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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 (16대)ㆍ노짱ㆍ변호인

by 당대 제일 2022. 1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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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盧武鉉ㆍ1946~2009ㆍ63세)"은 1966년 "부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막노동에 뛰어들었다가, 독학으로 1975.03월 (30세)에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1년을 재직하다가 그만두고, "부산"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여 여러 인권 사건을 변호하였다.  2013년 영화 "변호인 (The Attorneyㆍ주연 송강호 (노무현 역)"의 실제 주인공이다.

 

1. 노무현 (盧武鉉1946~2009향년 63)

16대 대통령 (2003.02~2008.02) 판사 (대전지방법원)사법시험 합격(17회ㆍ1975)ㆍ2선 국회의원(13대/ 15대)ㆍ해양수산부 장관 (6대)

•  출 생 : 경남 김해군 진영읍 본산리 봉하마을

•  사 망 : 양산 부산대학교병원 (경남 양산시 물금읍 범어리)

•  사 인 : 투신 자살(봉화산 부엉이 바위)

•  별 칭 : 노짱(노무현 짱)ㆍ노공이산ㆍ노시개

•  학 력 : 부산상업고등학교          •  종 교 : 불교

•  처 : 권양숙        •  자 녀 : 1남 1녀ㆍ아들 - 노건호ㆍ딸 - 노정연

•  가 족 : 부- 노판석ㆍ모- 이순례ㆍ형- 노영현 (1932~1972)ㆍ노건평 (1942~)

노무현

1988년 "김영삼(통일민주당 총재)"의 공천을 받아, 제13대 총선에 출마하여 "부산 동구"에서 당선되며, "5공 비리 특별위원"으로 활동했다. 1990년 "3당 합당"에 반대하면서 "김영삼"과 결별한다.

"김대중 정부"에서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냈고, 2003년 국민경선제에서 "새천년민주당" 소속으로 "제16대 대선"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나, 2003년 말에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고 2004년 초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한 개혁 세력들이 주축이 되어 창당한 "열린우리당"에 입당하였다.

2004년 무렵,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 방지법"이 정한 "중립의무 및 헌법 위반"을 시유로 국회로부터 (야당)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대통령직 재임 중 탄핵 소추"를 당해 대통령 직무가 정지되었다. 하지만 이후 탄핵을 주도했던 "새천년민주당ㆍ한나라당ㆍ자유민주연합"은 여론의 역풍에 휩싸여, 제17대 총선에서 참패하였고, 얼마 후 "헌법재판소"에서 소추안을 기각하며 다시 대통령 직무에 복귀하였다.

2. 1988년,  "5공 청문회 스타"로 정계 입문

정계 입문 초기인, 1988.06.27일, "5공 비리 특별위원회"가 구성되어, "제5 공화국 정치 권력형 비리"에 대해 진행된 청문회에서 직설적인 화법으로 "청문회 스타" 자리에 오르기도 하였다. (당시, "5공 청문회 스타 3인방"은 노무현(1946~2009)ㆍ 이해찬 (1952~ ㆍ7선 국회의원)이인제 (1948~ ㆍ6선 국회의원)이었다)

이는 대중적 인지도를 크게 끌어올려 대통령 당선의 밑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임기 중에는 "대통령 못 해 먹겠다ㆍ미국 엉덩이 뒤에 숨어서" 등 그의 화법이 논란이 되며 보수 언론으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합법화ㆍ국가보안법 폐지 검토ㆍ2007.10.04일 남북정상회담 당시 김정일과의 회담에서 NLL에 관한 발언"이 오해를 불러, 보수 언론의 공격을 받았다.

보수 언론들은 "노무현"을 "반미주의자"이며 "좌파"로 규정하고 공격을 가했으나, 실제 임기 중에 펼친 정책은 그러한 노선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진보 진영으로부터는 "한미 FTA 추진ㆍ이라크 파병"등 노무현 정부의 정책이 "신자유주의 우파에 가깝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진보 언론"으로부터는 "신자유주의자"라고, "보수 언론"에게는 "반미주의자"라며, 양측 진영에서 모두 비판받은 대통령으로 평가받는다. "행정수도 이전ㆍ혁신도시" 등 지방 균형 발전을 추진하였으나, "세종특별자치시 수도 이전"은 "헌법재판소"에서 "관습 헌법"이라는 이유로 "위헌 결정"을 내려, "행정도시"로 선회하였다. 퇴임 후 고향 "김해의 봉하마을"로 귀향하였다.

2009년 검찰의 "정관계 로비 수사"가 전방위로 확대되면서, 노무현의 측근 세력들이 수사 대상에 오르게 되었고, 노무현과 개인적 친분이 있던 "박연차"로부터 노무현 일가가 금전을 수수했다는 포괄적 뇌물죄 혐의를 받아 조사를 받았으며, 노무현 또한 검찰 조사를 받기에 이르렀다.

※ 박연차 (朴淵次ㆍ1945~ 2020ㆍ향년 75세ㆍ경남 밀양) 태광실업의 회장

한나라당 및 노무현을 후원한 것으로 유명하다. 비리ㆍ탈세ㆍ정관계 로비 사건 등의 의혹으로 2008.12월 검찰의 수사를 받았다. 2째 형 "노건평"과 더불어 "농협의 세종증권 인수 관련 뇌물"을 건넨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아내가 받았다"는 노무현의 주장과는 달리, "박연차"는 검찰 조사에서 "노무현"이 직접 전화를 걸어 자녀들의 집 장만을 위한 "100만 $를 요구했다."고 일관되게 진술하였고, 비서관을 통해 요청을 받고 차명계좌에서 "노건호(아들)ㆍ연철호(조카사위)"가 동업하는 기업에 500만 $를 송금한 사실도 밝혀졌다.  이러한 노무현 일가의 "640만 $ 수수 의혹"은 현재까지도 해소되지 않고 있다.

이 같은 "뇌물 수수 직접 개입" 의혹이 수면으로 부상하면서 궁지에 몰리게 되자, 노무현은 그해 05.23일 자택 뒷산인 "봉화산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자살하였다.

"양산 부산대학교병원"에서는 기자회견을 통해, "두부 외상ㆍ다발성 골절" 등을 사망 이유로 결론 내렸다. "노무현"이 사망하면서, "법무부"는 "노무현의 뇌물 수수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를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시켰다. 사후 "봉하마을"에는 전국에서 500만여 명의 추모객들의 발길이 이어졌고,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노무현

3. 주요 업적

권력층에 만연해 있던 "권위주의ㆍ정경유착"을 타파하고, 기존 정권이 하지 못했던 각종 재벌 개혁을 시행한 것이 꼽힌다. "상속증여세의 포괄주의를 도입해 대기업 총수의 탈세 여지를 좁힌 것ㆍ증권 관련 집단소송제를 시행한 것ㆍ대기업 간 불공정 담합에 대한 적발과 처벌을 강화한 것" 등이 높게 평가받는다.

주요 실책으로는 "정치적으로 친인척 및 측근비리ㆍ사회적으로 교육 정책 및 부동산 정책의 실패ㆍ 경제적으로 양극화 심화에 따른 민생경제 파탄ㆍ외교적으로 햇볕정책의 실패" 등이 꼽힌다. 부동산 정책은 전반적으로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았고,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노무현 정부에서 소득 분배 지표가 더욱 악화되어 서민경제의 파탄을 초래했다는 비판도 있고, "반미적 입장ㆍ편협한 국수주의ㆍ친북적 정책"으로 인한 외교적 모순으로 국제사회에서 신뢰를 잃었다는 분석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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