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양사/인물 - 시성 • 철학 • 작가

고대 그리스 ⑤ 플라톤 (BC 428)ㆍ철인 정치론ㆍ동굴의 비유ㆍ이데아

by 당대 제일 2023. 1. 21.
반응형

 

"플라톤 (PlatoㆍBC 428/427/424/423~348/347ㆍ80(75)세)"은 현대 대학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세계 최초의 고등교육기관인 "아카데메이아"를 "아테네"에 세운 장본인이다. 플라톤은 "아카데메이아"에서 폭넓은 주제를 강의하였으며, 특히 "정치학ㆍ윤리학ㆍ형이상학ㆍ인식론" 등 많은 철학적 논점들에 대해 저술하였다. 일각에서는 실제 이름이 "아리스토클레스"였을 것으로 여겨지며, 플라톤은 "넓은, 어깨 폭이 넓은"이라는 뜻이다. 

 

1. 플라톤 (PlatoㆍBC 428/ 427/ 424/ 423~348/ 347ㆍ향년80 (75)세)

소크라테스의 제자ㆍ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ㆍ서양의 다양한 학문에 영향력을 가진 그리스의 철학자ㆍ그가 이성 우위의 전통을 가진 서양 철학에 미친 영향은 더할 수 없이 크다. 영국의 철학자인 "화이트헤드"는 "서양의 2000년 철학은 모두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라고 말했으며, 미국의 시인 "에머슨"은 "철학은 플라톤이고, 플라톤은 철학이다"라고 평했다.

젊었을 때 "소크라테스"에게 배우고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는데, 그의 저서는 모두 "소크라테스"가 주인공으로 된 변증론에 관한 "대화편"이어서 그와 스승과의 학설을 구별하기 힘들다. 스승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그는 정치가로서의 꿈을 버리고, "정의"를 가르치기로 결심하였다.

• 출 생 : 고대 그리스 아테네           • 사 망 : 고대 그리스 아테네           • 부 모 : 부- 아리스톤 (아테네의 전설적인 왕 코드로스의 자손) / 모- 페리크티오네 (그리스 7현인 중 1인인 위대한 입법가 솔론의 후손)- "아테네"의 유력 명문 가문           • 제 자 : 소크라테스 (민주주의)→ 플라톤 (귀족주의철인정치)→아리스토텔레스 (민주주의)→ 알렉산더 대왕           • 연 구 : 수사학(말로 설득하는 기술)ㆍ예술ㆍ문학ㆍ인식론ㆍ정의ㆍ덕ㆍ정치ㆍ교육ㆍ가족ㆍ군국주의           • 업 적 : 이데아론(형이상학)ㆍ국가론ㆍ플라톤 이상주의ㆍ플라톤 실재론→ 고대 서양 철학의 정점

• 저 서 : 소크라테스의 변론ㆍ크리톤ㆍ국가ㆍ법률ㆍ에우튀프론ㆍ파이돈 IIㆍ크라튈로스ㆍ테아이테토스ㆍ소피스트ㆍ정치가 IIIㆍ파르메니데스ㆍ필레보스ㆍ향연ㆍ파이드로스 IVㆍ카르미데스ㆍ라케스ㆍ뤼시스 VIㆍ이온ㆍ에우튀데모스ㆍ프로타고라스ㆍ고르기아스ㆍ메논 VIIㆍ소 히피아스ㆍ티마이오스ㆍ메넥세노스 VIIIㆍ크리티아스 IX

• 명 언 :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들에게 지배당한다는 것이다ㆍ스스로 통치하려는 마음을 갖지 않을 경우에, 그에 대한 최대의 벌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한테 통치를 당하는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 중에서ㆍ사실 소크라테스의 기본적인 정치 철학에 빗대보면,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이라 함은 "무지한 국민들"을 뜻한다고 한다)ㆍ철학자가 통치자이고, 통치자가 철학자인 국가는 행복하다ㆍ국가란 인간이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국가도 인간처럼 가지각색의 성격으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ㆍ최대의 승리는 자기 자신을 정복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정복당하는 것은 최대의 수치다.

