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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료 : (해평윤씨 가문 ) 윤치호ㆍ윤보선ㆍ윤치오ㆍ윤두수

by 당대 제일 2022.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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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 (尹致昊ㆍ이토 지코(伊東致昊)ㆍ1865~1945ㆍ80세)"의 가문은 "해평 윤씨"로,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윤두수(1533~1601)"의 후손으로, "윤보선 대통령ㆍ윤치영 서울시장ㆍ윤일선 서울대 총장" 등을 배출했다. 

 

1. 명문가 : 윤웅렬윤영렬 형제 가문

1910, "경술국치" 이후, 100년 동안 한국에서 가장 이름을 떨친 명문가를 꼽으라면 빠지지 않는 집안이 "윤웅렬윤영렬 형제" 가문이다.  "윤치호"의 가문은 "해평 윤씨" 가문으로, "선조" , "영의정"을 지낸 "윤두수(1533~1601)"의 후손으로, "윤보선 대통령윤치영 서울시장윤일선 서울대 총장" 등을 배출했다동시에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7명의 이름을 올렸다.

윤치호1

2. 윤웅렬 (1840~191171)동생 윤영렬(1854~193985)

윤웅렬 (尹雄烈1840~191171)조선 말기 무신 (군부대신)

아들 (3): 1째 윤치호 (중추원 고문)2치왕 (영국 글래스고 의대 출신 군의관, 세브란스 원장)3째 윤치창 (미국 시카고 대 출신 외교관, 초대 주영공사터키대사)

일찍이 무과에 급제한 후, "2차 수신사" 일행으로 일본에 다녀왔고, 1882년부터 "교련병대 창군" 지도하였다. 1884, "갑신정변"에 가담하였다가, 정변실패를 예상하여 관직을 사양했다. "갑오개혁" 이후, "경무사군부대신" 등을 지냈다1897, "대한제국" 수립 후, "법부대신고등재판소 판사 군부대신" 등을 거쳤고, "전라도"전남전북도로 분도되자, 초대4"전남 관찰사"가 되었고, 1910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되자 ,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아,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지목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됐다.

윤영렬 (尹英烈1854~193985)대한제국 군인 겸 정치가

아들 : 윤치영 (국회 부의장)   손자 : 윤보선 (4대 대통령)윤원선 (경기도지사)윤일선 (서울대 총장), 윤명선(일제 괴뢰국 만주국의 간도성 차장)

63녀를 낳았는데, 이 가운데 4명의 이름이 친일인명사전에 올라가 있다. 손자를 포함하면 모두 5명에 이른다1"윤치오"2"윤치소"는 일제 때, "조선총독의 자문기관"이던 "중추원"의 찬의참의를 각각 지냈다2 "윤치소"의 장남이 "윤보선"이다3 "윤치성""일본 육사(11)"를 나와, "일본군 기병 중좌(중령에 해당)"로 있었다6"윤치영"은 일제 말기 "국민동원 총진회 중앙지도위원" 등으로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펼쳤고, 해방 이후 "서울시장민주공화당 의장내무부장관국회 부의장" 등을 지냈다.

3. 윤치호 (尹致昊이토 지코(伊東致昊)1865~194512.09향년 80)

문신 개혁가독립운동가외교관(조선인 최초의 영어 통역관)일본/ 중국/ 미국을 유학한 지식인ㆍ언론인교육자정치가사상가종교가철학가기독교 운동가민권운동가시민사회운동가독립신문 사장대한자강회 회흥업구락부 회장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배화여고 교명(캐롤라이나 학당의 새로운 교명)작성자일제 시기, "시국강연" 등을 통해 전시 동원에 적극 협력 (독립 운동가였다가, 친일파로 변절) 

기독교청년회(YMCA) 지도자로, 개혁/자강파의 중심인물로 꼽혔다그러나 1915.02월 전향을 선언한 뒤, 노골적으로 친일 행각을 벌여, 1941.01월 국민정신총력연맹 이사, 1944.05월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1945.02월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의원을 지냈다절자라는 견해와 나약한 지식인이라는 비판과 근, 냉철한 합리주의자라는 상반된 시각과 평가가 존재하고 있다.

