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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공산주의 (남로당 • 빨치산 • 연안파 • 소련파)

공산당 ⑤ 고려공산당ㆍ조선공산당ㆍ공산당 사건

by 당대 제일 2022. 1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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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공산당 한인지부"에는 조선인이 조직한 "공산주의" 정당 2개가 존재하는데, "상하이 고려공산당 (1921년)ㆍ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 (1919년)"으로 나뉜다. 2개 정당은 서로 대립하면서, "소련 정부ㆍ코민테른"으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고 지원을 얻고자 경쟁ㆍ반목하며, "한인투쟁부대의 통수권"을 둘러싸고 대립을 벌여, 1921.06.27일 "자유시 참변"이라는 비극을 낳기도 했다.

 

1. 고려 공산당 (高麗 共産黨ㆍ1919년 이전)

 고려공산당 (조선공산당 상해지부)

상하이에서 "여운형ㆍ이동휘"등이 결성한 조선인들의 공산당. 국제공산당은 "1국 1당 원칙"을 내세워, "고려공산당"은 "중국공산당"에 흡수되었다. 그래서 "중국공산당 강소성위원회 법남구 한인지부"에 소속하게 되었다.  "한인지부"를 "여운형ㆍ안영흠ㆍ김원식ㆍ현창건ㆍ홍남표" 등이 이끌었다.

고려공산당

 상하이 고려공산당ㆍ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

한인지부에는 조선인이 조직한 "공산주의" 정당 2개가 존재하는데, "상하이 고려공산당 (1921년)ㆍ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 (1919년)"으로 나뉜다. 2개 정당은 서로 대립하면서, "소련 정부ㆍ코민테른"으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고 지원을 얻고자 경쟁ㆍ반목하며, "한인투쟁부대의 통수권"을 둘러싸고 대립을 벌여, 1921.06.27일 "자유시 참변"이라는 비극을 낳기도 했다.

양파의 파쟁이 극심해지자, "코민테른"은 화해ㆍ통합을 권유했으나, 실패하였다. 1922.12월, 양파를 모두 해체시킨 후, "꼬르뷰로"를 설치, 통일된 "공산당"을 조직하게 했다.  "상하이ㆍ이르쿠츠크" 양파의 무원칙적인 파쟁은 초기 공산주의 운동뿐 아니라, "민족해방운동" 전체에 악영향을 미쳤다.

 1921 : 상하이 고려공산당 (이동휘ㆍ김립ㆍ장덕수)

 주 체 : 이동휘ㆍ김립ㆍ박진순ㆍ이한영        목 적 : 이승만 대통령ㆍ남한 검사 살해        조 직 : 1921년- 상하이에서 "이동휘"를 중심으로 결성된 사회주의 단체

"이동휘(상해 임시정부 국무총리)"가 종전의 "한인사회당"을 모체로 조직.  "보이틴스키(코민테른 극동국 서기)"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면서, 중국ㆍ일본의 사회주의자 및 국내의 "장덕수ㆍ최팔용" 등과도 연계를 맺고 있었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는 "이동휘"가 "한인사회당 당수"로서 "국무총리"에 취임함으로써, "민족ㆍ사회주의 세력의 연합정부" 형태를 띠었다.

1919 :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 (김철훈ㆍ여운형)

정식명칭은 "전로 고려공산당"이나, "고려공산당"과 대비시켜,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이라 부른다.  1918.01월, "이르쿠츠크 공산당 한인지부"로 출발하여, 1919.09월 "전로 한인공산당"으로 명칭을 바꾸었다가, 1920.07월 다시 "전로 고려공산당"으로 개칭했다.