"영원불변"의 개념인 "이데아 (idea)"를 통해, "존재의 근원"을 밝히고자 했다. 그의 작품은 1편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논제를 둘러싼 "철학 논의"이므로, "대화편 (對話篇)"이라 불린다. 명문(名門) 출신으로 젊었을 때는 정치를 지망하였으나, "소크라테스"가 사형되는 것을 보고 정계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인간 존재의 참뜻이 될 수 있는 것을 추구, "Philosophia (愛知: 철학)"를 탐구하기 시작하였다.

BC 387년경, "아테네"의 근교에, 영웅 아카데모스"를 모신 신역(神域)에 학원 "아카데메이아(Akademeia)"를 개설하고, 각지에서 청년들을 모아 연구와 교육생활에 전념하였다. 그 동안 2번이나 "시칠리아 섬"을 방문하여, "시라쿠사"의 참주(僭主) "디오니시오스 2세"를 교육, "이상 정치를 실현시키고자 했으나, 좌절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그의 철학의 방향을 잘 말해준다. 생전에 간행된 거의 30편에 이르는 저서는 그대로 현재까지 보존되었는데, 1편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일종의 "희곡 작품"으로서 여러 가지 논제(論題)를 둘러싸고, 철학적인 논의가 오간 것이므로 "대화편(對話篇)"이라 불리며, "소크라테스"가 주요 등장인물이다. 연대에 따라,        ① 전기 (前期) 대화편 : "소크라테스"를 중심으로 주로 "덕(德)이란 무엇인가?"를 논하고, 대체로 "아포리아(aporia)"에 빠진 채 끝남 : 소크라테스의 변명ㆍ크리톤ㆍ메논ㆍ프로타고라스ㆍ고르기아스ㆍ라케스ㆍ카르미데스 등        ② 중기 대화편 : "영혼"의 불멸에 관한 장려(壯麗)한 "미토스(mythos: 神話)"로 꾸며지고, "소크라테스"에 의해 "이데아 론(論)"이 펼쳐지는, 문예작품으로서는 가장 원숙 : 파이돈ㆍ파이드로스ㆍ향연ㆍ국가론 등        ③ 후기 대화편 : 철학의 논리적 방법에 대한 관심이 농후하고, "영혼ㆍ이데아 설"이 "소크라테스"의 모습과 함께 점차 사라지는 것처럼 보임 : 파르메니데스ㆍ테아이테토스ㆍ소피스테스ㆍ폴리티코스ㆍ필레보스ㆍ티마이오스ㆍ노모이 등으로 나눈다. 

"플라톤"에게 "필로소피아"란 "소크라테스"의 "필로소피아"이며, 그는 "소크라테스"만이 "진정한 철학자"라고 생각하였다.  전기에서 중기에 걸친 대화편의 대부분이 "소크라테스"의 추억을 간직하고, "소크라테스" 속에서 구현(具現)되는 "철학자"를 변호, 찬양하려 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재판 장면을 적은 "소크라테스의 변명", 죽음에 직면한 철학자의 태도를 묘사한 "파이돈"은 말할 나위도 없고, "향연"이나 "국가론"도 또한 그와 같은 뜻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의 하나이다.

"소크라테스"에게 "필로소피아"란, 가장 중요한 것을 모른다는 "자신의 무지(無知)"를 깨닫는 데 있었다. 이 "무지를 깨닫는 일"속에 머물며, "아포리아" 속에 있으면서, 근원으로부터의 물음에 스스로를 맡기는 일이 바로 "필로소피아"이다. "전기 대화론"에서, 대화가 항시 "아포리아"에 수렴(收斂)되고, "무지의 고백"으로 끝나는 것은 이와 같은 사실을 말해 준다. "아포리아"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포리아"에 머물기 위한 "필로소피아"의 술책이 "미토스"와 "디알렉티케(dialektike : 問答法)"이다. 시간과 더불어 변하는 일 없이 동일한 것으로서, 머무는 영원불변한 것을 "플라톤"은 "이데아(idea: 形相)"라 불렀다. 

