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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인물

동아일보 ③ 김성수 (인촌ㆍ1891)ㆍ동아일보ㆍ고려대학교 인수

by 당대 제일 2022. 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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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金性洙ㆍ1891~1955ㆍ향년 63세)"는 "동아일보" 설립자로, "동아일보"는 1920.04.01일, "김성수ㆍ박영효ㆍ김홍조ㆍ장덕준" 등을 중심으로 "타블로이드판 4면 체제"로 발간되었다. 당초" 3ㆍ1운동" 1주년인 1920.03.01일 창간하려 하였으나, 부족한 자금을 마련하느라 1달이 늦어졌다.  또한 1932년,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를 인수하였다.

 

1. 김성수 (金性洙1891~1955향년 63)

일제 강점기 교육인언론인기업인ㆍ서예가ㆍ민족운동가(친일파로 변절1942~)정치인2대 부통령(1951.05~1952.08)한국 민주당 조직민주 국민당 최고위원동아일보 설립(1920)보성전문학교 교장 (, 고려대학교, 1932년 인수)중앙고등보통학교 교장(1915)경성방직 설립 / 운영(1919)

1937.06, "동아일보" 복간 후, "지원병" 적극 권장, 미화 기사1942년 전후로, 완전히 "친일파"로 변절하였고, 1937.07,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8"경성군사 후원연맹"에 국방헌금 1,000원을 헌납했다

1943~1945년 동안, "학병제징병제"를 찬양하는 내용의 총 25편의 논설사설을 기고했다이를 통해 "총독부"로부터 협력한 대가로 "재산도 많이 받았다"고 알려졌다.  반면, "김성수""이광수서정주"와는 달리, "총독부의 창씨개명(創氏改名)"요구에 대해서는 끝까지 거부했고, 일제로부터 "훈장작위"를 받은 경력은 없다.

• 출 생 : 전북 고창군 부안면부안면 줄포에서 성장     • 사 망 : 서울대학교 병원       • 사 인 : 병사 (심근염뇌일혈위장병 등의 합병증)

•  : 인촌 (仁村)     • 아 명 : 김판석 (金判錫)          • 학 력 : 1914 - 일본 와세다 대학교 정치경제학부

• 종 교 : 유교(성리학) 개신교 천주교(세례명 바오로 / 임종 직전, 로마 가톨릭교회의 세례병자성사 받음)

• 부 모 : 생부- 김경중생모- 제주 고씨 (양부- 김기중양모- 전주 이씨서모- 공주 김씨)

•  : 고광석(1886~1919)이아주(1899~1968)      • 자 녀 : 6 3녀ㆍ김상만(동아일보 회장)김남(윤보선 비서)김상흠(국회의원)      

• 형 제 : 동생 김연수(9살차이)김성수 위로 형이 3명 있었으나, 모두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병사     • 사 돈 : 윤치영송진우이한동(국무총리

• 친 구 : 송진우장덕수김구안창호한용운최남선이광수박영효최린안재홍백관수이승훈

김성수

1914, "와세다 대학교 정경학부"를 졸업하였고, 귀국 후 1915"중앙고등보통학교"를 인수하여, 교장을 지내는 등 교육 활동을 하였다. 191910"경성방직"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경성방직"은 초기에 경영상황이 어려워서, 늘 사재를 털어서 보충해 나가는 중, 1926년 이후에 동생 "김연수"경영에 능하고, 재능이 있어 성장시켰다"김성수""경성방직"을 운영하며,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하였고, 1920년에는 "양기탁덕수유근" 등과 "동아일보"를 설립하였으며, 1932, 설립 이래 계속 경영난에 허덕이던 "보성전문학교(, 고려대학교)"를 인수하여, "일제의 식민지 교육"에 맞섰다

"815광복" 이후, "한국 민주당 조직대한민국 임시정부 봉대운동" 등에 참여한 뒤, "김구조소앙" 등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 운동"를 주관하였다. 1949"민주 국민당"의 최고위원이 되었다.

한국 전쟁 기간인 1951.05~ 1952.08월까지,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을 역임하였다그러나 "이승만""부산 정치 파동"으로 헌법을 개정하여, 재선을 추진하자, "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1954, "이승만 장기집권"에 반대하는 "호헌동지회"에 참여, 통합 야당인 "민주당"의 창립 준비에 관여하였다한편, 2002.02.28, 대한민국 국회의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과 광복회가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에 수록되었고,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언론계 친일파"로 수록되었다.

