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봉암 (曺奉岩ㆍ1899~1959ㆍ59세ㆍ죽산(竹山))"은 독립운동가로, 공산당 조직 활동(건국준비위원회)ㆍ제헌국회의원ㆍ농림부 장관 (1대)ㆍ국회 부의장 (2대)ㆍ진보당 총재ㆍ농림부 장관 재직 시, 지주에게 예속된 농지들을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농지개혁 주관하였다.
1. 조봉암 (曺奉岩ㆍ1899~ 1959.07.31ㆍ향년 59세)
독립운동가ㆍ공산당 조직 활동(건국준비위원회)ㆍ제헌국회의원ㆍ농림부 장관 (1대)ㆍ국회 부의장 (2대)ㆍ진보당 총재ㆍ농림부 장관 재직 시, 지주에게 예속된 농지들을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농지개혁 주관ㆍ"신의주 형무소"에서 7년간 복역하는 동안, 줄곧 독방에 갇혀 있었고, 고문으로 손가락 7개가 동상으로 잘려 나가, 형무소 생활 중 많은 고통을 겪었다고 하며, "박헌영"과의 갈등을 계기로 사상 전향ㆍ"장택상 (수도경찰청장)"과 이념을 넘어, 오랜 친분관계를 유지하였다.
1956년, "대통령 선거(제3대)"에 출마하여, 30%라는 지지율을 얻어,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1959년 상인 양명산의 "진보당 사건"으로 "국가변란ㆍ간첩죄" 혐의로 체포ㆍ조봉암이 사형 집행된다.
• 출 생 : 경기도 강화군 선원면 지산리 (인천 강화군 선원면 지산리) • 사 망 : 서울 서대문구 형무소 사형장 • 사 인 : 교수형 (북조선- 애국열사릉에 가묘 설치ㆍ서울 중랑구 망월동 묘지공원 내)
• 신 체 : 고문으로 손가락 7개가 동상으로 잘려 나감
• 호 : 죽산 (竹山) • 학 력 : 소련 동방 노력자 공산대학 중퇴 (2년 수료)ㆍ일본 주오 대학 중퇴
• 처 : 1혼- 김이옥 (1905~1933ㆍ사별(폐결핵)ㆍ1927~1933) → 병을 고치기 위해, 중국사회주의 청년단 공금을 유용 / 2혼- 김조이 (金祚伊ㆍ1904 ~ ?ㆍ1924~1927 / 1938~ㆍ6ㆍ25때 실종)ㆍ독립운동가ㆍ좌파여성운동 (주세죽 (박헌영)ㆍ허정숙 (허헌 딸) )
• 자 녀 : 1남 3녀 • 저 서 : 공산주의 모순발견ㆍ우리가 나아갈 길ㆍ우리의 당면과업
• 수 상 : 1990년대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조국통일상 • 경 력 : 조선공산당 상임위원ㆍ민주주의독립전선 전임위원
1925년 "조선공산당"이 조직되었을 때, "조직 중앙위원장"을 지냈으며, "고려 공산청년회" 간부가 되었다. 1925년, "공산청년회" 대표로, "중국 상하이"를 경유하여, "소련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총회"에 참석하고, "모스크바 동방 노력자 공산대학"에서 2년간 수학하고, 귀국하였다. 이후 "소련ㆍ중국ㆍ만주" 등을 오가며, "독립 운동ㆍ공산주의 운동"을 하였다.
1927년, "임정 요인"들을 상대로 "민족 유일당 운동"을 추진하기도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노농총연맹조선총동맹(勞農總聯盟)"을 조직하고, 문화부책에 선출, "상하이"로 가서 "코민테른 원동부" 한국인 대표에 임명되고, "ML(마르크스-레닌)당"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1932.09월 "상하이 프랑스 불조계"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ㆍ국내로 송환되어, "신의주 형무소"에서 7년간 복역하였다. 출옥 후, "인천"에서 지하 노동단체를 조직, 비밀리에 활동하다가, 1945.01월 다시 검거되었다.
해방과 동시에 석방되어, "조선공산당ㆍ건국준비위원회 인천부 지부ㆍ민족주의 민주전선 인천부지부 "등에서 활동하였으나, 1946.05월 "박헌영"과의 갈등을 계기로 사상 전향하여, "좌우합작 운동"에 참여하였고, "남북협상 노선"을 걷다가,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48.07월, "국회 헌법기초위원장"으로 "헌법 제정"에 참여한 뒤, 건국에 참여하였으며, "농림부장관(제1대)과 국회 부의장(제2대)"를 역임하였다. "농림부 장관" 재직 시, 지주에게 예속된 농지들을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농지개혁"을 주관ㆍ성사시켰다.