"이데아"는 "생성(生成)에 대한 존재, 다(多)에 대한 하나, 타(他)에 대한 동(同)"이며, 육체의 감각으로 파악할 수 없고, "영혼의 눈(目)"인 "이성"에 의해서만 관찰할 수 있다. "생성"의 세계, "가시계(可視界)"는 존재의 세계(불가시계)를 분유(分有)하며, 모방하는 데에서만 이에 입각하여 존재하고, 두 세계 사이에는 실물과 그림자, 실물과 모상(模像)의 비례가 있다. ("국가론"의 선분(線分)ㆍ동굴ㆍ태양의 비유, "티마이오스"의 우주 창성론(宇宙創成論) 등)

인간이 탄생과 죽음에 의해서 한계 지어진 "이 세상(여기)"과 "저 세상(저기)"의 구별을 플라톤은 이 두 세계를 따로 상대하는 것으로 구상하였고(파이돈ㆍ파이드로스 등), 이 "양계(兩界)"를 편력하는 불멸의 영혼에 관한 "광채육리(光彩陸離)"한 "미토스"로써 이를 장식하였다. "영혼"은 원래 천상(天上)에 있으면서, 참 실재(實在)의 관조(觀照)를 즐겼으나, 사악한 생각 때문에 지상에 전락하고 땅(육체) 속에 매몰되어 생물이 되었다. (육체=묘표(墓標) 설) "애지"는 영혼이 지상의 사물 속에서 천상의 사물과의 유사점을 발견하고, 참 실재를 상기하여(상기설 (想起說)), 이를 간절히 소망하는 일이다 (에로스 설)라고 설명할 수 있다 (파이드로스ㆍ향연ㆍ메논)

그러나 "미토스"를 "도그마"로 하고, 거기에서 고정된 철학설을 구성하는 일은 "플라톤"이 뜻하는 것이 아니다. "미토스"는 오히려 "아포리아"에 있는 자가, 자기가 놓여 있는 위치를 확인하기 위하여, "아포리아" 밖에 내던진 "자기 존재의 겨냥도"이며, 아포리아로서 응축된 "근원에의 관련"을 형상으로 하여 "우주론"적인 규모 속에 틀을 만들고 투영하는 것이다. "아포리아"에 있는 자가 "미토스"의 형상을 거부 배척하고, "아포리아"에서 묻고 있는 존재, 그 자체에 대해서 그 "무엇인가"를 "말"속에서 질문하는 데에, "디알렉티케"가 성립된다.

"아포리아" 속에 있는 자는 질문 속에 놓이게 된다. 질문은 사물이 "무엇(A)인가, 아닌가"를 질문하나, 그것은 그 무엇인가(A)를 그것과 다른 것(A가 아닌 것)으로부터 분리하게 됨으로써 가능하며, 이 질문에 대답함으로써 인간은 이 양자(A와 A가 아닌 것)를 포괄하는 전체와의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 전체와 부분과의 뒤얽힘에서 다(多)를 꿰뚫는 하나를 보는 것이 "애지자(愛知者)"이다. (소피스테스ㆍ폴리티코스). "플라톤"은 지식을 고정된 체계로서 문자로 표시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근원"을 묻는 "애지"의 진행에서 이 물음을 묻게 하고, 이 진행을 배후에서 떠받치는 것이 "이데아"이다. "이데아"는 "애지"의 진행(흐름) 속에 어느 때 갑자기 보이게 된다.

2. 플라톤의 저작ㆍ사상은 고대 서양 철학의 정점이라 평가

① 그의 사상에는 스승 "소크라테스 사상" 뿐 아니라,

"고대 자연철학ㆍ엘레아학파ㆍ피타고라스학파ㆍ 소피스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철학적 요소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고정된 존재ㆍ생성과 다원성ㆍ윤회와 정화ㆍ구원ㆍ영원성ㆍ영혼"등 모든 것들이 플라톤을 통해 진지하게 논의되었다.

② 그의 사상은 "기존 그리스 전통"을 뛰어 넘는 면모를 보인다. 

그는 "아테네 정치이론"에 회의를 품었으며, "그리스" 예술과 문학적 전통의 가치에 한계선을 그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을 탐구하는데 있어, "고대 인도철학"과 유사한 요소를 끌어들이기도 했다.