  주 체 : 고문- 보리스 스미야스키ㆍ김철훈(위원장)ㆍ최고려/오하묵(군정부장)ㆍ이성(비서장) 등 / 1921년 "상하이"에 지부를 설치 : "여운형ㆍ김만겸ㆍ조동호" 등이 위원으로 활동.  "고려공산 청년동맹"을 결성 : "박헌영ㆍ김단야ㆍ임원근" 등이 주요간부로 활동        목 적 : 청년교육ㆍ군사훈련에 힘썼으며, 기관지 "경세종"을 발행        조 직 : 1919년- "연해주(러시아) 이르쿠츠크"에서 "김철훈"이 중심으로 결성된 사회주의 단체

2. 조선 공산당 (朝鮮 共産黨ㆍ1925.04월)

 조선공산당 (Communist Party of Korea)

1925.04.17일, 창건한 "공산주의 정당"이다. 1928년, "일본 탄압ㆍ내부 분열"로 해산되었다가, 해방 후, "장안파(1945.08.15)ㆍ재건파(08.20)"가 출범하여, 08.24일 최종 통합되어, "조선공산당"이라는 당명으로 재건되었다.

1946.11.23일, "조선공산당"은 "조선신민당ㆍ조선인민당"과 합당하여, "남조선로동당"의 전신이 되었다.

 조선공산당 지도자

<  제1차 > 1925.04.17~ 1925.11 : 1대 김재봉 → 일제당국에 의해 구속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  / 고려공산 청년회(당의 외곽단체): 책임비서 박헌영  /  1925.11~ 1925.12 : 임시 박헌영 (당시 상해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제2차 > 1925.12~ 1926.02 : 2대 강달영 • 고려공산청년회 : 책임비서 권오설  /  1926.02~ 1926.06 : 3대 강달영 고려공산청년회 : 책임비서 권오설 → "6ㆍ10 만세운동"에 가담ㆍ실패로 해산(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

 제3차 > 1926.09~ 1928.08 : 4대 김철수→ 5대 안광천→ 6대 김준연 (속칭 ML 7대 김세연 1928.08월 일제에 의해 검거 (3차 조선공산당 사건)  /  비정통파 조선공산당(속칭 춘경원당): 1927.12~ 1928.06 : 이영

 제4차 >  1928.03~ 1928.07 : 8대 차금봉 (최초 노동자 출신) • 고려공산청년회 : 책임비서 고광수  → 일제가 "차금봉ㆍ김재명"등 고문치사, 170명 구속ㆍ검거→ 조직 와해

< 12월 테제 (1928.12.10) 이후 > 1928.12.10~ 1945.08.14 : "12월 테제"로 "조선공산당 "임시 해산

< 1945.08.15 해방이후 >  "장안파" 조선공산당 : 1945.08.15~ 1945.08.24 : 책임비서 이영  /  "재건파" 조선공산당 : 1945.08.16~ 1946.11.23 : 책임비서 박헌영(조선공산당 재건운동 지도자)

3. 공산당 창당

조선의 "사회주의 운동"은 1920년대 초부터, 진보적인 "조선인 유학생"들이 "일본" 유학기간동안 "사회주의"를 접하면서, 점차 수면으로 나오기 시작하였다. "사회주의 10월 혁명"에 영향을 받은, "몰락한 양반ㆍ인텔리어ㆍ민족주의계열" 등이 중심이 되어, "조선공산당"이 설립되었다. 하지만 "ML파ㆍ화요파ㆍ서울파" 등 파벌들의 난립으로, "코민테른"에서 서로 자기들이 "조선공산당"이라고 주장할 정도로 심각한 진통을 겪었다.

1925.04.17일, 서울 시내의 식당인 "아서원"에서 "박헌영ㆍ김단야ㆍ조봉암" 등에 의해, 비밀리에 "조선공산당"을 창립하고, 초대 책임비서로 "김재봉"을 선출했다. 04.18일, "박헌영"의 집에서 당의 외곽단체인 "고려공산청년회"를 결성하는데 성공하였고, "상해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였던 "박헌영"을 "고려공청회 책임비서"로 선임하였다. 이 당은 "화요회 출신"이 주동이 되어 이 당을 조직하였다고 하여, 일명 "화요회당"이라고도 불렀다. 그러나 1925.11월, "김재봉"이 일본 경찰에 의해 구속되면서, 해체ㆍ재건을 거듭한다.