1948년 이후, "윤치영" 등과 "이정회ㆍ대한국민당" 등에서 활동하였고, "대통령 선거(제2대)"에는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했고, "대통령 선거(제3대)"에 출마하여, 30%라는 지지율을 얻어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1959년 "상인 양명산"을 통해, "북조선의 정치자금을 건네받았다"는 혐의로, "진보당 사건"에 연루되어 재심결과 사형선고를 받고, 교수형을 당하였고, 당대에도 "사법 살인"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2011.01.20일,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내려, 복권되었다.
2. 진보당 조봉암 사건 (進步黨 曺奉岩) : 1959.07월, 대표적인 사법 살인
"조봉암"을 비롯한 "진보당 간부들"을 "국가변란ㆍ간첩죄" 혐의로 체포ㆍ조봉암을 사형 집행한 사건, 제2대 대통령선거(1952.08.05)에서 79만 7504표를, 제3대 대통령선거(1956.05.15)에서는 무려 216만 3808표를 얻은 "조봉암"이 1956.11.10일 "진보당"을 결성하고 지방에서 지역당 조직을 확대해 가자, "이승만 정권(당시 505만표 획득)"은 정치적 위협을 느꼈다.
1958.01.12일 "민의원 총선거"를 4개월 앞두고, "서울시 경찰국"은 "진보당 간부들(조규희ㆍ윤길중ㆍ김달호ㆍ이동화" 등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정부 전복 기도)"로 체포하였다. 1958.01.13일, "조봉암"은 자진 출두 도중,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거되었다. 1959.07.30일, 그는 "대법원 판결"에 대해 재심을 청구ㆍ기각되고, 07.31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 봉암새 (혹은 죽산조)라는 민담이 있다
조봉암의 처형과 관련하여, 과거 서대문형무소 수인들과 간수들 사이에 전해져 내려오는 민담 중에 "봉암새(혹은 죽산조)"라는 민담이 있다. "나는 어느 사이 비둘기의 벗이 되었다. 악하고 거짓 많은 인간들보다 이 비둘기는 얼마나 더 기특하며 정다운 친구인가 말이다. 비둘기가 좋아하는 콩, 그 콩을 내 밥에서 골라내어 던져준다. 마룻바닥에 떨어진 밥알을 주어 먹는 배고픔 속에서도 이 비둘기 모이만은 잊지 않는다. 식후 창가로 가서 구구구 비둘기를 불러 콩알을 던진다. 여기저기 모여와 구구거리면서 그걸 쪼아 먹는 모습을 내려다보면서 나는 끝없는 희열감에 젖는다. 그러나 알고 보니 이 일은 나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딴 방의 사람들도 소중한 밥을 나누어 던져주는 것이었다."
"건너편 2사의 조봉암 선생도 끼니때마다 콩알은 비둘기에 던져 주고, 보리밥 알은 창가에 놓아 참새들이 와서 먹게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한 끼도 빼지 않았으며, 콩과 밥알을 주워 먹는 날짐승들을 하염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독방의 고독한 그에겐, 생사의 기로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눈앞에 보는 그 분에겐 이 순성(順性)의 귀여운 날짐승들이 유일한 손님이요, 친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나 정성드리 비둘기와 새를 기르던 이 방의 주인은 어느 무더운 여름날 홀연히 떠나가 버렸고 새들은 그들을 반겨주고 사랑해 주던 사람을 잃고 말았다."
죽산 선생의 파란만장한 일생이 교수대에서 그 막을 내린 것이다. 그 후, 사형집행의 버드나무엔 "전에 볼 수 없었던 낯선 진귀한 새가 나타나 슬피 운다"는 것이며, 이것이 소위 "봉암새" 혹은 "죽산조(竹山鳥)"라는 얘기다. 언제부터 생겼는지, 누가 지었는지, 조차도 확실치 않는 "봉암새"의 얘기가 서대문 징역꾼과 형무관 사이에 마치 하나의 전설이나 민화(民話)처럼 구전되고 있다.