③ "이데아론"을 비롯한 그의 철학은 "중세 기독교 철학" 및 "근현대 사상체계"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중세시대" 지배 논리인 "세 위계 이론(성직자ㆍ귀족ㆍ제3신분)","세계를 신의 나라(이데아)"와 "인간의 세상(그림자)"으로 나누는 "신국론(神國論)ㆍ신 플라톤주의"가 플라톤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3. 플라톤의 이상국가 : 스파르타여! 타락한 아테네를 구원하라

BC 404년, 고대 그리스 최고의 문명국가였던 "아테네"는 "스파르타"에게 항복하고 만다.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그리스"와 한참 떨어진 "스파르타"는 아주 독특한 개성을 지닌 국가였던 것이다. 적인 "스파르타"에 대한 "아테네"사람들의 태도는 극히 이중적이었는데, "아테네"인들은 "스파르타"를 군사훈련밖에 모르는 "무식한 군발이들의 나라"정도로 무시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의 질서 학교"로 존경받기도 했다.

"금욕ㆍ절제"에 기초한 "스파르타"의 강인한 무사기질은 민주주의를 한다면서, 시민들 입만 떠드는 나약한 다른 도시국가들에게는 경외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민주정치"를 택한 다른 도시국가들이 심한 정치적 혼란을 겪을 때에도, "스파르타"는 흔들리지 않았고, 시민들의 삶은 평등하고 조화로웠다. "스파르타"가 경제ㆍ문화 대국이던 "아테네"를 이길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스파르타"의 국부(國父)라 불리는 전설의 "리쿠르고스(Lycurgus)" 만든 국가 체제다. "스파르타"는 국가 자체가 "군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4. 동굴의 비유 : 플라톤의 비유

이데아론을 설명하기 위해서, 플라톤이 생각한 비유로, "국가" 제7권에서 상술된다.

① "지하의 동굴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상상해 보자.

빛으로 향해 동굴의 폭 가득한 통로가 입구까지 달하고 있다. 사람들은 어릴 적부터 손발이나 목도 속박되고 있어 움직이지 못하고, 쭉 동굴의 안쪽을 보면서, 되돌아보는 것도 할 수 없다. 입구의 아득한 윗쪽에 불이 불타고 있고, 사람들을 뒤로부터 비추고 있다. 불과 사람들의 사이에 길이 있어, 길을 따라서 낮은 벽이 만들어져 있다. 벽을 따라서, 여러 가지 종류의 도구, 나무나 돌 등으로 만들어진 인간이나 동물의 상이 벽 위에 옮겨져 간다. 옮겨 가는 사람들 속에는 소리를 내는 것도 있으면, 입 다물고 있는 것도 있다."

② 해설

동굴에 사는 속박된 사람들이 보고 있는 것은 "실체의 그림자"이지만, 그것을 "실체"라고 믿어 버리고 있다. "실체"를 옮겨 가는 사람들의 소리가 동굴의 안쪽에 반향하고, 이 믿음은 "확신"으로 바뀐다. 똑같이, 우리가 현실에 보고 있는 것은 "이데아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다고, 플라톤은 생각한다.

5. 행복론

그는 "행복 (幸福)이란 만족한 삶"이라고 했다. 자기가 만족할 수 있으면 무엇을 먹든, 무엇을 입든, 어떤 일을 하든 그건 "행복한 삶"이다. 우리의 "불행"은 부족하다고 느끼는 결핍감에서 온다는 말이 있다. 그것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느끼는 "상대적인 결핍감"에서 비롯된다. 플라톤이 생각하는 "행복의 조건"들은 완벽하고 만족할 만한 상태에 있는 것들이 아니다. 조금은 미흡(未洽)하고 모자란 상태다. 재산이든, 외모든, 명예든, 모자람이 없는 완벽한 상태에 있으면 바로 그것 때문에 근심과 불안과 긴장의 생활을 하게 된다.

플라톤이 추구했던 "행복의 조건"은 어떤 것인가?