4. 공산당 사건 (1~ 5차ㆍ1925~ 1929)

① 1925  :  1차 공산당 사건 (신의주 사건)

"김재봉ㆍ박헌영"은 "공산당 조직 확대ㆍ고려공산 청년회원 모스크바 파견훈련"을 비밀리에 적극 추진하다가, 1925.11.22일 "평북 신의주"에서 "조선총독부 밀정"에 의해 계획이 탄로되었고, "김재봉ㆍ강달영" 등이 체포되었다.  이후 "신의주"는 물론, "간도"에 있던 "조선공산당 근거지"까지 수색, 곧 일경에 일망타진되었다.

② 1926  :  2차 공산당 사건 (강달영 당 사건)

1925.12월, "서울"에서 극비리에 "조선공산당"이 "2차"로 재조직되었다. 재조직된 공산당원들은 "1차 공산당"에 가담했던 인물들로, 당 책임비서에는 "강달영", "고려공산 청년회"의 책임비서에는 "권오설"이 각각 선출되었다.  이들은 모두 "화요회"의 요인이며, "1차 조선공산당"의 당원이기 때문에, 이들에 의한 "2차 조선공산당 ㆍ고려공산 청년회" 재건은 사실상 "1차 당ㆍ공산청년회"의 후속조직이었다.  그러나 "강달영 당"으로 부른다.

"강달영 당"의 정치목표는 좌우연합의 국민적인 당을 조직하여, "공산당"이 실권을 장악하려는 것이었다.  "강달영 당"은 "민족주의 진영ㆍ천도교 중진" 등과도 접촉을 시도, 민족적 기반의 "좌ㆍ우 연합당"을 성취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을 추진하였다.  1926년, "6ㆍ10만세운동"의 참여를 통하여, "3ㆍ1운동"을 재현하려던 "강달영 당"의 계획은 거사 직전에 "밀정"에 의해 탄로되어, 일망타진 당하면서, "좌ㆍ우 연합당"은 실현되지 못하고, 간부들은 구속되고, "강달영 당"은 강제 해산당했다.

※ 정우회 (正友會) 선언 : 1926.11월, "일본"에 있던 "사회주의 유학생" 단체인 "일월회(一月會)"의 간부인 "안광천ㆍ하필원" 등이 국내에 비밀리에 잠입하였다.  이들은 1926.12월에 "선언서"를 발표하였는데, 이 선언을 "정우회 선언"이라고 한다.  이 선언에서 "한국의 사회주의 운동은 민족주의 운동을 무시하거나 경시하여서는 안 되며, 종래의 경제투쟁 형태를 정치투쟁 형태로 바꾸어야 한다."며, 노선의 전환을 주장하였다.  이 선언은 "민족주의ㆍ사회주의" 양 진영의 협동을 추진하자는 내부의 의견을 결집시켰다.

③ 1928  :  3차 공산당 사건 (ML당 사건)

1926.12월, "정우회 선언"에 따라, "조선공산당"이 재건되었는데, 이를 "ML 당"이라고 한다. 이 당은 "조선공산당" 사상 이른바 "파쟁청산의 통일적 당"이라고 한다.  "코민테른"은 "ML 당"에 대하여, "당 조직 운영방침ㆍ단일의 민족혁명전선 조직 방침ㆍ운영 방침" 등에 대한 11개조의 지령을 내려 보냈으며, 특히 "단일 민족혁명전선의 운영방침"을 명시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ML 당"은 일경의 추적을 피하기 위하여, 당 책임비서를 "김철수ㆍ안광천ㆍ김준연ㆍ김세연"등으로 수시로 바꾸었지만, 그들은 1928.02월 일경에 의해 검거되고 말았다.  이 당의 "고려공산 청년회"도 당과 같은 이유로 책임비서로는 "양명ㆍ하필원ㆍ김철" 등으로 자주 바꾸었으나, 당과 함께 검거 당하였다.