3. 평 가
1940년 이후, 지하단체 조직 활동을 하였으나, 소극적이었으므로 조선공산당으로부터 "유휴분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41년, 수감 중 형문에 못 이긴 "리승엽"이 전향하고, "대화숙"에 가입하게 된 것은 그의 설득의 영향이 컸다. 이 때문에 동료의 변절을 도왔다는 비판도 있었다.
"박진목(독립운동가 출신 정치인)"은 그를 "대인(大人)이지만, 변절자"라고 평가하였다. "서중석(성균관대학 교수)"는 "민국당 못지않게 그의 정치적 신조와 거리가 멀다고 밖에 볼 수 없는 국민당에 몸 담았던 것은 정치적 피신이라고 하더라도 파격적인 일이라고 봐야 할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이정회"에 이어 국민당에 들어간 것은 그의 정치적 곡예를 보여준 것으로서, 일정한 기간 동안 이승만과 그의 추종자들로부터 박해를 받지 않고 정치적 입지를 넓힐 수 있다는 적극적인 면이 고려되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자본독재ㆍ공산독재"도 아닌 "제3의 길(개혁ㆍ혁신ㆍ진보)"를 택했고, 그 대가로 죽음을 맞았다. 그의 죽음과 함께 "한국의 진보세력"도 맥이 끊기고 말았다. 그에 대한 "사형선고"는 "한국 진보에 대한 사형선고"였던 셈이다.
"특정 계급"을 살찌우는 대신, "일반 서민들"이 잘 사는 나라. 모든 사람이 고루 잘 살 수 있는 세상을 이 땅에서 실현하고자 한 것이다. "독재ㆍ극우 반공체제"가 확립되어가던 시기, 그 흐름을 거슬러 올랐던 "조봉암". 그가 마지막 남긴 말은 그의 꿈과 좌절을 담담히 말해주고 있다.
"나에게 죄가 있다면 많은 사람이 고루 잘 살 수있는 정치 운동을 한 것 밖에는 없는 것이오. 그런데 나는 이박사와 싸우다가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음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오. 다만 나의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발전에 도움이 되길 바라며, 그 희생물로는 내가 마지막이 되길 바랄 뿐이오."
4. 성품ㆍ여운형과 관계
애연가였으며, "여운형"은 "그가 술을 좋아하고 잘 마셨으며, 시를 읊었고 강개가 북받치면 눈물을 흘리는 감성적인 사람" 이었다고 한다. "조호정(조봉암 장녀)"의 회고에 의하면, "여운형"과 가장 친했으며, "박헌영ㆍ이승만ㆍ김구ㆍ한국민주당"을 안 좋게 생각했다고 한다. 특히 김구를 "테러리스트"라며, 싫어했다고 한다.
1945.08.15일, 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조봉암"은 옥중에서 광복 소식을 접하고 석방된다. 그가 석방되자, "여운형"은 일본의 패전 소식을 전하며, 출소한 그를 맞이하였다. 이후, "여운형"과 가까이 지냈고, "여운형"의 노선에 동의하던 그는 "여운형"의 사후, "김규식"을 찾아가기도 했지만, 그로부터 배척당하고, 독자적으로 "좌우합작ㆍ남북협상 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여운형"은 "박헌영"을 찾아가 그가 상하이에서 잘못을 저질렀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여운형"은 "박헌영"에게 "조봉암이 상하이에서 돈을 훔쳤고, 강도질을 했으며, 이로 인해 감옥살이를 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5. 이적행위 여부ㆍ공산주의자 의혹에 대한 반론
사형당할 당시, 정치계와 학계의 일부 인사들은 "사법살인"이라며 비판하기도 했다.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여 "이승만"에게 도전한 것이 죽음의 원인이라는 주장과 함께 "법살ㆍ사법살인"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가 공산주의자가 아닌 이유로는 공개 발표한 "전향서"와 "장택상(반공주의자)"이 그를 옹호하고, 그의 구속ㆍ재판 시에는 "장택상"이 나서서 직접 구명ㆍ변론을 한 점을 들기도 한다. 또한 그가 "양명산"이 공산주의자인 것을 알 리 없다는 반론과 "양명산"이 법원 진술에서 고문으로 강요당했다며 진술을 번복한 것을 들기도 한다.