① 재물 (財物): 먹고, 입고, 살고 싶은 수준에서 조금 부족한 듯한 "재산"을 가지면 행복하다.       ② 용모 (容貌): 모든 사람이 칭찬하기에 약간 부족한 정도의 "용모"를 지니면 행복하다.       ③ 명예 (名譽): 사람들이 절반 정도밖에 알아주지 않는 "명예"가 있으면 행복하다.       ④ 체력 (體力): 남과 겨루어서 한 사람에게는 이기고, 두 사람에게 질 정도의 "체력"이면 행복하다.       ⑤ 언변 (言辯): 청중이 나의 연설을 듣고도 절반은 손뼉을 치지 않는 "말솜씨"가 있으면 행복하다.

6. 사상 (철인 정치론)

① 교육관 (국가관)

그는 인간의 "영혼"이 육체와 결합된 충동적이며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는 "정욕"과, 육체와 결합되지 않으며 불사적인 순수한 "이성"으로 되어 있다고 하고, "이성"은 매우 순수한 것이지만, 이 세계의 배후에 있는 완전 지선의 실체계인 "이데아"를 직관할 수 없으며, 세상에 탄생하여 육체 속에 듦으로써 "이데아"를 잊고 있다. 이 잊었던 "이데아"를 동경하는 마음이 "에로스"이며, 현상을 보고 그 원형인 "이데아"를 "상기하여(상기설)", 인식하는 것이 "진리"라고 한다. 그리고 인간의 "이성적 부분의 덕"이 "지혜"이며, "정욕적부분의 덕"을 절제ㆍ이성의 명령에 복종하여 "정욕을 억압하는 기개의 덕"을 "용기"라고 하는 것이다. 

"올바름 (Dikaiosyne또는 정의)"란 여러 덕이 알맞게 그 기능을 발휘할 때의 상태를 말한다. 그는 이러한 덕론을 통하여, 인간 개인의 "윤리학"을 논하였다. 그러나 "정의의 실현은 개인의 덕을 달성하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여, 사회 전체의 윤리설을 주장하였으며, 그것이 그의 "국가 (Politeia)"이다.

② 교육 방법 (철인 정치론)

교육방법의 확대로 생각하여 개인에 있어서의 "정욕"의 부분이 "농ㆍ공ㆍ상업의 서민"이며, "기개"의 부분은 "군인ㆍ관리", "이성"의 부분은 "통치자"라고 하고, "이성"은 당연히 "선의 이데아"를 인식하여야 하므로 "철학자가 왕이 되거나, 왕이 철학을 해야 한다"고 하는 유명한 "철인 정치론"을 전개했다. 이러한 통치자의 교육 제도와 방법에서 그의 교육학을 엿볼 수 있다.

③ 철인 정치론

"철인 정치론"을 전개한 플라톤은 기본적으로 "엘리트에 의한 지배"를 옹호한다. 일반적으로 "귀족정"은 "평등사회가 아닌 신분사회를 옹호"하는데, 플라톤 또한 "신분사회"를 옹호한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귀족정"의 궁극적인 목적과 그 실현 양태는 일반적인 "귀족정"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가 말하는 "귀족정에서의 왕"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같은 높은 신분으로써의 도덕적 의무를 중시해야 하는데, 그 실현의 1가지 예를 들면, "왕의 사유재산의 형태"로 나타난다.

플라톤은 "왕의 사유재산"은 "오직 공익을 위해서만 쓰여야한다(공유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고 그 밑의 귀족들까지도 사유재산을 공유하자는 것이 아니라, 가장 높은 신분의 상징인 "왕"이라면 "그만큼의 도덕적 의무를 실천해야함"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또한 정치 일선을 담당한 일선 "귀족들"은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무사계급에 기반한 귀족" 또는 "세습에 의한 귀족"이 아니라, "철학 지식이 충만한 철학자"들을 가리킨다. 그는 "지식인에 의한 독재"를 줄곧 주장해왔으며, 시민계급에 의한 토론 정치인 "아테네의 민주정"을 "우민 정치"라고 비판해 왔다. 뿐만 아니라 그의 "4가지 주된 덕(cardinal virtues)"에서는 "조화"라는 것을 엿볼 수 있는데, "4가지 주된 덕"에 맞는 각각의 신분이, 각자 맡은 일만을 해야 하며, 그것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로 다른 일을 한다거나, 서민이 전쟁을 한다는 것과 같은 "용기"를 보이는 것은 플라톤의 관점에선 "사회적 부조화"를 야기한다는 것이다.