※ 춘경원당 (春景園黨) : 1927.12월, "정통 조선공산당"에서 배제된 "이영" 등이 "서울 춘경원"에서 "ML 당"의 정통성을 탈취하기 위하여, "ML 당"과는 별도로 "조선공산당"을 결성하였다.  그러나 "코민테른"의 승인을 얻지 못하고, 1928.04월과 6월에 일경에 일망타진되고 말았다.  "비 정통파 조선공산당" 또는 "춘경원당(春景園黨)"이라고도 한다.

④ 1928  :  4차 공산당 사건

1927.05월, "근우회"가 발족되었고, 1928.02월, "제3차 조선공산당사건(ML당 사건)"으로 "김준연" 등 34명이 구속되었다.  07월에는 "제4차 조선 공산당사건"으로 170여 명이 구속되었고, 9월에는 "간도 공산당사건"이 일어나, "조선총독부"의 탄압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1929  :  5차 공산당 사건

1929.02월, "원산노동 연합회"가 "총독부"의 노동운동 탄압에 맞서, "총파업 투쟁"을 벌였다.  1929.06월, "제5차 공산당사건"으로 "인정식" 등 50여 명이 구속되었다. 이때 "안광천" 등은 "북경"에서 "조선공산당 재건동맹"을 조직하였다. 1930년, "여학생 만세시위 사건"으로, "사회주의 계ㆍ기독교 계"가 혼재된 여성운동단체인 "근우회"의 "사회주의 계열" 간부들이 대거 검거되었다.

5. 1945년 광복이후

"조선공산당"은 이후 1945.09.11일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재건되었다. "소련 군정"은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의 "1국 1당" 원칙에 의거, "조선공산당"을 승인하고, "김일성"에게 "북조선분국"을 세우도록 지시했다. 1945.12.17일, 열린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제3차 확대집행위원회"에서 "소련 점령군 사령부"의 각본에 따라, "김일성"이 책임 비서로 선출되었다.

① "임시 정부"와의 관계

"조선공산당"은 "상하이 임시정부의 법통"에 비판적 입장이었다. 1945년 말, "임정 요인들"의 귀국 직전, "조선공산당"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공헌은 어느 정도 인정하지만, 일제의 식민지 체제하에서 악전고투하며, 구사일생해 온 것은 노농대중이고, 이들이 민족해방의 주체"라고 주장하였다. 즉, 국내 혁명세력을 "민족 해방운동"의 중심에 두고, "인공이 그것을 이어받았다"는 이유를 들어 "임정 추대"에 반대하였다.

② 폭력투쟁 노선과 인민의 외면

1946.01.03일,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민족통일자주독립 촉성 서울시민대회"를 열었다. 원래 "서울시민대회"는 "신탁통치 반대"를 위한 대회였는데, 갑자기 "찬탁"으로 바뀐 채,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을 지지하는 결의를 하였다. 이는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좌익"이 극단적인 폭력투쟁노선과 더불어, 인민들에게 외면 받는 원인이 되었다.

③ 북조선로동당ㆍ남조선로동당

실질적으로 "조선공산당"은 "김일성의 빨치산파"의 압력을 받고 있었으며, "빨치산파"가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북조선로동당"으로 개칭하자, "남조선"에서도 "조선공산당ㆍ조선신민당ㆍ조선인민당"이 합당하여, "남조선로동당"이 세워졌다. 1949.06.30일, "북조선로동당ㆍ남조선로동당"은 "조선로동당"으로 이름을 바꿔 합쳐졌으나, 실권은 "소련군정"을 등에 업은 "빨치산 파"에 있었다. "박헌영"을 지도자로 한 옛 "남로당" 인사들은 "로동당" 내에서 "남로당파"를 형성하였으나, "한국전쟁" 이후, 모두 숙청의 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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