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세노폰 (XenophonㆍBC 430?~354?ㆍ76세)"는 "소크라테스"의 제자로, "플라톤"과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그가 살았던 BC 4C에 대한 역사ㆍ소크라테스의 말ㆍ고대 그리스의 생활사에 대한 기록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1. 크세노폰 (XenophonㆍBC 427?~355?ㆍ향년 72세)
BC 5C 말~4C 전반에 정계와 지식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던 "스파르타 왕 아게실라오스"나 "소크라테스"와 친분이 두터웠던 것으로 보인다. 저서들 가운데는 "철학"으로도 "역사학"으로도 분류할 수 있는 저작이 상당한데, 실제로 그는 고대에는 "1차적으로 철학자, 2차적으로는 역사학자"로 간주되었다. 자신의 조국 "아테나"에서 추방되어, "스파르타"와 가까이 지내며, 중간 입장에서 남다른 경험을 쌓을 수 있었고, 따라서 자신이 살던 급변의 시대를 직시하는 보기 드문 "통찰력"을 갖출 수 있었다. "소아시아(고대 페르시아(바빌론, 이란) 키루스 대왕)"전쟁에 참가하였고, 귀국 후 "엘리스"에서 은퇴하였다.
• 출 생 : 고대 그리스 아테네 근처 • 사 망 : 고대 그리스 코린토스나 아테나 • 부 모 : 상류층 출신 • 스 승 : 소크라테스(민주주의) • 저 서 : 헬라스의 역사ㆍ아나바시스ㆍ소크라테스 회상ㆍ키로파에디아 • 아나바시스(올라가기라는 뜻) : 페르시아로 원정을 떠났다가 고국으로 돌아온 여정을 담은 기록의 저서로, 후에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 원정"을 떠날 때, "지리서"로 쓰였다.
2. 용병 생활 : 소아시아 (고대 페르시아 (바빌론ㆍ이란) 키루스 대왕) 전쟁
언제 태어났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학자들 대부분은 그가 B.C 430년경 "아티케"의 도시국가 "아테나이" 근처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고 있다. 크세노폰은 상류층 출신이었으면, 고대 "아티케 귀족"의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B.C 401년, 젊은 시절에 크세노폰은 "키루스(Cyrus)"가 자신의 형인 "아케메네스 제국"의 대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에 대항하는 원정길에 떠났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키루스의 원정"에 참가해야 할지를 놓고, "아테나이"출신의 "소크라테스"에게 물었는데, 스승인 "소크라테스"는 "델포이 신탁"에서 "신"과 의논해 볼 것을 권하였다. 그래서 크세노폰은 그리로 가서,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여행을 성공적으로 잘 마치고 목적을 달성한 뒤 무사히 돌아오기 위해서는 어떤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기도드려야 하는지, "아폴론 신"에게 물었다. "아폴론"은 그가 어떤 신들에게 제물을 바쳐야 하는지 알려주었다.
그는 돌아와서, "소크라테스"에게 예언을 말해주었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듣고, 그가 여행하는 것이 좋은지, 아니면 머무는 것이 좋은지, 먼저 묻지 않고 여행하기로 혼자서 결정하고는 어떻게 여행하는 것이 가장 좋겠는지 물었다고 그를 나무랐다. 그래서 크세노폰은 "아폴론"이 알려 준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나서, 배를 타고 떠나 "키루스"에게 갔다.
"아케메네스 제국"의 대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동생인 "키루스(Cyrus)"는 "팃사페르네스와 싸운다."는 핑계로, "페르시아 인" 병사로 구성된 거대한 군대를 모았으며, 거기다가 그가 "페르시아 병사"보다 뛰어난 전사라고 여겼던 "헬라스(그리스) 군대"도 모았다.("1만 인"으로 알려져 있다) 대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가 전쟁을 선포하기 전에, "키루스"는 "피시디아 사람들이 전쟁 상대"라고 공언하였으며, "헬라스(그리스)" 사람들은 자신들이 "페르시아(아케메네스 제국)" 대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어마어마한 군대와 싸우게 될 것임을 알지 못하였다.
"타르소스"에서 "헬라스(그리스) 병사"들은 "키루스"가 "대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를 몰아내려고 원정을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키루스"를 따르는 데 거부하였다. 그러나 "스파르타" 출신의 "클레아르코스"가 "헬라스(그리스)"사람들을 설득하여 계속 원정대에 남았다. "키루스"의 군대는 "쿠낙사 전투"에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군대와 전투를 벌였다. "헬라스(그리스)" 군대는 선전하였으나, "키루스"는 전사하고 만다. 그러자 얼마 안 되어, "스파르타" 출신의 "클레아르코스"장군이 4명의 다른 "헬라스 장군"과 함께 "휴전 회의"에 초대받았으나, "페르시아 인"들은 이들을 배신하고, 장군들을 참수하였다.
"1만 인"으로 알려진 이들 "헬라스(그리스) 용병"들은 "메소포타미아"의 심장부와 가까운 적국 내륙 한 가운데에 지휘자도 없이 버려졌음을 알게 되었다. 이들은 "크세노폰"을 비롯한 새로운 지휘관을 뽑았으며, 자신들에게 적대적인 "페르시아ㆍ아르메니아ㆍ 쿠르드"를 지나, 북쪽으로 "흑해"연안의 "트라페주스"로 진군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용병대"는 서쪽으로 가서, 고국 "그리스"로 귀환하였다. 그곳에서 "용병대"는 "스파르타"의 "티브론 장군"의 군대에 들어가고, "세우테스 2세"가 "트라케"의 왕이 되는 것을 도왔다.
3. 망명ㆍ죽음
나중에 "크세노폰"은 "아테나"에서 추방되었는데, "코로네이아 전투"에서 "스파르타" 왕 "아게실라오스 2세" 밑에서 "아테나"와 싸웠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가 "페르시아 인"을 위하여 복무했을 뿐 아니라, "소크라테스"를 지지하는 등 다른 이유도 한 몫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크세노폰" 생전에 아들 "그륄로스"가 "만티네이아 전투"에서 "아테나"를 위해 싸우다 죽자, 추방 조치가 취소되었을 것이다.)
그가 "아나바시스"에서 쓴 바에 따르면, "스파르타" 사람들은 "엘리스의 올림피아" 근처 "스킬루스"의 토지를 그에게 주었다고 하며, "크세노폰"은 "코린토스"나 "아테나"에서 죽었다. 그의 사망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며, 역사가들은 그가 자신의 후원자 "아게실라오스 2세"의 찬사를 써서 그를 구했다는 사실만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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