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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공산주의 (남로당 • 빨치산 • 연안파 • 소련파)

공산당 ① 계보ㆍ고려공산당 (~1919)ㆍ조선공산당 (1925~)

by 당대 제일 2022. 1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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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共産黨Communist party)""벨기에"의 청년 헤겔파 사회주의 조직인 "브뤼셀 공산주의자 연락위원회"와 영국의 기독교 사회주의 단체인 "정의자 동맹"1847.06월에 합당하여 만들어진 "공산주의자동맹 (Communist League)"이 그 시초이다. "공산주의자동맹" 창당 시기에 씌여진 선언문이 바로 "공산당 선언 (독일어: 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이다.

 

1. 공산당 계보

"공산당 선언"은 공산주의 사상가인 "카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에 의하여 집필된 공산주의자들의 최초의 강령적 문헌으로, 1848.02.21일 첫 출판되었다. 19C 중엽, 독자적인 정치 세력으로 무대에 등장한 "프롤레타리아"에게 역사적 사명과 해방의 앞길을 밝혀 주고,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지도적 지침을 확립한다"는 목적의식 하에, 1847 "마르크스엥겔스"에 의해 초안이 작성되었다. 1847, "마르크스엥겔스"가 가입한 "의인동맹(義人同盟Bund der Gerechten)" "공산당 선언"을 동맹의 정책문서로 채택하였다.

고려공산당 (1919년 이전 / 이동휘ㆍ여운형)

조선공산당 상해지부 (중국공산당 강소성위원회 법남구 한인지부) → 2개의 정당 :  "상하이" 고려공산당 (1921)"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 (1919) ) 1921.06.27 : 자유시 참변(自由市慘變)흑하사변(黑河事變) 발생

• 상하이 (1921) : 이동휘ㆍ김립 → 장덕수 → "상하이 고려공산 청년동맹" 결성 : 박헌영 (책임 비서)ㆍ김단야 활동

• 이르쿠츠크 (1919) : 김철훈 → 여운형

조선공산당 (1925.04)

1925.04 : 서울에서 "박헌영김단야조봉암" 주도 (김재봉(1) 선출)  고려공산 청년회(당의 외곽단체) 결성 : 박헌영(책임비서) ㆍ일제에 의해 해산 (1928.12.10, "12월 테제""조선공산당" 임시 해산)

 1945 해방 장안파 (08.15서울 종로3가 장안빌딩) + 재건파 (08.20박헌영) = 조선공산당(08.24) 서울파 (정백) 경성콤그룹(박헌영)화요회(리승엽홍남표)

  1945.09.11 :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재건 → 국제공산당의 조선공산당 승인, "김일성"에게 북조선분국을 세우도록 지시  

  1945.12.17 :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3차 확대집행위원회 김일성 (책임비서) 선출ㆍ빨치산파 (김일성)북조선분국북조선로동당으로 개칭

1946.11.23(남조선): 조선공산당 + 조선신민당 + 조선인민당 = 남조선로동당 설립 (북조선로동당에 대한 위기감에 설립) →  모쳬 : 박헌영 (1945) + 김두봉 (1946ㆍ연안파)  + 여운형 (1945ㆍ조선건국준비위원회)

1949.06.30 : 북조선 로동당 + 남조선 로동당 = "조선로동당"으로 개칭  (실권은 소련 군정을 등에 업은 빨치산파박헌영남로당 인사는 숙청)

 한국 사회주의 운동 역사는 "화요회북풍회서울파ML(Marx-Lenin)"등이 주도했다.

"상해파이르쿠츠크파"의 결합으로 탄생한 "화요파" 같은 일본 유학생들이 결성한 "사회주의" 조직인 "서울파ML(Marx-Lenin 파)"와는 대립관계에 있었다 "북풍회" "조선공산당" 내의 지도적 위치를 놓고 한때 대립하기도 했으나, 1925.03.25일 합동을 결의했다.

계보

2. 자유시 참변 (自由市慘變)ㆍ흑하사변(黑河事變) → 군권 장악통수권 갈등

"자유시 (自由市) 참변ㆍ흑하사변 (黑河事變)"은 독립운동사상, "최대의 비극ㆍ불상사"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소련 영토인 "스보보드니(이만ㆍ연해주 자유시)"에서 "붉은 군대"가 "대한독립군단" 소속 독립군들을 포위ㆍ사살한 사건으로, "고려 공산당"의 "이르쿠츠크 파ㆍ상해 파" 간의 정면 대결로 발생한 것이다.