1993.07.08일, "국가보훈처" "역대 독립유공 서훈자 가운데, 친일의 흠결이 있는 자는 가려내, 서훈을 취소하겠다."고 발표하고, 대상 인물로 "김성수(건국공로훈장 대통령 장(2등급)수상)"을 포함한 8명의 명단을 공개했다. 당시 "보훈처"의 방침에 대해, "동아일보" 2일 뒤인 07.10일자에서 "친일 혐의 독립유공자 명단, 근거 없이 작성 유출" 제하의 기사를 통해, "보훈처"를 비판했다.

2. 친일 행적

1937, "안창호""고문후유증지병"으로 병원에 입원중일 때, "안창호" 가족들이 그를 방문하여 도움을 청했을 때, "김성수""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 거절하였다가, 나중에 사람을 뒤로 몰래 보내, 액의 자금을 "안창호"에게 전달했다는 증언이 있다.

후일 1946, "한국독립당" 당원이었던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명단- 교육 부문"에는 김성수의 명의로 칼럼으로 인해 "()항일, ()친일" 인사로 분류되어, "친일파 군상"에 수록된 것은 물론,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행한 "친일인명사전", 대한민국 정부기관 "친일진상 반민족행위규명위원회 보고서"에도 "친일파"로서 수록되었으며, "김승학의 친일파 명단"에 김성수는 "경찰의 박해를 면하고, 신변의 안전 또는 지위사업 등의 유지를 위하여, 부득이 끌려 다닌 자", "유억겸"과 함께 분류되었다.

1937~1945년까지, "실력양성운동"을 비롯한 민족운동은 "총독부"의 가혹한 민족말살정책으로 탄압을 받아, "합법적 공간"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지자, 1942년 전후로는 김성수는 완전히 "친일파"로 변절했다.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폐간되었다가, 1937.06월 복간된 "동아일보"에는 일본의 침략전쟁을 위한 "지원병"적극 권장하거나, 미화하는 기사 글이 여러 번 올라왔다.

1937.05월부터, "보성전문학교 교장"으로 다시 취임해 있었던 그는 07.07"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전쟁의 의미를 선전하기 위해, 마련된 "경성방송국"의 라디오 시국강좌 담당연설을 하였고(07.3008.022일간), 8"경성군사후원연맹"에 국방헌금 1,000원을 헌납했다.

9, "총독부 학무국"이 주최한 "시국강연대"의 일원으로, 춘천철원 등 강원도 일대에서 연사로서 국강연에 나섰으며, 1938.06월에는 친일단체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이사 및 산하의 "비상시생활개선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다.

이밖에 "국민총력조선연맹 발기인 및 이사(1940)국민총력조선연맹 총무위원(1943)흥아보국단(興亞報國團) 결성 준비위원(1941)조선임전보국단 감사(1941)" 등으로 활동하였다.

1943~1945년 동안, "매일신보경성일보잡지 춘추"등에 "학병제징병제"를 찬양하는 내용의 총 25편의 논설사설을 기고했다. 이를 통해 "총독부"로부터 협력한 대가로 "재산도 많이 받았다"고도 알려졌다.

1930.12.30, 조선총독부 총독 "사이토 마코토"에게 보낸 편지

이번에 건강이 좋지 않아 조선을 떠나시게 된 것은 정말로 유감스럽습니다. 각하가 조선에 계시는 동안에 여러 가지로 후정(厚情)을 입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경성방직회사를 위해 특별한 배려를 받은 것은 감명해 마지않으며 깊이 감사말씀 올립니다. 석별의 정으로 별편(別便)에 조촐하지만 기국(器局)을 하나 보냅니다 기념으로 받아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는 영광으로 여기겠습니다.

조선 징병령 감사주간에 당하여 소감의 일단을 들어 삼가 반도청년 제군의 일고(一考)를 촉()코자 한다. 작년 58일 돌연히 발포된 조선에 징병령 실시의 쾌보는 실로 반도 25백만 동포의 일대 감격이며 일대 광영이라 당시 전역을 통하여 선풍같이 일어나는 환희야 말로 무엇에 비유할 바가 없었으며 오등 반도청년을 상대로 교육에 종사하는 자로서는 특히 일단의 감회가 심절(深切)하였던 바이다.

제군의 희생은 결코 가치 없는 희생이 아닐 것을 나는 제군에게 언명한다. 군이 생을 받은 이 반도를 위하여 희생됨으로써 이 반도는 황국으로서의 자격을 완수하게 되는 것이며, 반도의 미래는 오직 제군의 거취에 달렸다고 할 수 있다.

문약의 기질을 버리고, 상무기풍을 조성하라 < 매일신보 1943.08.05일자 >

대의에 죽을 때, 황민의 책무는 크다 < 매일신보 1943.11.06일자 >

"유진오"는 그의 회고록 "양호기"에서, "김성수 이름"으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실린 "학도병" 기사는 "김병규(매일신보사 기자)""유진오"와 상의한 뒤, 대필하여 승인을 받은 글이라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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