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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사건

사건- 68.04 : 실미도(684) 부대 ① → 자폭사건 발생 (71.08.23)

by 당대 제일 2022. 1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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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4 부대 (실미도 부대ㆍ2325부대 209파견대)"는 "김형욱"이 창설했으며, "684 부대"는 공식적으로 "2325부대 209파견대"로 1968.04~ 1971.08월까지 존재하던 대한민국 "공군의 북파공작 부대"였으며,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의 건의로 창설, 훈련 과정에서 7명이 사망하였다. 1971.08.23일, 공작원(24명)이 탈출 후, 부대원 대부분이 "유한양행 앞(영등포구 대방동)"에서 수류탄으로 자폭하고, 생존자 4명은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1972.03.10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1. 684 부대 (실미도 부대2325부대 209파견대김형욱이 창설)

① 기 간 : 1968.04~ 1971.08.23 (실미도 사건 발생일)

② 부대 명 : 684 부대 (부대창설 월인 1968.04월을 의미) 김형욱이 창설      ③ 소 속 : 대한민국 공군 (2325부대 209파견대)

④ 인 원 : 장교(1명)ㆍ사병(42명)ㆍ조종관(5명)ㆍ공작원(31명)        ⑤ 종 류 : 특수부대북파공작원        ⑥ 본 부 : 실미도 (경기도 부천군 용유면 무의리 (현, 인천 중구 무의동) 실미도)

⑦ 역 할 : 김일성 암살 (평양 주석궁 침투)ㆍ북조선 침투ㆍ김일성 북한 주석 거처원산 원유저장소송림제철소를 폭파

⑧ 규 모 : 31명 ("124군 부대"의 인원 같은 수) → 훈련과정에서 7명 사망ㆍ작전수행 도중 발각될 경우, 대처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가르쳤는데, 그 내용은,  •  체포되면, 자폭하라.    • 낙오자는 죽인다.

⑨ 결 과 : 1971.08.23일 오후 2:25분(마지막 교전ㆍ24명ㆍ수류탄/칼빈 소총으로 무장)→ "유한양행 앞(서울 영등포구 대방동)"→ 14명 사망(수류탄 자폭)ㆍ피살4명ㆍ6명 부상(민간인6명ㆍ경찰2명)  /  부상자 6명→ 2명은 치료 중 사망, 4명은 군사재판을 받고, 사형 당했다.

⑩ 사건 후 :  1971.08.25일, "정래혁(국방부 장관)"이 사건발표 후, 자진사퇴하는 것을 끝으로 사건은 급히 종결된다.  "실미도 부대원"들을 교육했고, 당시 사건에서 사망한 기간병들은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백동호(소설 "실미도"의 저자)"는 이들이 부대에서 탈출ㆍ서울로 향한 이유는 "배신감"이라는 감정 때문이라고 추측하고 있는데, "임무 취소" 이후, "해산"을 명령하든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해 주든지 했었어야 하는데, 정작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형욱ㆍ이후락"은 이를 외면하였고, 그들은 목표 의식을 잃은 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강도 높은 훈련을 3년간 하루도 빼먹지 않고, 계속한 사실에 대해, "환멸감"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직까지도 "실미도 부대"에 대한 정확한 진상조사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2.  사건 개요

1968.01.21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조선인민군 124부대"소속의 "김신조" 등 31명을 대한민국에 침투시켜,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할 목적"으로 "1ㆍ21사태"를 일으켰다. 당시 "김형욱(중앙정보부장)"과 "이철희(중앙정보부 제1국장)"은 이를 보복하기 위하여, 각 군별로 "보복부대"를 만들도록 지시했는데, "공군 정보부"가 대북정보 수집을 주임무로 하는 "공군 2325부대"에 명령하여. 같은 해 4월에 창설한 부대가 "209 파견대"이다. "209 파견대"는 청와대를 기습한 31명과 인원수를 맞춰 부대를 꾸렸고, 창설된 연도와 달의 숫자를 따서, "684부대"라는 위장 명을 썼다. 

"684 부대원"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침투하여, 김일성을 암살하기 위해 철저한 인민군 식 실전 훈련을 받았고, 훈련 과정에서 7명이 사망하였다. 불과 몇 개월 만에 북파가 가능한 "인간병기"로 만들어진 이들은 3년 가까이 "북파 명령"을 기다렸으나, 1971년 국제적인 긴장완화와 남북적십자회담 등 남북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작전 자체가 불확실해졌다.

가혹한 훈련과 장기간의 기다림에 불만을 품은 "684 부대원"들은 1971.08.23일 교관 및 감시병 18명을 살해하고, "인천"에서 "시내버스(현대 R-192)"를 탈취하여 청와대로 향하던 중, 이를 제지하는 군ㆍ경찰과 총격전을 벌였다. 탈취한 시내버스의 타이어가 터져 움직일 수 없게 되자, 이들은 "수원-인천 간" 태화상운 "시외버스(신진 FB100L)"를 다시 탈취하여, 서울 영등포구 "대방동"까지 진입하였다. 이곳에서 군의 방어에 막히자, 부대원 대부분이 "대방동 유한양행" 앞에서 수류탄으로 자폭하고, 생존자 4명은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1972.03.10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3. 1971.08.23일,  "실미도" 사건 진행 사항

① 1971.08.23, 오전 6시경 : "실미도" 부대 내

실미도 내, 부대에서 총성이 울려 퍼졌는데, 훈련병들에 의한 "반란"이 일어난 것이었다. 이들은 3년간 철저히 인간이기를 포기한, "인간 병기"로 길러져 왔다. 결국 기간병들은 훈련병들을 이길 수 없었으며, 기간병 총 24명 중 12명은 사망, 6명은 익사, 6명은 숨어있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당시 생존 기간병의 증언을 옮겨보면, "걔네들은 총을 쏘면 모두 머리, 심장에 명중했어요. 그래서 우리가 이길 수가 없었어요. 나는 그 때 화장실에 있었는데, 총소리가 들리는 거야. 그래서 그 화장실 밑으로, 변이 있는 데로 몸을 숙였어요."