• 일 시 : 1921.06.27

• 주 체 : 상하이 파 공산당→ 대한의용군(대한독립군단 소속)ㆍ사할린 의용군ㆍ이항군   /   이르쿠츠크 파 고려공산당→ 고려혁명군(임시 고려군정회)ㆍ자유대대 + 소련군(볼셰비키 군)

• 피 해 : "독립군 960명"이 전사하였으며, 약 1,800여 명이 실종되거나, 포로가 되었다. (당시 대한독립군단 총 병력은 3,500여 명ㆍ독립군단 : 12개ㆍ한인의병대 : 8개ㆍ총 20여개)  "대한의용군" 2,000여 명 가운데, 100명이 사망하고, 800여 명이 포로가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나머지는 이곳을 탈출하여, 다시 "북만주"로 돌아왔다.

• 사 유 : "연해주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 독립 군대 중, "자유대대ㆍ이항군"사이에 "독립군 통수권"을 둘러싼 갈등으로 일어났다.

• 결 과 : 사건이 일어날 당시, 조선의 분산된 독립군들이 모두 "자유시"에 집결하였기 때문에, 이 사건을 계기로 "만주ㆍ연해주 지역" 조선독립군 세력은 사실상 모두 와해ㆍ궤멸되었다.  탈출한 사람은 드물고, 분산되었던 조선독립군들이 모두 모여서 3,500명의 대규모 부대를 이루었다가, 적군에 모두 사살, 부상당하거나, "수용소"로 끌려감. 여기서 살아남은 "독립군"은, 대부분이 "상하이 파 공산당"으로 들어갔다.

• 자유시 집결 목적 : 분산돼 있던 "독립군 부대들"이 힘을 합쳐, 단일한 조직 아래 "대일항전"을 전개하고, "러시아 적군"을 도와, "일본군"을 몰아냄으로써 "자치주"를 보장받으려는 의도

< 자세한내용은 이 Tistory 내에 있는 "사건- 21.06 : 자유시 참변 (흑하사변) → 독립군단 와해"를 참조하여 주세요 >

3. 서울청년회ㆍ북풍회ㆍ화요회ㆍML파

① 서울 청년회 (1921.01~1929.08)

서울에서 발생한 최초의 "청년 단체"였으며, "조선청년연합회"의 성원으로 등록한 회원 단체이기도 하였다. 이 회는 창립 초기에는 "민족주의적 성격"의 청년단체로 출발하였다.  한국 사회운동에 많은 활동과 역할을 남겼다.

• 조 직 : 1921.01.27 : 서울에서 조직된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청년 사상단체 1922.04 이후 : "사회주의 노선"으로 전향  1929.08.31 : 해체 ("조선청년 총동맹" "중앙 청년동맹"에 합류하기 위함)

• 주 체(창립 초기): 이사장(대표) : 이득년 / 이사 : 장덕수ㆍ이득년ㆍ김한ㆍ김사국ㆍ오상근ㆍ김명식 등 7인

• 1919년 "3ㆍ1운동" 이후, 전국에는 각종 "청년 운동단체"가 많이 생겨났고, 전국 규모의 "연합회"가 실현되는 경우, 연합체에 대표를 파견하고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가맹자격을 가질 수 있는 새로운 청년 단체를 조직해야 할 필요성에 의해, 결성되었다.

• "서울청년회"는 날로 고조되어가는 "사회주의 풍조" 속에서 "장덕수"를 중심으로 하는 "민족주의 계"와 "좌경파(김사국ㆍ김한 중심)"로 대립되었고, "김사국" 등은 "장덕수 일파"를 "서울청년회ㆍ조선청년연합회"에서 추방하고, 청년 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려 하였다.  이들은 "김윤식(1835~1922ㆍ구한말 개화파 정치인ㆍ중추원 간부였으나, 이용직과 함께 3ㆍ1운동에 동조ㆍ작위 박탈)"의 사회장 반대투쟁으로부터, 이른바 "사기 공산당사건" 규탄을 계기로 하여 1922.04월, "조선청년연합회 제3회 정기총회"에서 "서울청년회 대표"와 이에 동조하는 "18개 청년 단체"가 탈퇴하고, "연합회 간부"를 비난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 결국 한국 청년단체는 "연합회 계ㆍ서울청년회 계"로 분열되고 말았으며, 이때부터 "서울청년회"는 "민족주의 진영"과 정면으로 대결하면서, 본래의 "청년단체"가 아니라, 하나의 "당적 존재"로 전환되었으며, "자기파"의 사상청년단체 조직에 주력하게 되었다.

