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림 간첩단 사건 (동베를린 사건)"은 1967.07.08일, "중앙정보부"에서 발표한 대규모 공안사건(간첩단 사건)으로, "동백림 (東伯林)"은 당시 동독의 수도인 "동 베를린"을 말한다.
1. 동백림 (東伯林) 간첩단 사건ㆍ동베를린 사건 (The East Berlin Affair)
• 발 생 : 1967.07.08~ 1969.03.31 • 장 소 : 베를린 (당시 동독의 동베를린) • 성 격 : 공안사건
• 관 련 : 천상병(시인ㆍ37세)ㆍ윤이상(50ㆍ재 서독음악가ㆍ전 서독한인회장)ㆍ이응로(63ㆍ재불 화가)ㆍ민족주의비교연구회(서울대 문리대)학생 등 104명 구속 / 천상병 (千祥炳ㆍ1930~1993ㆍ63세ㆍ호: 심온(深溫)ㆍ시인ㆍ문학평론가)ㆍ윤이상 (尹伊桑ㆍ1917~1995ㆍ78세ㆍ독일 현대 음악 작곡가ㆍ바이올리니스트ㆍ기타리스트ㆍ첼리스트)ㆍ이응로 (李應魯ㆍ1904~1989ㆍ85세): 프랑스 화가
※ 천상병 (千祥炳ㆍ1930~1993ㆍ63세) : 서울대 경제학과중퇴ㆍ시인ㆍ문학평론가ㆍ작품 : 귀천
6개월 구금(전기고문 등)ㆍ행려병자로 서울 시립정신병원에 유치ㆍ생사를 몰라, 친구 시인들이 "새" 라는 유고시집 발간ㆍ1967년 "동백림(동베를린) 간첩단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간 심한 고문ㆍ옥고로 몸ㆍ마음이 깊이 상해, 가난ㆍ방탕ㆍ주벽으로 일관한 삶을 살았고, 많은 일화를 남겼다. 이후 그의 시는 동심에 가까운 순진성과 티 없이 맑고 깨끗한 서정으로 가난ㆍ죽음ㆍ고독 등을 일상적이고 소박하며 순수한 말로 표현했으며, 간경변증으로 죽음을 앞둔 시기에 고통과 상처로 얼룩진 지난 세월을 담담하게 돌아보고 인생을 받아들이는 달관과 관조의 태도를 형상화했다.
"문단의 마지막 순수시인ㆍ문단의 마지막 기인"으로 불리며, "귀천"과 같이 죽음과 피안, 인생의 비통한 현실 등을 간결하게 압축한 시를 썼다. 마산중학 국어교사였던 "시인 김춘수"의 영향으로 시를 쓰기 시작해, 1949년 5학년 때는 "죽순"지에 시 "공상"외 1편을 발표하였고, 1952년 "문예"에 "강물ㆍ갈매기"등을 추천받았다. 1953년에는 "문예"에 평론 "나는 거부하고, 저항할 것이다"와 "사실의 한계- 허윤석 론"을, 1955년 "현대문학"에 "한국의 현역대가"를 발표하는 등, 시ㆍ평론을 겸하는 문학 활동을 했다.
※ 작품 : 귀천 (歸天)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 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로 시작해서, 매 연에서 이 시행이 반복된다. 하늘에서 왔으니 하늘로 돌아가는 것이 순리라는 화자의 생각을 강조하면서도 운율을 형성한다. 때가 되면 사라지는 것들과 같이 자신도 때가 되면 하늘로 돌아갈 것이라는 달관적인 태도를 보인다. 세상의 삶을 "소풍"이라고 말하며, "삶이란 잠시의 소풍이고, 죽음은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인식을 달관적으로 드러낸다. 마지막의 "하늘로 돌아가, 이 세상 아름다웠더라고 말한다"에서, 모진 고문을 당해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던 시인이 세상을 아름답게 인식하려는 긍정과 관조의 태도를 보인 부분으로 해석되어, "삶에 대한 달관과 죽음에 대한 정신적인 승화"를 드러낸다.
2. 시대적 배경
1960년대 후반은 북한이 "사회주의적 산업화"의 초기효과에 의해, 경제발전 강도에서 한국보다 앞서 있었다는 평가를 받았던 시기이며, 한국은 "박정희 정권"이 추진해온 "수출주도형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그 효과가 나타나기 전이었다. 한국은 경제발전에 필요한 외화획득을 위해, 서독에 광부(1963.12월)ㆍ간호사(1966.10월)를 파견하였고, 이들은 유학생들과 더불어 "재유럽 한인사회"를 형성하게 되었다.
