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오 (尹致旿ㆍ이토 지오ㆍ1873~1949ㆍ76세)"는 "윤영렬(구한말의 육군 참장)"의 아들ㆍ윤치호의 사촌 동생ㆍ"윤치영"의 형ㆍ윤보선(제4대 대통령)의 큰아버지ㆍ"윤일선(의학자ㆍ교육자)"의 아버지이며, 공주의 갑부 "김갑순"과는 사돈간이다. 한때 "유길준ㆍ안창호"의 "흥사단" 회원으로도 활동했다.
1. 윤치오 (尹致旿ㆍ이토 지오ㆍ1873~1949ㆍ향년 76세)
구한말의 교육자(중앙중학교 교장)ㆍ일제 강점기의 관료(중추원 부찬의)ㆍ한국의 초기 일본유학생ㆍ"윤영렬(구한말의 육군 참장)"의 아들ㆍ윤치호의 사촌 동생ㆍ"윤치영"의 형ㆍ윤보선(제4대 대통령)의 큰아버지ㆍ"윤일선(의학자ㆍ교육자)"의 아버지이며, 공주의 갑부 "김갑순"과는 사돈간이다.한때 "유길준ㆍ안창호"의 "흥사단" 회원으로도 활동했다.
• 출 생 : 조선 충청도 아산군 둔포면 • 호 : 동암(東庵) • 별 칭 : 신동
• 부 모 : 부- 윤영렬ㆍ모- 한진숙ㆍ9남3녀 중 장남 • 자 녀 : 8남 3녀
• 처 : 이숙경 (이경숙ㆍ1869~1906) 4남 2녀 / 2째 : 윤고려 (윤고라ㆍ김고라ㆍ1891~1913) 2남 1녀 / 3째 : 현송자 (1897~1934ㆍ배정자의 둘째 딸) 2남 1녀
• 가 족 : 아버지 : 윤영렬(1852~1935)ㆍ백부 : 윤웅렬(1840~1911)
• 장 인 : 김윤정(金潤晶ㆍ1869~1949) 윤고려의 아버지ㆍ외교관ㆍ"인천부 경무관" 재직시, 일본인 "쓰치다 조스케"를 살해한 혐의로 끌려온 "김창수(백범 김구)"를 심문하기도 했고, "주미국 조선대사관의 서기관(외교관)"으로 있을 때는 "미 국무부"에 고종의 밀서를 전달해 달라던 "이승만"의 청을 거절하였다. 1945.11월, 환국한 "김구를" 찾아, "김구"를 심문하던 옛 인연을 대화하기도 했다. "돈암장의 이승만"도 찾아갔으나, "이승만"은 미국에 밀사 파견당시 외면한 일을 기억하여 꼴도 보기 싫다며, 냉대한 후 내쫓았다.
• 사촌 형 : 윤치호 (1865~1945ㆍ정치인ㆍ사상가ㆍ사회운동가ㆍ교육자) / 동생 (5째): 윤치명 (교육자ㆍ대한제국 말기 학부주사) / 동생 (6째): 윤치영 (1898~1997ㆍ29세 차이가 나는 남동생) / 제수 : 이병영 (수군절도사 이봉구의 딸ㆍ사학자 이병도의 여동생) / 누이 (2째): 윤노덕 (윤정숙ㆍ1889~1979ㆍ정동교회 최초의 여성장로) / 매제 (2째): 이병림 (사학자 이병도의 6촌 형)
• 아들 (1째): 윤일선 (의학자ㆍ한국 최초의 병리학자ㆍ병리학/해부학 교수) / 아들 (2째): 윤명선 (고등문관시험 합격ㆍ만주 간도성 차장ㆍ충남 공주갑부 김갑순의 사위) / 아들 (4째): 윤승선 (해군 시설감ㆍ해병대 공병감) / 아들 (7째): 윤영선 (미국 정신과 전문의) / 딸 (1째): 윤시선 (화가ㆍ1950년 납북) / 사위 (1째): 민원식 (독립운동가ㆍ김규식의 보좌진ㆍ1950년 납북) / 며느리 : 이을남 (역사학자 이병도의 6촌 여동생)
• 조카 : 윤보선 (1897~1990ㆍ4대 대통령ㆍ2째 동생 윤치소의 장남) / 외조카 : 이영희 (이화여대 음대교수) / 외조카 사위 : 한상준 (한양대학교 6대 총장)ㆍ김두만 (공군참모총장) / 손자 : 윤석구 (물리학자ㆍ미국 사지노대학 물리학과 교수)ㆍ윤탁구 (의사ㆍ원자력 병원장)ㆍ윤종구 (서울대 소아과학교실 교수)
• 사돈 : 남궁억 (南宮檍ㆍ1863~1939ㆍ독립운동가) ㆍ5촌 조카 윤광선의 장인 / 민영철 (閔泳喆ㆍ1864~1912)ㆍ민영환의 6촌 동생ㆍ딸 윤시선의 시아버지ㆍ동생 윤치소의 아들인 윤보선의 장인 / 이병도 (李丙燾ㆍ1896~1989)ㆍ제수 이병영의 오빠ㆍ매제 이병림의 6촌 동생 / 현진건 (玄鎭健ㆍ1900~1943)ㆍ후처 현송자의 6촌 동생ㆍ7촌 조카사위 현정건의 동생