윤치호

4. 윤보선 (尹潽善1897~1990향년 92)

4대 대통령(1960.08~1962.03.23)4선 국회의원(3~ 6)서울시장(1948.12~1949.06)상공부장관ㆍ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기여했다는 평가와 "516 군사정변" 협력 논란이 양립하고 있다.

1961, "516 군사정변" 당시, "장면 내각"에 반발하여, "군사정변"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던 점 등으로 외면되거나,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 오다가, 2000년 이후 "박정희 19"에 맞선 야당 정치 지도자들 중의 한사람이라는 점이 감안되어 재평가를 받기 시작하였다"516 군사 정변"을 방조했다는 의혹을 받아왔으나, "3공화국4공화국" , "박정희의 라이벌"었으며, "3유신시절" 내내 민권 투쟁에 앞장섰고, 각종 사회사업에도 참여하였다.

"김영삼김대중"이 등장하기 전까지 야당을 이끌었으며, "선명 야당"을 강조하였다"미군정기1공화국"의 야당 정치인이었으며, "국회의장 이승만의 비서관서울특별시장상공부 장관대한적십자사 총재" 등을 거쳐, 2공화국에서 대통령에 선출되었다1961, "516 군사정변" 이후, "대통령 사퇴" 성명을 발표했다가, "민주당 정권"이 붕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군부에서 "대통령 직"에 있어달라는 요구를 수락사퇴 성명을 번복했다.

1962.03, "하야" 이후부터는 "반독재 야당 지도자"로 활동하였으며, "박정희""군부내 좌익 프락치"라고 규정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5대 대통령 선거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기도 하였다. 이후 "한일회담 반대운동민주회복국민선언명동구국선언" 등에 참여하였으며, 군사 정권하에서 여러 번 기소와 재판에 회부되었다.

5. 해평 윤씨 가문 (海平 : 경북 구미 해평면)

시조 : 윤군정 (尹君正)

고려 고종원종 때, 금자광록대부수사공좌복야공부판사(工部判事)를 지냈다손자 "윤석"이 고려 충숙왕 때, "우의정판전리사사""해평부원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을 본관으로 했다

윤두수 (尹斗壽1533(중종28)~1601(선조34)68)

"윤보선치영윤치호"의 선조이자, "순종비 순정효황후"의 친정인 "윤덕영선윤택영"의 선조였다또한 "선조"의 부마 "윤신지"의 할아버지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때의 장군 "원균"의 인척이기도 하다

조선 중기의 문신 (영의정)성리학자작가시인서인(西人)의 일원이황학파ㆍ"이조정랑"으로 있던 "명종" 때의 외척 "이량(李梁)"의 아들 "이정빈"을 천거하자, 끝까지 거절하여 무고로 파직되었다가 "이량" 등이 실각한 후 복직되었다선조 때, 동인들로부터 "진도군수 이수의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를 받고 파직되었다가, 다음해 "연안부"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대사헌" , 당쟁 과정에서 회령에 유배되었다가 "임진왜란"으로 복직되어 임금을 "개성"에 호종, "어영대장"을 지낸 후 "의정부 영의정"까지 올랐고, "해원부원군"에 봉작되었다.

5명의 아들 모두,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에 오른다1"윤방""인조" , "영의정"에 올라, "부자 영상"으로 이름을 떨쳤다. 2"윤혼"은 지중추부사에 올랐고, 3"윤휘"가 좌찬성, 4"윤훤"은 병조판서, 5"윤오"가 병마절도사에 이르렀다.

인재

서포 김만중 : 어머니도 "해평 윤씨"이고, 그녀의 고조부가 바로 "윤두수"이다. "윤씨"는 홀로 "만기만중" 형제를 당대 최고의 학자로 키워냈다.

조부 윤신지 : "선조"의 부마였으며, 아버지 "윤지"는 이조참판을 지냈다. 할머니는 "선조"의 딸인 "정혜옹주"이다.

• 윤웅렬 (1840~1911ㆍ71세)ㆍ동생 윤영렬(1854~1939ㆍ85세)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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