• 1922년 가을부터 "서울청년회"는 "이영ㆍ김사국ㆍ한신교" 등에 의하여 더욱 좌경화되었고, 강령을 "역사적 진화의 필연적인 신사회의 건설을 목표로 하여 돌진한다. 또 계급적 자각과 단결로 무산 대중 해방 운동의 전위임을 기한다."라고 개정하였다. 1923.03월, 서울에서 94개 단체 대표의 참석으로 "전조선 청년당 대회"를 주최하였으며, "전조선 노동대회"를 준비하기도 하였고, 1924년에는 "조선청년총동맹" 결성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② 북풍회 (北風會ㆍ1921.01~ 1929.08)

• 조 직 : 1924.11.25 : 서울에서 결성된 사회주의 사상단체"북성회(北星會ㆍ재일한국인 사회주의단체)"의 국내지부  1926.04.14 : "정우회(友會)"로 통합해체

• 주 체 : 김약수ㆍ김종범ㆍ마명ㆍ정운해ㆍ남정철ㆍ서정희ㆍ박창한ㆍ박세희ㆍ신용기(일명 신철)ㆍ송봉우ㆍ이호 외 13명

• 1921.11월, 재일한국인 20여 명이 모여, "재일한국인 사회주의 운동단체"의 효시인 "흑도회(黑濤會)"를 결성하였으나, 1921.12월 "무정부주의"를 주장하는 "박열(朴烈)파"와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김약수 파"의 대립으로 해산되었다. 해산 후, 1923.01월 "김약수 파"는 "일본 동경"에서 사회주의 사상단체인 "북성회"를 조직하였다.  "동경"에 본부를 둔 "북성회"는 자파의 인물들로 국내의 "사회주의 단체"를 장악하려 하였다.  이때의 구성원은 "김약수ㆍ김종범ㆍ송봉우ㆍ변희용ㆍ김장현ㆍ이여성" 등 60여 명이었다.

• "북성회"는 국내의 유력한 청년사상단체인 "서울청년회"와 반목이 계기가 되어, 국내 단체를 체계적으로 지휘하기 위한 기관을 설치할 필요성을 느꼈고, 이에 따라 1923.10월, "서울 재동"에서 "김약수ㆍ김종범ㆍ마명ㆍ이헌ㆍ김재명" 등 160여 명이 모여, "건설사(建設社)"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이를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1924.11월 "북풍회"가 결성되었다.

• 1925.03월 "임시총회"를 열고, "화요회"와의 합동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두 단체는 합동 뒤부터 반목이 시작되었고, "조선일보(1925.09.08일자)" 사설에서는 "두 단체의 밀월은 사실상 결렬되었다"고 전하였다.  특히 1925.05월 "치안유지법"이 조선에서도 실시되자, "민족주의자"들이 우세하게 되었고, 여러 차례의 "공산당 검거"로 "사회주의 세력"은 약화되었는데, 결국 "북풍회"는 1926.04.14일 "정우회(正友會)"로 통합하여 해체되었다.

③ 화요회 (화요파ㆍ1924.11~ 1929.08))

"화요회"라는 이름은 "칼 마르크스(1818.05.05.)"의 생일이 "화요일"인 것에 착안해 이름을 변경"조선공산당" 창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김재봉""1차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가 된다.

• 조 직 : 1924.11.19 : 사상연구 단체였던 "신사상연구회"가 행동단체로 개편하여 탄생 1926 : 해체 (1925, "1조선공산당 탄압사건" 영향)

• 주 체 : 서울에 본거지, 약 60여 명의 회원 /  일본 유학생 출신들로, 박헌영ㆍ조봉암ㆍ김재봉ㆍ김찬ㆍ윤덕병ㆍ홍덕유ㆍ홍증식ㆍ임원근ㆍ김태영ㆍ조동호 등

• "화요파"는 "조선공산당"이 처음으로 결성되었으나, 일제의 탄압ㆍ내분으로 와해된 사건인 "제1차 조선공산당 탄압사건(1925년)"으로 주요인물들이 검거ㆍ활동이 중단되다시피 하다가, 1926년 해체했다.

④ ML 파 (Marx- Lenin 파)

• 조 직 : 1926.04 : 서울에서 "서울파 일부 + 고려공청만주총국 일부 + 이르쿠츠크 파 + 일월회"로 결성  1953 : "한국전쟁" 이후까지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주 체 : 김근ㆍ안광천ㆍ양명ㆍ한위건ㆍ고경흠 등

• 1926년, "조선공산당" 형성 이후, "화요파"가 대세를 잡자, 그에 대응하여 만들어진 분파이다.  이후 "조선공산주의" 운동은 "화요파ㆍML 파ㆍ서상파"의 3파전이 시작되었다.  "조선공산당"이 와해된 이후에도 "ML 파"는 당 재건을 위해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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