④ 초기 사회주의

오늘날 "사회주의라"고 하면 일컬어지는 "마르크스 주의"의 철학적 전제들과 큰 차이를 보이지만, 인간은 정치ㆍ사회적으로 독립될 수 없는 개인이며, 더 나은 정치·사회체제를 만들려는 것이 인류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진리라고 설파했다. 또한 인간은 더 나은 사회를 구성하기 위해서, "이성적 존재"가 되어야 하는 "의무가 부여된 존재"라는 "목적론적 인간관"이란 개념을 만들었기 때문에, 초기 "관념적 사회주의 기조의 창시자"라고 알려졌다. 이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으로 계승이 되기도 했다.

7. 주요 저작ㆍ철학사상

플라톤의 저작 대부분은 "대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총 30여 편이 넘는 "대화편"들이 전해지는데, 그 가운데 일부는 진위를 의심받고 있다. 그의 주요 저작들은 연대와 사상적 흐름에 따라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다.

① "변론 (소크라테스의 변명ㆍApologie)ㆍ크리톤 (Kriton)ㆍ프로타고라스 (Protagoras)ㆍ고르기아스(Gorgias)" 등은 초창기 대화록들이다.

이 저작들은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정립하는 면이 강하며, 윤리 영역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변론"은 "소크라테스"의 재판과정에서 신성모독과 청년들을 현혹했다는 "소크라테스"의 죄목들이 왜 타당하지 않는지를 다루고 있다.  또한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 스스로의 무지에 대한 깨달음, 부에 앞서는 덕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크리톤"은 감옥에서 탈출하기를 거부하는 "소크라테스"와 그를 설득하려는 제자 "크리톤"의 논쟁을 통해 법의 준수문제를 다룬다.  도주는 법에 위배되고, 법에 위배되는 것은 선과 정의에 어긋난다는 논리로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받아들인다.  "프로타고라스"와 "고르기아스"에서는 "소피스트"와의 논쟁을 통해 덕의 본질을 찾고자 한다.

② "메논(Menon)ㆍ파이돈(Paidon)ㆍ파이드로스(Phaidros)ㆍ국가"등은 여행 이후, 플라톤이 독자적인 사상을 완성해 나가던 시기에 작성된 문서들이다.

"메논"은 덕과 앎의 관계를 논하고, 인식의 본질을 찾고자 한 작품이다.  전생의 기억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는 등 "피타고라스학파"와 연관성을 보인다.  "파이돈"에는 "소크라테스"가 죽기 직전 동료들과 나눈 대화이다.  영혼불멸을 논의하는 작품으로 "이데아론"이 드러난다.  "파이드로스"에서는 영혼을 능동적인 것으로, 육체를 수동적인 것으로 묘사한다.

육체와 분리된 귀중한 영혼들은 "이데아의 세계"인 "천상"에 도달한다. 반면 영혼이 육체와 함께 있는 "인간의 앎"은 "이데아"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불완전하다.  "국가"에서는 본질과 그림자에 비유되는 "이데아론"과 그것이 반영된 "정치철학"이 담겨있다.  최선의 법이 적용되고 있는 이상국가의 시민은 "관리자(통치자)ㆍ군인(수호자)ㆍ서민(생업 종사자)" 3계급으로 나뉜다.  "이상국가의 법"은 덕과 앎에 기반을 둔 것이므로, "관리자"들은 앎을 통해 덕을 추구하는 사람, 즉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

③ "티마이오스(Timaios)ㆍ폴리티코스(Politikos)ㆍ법률" 등은 더 심오해진 노년기의 철학을 보여준다.

"티마이오스"에서는 우주와 땅 위의 생명에 관한 "자연철학적 논의"가 전개된다.  "인과법칙"으로 자연을 설명하는 기존 철학과 달리 "이데아"와 그 반영이라는 입장에서 자연을 바라본 것이 특징이다.  "폴리티코스"와 "법률"에서 그의 정치철학은 더욱 구체화되고 광범위해진다.  다양한 정치형태와 통치자들이 논의되고 있으며, "이상 국가"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교육ㆍ기관ㆍ국방ㆍ국가윤리" 등이 제시된다.