"진보당 사건"으로 기소되자 "장택상"은 "조봉암"의 구명운동을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를 비판하던 측은 "자유당ㆍ민주당"계열이었고, 그를 공개적으로 변호하던 인물은 "이승만"의 측근인 "장택상ㆍ윤치영"이었다. "장택상ㆍ윤치영"은 "이승만"의 측근들 중에서도 "강경파"로 분류된다.
"장택상ㆍ윤치영"은 그가 공산주의자ㆍ이적행위자가 아니라고 증언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증언은 기각되었다. "장택상"은 그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며, 재판 과정에서 직접 변호하는 글을 법원에 제출하였다. "장택상"에 의하면, 그의 재판은 모함이며 무고라는 것이다. "윤치영"은 그가 용공분자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가 진보당 사건으로 연루되어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불운을 겪게 되었지만. 그리 된 데에는 주변정세를 잘못 판단하여 용공분자로 몰리는 불운을 가져오지 않았나 하는 안타까움과 애석함이 남아 있다"
"윤치영"은 그가 "이승만"에게 도전한 것이 죽음의 원인이라고 하였다. 후일 "윤치영"은 한 인터뷰에서 "조봉암"을 회고하면서 "비극의 주인공"이라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6. 농지 개혁 정책 (토지개혁) : 농림부장관 조봉암의 개혁
1950.03월에 개정되어 공포된 농지개혁법안으로 "농지개혁법"을 시행했다. "이승만"의 승인 하에 농지개혁을 주도한 사람은 당시 "농림부 장관"이었고, 그는 "이승만의 진보당 사건 조작"으로 사형당한 "조봉암"이다.
1948년 조봉암이 농림부 장관으로 있을 때, 농지개혁을 주도하여 소수의 대지주들에게 집중된 농지들을 농민들에게 분배하였다. 당시 한민당세력을 비롯한 대지주들의 반발이 거셌다. 1948.08월 이승만은 농림부 장관 조봉암의 건의와 설득을 받아들여 농지개혁을 승인한다. 농지개혁으로 왕조시대 이후 대지주에게 집중된 농토를 실제 농민에게 나누어주는 것이었다.
인천의 지역 유지이며, 인천시 의회 제1대 의장인 이명호는 조봉암의 농지개혁에 반발하였으면서도 이승만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참았다고 한다. 이명호의 5째 딸 이양숙의 증언에 의하면 이명호는 토지개혁으로 그 많은 땅을 빼앗겼으면서도 크게 내색하지 않았다고 한다. 워낙 이승만 대통령을 존경했는데, 그 이승만 대통령이 장관으로 임명한 조봉암이 나서서 한 일이니 이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농지개혁으로 인한 효과는 남다른 것이었다. 비록 일부에서는 "실패한 토지개혁"으로 폄하하는 의견도 있으나, 정설로는 "토지개혁을 통해 주인의식이 생긴 농민들이 많아져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일성, 박헌영 등이 주장하던 100만 봉기설이 무용지물이 됐다"는 것이다.
7. 전향 선언 : 조선공산당 탈당ㆍ박헌영과 결별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조봉암이 간부로 있던 조선공산당 인천지부에 ,일제 말 조봉암의 소극적이거나 개별적인 활동을 문제 삼았다. 조선공산당 본부는 일제 말 그가 혁명활동을 포기하고, 일제 당국의 비호 하에 있었다 하여 조봉암을 직위해제하였다.
1946.03월 박헌영을 비판하는 공개 편지를 보냈는데, 편지에 주된 내용은 "박헌영의 정치적 오류"에 대한 것이었다. 즉, "모스크바 3상 회의한 박헌영의 결단은 절대 지지하지만, 그 실천에 있어 기술적으로 졸렬했던 까닭에 조직대중을 이해시키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미조직 대중을 우익에 빼앗겼다"고 질책했으며, "박헌영은 조선공산당의 대선배로서 대다수 공산주의자들의 희망이니 꿋꿋이 버티는 게 올바른 자세다" 라고, 충고한 내용들이다. 그러나, 이 공개 편지는 곧 민전 인천시 지구를 수색하던 미군 CIC 방첩대에게 빼앗겼다. 6월말 미군방첩대는 일부를 개작하여 다시 발표했다.
1946.05월 미군정에 끌려갔다 온 조봉암을 적극 지원하여 그의 전향을 유도한 것은 "윤치영"이었다. 1946.05월, 조선공산당의 박헌영에게 보낸 조봉암의 편지가 미군 정보기관에 압수되어 공개된 일이 있었다. 윤치영은 그에게 이왕 미군정에 의해 이왕 공개될 것이면 자발적으로 공개하라고 유도했다.
