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호 (尹致昊ㆍ이토 지코(伊東致昊)ㆍ1865~1945ㆍ80세)"의 가문은 "해평 윤씨"로,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윤두수(1533~1601)"의 후손으로, "윤보선 대통령ㆍ윤치영 서울시장ㆍ윤일선 서울대 총장" 등을 배출했다.
1. 명문가 : 윤웅렬ㆍ윤영렬 형제 가문
1910년, "경술국치" 이후, 100년 동안 한국에서 가장 이름을 떨친 명문가를 꼽으라면 빠지지 않는 집안이 "윤웅렬ㆍ윤영렬 형제" 가문이다. "윤치호"의 가문은 "해평 윤씨" 가문으로,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윤두수(1533~1601)"의 후손으로, "윤보선 대통령ㆍ윤치영 서울시장ㆍ윤일선 서울대 총장" 등을 배출했다. 동시에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7명의 이름을 올렸다.
2. 윤웅렬 (1840~1911ㆍ71세)ㆍ동생 윤영렬(1854~1939ㆍ85세)
① 윤웅렬 (尹雄烈ㆍ1840~1911ㆍ71세)ㆍ조선 말기 무신 (군부대신)
• 아들 (3명): 1째 윤치호 (중추원 고문)ㆍ2째 윤치왕 (영국 글래스고 의대 출신 군의관, 세브란스 병원장)ㆍ3째 윤치창 (미국 시카고 대 출신 외교관, 초대 주영공사ㆍ터키대사)
일찍이 무과에 급제한 후, "2차 수신사" 일행으로 일본에 다녀왔고, 1882년부터 "교련병대 창군"을 지도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에 가담하였다가, 정변실패를 예상하여 관직을 사양했다. "갑오개혁" 이후, "경무사ㆍ군부대신" 등을 지냈다. 1897년, "대한제국" 수립 후, "법부대신ㆍ고등재판소 판사 군부대신" 등을 거쳤고, "전라도"가 전남ㆍ전북도로 분도되자, 초대ㆍ4대 "전남 관찰사"가 되었고, 1910년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되자 ,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아,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지목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됐다.
② 윤영렬 (尹英烈ㆍ1854~1939ㆍ85세)ㆍ대한제국 군인 겸 정치가
• 아들 : 윤치영 (국회 부의장) • 손자 : 윤보선 (제4대 대통령)ㆍ윤원선 (경기도지사)ㆍ윤일선 (서울대 총장), 윤명선(일제 괴뢰국 만주국의 간도성 차장)
6남3녀를 낳았는데, 이 가운데 4명의 이름이 친일인명사전에 올라가 있다. 손자를 포함하면 모두 5명에 이른다. 1째 "윤치오"와 2째 "윤치소"는 일제 때, "조선총독의 자문기관"이던 "중추원"의 찬의ㆍ참의를 각각 지냈다. 2째 "윤치소"의 장남이 "윤보선"이다. 3째 "윤치성"은 "일본 육사(제11기)"를 나와, "일본군 기병 중좌(중령에 해당)"로 있었다. 6째 "윤치영"은 일제 말기 "국민동원 총진회 중앙지도위원" 등으로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펼쳤고, 해방 이후 "서울시장ㆍ민주공화당 의장ㆍ내무부장관ㆍ국회 부의장" 등을 지냈다.
3. 윤치호 (尹致昊ㆍ이토 지코(伊東致昊)ㆍ1865~1945ㆍ12.09ㆍ향년 80세)
문신 개혁가ㆍ독립운동가ㆍ외교관(조선인 최초의 영어 통역관)ㆍ일본/ 중국/ 미국을 유학한 지식인ㆍ언론인ㆍ교육자ㆍ정치가ㆍ사상가ㆍ종교가ㆍ철학가ㆍ기독교 운동가ㆍ민권운동가ㆍ시민사회운동가ㆍ독립신문 사장ㆍ대한자강회 회장ㆍ흥업구락부 회장ㆍ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ㆍ배화여고 교명(캐롤라이나 학당의 새로운 교명)작성자ㆍ일제 시기, "시국강연" 등을 통해 전시 동원에 적극 협력 (독립 운동가였다가, 친일파로 변절)
기독교청년회(YMCA) 지도자로, 개혁/자강파의 중심인물로 꼽혔다. 그러나 1915.02월 전향을 선언한 뒤, 노골적으로 친일 행각을 벌여, 1941.01월 국민정신총력연맹 이사, 1944.05월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1945.02월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의원을 지냈다. 변절자라는 견해와 나약한 지식인이라는 비판과 근대인, 냉철한 합리주의자라는 상반된 시각과 평가가 존재하고 있다.
4. 윤보선 (尹潽善ㆍ1897~1990ㆍ향년 92세)
제4대 대통령(1960.08~1962.03.23)ㆍ4선 국회의원(3~ 6대)ㆍ서울시장(1948.12~1949.06)ㆍ상공부장관ㆍ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기여했다는 평가와 "5ㆍ16 군사정변" 협력 논란이 양립하고 있다.