대화편 : 30여 편에 달하는 대화록 저서

저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대화편"이다. 비록 일부 편지들은 단지 그의 이름을 붙여서 내려오고 있기는 하지만, 플라톤에 의한 진짜 "대화편"은 모두 온전하게 전해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현재 학자들의 합의에 따라, 그리스인들이 플라톤의 것으로 생각하는 "알키비아데스 I"과 "클레이토폰"등과 같은 "대화편"들은 의심스럽거나, 또는 "데모도코스"와 "알키비아데스 II"등과 같은 "대화편"들은 대개는 위조된 것으로 여겨진다. "편지"들은 대개 거의 모두 위조된 것으로 여겨지며, "7번째 편지"만이 예외로서 위조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대화편"에 자주 등장하는 주요 등장인물이었다. 이는 플라톤의 "대화편"에 있는 내용과 주장 중 어디까지가 "소크라테스"의 견해이고, 어디까지가 플라톤의 견해인지에 대한 많은 논쟁을 불러왔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는 어떠한 것도 글로서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종종 "소크라테스의 문제"라고 부른다. 그러나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따라서 플라톤의 많은 아이디어들, 적어도 그의 초기 연구들은 아마도 "소크라테스"의 것을 빌려오거나 발전시켰을 것이다.

 저작의 진위여부

현존하는 저작의 대부분은 "대화편"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일부의 예외를 제외하고,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주요 해설자로 한다. 35편의 "대화편"과 13편의 "서간"은 전통적으로 플라톤의 것으로 여겨졌으나 현대 학자들은 최소한 일부 저작에 대해서는 진위 여부를 의심하고 있다. 플라톤의 저작은 여러 방식으로 간행된 바 있는데, 그에 따라 플라톤의 글을 명명하고 배열하는 방식도 여러 가지가 되었으며, 플라톤의 글을 분류하는 일반적인 방식은 16세기 "앙리 에티엔(헨리쿠스 스테파누스)"의 플라톤 판본에서 비롯되었다. 또 플라톤의 글을 배열하는 방식으로 "4부극"에 따르는 전통이 있었는데,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이 방식이 고대의 학자이자 "티베리우스 황제"의 궁정 점성가였던 "트라쉬불로스"의 것이라고 여겼다. 그 밖에 저작은 플라톤의 이름을 빌었으나 상당수는 고대에 이미 위작으로 여겨졌으며, "트라쉴로스"는 자신의 "4부극 식" 저작 배열에서 이런 류를 넣지 않았다.

플라톤이 쓴 것 : 소크라테스의 변론ㆍ크리톤ㆍ국가ㆍ법률ㆍ에우튀프론ㆍ파이돈 IIㆍ크라튈로스ㆍ테아이테토스ㆍ소피스트ㆍ정치가 IIIㆍ파르메니데스ㆍ필레보스ㆍ향연ㆍ파이드로스 IVㆍ카르미데스ㆍ라케스ㆍ뤼시스 VIㆍ이온ㆍ에우튀데모스ㆍ프로타고라스ㆍ고르기아스ㆍ메논 VIIㆍ소 히피아스ㆍ메넥세노스 VIIIㆍ티마이오스ㆍ크리티아스 IX

플라톤이 쓴 글인지, 합의가 되어 있지 않은 것 : 알키비아데스-1ㆍ대 히피아스ㆍ클레이토폰ㆍ편지들           플라톤의 저작이 아닌 것으로 여겨지는  :  알키비아데스-2ㆍ히파르코스ㆍ에라스타이ㆍ테아게스ㆍ미노스ㆍ에피노미스           위작 (Notheuomenoi)ㆍ위서 (Apocrypha) : 악시오코스ㆍ정의ㆍ데모도코스ㆍ시ㆍ에뤽시아스ㆍ할퀴온ㆍ올바름에 대하여ㆍ덕에 대하여ㆍ시쉬포스

