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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1970.03 : 정인숙 (정금지) 사건 ② 친부는 누구?ㆍ장사공

by 당대 제일 2022. 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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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공화국 시절, 엄청난 미모로 최고 권력층의 실세와 유력한 정치인들을 두루 섭렵하고 다니면서 큰 위세를 떨쳤던 고급요정 종업원 출신 "정인숙 (鄭仁淑1944~ 1970.03.17향년 25)""박정희정일권박종규이후락" 등 대다수 516 주체세력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1. 아이 친부 논란 (정일권 설박정희 설)

정일권 설

1991.06.05, "정성일" "정일권"을 상대로 서울가정법원에 친자 확인 소송을 제기하였다.

1991년 소송 당시, "정성일""어릴 때부터 외할머니와 외삼촌으로부터 정일권 씨가 1967년 어머니와 교제해, 다음 해 나를 낳았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친자확인 소송을 제기했다그러나 06.27일 외삼촌 "정종구"의 권유로 소송을 취하하고, 다음 날 다시 미국으로 출국했다1993년 다시 "정일권"을 상대로 서울가정법원에 친자확인 소송을 냈으나, 소송 진행 중 "정일권" 사망으로 무효화되었다.

1989년 가석방된 정종욱은 "정성일이 정일권의 아들이 틀림없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정일권이 1달에 1번 꼴로 서교동 집으로 찾아왔지요. 그리고 동생이 "그이가 아들 하나만 낳아달라고 한다."며 상의를 해 처음엔 가족들이 극구 반대를 했지요 출산 후에는 1주일에 1번 꼴로 찾아와 성일이를 안고 즐거워했으며, 늘그막에 아들을 얻어 소원을 이뤘다는 뜻에서 성일이란 이름까지 직접 지어왔어요. 성일이도 자기 아빠가 TV에 비치면, "아빠"라고 소리치며 좋아했지요."라는 것이다.

"선우련(박정희 대통령 비서관)""정성일이 정일권의 아들"이라고 주장한다.

"정일권 씨가 1971년 봄, 형님인 선우휘 씨를 찾아와 "이동원 외무장관과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정인숙을 알게 되었으며, 내 아들을 낳았으나 공개할 수가 없다."고 털어놓았다."고 했다.

그러나 선우휘가 정일권을 만난 1971년과 같은 해에 정일권을 만난 재미언론인 문명자는,

"문 기자, 나는 정인숙과 딱 1번 같이 잤는데, 그 아이가 내 아들일리가 없소. 나는 이미 불임수술을 해서 아이를 낳을 수가 없는 몸이오."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일권이 불임수술을 한 상태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1977년 재혼한 부인 사이에 2남매가 출생했기 때문이다.

문명자는 이 글에서 정일권에게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정일권이 먼저 "불임수술을 풀었다"고 말해 그만두었다고 밝히고 있다.

2000년대 이후 정성일의 생부가 정일권이라는 견해들이 나오고 있다.

2007년 초 언론취재 결과, 당시 주변 관계자들의 증언을 통해 숨겨진 진상이 조금씩 실체를 벗고 있다.

일요신문은 취재하는 과정에서 박정희 정권 당시의 여야 국회의원을 찾아다녔고, 이들에 따르면

"정 씨의 친아버지는 정일권 전 총리일 가능성이 높으며, 정 씨 측의 요구로 생전에 적잖은 금전적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94년 타계하기 전까지 적잖은 금전적 도움을 줬음에도 정씨 측이 자주 손을 벌려 관계가 상당히 멀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 여인의 살해범은 4째오빠가 거의 확실하다는 것이 공통된 진술이었다.

