 무시하고 결국 "주준"에게로 갔다.

 184년 : 곡양 전투 (후한 형주 곡양)

결 과 : 한나라 관군의 승리(황보숭조조)장량(대장) 전사

"유비주준""양성"에서 "장보"와 대치하고 있는 동안, 황건적의 우두머리 "장각"이 병으로 사망해 황건적의 사기는 크게 떨어진다. "장각"의 뒤를 이어 동생 "장량"이 황건적을 이끌지만, 관군 대장 "황보숭"과 거록 태수 "곽전"은 황건적의 본거지 "곡양"을 기습 공격하고, "기도위 조조" 앞세워, 7번 싸워 7번 모두 승리한다 결국 "장량""곡양"에서 전투 중 전사하여, 목이 베이고 만다. 조정에서는 공을 세운 "황보숭 조조"에게 큰 벼슬을 내리고,"황보숭"의 상소로 "노식"을 다시 "중랑장"으로 임명한다.

 184년 : 양성 전투 (후한 형주 남양 양성)

결 과 : 주준유비(장비관우)의 승리장각 전사     /     병 력 : 유비(500) - 황건적 장보(90,000)

"양성"에서 대치한 "유비주준"의 관군과 "장보"의 황건적은 치열하게 싸우고, "유비"의 의형제 "장비"가 황건적들의 부장 "고승"을 베면서, 황건적들은 "양성"으로 쫓겨 들어간다 이에 "유비"는 기다리는 장기전으로 돌입해, 황건적들의 내부 분열을 일으키려는 작전을 세운다 "유비"의 작전은 그대로 성공해, "장보"의 부장이던 "엄정""장보"를 살해하고 성문을 열어 항복한다.

 184년 : 완성 전투 (후한 형주 남양 완성)

결 과 : 유비손견주준의 승리황건적의 난 진압     /     병 력 : 유비(500) - 황건적(90,000)

"남양" 지역에서는 3"장만성"이 황건군을 이끌고, "남양"을 공격해 남양 태수 "저공"을 죽이고 이에 6월 새로 임명된 남양 태수 "진힐""장만성"을 죽였으나, 다시 "손중조홍한충" 등이 군사를 모아, "형주의 완성"에서 저항하자, "유비주준"은 남양 태수 "진힐", 형주 자사 "서구"합류해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출전한다. 전투 중, "손견"1,500명의 군사와 합류하여 다시 재정비를 하여 "유비"는 북문, "손견"은 남문, "주준"은 서문을 공격한다 "손견유비"는 성벽을 넘어 황건적들을 무찌르고, "손견""조홍"을 사살하고, "손중" 역시 동문으로 도망가다가, "유비"의 화살에 맞아 전사한다. 그리고 "한충"도 남양 태수 "진힐"에게 죽고, 10월 마지막 남은 "손하"의 황건군 마저 괴멸당하면서, "남양군" 10개의 고을이 평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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