조선공산당을 장악하고 있던 박헌영의 당 운영에 불만을 품은 조봉암이 "박헌영의 1인 체제"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편지를 신문에 공개하게끔 은밀하게 주선한 것이 바로 "윤치영"이었던 것이다. 미군정이 편지를 공개하기 전에 조봉암은 윤치영의 권고대로 선수를 쳐서 언론에 "박헌영에 대한 비판을 공개비판"으로 발표하고 전향을 선언하게 된다. 이는 "조선일보"와 안재홍의 "한성일보"에서는 특히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1946년 5월, 박헌영에게 경고하는 공개서한을 보내고 좌익에서 우익으로 사상전향, 공개서한이 언론에 공개되면서 공산주의와 완전히 결별 선언하였다. 그는 원래 공산당에서 출발했지만 광복 후, 박헌영의 노선을 비판하면서 공산당과 결별하게 됐다. 1946.05.15일 민전 인천부지구 위원장직을 사퇴하였다. 조선공산당과 결별을 선언한 조봉암은 당시 배신하였다고 하여 북쪽으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았다.
• 무원칙하다 • 종파적이다 • 민전에 공산당원이 과대히 침투하여 비당 군중의 능동적 행동을 스스로 제약하고 있다 • 인민위원회가 조직이나 운영 면에서 문제가 많다. 현금의 인민위원회는 비공산적 요소가 거의 없어 공산주의자들의 정치구락부에 지나지 않는다 • 모스크바 3상회의 지지투쟁의 방침은 진실로 옳았지만, 기술적으로 졸렬했기 때문에 군중들로부터 배신자로 낙인찍혔다
편지 내용 중 민주주의민족전선에 공산당원이 다수를 가입시켜 민전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는 박헌영의 시도를 비난, "민주주의민족전선은 잘된 줄 아오, 마는 역시 통일전선으로서는 너무 우리 당원이 과대히 침투했기 때문에 비당원 군중의 능동적 활동을 스스로 제약시키고 있다고 봅니다.(중략) 또한 "지방에서는 당원이 절대다수를 차지하여야 된다"등의 지령은 과오로 생각됩니다." 라는 구절이 문제되기도 했다. 1946.06월 박헌영은 조봉암을 공산당에서 제명, 출당시켰다.
조봉암이 박헌영과 결별하게 된 원인으로 박헌영이 코민테른의 노선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데에 차츰 불만이 쌓였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1946.06.12일 미국 CIC 방첩대에 의해 구금되었으나, 06.22일 석방되었다. 06.23일 인천에서 " 여운형ㆍ이강국ㆍ김원봉ㆍ성주식" 등이 참가한 "미소공위 촉진 시민대회"가 열리자, 조봉암은 이 대회에 참가했다. 여기에서 그는 "우리는 노동계급의 독재나 자본가 계급의 전제를 반대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06.23일 민전 주최의 인천시민대회 중 좌익을 비난하는 노골적인 성명서가 그의 명의로 배포되었다. 전향 이후, 언론에서 그에게 전향 이유를 묻자 그는 "우리 한국 청년의 대부분이 3.1운동 이후로 많이는 사회주의자가 되고 혹은 공산당을 조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대부분은 한국독립을 위한 사회주의고 한국 독립을 위한 공산주의자였습니다. 한국 민족을 버리고 한국 독립을 불고하고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를 생각한 일은 없습니다."라고 답변하였다.
'한국 (근 • 현대사) > 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상설 (보재ㆍ1871)ㆍ안중근의 정신적 스승ㆍ헤이그 밀사 (2) | 2022.09.30 |
---|---|
서재필 (송재ㆍ1864)ㆍ독립협회ㆍ독립문 (1897) 건립 (2) | 2022.09.24 |
동아일보 ③ 김성수 (인촌ㆍ1891)ㆍ동아일보ㆍ고려대학교 인수 (2) | 2022.09.16 |
동아일보 ② 장덕수 (설산ㆍ1894)ㆍ한국민주당 수석총무 (당수) (2) | 2022.09.16 |
동아일보 ① 송진우 (고하ㆍ1890)ㆍ한국민주당 초대 수석총무(당수) (2) | 2022.09.1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