60~ 70년대 중정에 몸담았던 이모 전 의원은"정인숙의 2째 오빠와 고교 동창생으로 아주 친한 사이여서, 비교적 그 집안 사정을 잘 안다. 선친은 대구 부시장을 지낼 정도로 집안이 괜찮았고 형제들도 모두 똑똑했다. 그런데 다른 형제들에 비해 넷째가 변변한 직업이 없었고 그래서 형제들 사이에서 좀 따돌림을 당했던 것 같다. 그런 오빠를 안 되게 여겨, 정인숙이 운전기사로 자신의 일을 돕게 했다고 한다. 그런데 돈 씀씀이가 헤퍼, 형제들은 물론 여동생과도 불화가 잦았다고 한다"고 전했다.

"사고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친구를 비롯한 그 가족들 모두 넷째오빠를 범인으로 확신하고 있다. 가족들이 그렇게 확신하는데 무슨 다른 의문이 있을 수 있나 그래서 지금도 넷째는 가족들과 왕래조차 하지 않는다고 한다. 내 친구는 "어떻게 우리 집안에 이런 일이 생기나. 오빠가 동생을 돈 때문에 쏴 죽이다니. 정말 집안 망신이다"라며 심하게 자괴했다"고 전했다.

정성일은 "저는 당신의 아들이었습니다."라는 책에서, 1991.11월 미국에서 정일권과 대화를 나눈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문을 사이에 두고 한 대화에서 정일권은 정성일에게 "아가야, 나는... 나는 지금 가슴이 떨려서, 무슨 말을 할 수가 없구나. 내일 아침에 전화를 하고 다시 와주련?"이란 말을 했다고 한다.

또 다른 이 전의원은 "우리 친인척 중의 한 분이 정 전 총리부인과 이웃에 살며 둘도 없는 친구였다. 사건이 터지기 전부터 정 전 총리부인이 친구에게 자기 집 남편을 가리키며, "어디서 아들 하나를 만들었다"고 한숨짓고는 했다고 한다. 실제 4대 독자였던 정 전 총리에게는 딸만 셋뿐이었기에 생전에 그 모친의 아들 독촉이 아주 성화였다고 한다."고 전했다.

또 다른 한 관계자는 "정 전 총리의 측근인 김모 전 의원과 얼마 전 식사를 함께했는데, 이 자리에서 그가 최근 납치범으로 보도된 정 씨에 대해 고개를 흔들더라. "(금전적으로) 그렇게 많이 도와줬는데도 툭하면 손을 내밀고 하더니, 그 못된 버릇을 못 버리고 이런 흉악한 범죄까지 저질렀다"고 분개 하더라."고 전했다.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김 전 의원은 앞서의 관계자가 전한 "금품 지원설"에 대해  "내가 직접 한 것이 아니니, 나 말고 정 전 총리의 비서를 지냈던 신 아무개 전 의원이나 김 아무개 전 의원 등에게 물어보라.", 즉답을 피했다.

비서를 지낸 또 다른 김 전 의원 역시 기자의 질문에"어쨌거나 정확한 DNA 검사를 하지 않았으니 (친아들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당시 정 씨가 넷째 외삼촌과 함께 돈을 얻을 요량으로 정 전 총리를 직접 지목하면서 친자확인소송을 하느니 소동을 벌여 상당히 곤혹스러웠다"고 말했다.

"정 씨(정성일)는 적절치 못한 처신으로 외가는 물론 정 전 총리 측과도 완전 결별하다시피 했다. 91년 그가 한국에 와서 친자확인소송을 한다고 했을 때, 정 전 총리측에서 거액을 주고 일단 무마시켰다. 그런데 얼마 못 가서 또 한국에 나타나서 방송 인터뷰니 뭐니 여기저기 말하고 다녀, 정 전 총리 측에서 아주 고개를 흔들 정도로 불쾌해 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상종해선 안 될 놈"이라는 막말까지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고 전했다.

 

박정희 설

1993SBS 주병진 쇼에 출연한 정성일은 "최근 정씨(정일권)가 나와의 직접 통화에서 "당신은 나의 아들이 아니며, 내가 모시던 분의 아들"이라고 밝혔다"고 말해 자신이 "박정희"의 아들일 수 있음을 시사했다.