"실미도" 부대원들은 기간병들을 제압하자, "무의도"로 향하여 그곳 "이장"을 찾아서는 말하기를, "부대장님이 맹장이 일어났소. 급히 배가 필요하니, 이장께서는 배를 좀 빌려주시오." 당시 무의도 주민으로서 그들을 대면했었던 증인의 말을 옮겨본다. "평소와 다르게 훈련복이 아니라 정복을 입고 있었고, 자동소총에 실탄까지 두둑하게 챙겼더라고요."

② 오후 12:20분 : "인천" 독배부리 해안

"684 부대원(31명)"은 "독배부리 해안"에 상륙하고, 이를 목격한 초병은 급히 상부에 보고했다.

\③ 오후 12:53분 : "인천" 송도역 삼거리

"송도역 삼거리"에서 "1번째 버스"를 탈취하는 데에 성공하고, "서울"로 몰고 갔다.

④ 오후 1:10분 : "인천" 옥련고개

버스를 탈취한 그들은 "옥련고개"에서, 초병의 보고를 받고, 출동한 "육군(24명)"과 마주치게 된다. 여기서 교전을 벌이게 됐고, "684 부대원"들은 사상자가 없었으며, "육군"은 2명의 중상자가 발생했다. 이 교전에서 "버스 타이어"가 총탄에 의해 펑크가 나게 되고, 결국 이들은 새로운 버스를 탈취해야만 했다.

⑤ 오후 1:20분 : "인천" 주안사거리 간석동 고개

"2번째 버스"를 탈취하는데 성공하는데, 당시 버스에 있었던 민간인의 증언을 보면, "해치지 않을 테니, 몸을 숙이라고 했어요. 우리를 왜 섬에다 가두어 뒀느냐, 우리를 왜 죽이려고 가두어 뒀느냐, 라면서 울더라고요."

⑥ 오후 1:30분 : "인천" 소사삼거리

추격해오는 "경찰관 1명"을 사살하는데, 증언에 따르면, 소대원 중 1명이 경찰관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소대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그를 제지하였다. 그런데 경찰이 오토바이 속도를 높여 버스를 추월하여, 버스 앞에 서서, "그들에게 멈추라"고 소리치자, 소대장 같은 이가 권총을 뽑아, 그를 사살했다고 한다.

⑦ 오후 1:38분 : "인천" 신앙촌 검문소

"신앙촌 검문소"에서 바리게이트를 치고 대기하고 있던 "경찰관"을 사살하고, 그대로 돌파하는데 성공한다.

⑧ 오후 2:15분 :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684 부대원"들이 탈취한 버스의 "운전기사"가 창밖으로 몸을 던져, 탈출에 성공한다. 이에 당황한 "684 부대원"들 중, 1명이 가까스로 핸들을 잡고, 운전을 하게 되었다.

⑨ 오후 2:25분(마지막 교전): "서울" 영등포구 대방동

"마지막 교전"이 발발하는데, 증언에 따르면, 이때 "군인ㆍ경찰들이 수두룩하게 진을 치고 있었고, 버스를 향해, 선제 사격을 가했다"고 한다. 결국 "버스 타이어"가 총탄에 맞아, "유한양행 앞 가로수"를 들이 받았고, "군인ㆍ경찰"은 이들을 포위하고, 천천히 다가갔다고 한다. "684 부대원"들이 버스 안에 있던 시민들에게 밖으로 나가라고 하였고, 그들은 "수류탄"을 꺼내 자폭한다.

4. 적기가 (赤旗歌ㆍThe Red Flag) :  영화 "실미도" 삽입곡

"좌익", 특히 사회주의와 관련된 노래이다. "오 탄넨바움(독일 민요)"의 번안곡이다.  "영국 노동당"의 반공식적인 당가이며, "북아일랜드 사회민주노동당ㆍ아일랜드 노동당"의 공식 당가이다.  "조선 인민 혁명군"으로 알려진 항일 무장 투쟁세력이 불렀다는 혁명가요 중의 하나인 적기가(赤旗歌)에서 유래되어 보급되었다.

민중의 기, 붉은 기는 전사의 시체를 싼다.  시체가 식어, 굳기 전에 혈조는 깃발을 물들인다.

높이 들어라, 붉은 깃발을. 그 밑에서 굳게 맹세해.  비겁한 자야, 갈라면 가라. 우리들은 붉은 기를 지키리라.

원쑤와의 혈전에서 붉은기를 버린놈이 누구냐.  돈과 직위에 꼬임을 받은 더럽고도 비겁한 그놈들이다

높이 들어라, 붉은 깃발을. 그 밑에서 굳게 맹세해.  비겁한 자야, 갈라면 가라. 우리들은 붉은 기를 지키리라.

붉은기를 높이 들고 우리는 나가길 맹세해  오너라 감옥아 단두대야 이것이 고별의 노래란다

높이 들어라, 붉은 깃발을. 그 밑에서 굳게 맹세해.  비겁한 자야, 갈라면 가라. 우리들은 붉은 기를 지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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