• 사돈 (윤치오ㆍ이병도의 겹사돈 관계 ) : 며느리 이을남의 6촌 오빠ㆍ아들 윤승선이 이을남(이병도의 6촌 여동생)과 결혼 / 여동생 윤정숙은 이병림(李丙琳)과 결혼ㆍ이병림 : 이병도, 이병묵의 6촌 형 / 동생(6째) 윤치영의 처남 (제수인 이병영의 오빠)ㆍ이병영 : 수군절도사 이봉구의 딸, 이병도, 이병묵의 여동생 / 동생(6째) 윤치소와 사돈ㆍ윤치소의 딸 윤계경(4째)이 이재녕과 결혼ㆍ이재녕 : 이병묵의 아들
첫 부인과 사별 후, 재혼할 때 언론에 공개구혼을 하기도 했다. 그의 공개구혼은 역사상 기록에 나타난 초기의 공개구혼 자료들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한국 최초로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는데, 1908.04월 여자에게도 남자와 같이 중등교육을 장려하기 위하여 "고등여학교령"을 진언, 제정ㆍ공포하게 하였다. 한국 최초로 자전거를 도입한 사촌형 "윤치호"가 준 자전거가 도둑맞은 것이 기사에 실리기도 했다.
시를 짓는 재주가 뛰어났던 그는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ㆍ정무총감 오노"에게 시를 지어 헌정했다. 1942년,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가 임기를 마치고 본국으로 소환될 때 송별시를 지었고, 1943년에는 "야마모토 이로소쿠(일본연합군함대 사령관)"가 사망하자, 추도하는 추도시를 지었다가 학생들과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동안, 교육ㆍ계몽ㆍ사회사업에는 참여하였으나, 정치적인 발언은 자제하였다. 광복 이후, 그는 특별한 친일 행적이 없었으므로, 친일파로 몰리지는 않았다.
< 경 력 >
1894 : 의정부 주사(主事)ㆍ중추원 참서관(參書官) → 1897 : 문관전고소(文官銓考所)위원 → 1906 : 학부 학무국장ㆍ일본유학생 감독 → 1907 : 문관전고소(文官銓考所)위원ㆍ국문연구소 소장ㆍ흥사단(興士團) 간부 → 1908 : 기호흥학회 평의원ㆍ서북학회 회원ㆍ관립/사립학교연합운동회의 대회장 → 1909 : 강구회(講舊會ㆍ교육계몽단체) 간사ㆍ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을 추도하는 관민추도회에 정부측 대표 → 1910 : 중앙중학교 제4대 교장ㆍ대한제국 부찬의ㆍ가선대부로 승진ㆍ한일합방 조약 이후,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찬의ㆍ천도교의 중앙강당 건립에 땅 1,500평 기부
1911~1915.03 : 조선총독부 중추원 찬의(4년 6개월) → 1912 : 이문회(以文會ㆍ조선총독부가 주관한 친일 유림들 친목단체) 간사 → 1919 : 경성에서 3ㆍ1운동에 참여 → 1925 : 조선전기공업주식회사 감사 → 1937 :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총독부 경무국"으로부터 "불령선인"으로 의심
2. 일본 유학ㆍ개화파 활동
"윤영렬"과 "청주한씨 한진숙"의 9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윤영렬"은 "윤취동 (지중추부사)"의 2남으로, "천안"의 도적을 토벌한 뒤, "동학군ㆍ안성의 도적"을 토벌하고, "육군 정령ㆍ참장"을 지냈다. 어머니는 "전라도 관찰사ㆍ경상도 관찰사ㆍ육군 참장"을 지낸 "한진창(韓鎭昌)"의 누이이기도 했다. 어려서 할아버지 "윤취동"에게 사서삼경ㆍ한학을 배웠다. 5세 때부터 한학을 수학한 그는 실력이 뛰어나 "신동"이라는 별명을 들었으며, 사서삼경을 통달하였다.