국내는 "박정희 대통령"이 1967년 재선에 성공하였으나, 1971년 정권을 내놓아야 하는 상황에서 "장기집권"을 위해서는 헌법을 고쳐, "대통령의 3선"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때문에 "박정희 정권"은 1967.06.08일 국회의원 선거에서 개헌 가능한 2/3 이상의 의석을 획득하는 것이 절박한 과제로 제기되었다. 1967년 "6ㆍ8 선거"에서 "박정희 정권"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2/3 의석을 차지하는데 성공했고, 야당과 대학생들이 "6ㆍ8 부정선거"에 대해 대규모 규탄시위를 전개하자, 정부는 06.16일 기준으로 대학(30개)ㆍ고등학교(148개)"를 임시 휴업시키는 등 "박정희 정권"의 "장기집권"을 둘러싼 분기점에 놓여 있었다.
3. 중앙정보부의 수사결과
"중앙정보부"는 1967.07.08~17일까지 7차에 걸쳐, "동백림(당시 동독의 수도인 동베를린)을 거점으로 한 북괴 대남적화 공작단"에 대한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중정"은 "문화예술계의 윤이상ㆍ이응로, 학계의 황성모ㆍ임석진 등 194명이 대남 적화공작을 벌이다가 적발되었다"고 발표했다. 또한 "중정"은 "서울대 문리대의 민족주의비교연구회"도 여기에 관련된 반국가단체라고 발표했다.
"중정"의 발표에 따르면, 한국에서 "독일ㆍ프랑스"로 건너간, 194명에 이르는 유학생ㆍ교민 등이 1958.09월부터 "동베를린"의 북한 대사관ㆍ평양을 드나들면서 이적(利敵)활동을 한 데 이어, 간첩교육을 받고, 대남적화활동을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일부는 입북 또는 "노동당"에 입당하고, 국내에 잠입하여 간첩활동을 해왔다는 것이다.
"중정"이 간첩으로 지목한 인물 중에는 유럽에서 활동하고 있던 "윤이상(작곡가)"과 "이응로(화가) "가 포함되어 있었으며, "천상병 시인"도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고문을 당하였다. 간첩으로 지명된 교민과 유학생은 "서독"에서 "중정요원"들에 의해 납치되어, 강제로 한국으로 송환되었다. 이 때문에 당시 "독일연방공화국(서독) 정부"와 외교문제를 빚기도 했다.
4. 재 판
사법부는 "동백림 및 민족주의비교연구회 사건"을 별도 심리하기로 결정하고, 1969.03월까지 "동백림 사건관련" 재판을 완료하여, 사형(2명)ㆍ실형(15명)ㆍ집행유예(15명)ㆍ선고유예(1명)ㆍ형 면제(3명)을 선고했다. "중정"의 발표와 달리 "동백림사건" 관련자 중, 실제로 한국에 돌아와서 간첩행위를 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보복이 두려웠거나, 또는 단순한 호기심에 북한에 잘 도착했다는 신호를 보낸 정도였다. "중정"은 "대규모 간첩단"이라고 하여, 무려 203명의 관련자들을 조사했지만, 실제 검찰에 송치한 사람 중 검찰이 "간첩죄ㆍ간첩미수죄"를 적용한 것은 23명에 불과하였다. 더구나, 실제 최종심에서 "간첩죄"가 인정된 사람은 1명도 없었다. 1967.12.03일 선고 공판에서 관련자 중 34명에게 "유죄판결"이 내려졌으나, "대법원 최종심"에서는 간첩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은 자는 없었다.
이러한 재판 결과는 "동백림사건"수사가 강제연행과 고문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유학생과 교민들의 강제연행은 외교적 마찰을 불러 일으켰다. 서독ㆍ프랑스 정부는 "영토주권의 침해"라고 강력히 항의하고, 원상회복을 요구했다. "윤이상"은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는데, 유럽에서 활동하는 음악인들과 "독일연방공화국 정부"가 한국 정부에 항의하여, 복역 2년 만에 석방되었다. "박정희 정부"는 1970년 광복절을 기해, 서독 및 프랑스의 의견을 수용하여, 사건 관계자에 대한 "잔여 형기" 집행을 면제, "정규명ㆍ정하룡" 등 사형수까지 모두 석방했다.