1961년, "5ㆍ16 군사정변" 당시, "장면 내각"에 반발하여, "군사정변"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던 점 등으로 외면되거나,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 오다가, 2000년 이후 "박정희 19년"에 맞선 야당 정치 지도자들 중의 한사람이라는 점이 감안되어 재평가를 받기 시작하였다. "5ㆍ16 군사 정변"을 방조했다는 의혹을 받아왔으나, "제3공화국ㆍ제4공화국" 중, "박정희의 라이벌"이었으며, "3공ㆍ유신시절" 내내 민권 투쟁에 앞장섰고, 각종 사회사업에도 참여하였다.
"김영삼ㆍ김대중"이 등장하기 전까지 야당을 이끌었으며, "선명 야당"을 강조하였다. "미군정기ㆍ제1공화국"의 야당 정치인이었으며, "국회의장 이승만의 비서관ㆍ서울특별시장ㆍ상공부 장관ㆍ대한적십자사 총재" 등을 거쳐, 제2공화국에서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1961년, "5ㆍ16 군사정변" 이후, "대통령 사퇴" 성명을 발표했다가, "민주당 정권"이 붕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군부에서 "대통령 직"에 있어달라는 요구를 수락ㆍ사퇴 성명을 번복했다.
1962.03월, "하야" 이후부터는 "반독재 야당 지도자"로 활동하였으며, "박정희"를 "군부내 좌익 프락치"라고 규정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5대 대통령 선거ㆍ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기도 하였다. 이후 "한일회담 반대운동ㆍ민주회복국민선언ㆍ명동구국선언" 등에 참여하였으며, 군사 정권하에서 여러 번 기소와 재판에 회부되었다.
5. 해평 윤씨 가문 (海平 : 경북 구미 해평면)
① 시조 : 윤군정 (尹君正)
고려 고종ㆍ원종 때, 금자광록대부ㆍ수사공ㆍ좌복야ㆍ공부판사(工部判事)를 지냈다. 손자 "윤석"이 고려 충숙왕 때, "우의정ㆍ판전리사사"로 "해평부원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해평"을 본관으로 했다
② 윤두수 (尹斗壽ㆍ1533(중종28)~1601(선조34)ㆍ68세)
"윤보선ㆍ윤치영ㆍ윤치호"의 선조이자, "순종비 순정효황후"의 친정인 "윤덕영선윤택영"의 선조였다. 또한 "선조"의 부마 "윤신지"의 할아버지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때의 장군 "원균"의 인척이기도 하다.
조선 중기의 문신 (영의정)ㆍ성리학자ㆍ작가ㆍ시인ㆍ서인(西人)의 일원ㆍ이황학파ㆍ"이조정랑"으로 있던 "명종" 때의 외척 "이량(李梁)"의 아들 "이정빈"을 천거하자, 끝까지 거절하여 무고로 파직되었다가 "이량" 등이 실각한 후 복직되었다. 선조 때, 동인들로부터 "진도군수 이수의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를 받고 파직되었다가, 다음해 "연안부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대사헌" 때, 당쟁 과정에서 회령에 유배되었다가 "임진왜란"으로 복직되어 임금을 "개성"에 호종, "어영대장"을 지낸 후 "의정부 영의정"까지 올랐고, "해원부원군"에 봉작되었다.
5명의 아들 모두,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에 오른다. 1째 "윤방"이 "인조" 때, "영의정"에 올라, "부자 영상"으로 이름을 떨쳤다. 2째 "윤혼"은 지중추부사에 올랐고, 3째 "윤휘"가 좌찬성, 4째 "윤훤"은 병조판서, 5째 "윤오"가 병마절도사에 이르렀다.
③ 인재
• 서포 김만중 : 어머니도 "해평 윤씨"이고, 그녀의 고조부가 바로 "윤두수"이다. "윤씨"는 홀로 "만기ㆍ만중" 형제를 당대 최고의 학자로 키워냈다.
• 조부 윤신지 : "선조"의 부마였으며, 아버지 "윤지"는 이조참판을 지냈다. 할머니는 "선조"의 딸인 "정혜옹주"이다.
• 윤웅렬 (1840~1911ㆍ71세)ㆍ동생 윤영렬(1854~1939ㆍ85세) 가문
'한국 (근 • 현대사) > 친일파 • 안중근 • 이토히로부미 • 총독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경찰 : 김태석 (1882)ㆍ공출의 귀감ㆍ반민법정 최초 사형구형자 (2) | 2022.10.22 |
---|---|
종교 : 이용구 (1868)ㆍ일진회 회장ㆍ한일병합여론조성ㆍ동학당 고제 (0) | 2022.10.22 |
관료 : 윤치호 (1865)ㆍ애국가 작사ㆍ무궁화 지정ㆍ윤보선 5촌 당숙 (2) | 2022.10.22 |
관료 : 윤치오 (1873)ㆍ(사촌형) 윤치호ㆍ(조카) 윤보선 대통령 (0) | 2022.10.22 |
관료 : 윤덕영 (1873)ㆍ옥쇄불법탈취 (1910)ㆍ고종독살?ㆍ벽수산장 (2) | 2022.10.2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