1894년(고종 32), "갑신정변" 당시 "윤웅렬(백부)ㆍ윤치호(사촌 형)"가 개화당에 협력한 일로 "윤치오"도 개화파로 지목되어 일본으로 망명했다. "윤치호"의 권고로 유학을 결심했다고도 한다. 이때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하생으로 수학하다가, 1년 뒤 "게이오의숙(慶應義孰)"에 입학하였다. 1895년(고종33), "게이오의숙" 재학 중, "중추원 참서관(中樞院參書官)"에 임명되고, 사촌 형 "윤치호"와 함께 "특파대사 수행원"으로 임명되었다. "게이오의숙"을 졸업하였으나, "갑신정변"의 실패로 "개화파"가 일망타진되면서 귀국을 미루고, "동경외국어학교"에서 "조선어 교사"생활을 하였다.
3. 관료ㆍ교육 활동
1897년 귀국, "문관전고소(文官銓考所)" 위원을 지냈고, "학부 학무국장ㆍ일본유학생 감독"을 지냈고, 1907.08월 "국문연구소"가 설치되자, "국문연구소 위원장"에 취임했다. "윤고려(윤고라ㆍ김고라)"와 재혼하였는데, 그는 결혼상대를 신문에 공모했고, 몇 명을 두고 저울질하다 "김윤정의 딸 김고라(윤고려)"를 선택했다. 신문에 실린 후, 몇 명의 "신여성"이 후보에 지원했으며, 결국 "김고라"가 최종 낙점되었다는 것이다.
"김고라"는 외교관이었던 아버지 덕에 일본ㆍ미국에서 여학교를 마친 보기 드문 여성이었다. 결혼 후, "김고라"는 "윤치오"를 따라 성을 바꿔, "윤고라"로 불렸고, 여성교육운동을 전개하는 등 활발한 사회활동을 했지만, 20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한국 최초로 자전거를 도입한 것은 사촌형 "윤치호"였는데, 그가 주로 애용하여 화제가 되었다. 이후 그가 타고 다니던 고가의 일본제 자전거가 도둑맞은 것이 신문 기사에 실리기도 했다.
4. 교육 계몽 활동ㆍ여성교육
1905년, "을사보호 조약체결" 이후 교육ㆍ계몽을 통해, 실력 양성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1907.11월, "유길준"이 "흥사단(興士團)"을 창설하자, 가입하였다. 1911년, 일제 압력으로 "흥사단"이 해단되었으나, 그는 탈퇴하지 않았는데, 뒤에 "안창호"에 의해 다시 "흥사단"은 부활되었다. 이후 그는 흥사단의 간부를 역임하기도 했다.
1908년, "기호흥학회" 평의원이 되고, "서북학회"에 가입하여 회원이 되었다. 1909.11월,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을 추도하는 "관민추도회"에 정부측 대표로 파견되어 포진담임위원에 되었다. 1910년, "중앙중학교"의 제4대 교장을 지냈다. 그는 "천도교"의 중앙강당 건립에 자신의 땅 1,500평을 기부하기도 했다. 한국 최초로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1908.04월, 여자에게도 남자와 같이 중등교육을 장려하기 위하여 "고등여학교 령"을 진언, 제정ㆍ공포하게 하였다.
5. 한일합방 이후
1910.08월, "대한제국 부찬의"가 되었고, "가선대부"로 승진했다. 1910.10월, "한일합방 조약" 이후,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찬의"에 임명되었다. 1911~1915.03월까지, 4년 6개월간 중추원 찬의를 지냈다. 1912.01월, "조선총독부"에서 친일 유림들의 친목단체인 "이문회(以文會)"를 조직할 때 간사가 되었다.
지인의 빚보증을 서주었다가, 이자가 5천원에서 9천원으로 늘어나자, 빚을 갚지 못하고, 1915.03월 사기혐의로 체포되자, "중추원 찬의직"을 사직했다. 1915년, 체포될 때 서훈 박탈당했고, 1916.06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1919년, 경성에서 "3ㆍ1만세 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를 모면하였고, 이후 칩거하며 "흥사단" 활동 이외에는 은인자중하였다. 1937.08월, "조선총독부"에서 주최하는 시국간담회에 참석하였고, "수양동우회 사건"이 발생하자 "총독부 경무국" 당국으로부터 불령선인으로 의심받았다. 1941.11월, "수양동우회 사건" 관련자 전원이 무죄 석방되면서, 총독부 경무국의 감시가 풀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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