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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친일파 • 안중근 • 이토히로부미 • 총독부

종교 : 이용구 (1868)ㆍ일진회 회장ㆍ한일병합여론조성ㆍ동학당 고제

by 당대 제일 2022.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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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구 (李容九ㆍ1868~1912ㆍ44세)"는 한말, "일진회 회장"을 지내며, "한일병합 조약 체결" 찬성 여론을 이끌었다. 항일의병장이며, "동학당 고제(高弟ㆍ손병희와 동급)"이다.

 

1. 이용구 (李容九1868~1912향년 44)

대한제국 말기, "일진회" 회장"한일병합" 조약체결 찬성여론을 주도ㆍ동학당 고제(高弟손병희와 동급)항일의병장시천교(侍天敎) 창설/교주

•  출 생 : 경북 상주군 진두리       •  : 해산 (海山)       •  별 칭 : - 대유 (大有)

•  종 교 : 천도교 고제 (高弟)ㆍ손병희와 같이 고제ㆍ시천교(侍天敎) 창설, 교주

•  수 상 : 1등 서보장(瑞寶章)- 일왕으로부터 수여

1890 : 동학당에 입교ㆍ2대 교주 최시형에게 사사ㆍ손병희와 함께 고제(高弟) 1894 : 동학운동시, 항일 의병장으로 활약ㆍ검거 후 투옥  1901 : 동학 탄압으로 손병희ㆍ손병흠과 함께 일본 망명  1904 : 동학교도를 중심으로 "진보회(進步會)" 조직ㆍ "송병준"의 권고로 "일진회"와 통합  1905 : "일진회" 총 위원장, 회장ㆍ"손병희"의 천도교에 맞서고자, 친일 사상을 가진 "시천교(侍天敎)" 창설ㆍ교주  1909 : "일진회" 회원들을 거느리고, "이토 히로부미" 장례식 날, 추도회 개최

이용구

"경북 상주군 진두리"에서 태어나서, 19세에 "청주", 20세에 "충주군 황산리"로 이주하였다23세 때, "동학당"에 입교, "최시형(2대 교주)"에게 배워, "손병희"와 함께 "고제(高弟)"가 되었다1894, "동학혁명" , 교주 등이 잡혀 처형될 무렵, 항일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함께 투옥되었으나 곧 사면되었다1901.03, "손병희손병흠"과 함께 "동학 탄압"으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손병희"의 명교(命敎)를 받고 귀국하여, 포교 활동에 종사하였다.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1904.09월에 동학교도를 중심으로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하여 주관하였다1904, "송병준"의 권고로 "일진회"와 합쳤다. 러일전쟁 때, 일본군에 적극 협조하였다1905, "손병희"가 동학의 전통을 이어, 반일사상을 가진 "천도교"를 포교하자, 이에 맞서 친일사상을 가진 "시천교(侍天敎)"를 창설, 교주가 되었다.

"일진회" 총 위원장, 회장이 되어, 1906년 통감부가 설치되자, "흑룡회 주간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 연줄로 친일 활동을 재개하였다. 국민들에게 한일 합방을 제창하는 동시에 "고종총리대신 이완용소네 아라스케 통감" 등에게 한일합방 건의서를 올리는 등 친일활동을 하였다.

1909.11.04"이토 히로부미" 장례식 날, 서대문 밖 독립관에서 "일진회" 회원들을 거느리고, "이토 도회" 열었고, 전 독립협회 회원이자, 일진회 총무이며, 일진회 기관지인 "국민신문사 사장"이었던 "한석진"이 조문을 낭독했다.

2. 일본수상 "가쓰라 다로"와 협상"일진회" 해산 권고

1909.12, "한일합병" 청원에 앞서, 일본수상 "가쓰라 다로"에게 청원 소요자금 300만 엔을 상의하자, "쓰라"3,000만 엔이라도 제공하겠다고 답하였다그러나 일진회원 25만 명에게 제공된 돈은 불과 15만 엔이었다그 후, "일진회""한일합병"과 함께, 1주일의 시한을 두고, 해산 권고를 받게 된다.

1912.05.22., 은거하던 "일본 스마(須磨)"에서 죽기 얼마 전, 문병차 왔던 "우치다 료헤이"에게, "우리는 참 바보짓을 했어요. 혹시 처음부터 속았던 것은 아닐까요?"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사망한 뒤, 일왕으로부터 훈1등 서보장(瑞寶章)을 받았다.

3. 시천교(侍天敎)제화교(濟化敎)상제교(上帝敎)천진교(天眞敎)제우교(濟愚)청림교(靑林敎) : 설립- 1906설립자- 이용구위치- 서울 견지동

일찍부터 "동학"에 가입, "손병희"와 함께 "최시형"의 제자가 되어 "도교" 발전에 이바지했으나, "일진회(一進會)"를 조직, 친일적 노선을 걷게 되자, "천도교"로부터 출교를 당했다. "천도교"에서 나온 뒤, 그를 따르는 "박형채권병덕송병준" 등과 신도들을 모아, 1906"서울 견지동"에서 "시천교"를 세웠다그리고 "천도교의 대도주(大道主)"로 있던 "김연국(金演局)""시천교의 대례사(大禮師)"로 삼았다.

"시천교"라는 명칭은 "천도교의 주문" ,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에서 따온 것이다1912, "이용구"가 사망하자, 1913년에는 "김연국""시천교"에서 출교당한 "권병덕"과 더불어 서울 가회동에 교당을 세우고, "제화교(濟化敎)"라고 하였다가, 다시 "시천교"로 고쳐 부르면서, "시천교""견지동 시천교가회동 시천교"로 나누어졌다"가회동 시천교"의 교주 "김연국"1920"충남 계룡산 신도안"으로 교당 본부를 옮기고, 교명을 "상제교(上帝敎의 천진교(天眞敎))"라 개칭하였으며, "견지동 시천교""송병준"을 교주로 하였으나 교세가 약화되어 갔다.

"천도교"와 대립하여 창립된 "시천교"는 초창기에는 교세가 급신장하여 "천도교"를 능가했으나, "일진회"가 해산되고, "이용구"가 사망하자, "김연국송병준"이 분열하였다"김연국""시천교 총부"를 만들었고, "교주 송병준"을 추종하는 세력은 약화일로를 걷다가, 1927년에 이르러, "평남 개천""시천교 별파"를 창립하고, "제우교청림교(靑林敎)" "동학 계통"의 각 파와 합동을 계획했으나, 부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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