5. 최종 판결사항
① 사형 : 정규명(39ㆍ프랑크푸르트 대 이론물리과 재학)ㆍ 정하룡(34ㆍ경희대 조교수ㆍ철학박사) ② 무기징역 : 조영수(34ㆍ전 동국대학 및 외대 강사) ③ 유기징역 (15년): 어 준(41ㆍ현대계장회사 전무)ㆍ임석훈 ④ 유기징역 (10년): 윤이상(50ㆍ재 서독음악가ㆍ전 서독한인회장)ㆍ최정길ㆍ강빈구(35ㆍ서울대상대 조교수ㆍ법학박사)ㆍ천병희(29ㆍ서울대사대 전임강사ㆍ불문학석사) ⑤ 유기징역 (7년 이하): 김중환(44ㆍ서울대의대 조교수ㆍ한일병원 피부과과장)ㆍ정상구 등 6명
⑥ 집행유예 : 7명 / 선고유예 : 1명 / 형 면제 : 3명 / ⑦ 혐의자 명단 : 이응로(63ㆍ재불 화가)ㆍ이순자(37ㆍ정하용 처ㆍ국회도서관직원)ㆍ임석진(36ㆍ명지대 조교수ㆍ철학박사)ㆍ황성모(42ㆍ서울대문리대 부교수ㆍ철학박사)ㆍ최창진(41ㆍ전북대문리대 조교수)ㆍ강하이드른(28ㆍ서강대 전임강사)ㆍ김종대(34ㆍ프랑크푸르트대 강사)ㆍ강성종(35ㆍ미국노트르담대 학회연구소원) ㆍ주석균(65ㆍ농업문제연구소 소장)ㆍ장덕상(32ㆍ중앙일보 파리특파원)ㆍ김광옥(31ㆍ동양 카프로락탐 기술과장) 박민종(50ㆍ재서독음악가ㆍ전 서독한인회장)ㆍ공광덕(36ㆍ오 살스부르크 대학생)ㆍ이희세(37ㆍ재불 화가)ㆍ노봉유(38ㆍ재불 유학생)ㆍ조상권(33ㆍ재불 유학생 회장)ㆍ박협(30ㆍ재불 변호사)ㆍ방준(33ㆍ재불 TWA항공회사 근무)ㆍ정성배(42ㆍ재불)ㆍ김옥희(30ㆍ공무원)ㆍ어원(50ㆍ외기노조 오산지구 상무)
6. 평가
"동백림사건"은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무마하기 위해, 기획ㆍ조작된 사건은 아니지만, 실제 수사결과와 발표에 의해, "부정선거 규탄 시위"는 냉각되었다. "동백림(동베를린)"을 거점으로 한 북한의 대남공작 실상을 국제적으로 폭로함으로써, 유럽지역에서 북한의 대남공작을 견제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독일ㆍ프랑스"등으로부터 "주권침해"공세에 시달리면서, 국제사회에서 국가 신인도가 추락되고 "윤이상ㆍ이응로" 등을 위한 국제사회의 탄원운동 등으로 "인권후진국"으로 낙인찍혔다.
※ 최덕신 (崔德新ㆍ1914~1989ㆍ향년 75세)
군인(육군 중장)ㆍ천도교 교령ㆍ"지리산 토벌군"으로 "거창양민 학살사건"의 현장 최고 책임자(6ㆍ25전쟁 때, 8사단ㆍ11사단 사단장으로 참전)ㆍ남한 출신 월북자로서는 최고위급 정치인 (외무부장관(9대)ㆍ1961~1963)ㆍ"동백림 간첩단사건 (동베를린 사건)"으로 월북하여, "북한"으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김일성"은 10대 소년 시절, 부친인 "최동오(독립운동가)"가 만주에 설립한 "화성의숙"을 다녔고, 사망시 "김일성"이 직접 조문했다고 한다. ( 출 생 : 평북 피현군 용흥리 / 묘 소 : 애국열사릉 (북한판 현충원))
독립운동가 "최동오(崔東旿)"의 아들로 태어나,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화민국 국민혁명군" 장교로 복무했으며,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선전과장을 맡았다. "국민혁명군"에서는 주로 미군과 국민혁명군 간의 군사외교ㆍ협력 업무를 맡았고 이러한 경력은 후일 "휴전협정"에서 한국 대표를 맡거나, "혁명정부"에서 "외무부장관"을 맡게된 계기가 되었다. 해방 이후, "육군 장교"로 임관하여, "육군사관학교 교장"을 거쳐, 6ㆍ25 전쟁 때, 8사단ㆍ11사단 사단장으로 참전하였으며, 막바지에는 "휴전회담 대표"를 역임하였다. "제1군단장"을 지낸 뒤 1956년 "육군 중장"으로 전역하였다.
전역 후, "초대 남베트남 대사ㆍ태국 대사" 등 외교관을 역임하다가, "박정희"가 집권하면서 1961년 "외무부장관"에 임명되었고, 1963.08월 서독 주재 대사로 부임했다. 1967.07월 "동백림 간첩단사건 (동베를린 사건)"의 수습이 실패하여 외교 문제로 비화되면서, 사태 수습을 위해 "박정희"는 그를 해임해 버렸다. 1967년부터 6년간 "천도교 교령"을 지냈고, 1976.02월 미국으로 이주했다. 이후 수시로 북한을 방문하고, 공개적으로 6ㆍ25 전쟁 "북침설"을 주장하는 등 친북 활동을 벌이다가, 1986년 아예 북한으로 망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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