8. 생 애

플라톤은 "아테네"의 유력 명문 가문에서 태어났다. 고대 사료들은 아버지 "아리스톤(Ariston)"은 "아테네"의 전설적인 왕 "코드로스(Codros)"의 자손으로, 어머니 "페리크티오네(Perictione)"는 "그리스 7현인" 가운데 하나인 "솔론(Solon)"의 후손으로 적고 있다. 어린 시절 유명 문학가들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레슬링 선수 "아리스톤"에게 몸을 단련하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20살 무렵, "소크라테스"의 문하로 들어가 제자가 되었다. 스승의 사상에 매료된 후, 플라톤은 문학보다는 철학에 매진하게 되었다. 플라톤과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의 철학 사상은 당시 "그리스" 정치 상황과도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아테네" 내부에서는 "민주주의 세력"과 "귀족주의 정파" 간의 갈등이 지속되고 있었다. "민주주의 정권"은 "소크라테스"를 "귀족주의의 본보기"로 처형하였다. "민주주의"에 대한 플라톤의 비판적인 시각은 스승의 죽음으로 인해 더욱 극대화되었다. 플라톤은 "철인(哲人)의 국가통치 이론"을 내세웠으며, 시민 가운데 "통치자 계급"을 따로 두어 정치를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크라테스" 처형으로 큰 상실감을 겪은 플라톤은 다른 제자들처럼 "아테네"를 떠났다. "메가라(Megara)ㆍ이탈리아ㆍ시칠리아ㆍ이집트" 등지를 여행하며 종파를 가리지 않고 다채로운 사상을 접했다. 이 시기의 독특한 경험은 그의 사상과 저작에 고스란히 스며들었다. 스승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그는 정치가로서의 꿈을 버리고, 정의를 가르치기로 결심하였다. "이탈리아"를 여행하여, "키레네 학파"로부터 "이데아"와 "변증법"의 기초를 얻었고, "피타고라스학파"를 접하며, 실천적 정신과 실생활에의 흥미를 얻어, 그의 독자적인 사상을 반성하게 되었다. 그 사이 "소크라테스의 변론ㆍ크리톤ㆍ라케스" 등을 쓰고, 40세에 귀국하여 "고르기아스ㆍ대(大)히피아스ㆍ소(小)히피아스"를 썼다.

40살이 지나, 고향 "아테네"로 돌아온 플라톤은 "아카데메이아 (Acadēmeia)"를 세워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의 사후, "플라톤 아카데미"라고 불린 이 학교는 6C까지 지속되었다. 그는 그의 "이상 국가"를 실현해 보고자 친구인 "디온"의 권고로 "시켈리아"의 참주 "디오니시오스 1세"의 초청에 응하였으나, 그의 "과두정치"를 비난함으로써, 분노를 얻어 노예로 팔리기까지 하였다. B.C 366년과 361년경 플라톤은 "이상 국가" 라는 자신의 정치 철학을 직접 실행하기 위해, 친구인 "디온"의 권고로 "시칠리아 시라쿠사"로 갔으나, "시라쿠사"의 참주 "디오니시오스 2세 (Dionysios II)"는 플라톤의 교육을 따라가지 못했으며 오히려 폭군의 면모를 보였다. 

또한 보수 세력들의 반발로 "시라쿠사의 그리스인"을 통합하는 일도 어려움을 겪었다. "디오니시오스 2세 (Dionysios II)"의 "과두정치"를 비난함으로써, 분노를 얻어 노예로 팔리기까지 하였다. 후에 그의 저작을 본 "퀴레네 사람" 덕분에 "시칠리아"의 반역자 혐의를 벗고, 구출되어 귀국할 수 있었다. 이후 "아카데메이아 학원"을 건립하고, 제자 양성에 전력하면서 저작에 몰두하였다. "향연ㆍ파이돈ㆍ국가ㆍ파이드로스"등 주요 저술이 여기서 이루어졌고, 이 학원은 A.D 529년까지 계속되었다. 대학교의 초기 형태인 "아카데미 (Academy)"라는 말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B.C 357년, "디오니시오스 2세"의 간청을 받고, 망설이던 끝에 다시 "시켈리아"로 가서, "이상 정치"를 펴보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1년 만에 귀국하여, "법률"등 몇 개의 저서를 더 쓴 뒤에 세상을 떠났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