"김형욱(전 중앙정보부장)"은 정성일이 "박정희의 아들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초점은 그 아이가 정일권의 아들 정성일이냐, 아니면 박정희의 아들 박성일이냐로 좁아진다.(중략 , 문제의 아이 성일 군이 정일권의 아들이었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 아이의 정체를 알 수도 있었을 최대현, 노진환, 문학림이 정일권의 명예를 보호하기 위하여 박정희가 상당한 의혹의 대상이 되는 현실을 감수하면서까지 침묵을 지켰을 것인가? 당시 정일권은 과연 그만한 일을 강행할 만큼의 국정에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던가? 그 후 정일권은 국회의원 자격도 없는 노진환을 공화당 전국구 의원으로 밀어 넣고, 일등 공신 최대현을 청와대 사정보좌관실에서 박정희의 비서로 일하게 할 만큼 정치적으로 강력했던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이 의문들에 대한 나의 대답은 결단코 "아니다!"였다.

이렇게 보자면 성일군의 아버지는 누구였는지가 스스로 명백해진다. 또 하나 명백한 것은 성일군의 아버지가 성일군의 어머니인 정인숙 여인을 살해한 장본인이라는 점이다. 이걸 성일군의 입장에서 보자면,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인 "골육 상쟁극"이었다.

1988년 박근혜(국회의원)는 한 여성지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그에 의하면 "정성일의 생부가 박정희는 아니라"는 것이다.

"아버지(박정희)와 어머니(육영수)는 그때 정 여인과 관련된 당사자를 알고 있었다 물론 상당한 고위층이었다. 그 사람은 사표를 가지고 아버지에게 찾아와 "제가 관계했던 여자이지만 결코 살인은 하지 않았다" 울면서 사죄했다. 아버지는 그때 그 당사자를 문책하게 되면 (그가) 살인자로 비쳐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에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 같다."

 

2. 장사공 (張史公1933~ 사망충남 예산한국해양대학교 항해 학사)

•  정인숙의 동거인 (12살 차)아이는 없다.

•  시나리오 작가1961"비단이장사 왕서방(王書房)"으로 등단

•  1963, 장사공이 30세 때에 정인숙(당시 19)과 만나, 1년 정도 동거했다.

•  경제적으로 무능력했던 장사공은 바람까지 피웠고, 결혼까지 생각했던 두 사람은 1년 만에 파탄 났다.

"정인숙"1962, "신명여고" 졸업 후, 1964"이화여자대학교 영문과"에 지원했으나 낙방했다.

이후 "명지대 사범대학"에 입학했으나, 학업에 흥미를 잃고 학교에는 가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중퇴하였다.

뛰어난 미모로 "미스코리아 대회"에 나가려고 했으나, 가족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아버지의 실직과 대학 낙방은 그녀의 방황을 부추겼다영화배우가 되고 싶은 꿈에 시나리오 작가인 "장사공"을 만났으나 1년 만에 헤어지고, 임신한 아이는 낙태하였다. 이후 요정에 들어가 요정업에 종사하게 된다.

대학을 중퇴한 후 일정한 직업이 없던 그녀는 "나 정도의 얼굴이면 영화배우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을 했고, 서울 충무로 영화가를 전전하였다또한 문학공부를 하고자 했던 그녀는 자신에게 문학을 가르쳐줄 마땅한 사람을 찾아다녔다.

1963, 시나리오 작가인 "장사공"을 만나 1년 정도 교제를 했다이때, "장사공"과 동거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당시 장사공은 KBS 방송국에 "태양은 늙지 않는다"란 연속극을 집필하고 있었고, 정인숙은 곧잘 친구들에게 "우리 애인은 유명한 작가"라며 자랑했다또한 "장씨와 약혼한 사이이며, 곧 영화에도 출연하게 될 것"이라고 비치기도 했다.

실제로 "장사공"의 소개로 S영화사와 접촉하여, 2~3편의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했다그러나 "신촌수유리" 등을 전전하며 하숙생활을 하던 "정인숙장사공"의 동거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결국 그녀의 타고난 기질과 장사공의 사업실패가 두 사람의 사이를 갈라놓았다"장사공"은 그녀를 구타했고, 정인숙은 대구의 집으로 도망가기도 했다.

"장사공"을 사위로 여기던 "정도환" 내외와 두 오빠는 그때마다 "아이가 철이 없으니 인내하고 데리고 살라"고 거듭 부탁하기도 했다그러나 경제적으로도 무능력해졌던 "장사공"은 바람을 피우고 있었고, 결혼까지 생각했던 두 사람의 사이는 1년 만에 파탄으로 끝났다.

< 각본 작품 >

1961 : 비단이 장사 왕서방 (양훈이예춘곽규석구봉서김희갑)

1962 : 아카시아 꽃잎 필 때 (신영균김혜정장동휘)

1962 : 비밀통로를 찾아라 (신영균방성자장동휘)

1963 : 대지의 지배자 (김석훈엄앵란문정숙)

1964 : 몽고의 동쪽 (황 해허장강김혜정태현실)

1965 : 불붙는 대륙 (황 해장동휘김혜정서영춘)

1965 : 첫사랑 (신성일엄앵란황정순)

1965 :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 (김희갑서영춘태현실허장강구봉서)

1965 : 흑룡강 (장동휘문정숙김혜정허장강)

1966 : 남자는 절개 여자는 배짱 (김희갑서영춘엄앵란)

1966 : 평양기생 (신영균김지미)

1966 : 비밀첩보대 (신영균김혜정이예춘이대엽)

1967 : 천도화 (신영균김지미박노식도금봉김희갑)

1968 : 청등홍등 (신성일고은아허장강황정순안인숙)

1971 : 외로운 산까치 (최무룡남정임)

1971 : 초원의 빛 (윤정희최무룡김희갑황정순)

1972 : 고향을 묻지 마라 (장동휘)

 

3. Release Me ( 엥겔버트 험퍼딩크Engelbert Humperdinckㆍ영국 가수1936~)  :  1970.03.17일 사건 당일, 남산 중턱에 있는 타워호텔 18층 나이트클럽에서 정인숙이 들은 노래

Please release me let me go                           제발 날 놓아 주세요. 떠나게 해 주세요.

For I don't love you any anymore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니깐요.

To waste our lives would be a sin                    우리의 삶을 허비하는 건 죄가 될 거에요.

Please release me and let me love again        날 놓아 주세요, 다시 사랑 할 수 있게 해 주세요.

I have found a new love dear                           난 새로운 사랑을 찾았어요.

And I will always want her near                        그녀가 늘 곁에 있기를 원해요.

Her lips are warm while yours are cold             당신의 입술은 싸늘한 반면, 그녀의 입술은 따뜻해요.

Please release me my darling let me go           그대여, 제발 날 놓아 주세요.떠나게 해 주세요.

Please release me let me go                             제발 날 놓아 주세요. 떠나게 해 주세요.

For I don't love you any anymore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니깐요.

To waste our lives would be a sin                     우리의 삶을 허비하는 건 죄가 될 거에요.

So release me and let me love again               그러니 놓아 주세요, 다시 사랑 할 수 있게 해 주세요.

Please release me can't you see                      제발 날 놓아 주세요. 나에게 매달리는

You'd be a fool to cling to me                            당신 모습이 바보스럽다는 것 모르겠어요?

To live a lie would bring us pain                        거짓된 삶은 사는 건 우리에게 고통만 줄 뿐이니,

So release me and let me love again               그러니 놓아 주세요, 다시 사랑 할 수 있게 해 주세요.

Let me go , let me go                                        떠나게 해 주세요. 떠나게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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